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비바사론 상권
1. 분별색품 ①[3]
[만들어진 색, 감각기관]
【문】이미 딱딱함ㆍ축축함 따뜻함ㆍ움직임의 4대종의 모습들이 전개하고 전변하여 어긋나는 것이,
마치 네 마리 독사가 하나의 몸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음을 알았다.
저 만들어진 색의 모습을 또한 듣고자 한다.
우선 어찌하여 ‘저 만들어진 색’이라고 부르는가?
【답】‘저 만들어진 색’이란, 눈의 감각기관[眼根] 등을 말한다.
눈이 곧 근본[根]이므로 눈의 감각기관이라고 말한다.
마치 청련화(靑蓮華)와 같다.
나머지 감각기관도 이와 같다.
【문】눈 등의 다섯 가지도 역시 계(界)와 처(處)에 포섭된다.
어찌하여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르는가?
【답】색 등의 바깥 대상[外境]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눈 등의 계와 처를 말한다면, 곧 감각기관[根]과 감각기관의 뜻[根義]의 차별을 알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이 가운데서 홀로 나타내어 감각기관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만들어진 색 가운데 안[內]을 감각기관이라고 부르고, 바깥[外]을 감각기관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
【문】이 가운데서 말한 감각기관의 뜻은 무엇인가?
【답】보다 높음[增上]ㆍ가장 뛰어남[最勝]ㆍ현재 보임[現見]ㆍ광명(光明)ㆍ기쁨ㆍ묘함을 봄[觀妙] 등이 모두 감각기관의 뜻이다.
【문】만약 ‘보다 높음’이라는 뜻이 감각기관의 뜻이라면, 모든 유위법은 전개하고 전변하여 보다 높고, 무위법도 역시 유위보다 높아서 모든 법이 곧 감각기관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답】수승함에 의지하여 감각기관을 세우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은 없다.
증상연에 수승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으니, 수승한 것을 세워서 감각기관이라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문】어떤 감각기관이 무엇에 대하여 몇 가지가 보다 높은 것인가?
【답】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은 각각 네 가지 일에 있어서 보다 높다.
첫째는 장엄신(莊嚴身)이고,
둘째는 도양신(導養身)이고,
셋째는 식(識) 등이 생김이고,
넷째는 공통되지 않는 일[不共事]이다.
먼저 눈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몸이 비록 여러 부분을 갖추고 있으나 나머지의 감각기관을 결여한다면, 눈의 감각기관이 다시 추하고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눈이 능히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볼 수 있어 모든 색의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것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안식(眼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색을 보는 작용은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귀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귀머거리는 소리를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양신’이란, 귀는 능히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모든 소리의 나쁜 쪽을 피하고 좋은 쪽을 택하게 하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모든 이식(耳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소리를 듣는 작용은 오직 귀의 감각기관에만 속하고 스물한 가지 감각기관은 이런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을 살펴보겠다.
‘장엄신’이란, 눈과 귀에서 말한 것과 같다.
‘도양신’이란, 이 세 가지 감각기관은 단식(段食)을 받아들여 몸을 오래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식 등이 생김’이란, 세 가지의 감각기관에 의지하여 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 및 이에 상응하는 법이 모두 얻어지기 때문이다.
‘공통되지 않는 일’이란, 맛을 보고, 향기를 구분하고, 촉감을 느끼는 작용은 이 코ㆍ혀ㆍ몸의 감각기관에 속하는 것이고, 다른 감각기관에는 없기 때문이다.
【문】이와 같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떤 수승한 덕이 있으며, 무엇을 자성으로 삼고, 행위의 작용[業用]은 무엇인가?
【답】눈의 감각기관의 덕은 안식 및 그에 상응하는 법에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눈의 감각기관의 자성은 청정한 색이다. 모든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눈의 행동양식이다.
나머지 감각기관의 세 가지 일도 눈과 같은 방식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또 행위의 작용이 있는 감각기관을 말한다. 모든 감각기관이 식(識)이 의지하는 바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색은 밝고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한 색[淨色]이라고 한다.
또한 이 가운데 안식 등에게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것은 동분(同分)의 감각기관을 나타내는 것이고, 청정한 색을 말하는 것은 피동분(彼同分)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어떤 것을 동분이라 하고, 어떤 것을 피동분이라고 하는가?
각각 기관에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행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동분의 감각기관이라 하고, 행위의 작용이 없는 감각기관을 피동분이라고 한다.
마치 색을 능히 볼 수 있는 것을 동분의 눈이라고 하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피동분이라 한다.
피동분의 눈은 네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과거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이미 소멸한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현재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지금 소멸하는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미래의 피동분의 눈이 있는 것으로 앞으로 소멸할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미래에 눈이 결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 동분의 눈은 오직 세 가지 차별이 있으니, 미래에 결코 눈이 생기지 않는 것을 제외한다.
귀의 감각기관 등의 네 가지에서도 눈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다시 다섯 가지 식[五識]은 각각 두 가지 의지하는 바가 있다.
첫째는 함께 생겨나는 것[俱時生]으로 눈 등의 다섯 가지 등이고,
둘째는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것[無間滅]이니 , 즉 의근(意根)을 말한다.
오직 식의 의지라고 말하면,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이 식에 퍼지게 되고, 다만 청정한 색을 말하면 다섯 가지가 본체가 같게 된다.
