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설법이 존중받는 모습]
어떤 것을 능히 성립하게 된 원인의 모습[因相]이라고 말하는가?
두 가지의 성립이 존중받는 까닭에
동등한 흐름이 수승(殊勝)해지며
번뇌의 원인이 되는 성품 때문에
하열한 것도 훌륭하게 되네.
두 가지 성립이 존중받는다는 말은 몸이 의탁하고 있는 땅에 탑을 만들어 세웠기 때문이니, 이것은 설법할 땅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의지하고 있는 몸이 대사(大師)와 같이 존중 받을 만한 성품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이는 곧 경을 지닌 사람이 보배를 보시 받는 땅이지만
보시를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아래 경문에서 이 법문(法門)을 밝혔으니,
그것은 곧 모든 부처님께서 친히 증득하여 깨달은 바와 같은 등류의 성품에 대한 것이다.
[법은 여래께서 설하신 것인가]
“일찍이 있어온 법은 곧 여래께서 설하신 것인가, 아닌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밝히려고 한 말인가?
어느 한 법도 여래(如來) 혼자서 말씀하신 것은 없었으니,
이 모두는 여러 부처님께서 다 함께 선양(宣揚)하셨음을 말한 것이다.
또 보배구슬[珍寶]의 보시로 얻은 복은 곧 고통과 번뇌[苦惱]의 일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며,
법문으로 얻은 공덕만이 비로소 번뇌와 의혹을 끊어 없애는 데에 요긴하므로 우열(優劣)관계에 있어서 현격(縣隔)한 차이가 난다.
[티끌이 아닌 것을 티글이라 하고, 세계가 아닌 것을 세계라 한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서 대지의 티끌로 비유를 들어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티끌이 아닌 것을 가지고 티끌이라 말한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세계가 실제 세계가 아닌데 이것을 실제 세계라고 말한다”고 하셨다.
여기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이 대지의 티끌은 더러움에 물드는 따위의 성품이 있는 티끌이 아니니, 그러므로 대지의 티끌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저 세계는 곧 번뇌의 인자(因子)가 없는 계(界)를 이름한 것이니 이것을 세계라고 말하였다.
계(界)란 인(因)의 의미가 있으며, 이것은 곧 세(世)의 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저 복(福)은 곧 번뇌와 의혹, 그리고 진분(塵坌)의 원인이 되니, 저것은 밖의 티끌[外塵]로 말미암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복덕의 비교]
비록 이것이 미진(微塵) 무기(無記)여서 복을 심고 선을 행하는 곳으로는 가장 비근(卑近)한 것이긴 하지만
어찌 모든 것이 부처를 이룩하는 복의 원인으로서 다시금 미열(微劣)하지 않음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또 저것은 능히 대장부의 모습을 성취하여 지니게 된 복덕이며, 이것은 보리를 성취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4구게(句偈) 등을 지녀서 다른 이에게 법문을 설하는 복도 이보다는 하열하다.
저 여러 가지 모습은 정각(正覺)의 체성(體性)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대장부상(大丈夫相)이라고 말한다.
저것은 표상(標相)이기 때문에 4구게 등을 지녀서 다른 이에게 설법함으로써 그 복덕이 비로소 대각(大覺)의 성품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하열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 저 복덕은 진귀한 보배를 보시한 복덕보다 훨씬 우세하거늘 하물며 법신(法身)을 근본 원인으로 하는 이 복덕을 초월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므로 하열하면서도 우세하다고 말한 것이다.
곧 이 복덕은 지극히 비근(卑近)하여 능히 대각(大覺)을 성립하는 원인이 되지만,
이는 이미 보배를 보시하여 성취한 복덕과 4구게를 지녀 다른 이에게 설법한 복덕의 원인과는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
다음 아래의 모든 글에서 다시 성립된 내용들은 무엇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과보[果]가 수승하지만 괴로운 까닭은
훌륭한 일이라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며
열반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다른 법이 함께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심오한 성품인 까닭은
그 밖의 약전[略詮]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며
으뜸가는 족성(族姓)으로 높고 뛰어나기 때문에
어느 복덕보다도 가장 우세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답하기를,
보배를 보시한 복으로 획득한 자신의 수용과(受用果)인 그 몸도 훌륭하긴 하지만
저 한량없이 많은 몸을 희생하고 버려 얻은 이 복이 앞에 것보다 훨씬 우세하니,
제 자신의 몸은 곧 괴로움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구나 법을 위하여 보시를 행한 것이겠는가?
그때 구수(具壽) 묘생(妙生)은 제 자신의 몸은 곧 괴로운 것임을 알고 법의 세력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러한 법문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묘생에게 스스로의 지혜가 생겨난 후로 지금까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은 수승한 일이었기 때문이니, 이것은 반야(般若)의 이름을 밝히려고 한 말이다.
이 아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수승하고 절묘한 일을 성립시키고자 한 것이다.
곧 경전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반야바라밀다라고 설명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무슨 뜻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가?
