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보리심론 제2권
5. 무생과 무자성
[무생(無生)]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설하였다.
“무생(無生)의 진실은 실제로 별개의 다른 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등은 모두 승의제의 무생(無生)에 수순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진실이다.
또한 승의의 무생은 곧 무생이 아니니, 저 일체의 행한 바는 모두 과거의 성품이다.”
이 가운데서 또 말한다.
“선남자여, 생멸의 두 법은 필경 모두 세간의 취착(取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대비는 세간에서의 온갖 행을 버릴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생멸 등이 필경에는 조그마한 법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 『성법집경』에서 설하였다.
“무엇을 생함이라 하고, 무엇을 멸함이라고 하는가?
생함이 없음을 생함이라 이름하고, 멸함이 없음을 멸함이라 이름한다.
이 가운데 또 말하기를,
“아자문(阿字門)에서 일체의 법은 생멸을 여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일체법무자성문(一切法無自性門)으로 자성의 공함으로 이루어졌다”라고 한다.
『성이제경(聖二諦經)』에서 설하였다.
“만일 무생의 평등이라면 곧 일체법의 평등을 얻는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설하였다.
“수보리야, 색과 색의 자성은 공하다. 나아가 식과 식의 자성은 공하다. 자상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액경(象腋經)』에서 설하였다.
“일체의 성품은 생함을 얻을 수 없다. 생함이 없는 성품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은 그 생함이 있다고 집착한다.”
『부자합집경(父子合集經)』에서 설하였다.
“저 일체의 법은 모두 다 평등하고 삼세 또한 평등하다. 과거 일체법은 자성(自性)이 여의었고 나아가 현재의 일체법 또한 자성이 여의었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아함 중의 견고한 뜻과 상응해서 응당 자세히 관찰해 보건대, 이것과 다른 어떤 인(因)은 성립할 수 없다.
이 중에서 이치대로 결정적으로 사유하고 관찰한 후에 요약해서 설하면, 모든 생함의 성품에는 인이 있다고 설하기도 하고 혹은 인이 없다고 설하기도 한다.
여실하게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은 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에 인의 성품을 버린다면, 이 차별의 성품이 참으로 드러내 보이기도 하므로 저 인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만약에 법이 생할 때 비로소 일체의 성품이 모든 곳에 두루하다면 어떻게 있지 않다고 하겠는가?
저 성품이 없을 때에는 차별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생겨날 때에도 또한 얻음이 있지 않으므로 저 인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하면, 저 인이 없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고, 또한 인이 있지 않으면서도 화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설한 것에 만일 아(我)가 있다고 계교(計較)한다면 바로 외도가 상인(常因)으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저 성품이 없어야 생함을 얻어서 능히 모든 행을 일으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모든 인의 성품이 파괴되었는데 어떻게 능히 모든 행을 생기하는가?
이치대로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외도가 집착하는 아(我) 등은 자체가 역능(力能)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별도의 법에서 버리지 않는 성품을 얻는데, 이미 항상하는 성품[常性]에 집착했다면 남에게 뜻을 지어 일을 이롭게 할 수 없다. 만일 뜻에 이로움이 없다면 상응하는 법을 어기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집착하는 아(我) 등의 일체 역능은 필경에는 모두 공인 것이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으니, 저 자성이 없는지라 짓는 일에서 그것들을 성취할 수 없다.
설령 짓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역능은 없다. 만일 짓는 바가 아니라면 또한 화합이 아니다.
또 일체의 일이 지음 있음을 따르는지라 생겨난 이후의 시기에 결정되는 것과 같다.
만일 역능이 있다면 곧 그 역능은 자성이 따라 구르니, 앞에서 설했듯이 일으켜 지은 일로 화합을 얻는다.
혹 따라 구르지 않음도 앞에서 설했듯이 저 자성이 없고 상인(常因)의 성품이 없어서 결정코 화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무상함 중에는 조그마한 법도 가히 얻을 수 없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대혜여, 참되지 않은 공상(共相)이란 이른바 허공ㆍ멸열반(滅涅槃)ㆍ무작자(無作者)ㆍ무성(無性)ㆍ무취자(無取者)의 공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상이 이 불화합을 평등하게 생하므로 역시 무상이 아니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두 가지 일의 성품에 역시 생함이 있지 않는데도 화합을 얻는 것과 같은데, 저 화합하는 인의 성품이 없어서 따라 구른다[隨轉].