그러므로 청정한 색을 말함은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의근을 간별하는 것이고,
눈 등의 식에게서 의지하는 바가 된다는 말은 눈 등의 감각기관을 차별하여 다섯 가지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다섯 가지 식이 의지하는 바와 등무간연(等無間緣)을 차별하여 각각 4구(句)가 있다고 말한다.
함께 생겨나는 눈 등의 감각기관으로 제1구로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소(心所)로 제2구를 삼고,
생기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심(心)으로 제3구로 삼고,
앞의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법으로 제4구로 삼는다.
[보는 것]
【문】무엇이 능히 색을 보는가? 눈의 감각기관이 보는가? 안식이 보는가?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보는가?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보는가?
그대가 의심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이 있다.
만약 눈의 감각기관이 본다면, 나머지 식이 작용할 때는 어찌 색을 볼 수 없는가? 어찌 다 함께 모든 대상들을 취하지 않는가?
만약 안식이 본다면, 모든 식은 다만 요별하는 것으로 모습을 삼고 보는 것을 모습으로 삼지 않는데, 어찌 색을 볼 수 있겠는가?
만약 안식과 상응하는 지혜가 본다면, 이식(耳識)과 상응하는 지혜는 듣는 것이어야 한다. 저것은 이미 듣는 것이 아닌데, 이를 어찌 보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만약 심과 심소가 화합하여 본다면, 모든 심과 심소의 화합은 정해져 있지 않다.
선한 안식은 스물두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선하지 않은 안식은 스물한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안식은 열여덟 가지 심소와 상응하고,
무부무기(無覆無記)의 안식은 열두 가지 심소와 상응한다.
이미 결정되어있지 않는데, 어찌하여 화합이라고 하겠는가?
【답】눈의 감각기관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식과 합해진 경우이고, 나머지 경우는 아니다.
마치 안식이 색을 요별함에 의하여 눈이 바야흐로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느낌[受] 등의 받아들임 등은 반드시 마음[心]에 의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응당 그러하다.
이러한 이치로 나머지 식들이 작용할 때 눈은 이미 식이 없어져[空] 색을 볼 수 없다.
또한 함께 모든 대상을 취한다는 오류가 없다. 하나의 상속 가운데 두 가지 마음의 전변이 없기 때문이다.
【문】무슨 까닭에 여섯 가지 의지하는 것과 연이 되는 것을 갖추었는데, 하나의 상속 가운데 6식(識)이 함께 전변함이 없다고 하는가?
【답】등무간연(等無間緣)은 오직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머지 뜻이 있다.
만약 안식이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분별하겠는가?
만약 지혜가 본다면, 어떤 것이 다시 능히 알겠는가?
만약 심ㆍ심소의 화합이 능히 본다면, 모든 법은 하나하나가 행동과 작용이 같지 않아 그 가운데 화합이 본다는 뜻은 결정코 없다.
또한 마땅히 하나의 본체에 두 개의 작용이 있다면 능히 보는 주체와 받아들여지는 대상 등을 허락해야만 한다.
또한 다른 뜻이 있다. 만약 식이 본다고 하면 식은 상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보는 주체 모든 색의 장애와 부딪칠 것이다.
지혜와 화합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눈의 감각기관만을 보는 주체라고 한다.
【문】이미 눈의 작용이 오직 눈의 감각기관에만 있음을 알았다.
눈이 색을 볼 때는 한 눈으로 보는가? 두 눈으로 보는가?
【답】이는 결정할 수 없다.
만약 두 눈을 뜨고 모든 색을 볼 때면 두 눈이 함께 본다.
한 눈을 뜨고 한 눈을 문지를 때는 눈 앞에 두 개의 달처럼 겹쳐져서 보이게 되고,
한 눈을 가리고 한 눈을 문지를 때 이는 보는 일이 없다.
이런 까닭에 어떤 때는 두 눈이 함께 본다.
또 『발지론(發智論)』에서 보는 원인을 함께 말한다.
“두 눈을 모두 뜨고 있을 때에 보는 작용이 명료하고,
두 귀, 두 코도 또한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문】무슨 까닭에 두 눈 두 귀ㆍ두 코는 각각 양쪽에 있는데,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하는가?
【답】두 곳의 눈 등이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이 취한 대상이 하나의 세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둘이 능히 의지하는 식이 하나의 식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이 함께 있을 때에 능히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비록 두 곳에 있으나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한다.
여근(女根)과 남근(男根)은 몸의 감각기관에 포섭된다.
이런 까닭에 이들은 따로 감각기관을 세우지 않는다.
안근의 극미는 눈의 수정체에 널리 퍼져 있고 대상을 대하고 있으면서 향능화(香菱花)처럼 머문다.
이근의 극미는 귀의 구멍 안에 고리를 둘러싸고 있고, 화피(樺皮)를 말아놓은 것처럼 머문다.
비근의 극미는 코 안에 있고, 콧등 위와 얼굴 아래 마치 쌍조갑(雙爪甲)처럼 머문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널리 퍼져 있고, 형태는 반달과 같다. 그러나 혀 가운데에는 마치 모발처럼 설근의 극미는 한량없다.
신근의 극미는 모든 몸의 부분에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