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무언동자경 상권
[바른 견해를 일으키다]
“어진 족성자여, 그대는 누구로부터 법을 듣고 지금 이러한 성현의 바른 견해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까?”
무언보살은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시여, 제가 듣기로 법은 조작이 없으므로 과거의 마음으로부터 도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또한 현재도 아닌 평등한 3세에 일체의 법이 평등하여 나아가는 것이 있지만 귀착하는 곳이 없어서 마침내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등한 것마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제가 그에게 듣기로 법은 유위(有爲)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어서 알음알이도 없고 머묾도 없으며,
심(心)ㆍ의(意)ㆍ식(識)도 없고 일체의 법을 받들지 않음도 없으며,
모든 중생의 마음을 제지하여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므로 그 이치를 얻을 수 없고
흔들리지도 않고 힘써서 해를 끼침도 없고 집착도 없습니다.
제가 올바로 그에게서 법을 들었다면 세상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은 생겨나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일체의 법은 일어나지도 않은 것 같아서 아무리 분별하려하여도 근본이 없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또 제가 올바로 그에게서 법을 들었다면 그 대하는 법의 경계는 평등하게 사람의 경계를 제어하며,
법의 경계와 사람의 경계와 허공의 경계가 모두다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평등한 모든 경계에는 생겨나는 것이 없고 아무런 조작이 없습니다.
또 제가 올바로 그에게서 법을 들었다면 어떤 도량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보리수 아래 앉아 있는 것도 아니며,
경행(經行)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되는 것도 아니며,
도(道)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세속을 버리는 것도 아니며,
모두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인민(人民)들이
‘여래께서 도를 얻으심은 또한 그 도를 얻음이 아니고
상호(相好)를 갖추심도 그 상호를 갖춤이 아니며,
이치를 증명하심도 그 이치를 증명하심이 아니라 모두 본래 청정한 자연의 성품을 따름이다’라고 마음으로 생각하게 할 뿐입니다.
사리불이시여, 또 법이란 가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으므로 어떤 몸뚱이가 없으며,
몸뚱이가 없으므로 성취할 것도 없고,
성취할 것이 없으므로 생겨날 것도 없으며,
생겨나는 것이 없으므로 일어날 것도 없고,
일어나는 것이 없으므로 끝내 사라질 것도 없으며,
끝내 사라지는 것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이 없으므로 흔들릴 것도 없으며,
흔들리는 것이 없으므로 조작할 것도 없고,
조작하는 것이 없으므로 빠르게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이미 빠르게 흐르는 물 같으므로 아무런 얻을 것이 없고,
이미 얻을 것이 없으므로 몸이 피안(彼岸)에 다다르며,
이미 피안에 다다랐으므로 내릴[下] 것이 없고,
내릴 것이 없으므로 그 그릇[器]이 아니며,
이미 그릇이 아니므로 대응할 것이 없고,
이미 대응할 것이 없으므로 애욕을 여의며,
이미 애욕을 여의었으므로 아무런 생각이 없고,
이미 생각이 없으므로 온갖 혼란을 끊습니다.
이미 온갖 혼란을 끊었으므로 본래 성품이 청정하고,
본래 성품이 청정한데 이르렀으므로 더러움이 없으며,
이미 더러움이 없으므로 번뇌[塵勞]가 없고,
이미 번뇌가 없으므로 똑같은 형상이 없습니다.
똑같은 형상이 없으므로 평등에 머물고,
평등에 머물므로 움직임이 없으며,
움직임이 없으므로 구할 것이 없고,
구하는 것이 없으므로 진리[眞諦] 그대로입니다.
이미 진리 그대로이므로 진실 되게 살피고,
진실 되게 살핌으로 소유함이 없으며,
소유함이 없으므로 모든 인연에 연연할 것이 없고,
모든 인연에 연연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계를 건너며,
경계를 건넘으로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나는 것이 없으므로 들 것도 없으며,
들 것이 없으므로 내릴 것도 없고,
내릴 것이 없으므로 문(門)이 없습니다.
문이 없으므로 곧 언교(言敎)를 여의고,
언교를 여의었으므로 문자의 구절[識句]을 초월하며,
문자의 구절을 초월하므로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지 않으므로 처소가 없으며,
처소가 없으므로 처할 곳이 아니고,
처할 곳이 아니므로 씨를 뿌릴 수 없으며,
씨를 뿌릴 수 없으므로 뿌리와 싹이 없고,
뿌리와 싹이 없으므로 무위입니다.
모든 의식의 자취를 벗어나 고요하게 되며,
고요하게 되었으므로 끝내 맑고 깨끗해지고,
이미 맑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그렇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 없으며,
그렇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 없으므로 한(恨)이 없고,
끝내 한이 없으므로 분명히 깨닫는 경지에 이르며,
분명히 깨닫는 경지에 이르므로 다시 더 일으킬 것이 없고,
다시 더 일으킬 것이 없으므로 평등한 무위(無爲)의 도로 돌아가니,
이것이 법이라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의 모습]
사리불이시여, 일체의 법이 이러하고 경전의 법을 설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인데, 그 바른 견해란 어떤 모습입니까?
