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승론 상권
1. 의품(5)
[보살의 행]
【문】 당신은 이미 다른 사람이 대승을 비방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마하연행에 들어가는가?
【답】 보살이 우선 종성(種性)을 갖추고 선행(善行)을 수순하면 깨달아 이해함이 광대해지고 내적인 마음이 광대해지며 계(界)의 영역이 광대해지고 종성이 광대해진다.
종성이 이미 구족되면 그 마음이 조화되어 부드럽고 점차적으로 번뇌를 여의며 탐진치가 적어지고 모든 선(善)을 닦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히 힘써 보살의 대승법을 외워 익힌다.
이와 같은 중생은 육근(六根)이 광대하여 커다란 원(願)을 발현할 수 있으므로 불도를 구하려고 한다.
그 종성의 양상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하근하성(下根下性)은 도에 대해 뜻을 일으키는 것이 하(下)이고 원(願) 역시 하이다.
중근중성(中根中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중이고 원 역시 중이다.
상근상성(上根上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상이고 원 역시 상이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 근성(根性)에 수순하시어 자애로운 마음으로 분별하여 가르치신다.
【문】 만약에 모든 중생들이 각기 별도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그 근성에 따라 법을 설해야 하는가?
【답】 상근기의 중생을 위해서는 보살의 심오하고 오묘한 법장(法藏)을 설한다. 그 근성이 보살행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살장을 설하는 것이다.
【문】 보살장(菩薩藏)이란 어떤 지(地)에 머무르는 것인가?
【답】 열 가지 종류의 행(行)이 있으며 해탈지(解脫地)에 이른다.
보살장을 청문(聽聞)할 수 있을 때에는 열 가지 종류의 법행(法行)을 얻을 수 있고, 해탈행을 떠나 곧바로 보살의 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보살의 해탈행을 닦는 것이니, 많든 적든 다 닦아 익힌다.
둘째는 보살이 지니고 있는 법이 많든 적든 모두 베껴 쓰는 것이다.
셋째는 보살장의 법이 많든 적든 다 공양하는 것이다.
넷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펼쳐 읽는 것이다.
다섯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섯째는 보살의 법이 말든 적든 다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일곱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익혀 외워 점차적으로 이로움에 통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 분별하여 펼쳐 설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사육하여 그 의미를 잘 알아내는 것이다.
열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혼자 있는 처소에서 사유하고 닦아 지혜를 쌓아 늘리는 것이다.
이상을 보살의 십행(十行)이라 한다.
여덟 번째 것은 보살의 문혜(聞慧)라 하고,
아홉 번째 것은 보살의 사혜(思慧)라 하며,
열 번째 것은 보살의 수혜(修慧)라고 한다.
[해탈문: 공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문】 보살이 이러한 문ㆍ사ㆍ수를 이미 얻었다면 어떤 행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답】 이미 지(地)를 얻었으면 해탈문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차례에 의해 문ㆍ사ㆍ수가 생하면 법계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지(地)에 대해 얻는 바가 있으면 세 가지 해탈문을 닦는다.
【문】 무엇을 세 가지 해탈문이라고 하는가?
【답】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행하는 것이다.
【문】 공이란 무엇인가?
【답】 나[我]와 남[人]과 중생(衆生)에는 자체(自體)가 존재하지 않아, 그 성(性)과 상(相)이 항상 적정(寂靜)함을 관조하는 것이다.
[공과 12인연]
【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답】 마땅히 십이인연에 들어가면 된다.
【문】 이 공해탈은 십이 인연법과 다른가?
【답】 공과 십이인연은 똑같아서 다른 모습이 아니다. 공이 곧 십이인연이고 십이인연이 곧 공이다. 왜냐하면 인연은 가유(假有)로 일어나는 까닭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존자 응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십이인연이 공이라는 것을
내가 지금 설명하고자 하니
가명인(假名因) 인연법,
이것이 곧 중도이네.
일체의 모든 법은 다 공적하다. 왜냐하면 모두 인연에 속하여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문】 만약에 일체법이 인연생이라면 무엇 때문에 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 이른바 인연은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면 체성도 없고 생겨남도 없다.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멸함도 없고 무생무멸이니, 즉 진정한 적멸이다. 적멸이란 곧 일체 모든 법의 적멸을 말하는 것이니, 따라서 나는 일체제법에는 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노모경(老母經)』 가운데서 세존께서 누이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사람과 북채와 북을 원인으로 해서 갖가지 조건[緣]이 화합하여 소리가 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소리는 과거ㆍ현재ㆍ미래세에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안과 밖 그리고 중간에도 있지 않으니, 그 성품[性]이 공적하여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
누이여, 지금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일체 모든 법의 체성도 역시 그러하다.”
『노모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공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보살은 무량겁 동안 복덕을 쌓고 선정(禪定)과 지혜를 닦아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 생과 멸이 모두 공적함이 마치 허깨비ㆍ불꽃ㆍ건달바성과 같음을 잘 관찰하여 모든 것이 꿈속에서 변화된 것과 같다고 여긴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맨 먼저 십이인연이나 중생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찰나의 경각에 얻는 것이
허깨비나 불꽃이나 건달바성과 같네.
이러한 순서대로 공해탈문에 들어가면 그 마음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그 의의와 이익을 체득할 수 있다.
【문】 외도가 각기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면 어떻게 이를 막아 끊을 수 있는가?
【답】 가령 외도가 내외(內外)의 색(色)에 대하여 모두 물들어 집착하면, ‘나[我]’라든가, ‘나의 것[我所]’이라고 취착하여 생사의 흐름에 따르게 된다.
그 자신[我]에 대해 집착함이란 자신이 음식이나 재물의 이로움을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갖가지는 아견(我見)이나 중생견(衆生見) 등에 의지한다.
저 ‘나’와 ‘나의 것’이란 자신이 조작하여 ‘이것은 나의 항아리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칭 등은 아소(我所)에 의지한다.
그가 업을 지어 동일하든, 다르든, 동일하면서 다르든,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든 취하여 치우치게 집착하면, 단지 언어로써 세상을 속여 미혹하고 결국은 자신의 몸에까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생사에 유전하고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법의 자성이 공임을 깨닫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