만일 동시에 생겨나서 상응하는 바가 있으나 또한 동시에 인이 짓는 자성의 일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저 동시(同時)의 관(觀) 또한 이루어지는 성품이 없으며, 혹 다른 때[異時]의 관도 역시 다른 때가 아니다.
만일 때와 연(緣) 가운데에서 관한다면 그것은 역시 생함도 없고 참됨도 없다.
과거에 만일 생하였다면 화합하는 바가 있다 해도 또한 연이 아니고 생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저 일체의 아(我)로도 또한 연이 없다.
또한 하나의 찰나 속에 일체의 찰나가 따라 들어오지 않으면, 겁과 찰나의 분량으로도 화합하지 않는다.
마치 미세한 먼지들이 모여 둥근 덩어리가 되는 가운데 또한 극미량의 아(我)도 없이 화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하나의 덩어리와 하나의 부분 속에서 저 찰나에 모인 덩어리의 성품[蘊聚性]은 화합하지 않고 스스로 생할 수 없으며 인분(因分)도 없다.
만일 이 중에서 저 부분[分]의 성품을 취한다면 곧 자아의 지은 바가 서로 어긋나므로 역시 두 가지 종류는 없다.
만약에 두 부분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곧 두 종류의 허물이 따라 붙는다.”
[자성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면, 일체 세속에서 생한 것은 얻는 성품이 있으나, 승의제 중에서는 참으로 생함이 없으니, 이러한 설명은 아함 등과 더불어 서로 어긋남이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모든 생(生)의 성품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세속을 말한다.
승의제 중의 생(生)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가운데서 만약 의혹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실제로 세속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설한 바가 이치 그대로인 것이 불세존의 진정한 승의(勝義)의 즐거움이다. 마치 세상의 벼와 벼 줄기 등처럼 자성과 타성 두 종류 가운데에서 인이 없는 생을 설한다. 이 뜻은 마땅히 그쳐야 하고 이 중에서 의당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만일 색과 무색의 저 두 가지 성품이 병기(甁器) 등처럼 그 극미량이라도 색의 성품[色性]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앞의 분위(分位)에서는 하나의 성품이 아니다.
앞의 분위 중에서 만일 파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극미의 덩어리 중에는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있는 것이 아니니, 그 하나와 다수의 성품을 여읜다면 어떻게 자성이 있겠는가?
만일 자성이 없다면 이것이 곧 승의인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얻은 색의 상(相)과 색(色)의 성(性)과 같다.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하니,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설하였다.
“대혜여,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코끼리가 파괴되면 미세한 티끌과 같은데, 이 미세한 티끌의 모습 가운데에서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그의 색성(色性)은 실로 자성이 없다.
또한 색온 중의 푸름 등의 색들처럼 그것이 상대의 장애가 있더라도 자성이 없다.
이와 같이 필경에는 식(識) 외에는 색(色)이 아니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외부에 색들은 없으며 자신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저 밖의 푸름 등 갖가지 색의 상은 실제로 상대의 장애[對礙]가 없다.
그리고 모습을 취하고 버리는 것도 또한 상대의 장애가 없다.
하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수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와 다수가 서로 어긋나는데, 어떻게 하나의 성품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나가 모인 색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아니라는 것은 그 뜻을 응당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모든 유(有)의 색상(色相)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자체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장애가 없으며, 그 식(識)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의 자상(自相)을 여의기 때문이라서 저 색이 식을 여의고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식의 자상은 갖가지가 실답지 않으니, 이와 같은 이유로 식은 실답지 않다고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식은 마술사[幻士]와 같다고 설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성품이든 다수의 성품이든 이 성품이라는 것은 모두 공이다.
승의제 중에는 일체의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 뜻은 결정적이다.
또 『능가경』에서 설하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거울 속에 보인 상(像)은 동일한 성품도 아니며 다른 성품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관할 때 이 성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一異性]을 여의기 때문이며, 동일함과 다름의 성품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 어떤 사람이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자성이 실제로 얻을 수 없음을 관하니, 이 가운데서 자성이 없음을 드러내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한 모든 것들을 이치대로 자세하게 관찰하면, 이것이 사소성혜(思所成慧)가 실답게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뜻이 성취되면 이로 말미암아 수소성혜(修所成慧)가 마땅히 생기하게 되는데, 만약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이 없다면 수소성혜는 이루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