금강반야바라밀경 파취착불괴가명론 상권
5. 일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행한다
그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또 수보리야, 보살은 일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행한다”는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한 것이다.
[보시의 세 가지]
여기에서 보시라는 이름 속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여섯 가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세 가지 보시인가?
첫째는 자생시(資生施)[재물 보시]요,
둘째는 무외시(無畏施)이며,
셋째는 법시(法施)이다.
이 가운데 자생시는 단나(檀那)[보시] 바라밀을 포섭하고,
무외시는 시라(尸羅)[지계]와 찬제(羼提)[인욕]의 두 가지 바라밀을 포섭하니, 아직 짓지 않았거나 이미 지은 악에 대하여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시[법 보시]는 나머지 세 가지 바라밀을 포섭하고 있으니, 부지런히 정진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모든 신통(神通)을 끌어들이는 것이 마치 얻을 대상이 없는 이치를 남을 위해 설법해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혹은 저 모든 바라밀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이 다 법시를 성취하는 것이 된다고도 한다.
[일에 머무르지 않는 것]
‘일’ 등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인가?
자기 몸에 대하여 이 몸에는 항상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한량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이 가운데에서 마음으로 애착함이 없는 것이며,
‘머무를 곳이 없다’는 것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색 등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생각할 만한 모든 경계를 희망하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또 무슨 뜻으로 인해 저기에 머무르지 않는가?
마음이 자기 자신에 집착하면 은혜로 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바라거나 구하는 것이 있으면 보리(菩提)에서 물러나 보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생시(資生施)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보시하는 사람이 보시하는 재물에 대하여 마땅히 애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애착하면서 보시를 행하게 되면 틀림없이 마음에 괴로움이 생기거나 혹은 보시하고 나서 도리어 후회하기 때문이다.
‘머무를 곳이 없다’는 것은 무외시(無畏施)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모든 보살들이 지계와 인욕바라밀을 닦을 때에 마땅히 마음을 내어 거기에 대한 과보(果報)가 있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색 등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법시(法施)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법시엔 두 가지 결과가 따르는데,
하나는 현재에 생겨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때에 생겨나는 것이니,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마땅히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현재에 생기는 과보’라는 것은 보시하는 재물로 사용한 색(色) 등 다섯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설법하는 사람은 중생들이 우러러보고 공경하는 대상이므로 그에게 미묘한 물질 등, 기악(妓樂)ㆍ향ㆍ꽃ㆍ음식ㆍ의복으로써 공양하는 것이다.
‘다른 때에 생겨나는 과보’라는 것은 법의 경계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도 머물지 않아야 하는가?
만약 모든 보살들이 진실을 증득하였을 때에는 마침내 법신까지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수행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청정함을 얻는가?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모습이나 생각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을 한 뜻은 무엇인가?
모든 보살들이 제일의 가운데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를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물질이라는 명의지(名義智)의 경계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니,
이것은 곧 마음을 항복받아 그 원인이 청정한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보시하는 일 등에서 복의 덩어리가 생겨난다고 말하지만 세 가지 일이 다 허망한 복이거늘 어디에서 화(禍)가 생겨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은 제일의가 되기 때문에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제(俗諦)이기 때문에 보시를 행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복의 덩어리는 헤아려 알기 어려우니, 마치 시방의 허공이 넓고 두루 퍼져 있어서 끝이 없는 것과 같다.
앞서 원인을 행한 곳에서 마땅히 그 복을 찬탄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마음을 항복받으면 모든 생각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이 생겨나지 않으면 보시가 비로소 청정하기 때문이며,
청정한 원인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복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아래의 모든 경전[修多羅]에서는 문답(問答)으로 의심을 없앴다.
이것은 바른 법을 닦아 생긴 복덕의 위력을 지녔으며, 이 위력을 성취함으로써 일체법을 수행하고 이렇게 수행함으로써 결과와 원인의 청정한 모습을 임의대로 운용한다.
일체 중생이 여래장성(如來藏性)의 부처님 경계에서 부처님의 법신과 법계의 모습을 깨달아 머무름이 없는 열반에 들어 유위(有爲)를 관찰한다고 세존께서 설하신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