답하기를, 열반의 경계는 알기 어려운 것인데 그는 열반의 경계를 알고 있었으니,
부처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다른 이들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문을 듣고 나면 실상(實想)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실상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외한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상이라고 말한 것은 오직 이곳에만 있기 때문이며,
실상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경문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들으면 능히 이와 같은 생각을 낼 텐데,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 희유(希有)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또 이 법문은 또한 매우 심오한 뜻이 있으니, 왜냐하면 이 경전을 혹시 조금이라도 받았거나 두루 지니게 되었다면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취한 바의 경계가 뒤바뀜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나라고 집착하는 등의 생각은 곧 실제 생각이 아니라’고 한 것은 취한 이도 뒤바뀜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 두 가지는 그 차례와 같이 나[我]와 법(法) 두 가지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지혜를 밝힌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뜻에 대하여 묘생이 말한 일을 따라 인가하셨으니,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두렵다[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니,
그것은 곧 경구(驚懼)ㆍ포구(怖懼)ㆍ외구(畏懼)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일에 따라 다르므로 세 가지로 구별한 것이다.
경(驚)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 하여 생겨나는 두려움이니, 바른 이치를 어기고 바른 도리에서 벗어나 싫어하기 때문이며,
[경(驚): 만약 옳게 번역하자면 범음(梵音)으로는 마땅히 월포(越怖)라고 해야 하는데 이제 경(驚)이라고만 말한 것은 옛 뜻을 옮기기엔 충분치 못한 것 같다. 만약 논석(論釋)에 준해 보면 경(驚)이라는 뜻은 매우 걸맞지 않다. 아래 두 가지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 보기 바란다,]
‘포(怖)’라고 말한 것은 계속해서 무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이런 마음이 이미 생겨난 뒤에는 끊어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怖)는 마땅히 속포(續怖)라 해야 할 것이다.]
외(畏)라고 말한 것은 결정된 마음을 내어 한결같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문득 성립되지 않아 마음속에 두려운 의혹이 생겨 멀리 떠나는 것이다.
[외(畏)는 마땅히 정포(定怖)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글에서 본음(本音)과 본의(本意)를 보지 않고는 뜻을 해석하기에 충분치 못할 것이다. 여기의 주석은 본음에서 나온 것이니, 의혹을 내지 말았으면 한다. 다른 역자들은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데, 그 논(論)은 잘못된 것이다.]
또 이 법문은 다른 경전[略詮]보다 수승한 것이니,
경에 말하기를
“이것은 가장 수승한 바라밀다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경전을 여기서는 약전(略詮)이라고 말했다.]
또 이 법문은 가장 으뜸가는 족성으로 높고 수승하다고 하였으니
‘수승한 족성이다’라는 말은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진귀한 보배의 보시에는 이와 같이 많은 덕을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 이것은 이 성립된 복이 앞의 복덩어리보다는 더 뛰어나니, 더구나 이치가 서로 다른 것이겠는가?
그래서 이른바
“몸은 괴로운 성품이니, 그것을 보시하는 것은 곧 고통스러운 과보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 복은 비열(卑劣)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법문에 근거하여 경을 가지고 설법할 때에 저 보살들이 모든 고행(苦行)을 행하는 것도 어찌 고통의 과보를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것만은 고통스런 과보를 얻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아래의 글이 생겨났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저 인욕행[堪忍]을 행할 때에
비록 괴롭지만 잘 수행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러므로 이것을 뛰어난 일이라고 이름한다.
성내거나 분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성품이라 부르지 않으니
안락(安樂)하고 큰 자비심이 있기에
행할 때에 괴로움의 과보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답하기를,
가령 저 사람이 고행(苦行)을 행할 때에 고뇌(苦惱)의 결과가 있다 할지라도 그때 감인(堪忍)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훌륭한 일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거기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첫째는 착한 성품인 까닭에 모든 바라밀다가 다 착함으로써 체성(體性)을 삼는 것이며,
둘째는 거기에서 얻어지는 덕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바라밀다가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저 공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피안[岸]은 일찍이 아는 이가 없으므로 그 언덕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수승한 법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곧 이 행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앞의 고뇌와 비교하면 저절로 다름이 있거늘 더구나 나라는 생각과 성냄이라는 생각이 모두 없는 것이겠는가?
결정코 그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 고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금 자비와 즐거움이 생겨날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또한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이 있는 것과 자비의 마음이 서로 호응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니, 이 말의 이치에 준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유정(有情)이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 등을 제거해 버리지 못한다면 고행을 할 때에 고뇌가 있음을 보고서 문득 보리(菩提)의 마음을 버리려고 할 것이니,
이런 까닭에 마땅히 모든 생각을 여의어야 한다고 권유한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는 무엇을 밝히고자 한 것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수승한 보리심을 내지 않는다면 문득 이와 같은 과실이 있어서 성내고 한탄하는 마음을 내게 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을 버리지 못하니
이런 까닭에 마땅히 굳세게 노력해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