그 바른 견해란 곧 자기의 몸부터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니,
자기의 몸을 평등하게 관찰함으로서 합쳐져 이루어진 모든 것을 여의며,
또 합해져 이루어진 모든 것을 여읨으로서 그 평등한 것에 있어서도 평등이라 보지 않고,
바라보는 모든 소견에서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시여, 이것이 법률(法律)을 드날리는 현성의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언보살이 다시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사리불이시여, 만약 무명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집착에 평등한 것이거나 또한 혜명(慧明)으로 해탈의 일에 평등한 것이거나, 멸도(滅度)에 평등한 것이거나
이러한 평등을 이룩함에 있어서 조작함도 없고 조작하지 않음도 없는 이것이 바로 평등하게 도달하는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고,
거기에 어떤 보이는 것이 있더라도 다른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입니다.
또 다음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사리불이시여, 또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모습에 평등할 수 있거나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해탈문의 해탈의 모습에 평등한 것은 곧 똑같은 모습이 되며,
모습 없이 돌아가고 이미 돌아갈 수 있다면 이것이 평등한 일이니,
곧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입니다.
또 바른 견해에 처한다는 것은 모든 평등함에 처하여 두 가지 일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두 가지 일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서로 호응함에 머물지 않으며,
이미 서로 호응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얻는다고 해도 머무르지 않고,
일체에 평등하여 특별하게 여기거나 차별을 두지 않는
그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입니다.
또 두 가지 없이 평등함이란 곧 중생에게 평등한 것이고, 곧 모든 부처님께 평등한 것이며, 곧 모든 법에 평등한 것입니다.
이미 모든 법에 평등하다면 곧 모든 국토에 평등하고,
모든 국토에 평등하다면 저 허공계와 평등한 것입니다.
이러한 평등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러한 평등에 머무를 수 있다면 닦는 처소가 따로 있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현의 바른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시여, 여법한 모습으로 듣는 것도 또한 그러할 것이니, 이른바 올바른 견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또 사리불이시여, 어르신[耆年]께서 이제 바른 견해를 일으키려 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법을 듣고 그 소견은 어떠한 부류입니까?”
[어떤 강설도 모자라고 부죽하다]
사리불은 대답하였다.
“내가 이제 족성자에게 설법을 들은 대로 그 이치의 귀결점을 살펴보건대, 어떤 강설(講說)도 모두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기는 하였지만 모두다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리불이 또 물었다.
“족성자여, 여래ㆍ지진께선 그 헤아릴 수 없는 복된 법회에서 많은 법문을 드날리셨는데, 여래의 말씀이야 어찌 모자라고 부족하겠습니까?”
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설하셨지만 설하신 것 없으니 모자라거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여래ㆍ지진께선 그 명예와 공덕을 일으키려 하지 않으시고, 또 최상의 복을 희망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여래란 공덕도 없고 명칭도 없으며, 여래라는 이치마저 근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래 또한 그와 같아서 근본이 없는 데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래의 최상의 공덕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이를 희망하는 것이 바로 평등함이 없는 것이고,
또한 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음에도 치우침이나 삿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희망하는 것이 있다면 곧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입니다.”
사리불은 다시 물었다.
“족성자여, 설법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무언보살이 대답하였다.
“4대(大)와 5음(陰)과 6입(入)이 없으므로 받들어 받아들이지[頂受] 않고,
불러서 이룩할[招致] 것도 없고 행할 어떤 것도 없으며,
언사도 없고 가르침[誨]도 가르치지 않음도 없습니다.
그리고 도법에 대해 심(心)ㆍ의(意)ㆍ식(識)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그 법은 모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심ㆍ의ㆍ식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됩니다.
만일 모든 법에 조작함이 있거나 조작함이 없다면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고,
만일 모든 법에 조작함도 조작하지 않음도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모든 법에 대해 분별할 것이 있고 제거해야 할 것도 있으며 행할 것이 있고 증득해야 할 것이 있다면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입니다.
만약 훤히 깨칠 것도 없고 제거해야 할 것도 없으며 또한 행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들을 것도 설할 것도 없는 법에서 어떤 소견을 가져 교화하고 도달해야 할 것이 있다하여 알음알이를 일으킨다면 곧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고,
모든 세계에 행할 것이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공덕과 결함을 분별하여 본다면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고,
만일 그 소행에 결함이 없고 공덕이나 칭찬도 없고 또 소견도 없다면 곧 모자람과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무언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족성자여, 그 누구라도 법을 강설하려고 한다면 이와 같이 강설해야 할 것이니라.”
그때 1만 2천의 보살들이 설법을 듣고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無生法忍)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