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제법보최상의론 하권
[유위법]
다음으로 생하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멸함[生住異滅]을 설하겠다.
이 네 가지 모습은 찰나찰나에 전전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상응함이 없는 모습이며 그 실체가 없다.
상응함이 없어 참된 모습이 없는 가운데에서는 두 가지 분별을 일으킬 수 없다.
동시라고 설할 수도 없고, 다른 때라고 설할 수도 없다.
동시와 다른 때에 생기(生起)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 때도 없이[無時]라고 할 수도 없다. 이치에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만일 무너질 때라고 한다면, 무너짐은 곧 생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생할 때에는 머무는 것이 없으며, 머무를 때 또한 그러하여 얻을 수 없다. 그 머무는 성품이 없는데, 어떻게 멸함이 있겠는가?
그 생하는 것과 머무는 것이 다름[異]이 된다고 한다.
만일 본래 생하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머무르는 것이 있겠는가?
만일 법이 머무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생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머무르는 것이 없는데, 어떤 뜻으로 멸함이 있다고 하겠는가?
만일 법이 머무름이 있다면 머무르는 법 가운데에서 다른 성품을 설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이 이미 머무름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성품이 있겠는가?
다른 성품이 없는 데에서는 분별할 수 없다.
[분별이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른 성품은 머무르는 성품이 아니며 실로 하나의 성품도 분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모습과 분별하는 마음, 이것은 두 가지 종류라고 한다.
만일 모든 모습이 없다면 곧 분별이 없다.
그 모든 모습이나 분별하는 마음에 분별이 있다면, 둘은 모두 분별이다.
여실한 뜻은 모습도 없고 분별도 없다.
생하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멸함이 만약에 자성이 있다면, 모든 때, 모든 곳, 모든 법에서 처음과 중간과 끝으로 나누어 안립할 수 없다.
만일에 능히 이와 같이 여실한 이치로써 사유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은 이름하여 큰 지혜[大智]라고 하신다.
[성품이 없다]
처음, 중간, 뒤의 모든 성품은 셋의 성품 중에서 실로 하나의 성품도 생기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하나의 성품도 아니고, 다수의 성품도 아니다.
하나와 다수와 중간 모두 얻을 수가 없다.
[항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만일 모든 법이 하나의 성품도 떠나고 다수의 성품도 떠난다면, 곧 항상과 무상으로 분별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무상도 아니고 무상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서 두 가지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처음과 중간과 뒤는 동시에 생하지 않으며 동시에 있지도 않다.
마치 다른 사람의 성품이 곧 자신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
만일 자체의 성품이라면 타인에게 어떻게 있겠는가?
이 중에 설한 바 자성은 없다 했는데 다른 성품이 어떻게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도 한 성품이 없고 다른 것도 또한 성품이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법이 행하는 것과 짓는 것은 인의 성품[因性]을 떠나지 않는다.
무너짐과 무너지지 않음이 마음이 사량한 것이 아니라면 분별할 수 없다.
[무위법은 다른 모습이 없다]
처음과 중간과 뒤를 여실하게 사유하면 모두 무위의 모습[無爲相]으로서 달리 다른 모습이 없다.
그 모든 법의 각각의 종자에 그 각각의 성품이 있다고 분별해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는 지혜 종자가 생한 것임을 떠나지 않는다.
찰나찰나의 때에 나뉘고 바뀌고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하나가 모든 법의 성품이다.
어떻게 마음이 능히 사유하여 생기하는가?
모든 법 가운데 차별된 현상의 모습[事相]이다. 인(因)도 없고 또한 차별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조작된 것이 없다]
모든 법은 본래 조작된 것이 없다.
비록 작용이 상속할지라도 어떻게 실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려지는 모든 법과 능히 아는 주체 이 둘은 찰나 중에 화합할 수 없다.
그 이와 같은 성품은 실로 능히 취하는 것이 없다.
이 중에는 있는 바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마땅히 모든 법은 생하자마자 무너진다고 관해야 한다.
만약 법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곧 생하는 법이 아니다.
법은 무너지기 때문에 얻는 것이 없다.
그 무너지지 않는 것은 항상 머무르는 성품이며 곧 항상 머무르는 성품 그것도 또한 다시 떠나는데, 곧 떠난다는 그 말도 이 가운데에서 또한 떠난다.
만약에 이와 같이 알면 곧 모든 법의 그 차별된 성품을 깨닫는다.
이것이 항상 머무르는 인(因)이며, 차별되는 성품이 없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모든 유위법은 머무름이 없다]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곧 생하고 곧 멸한다. 그러므로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에 머무름이 있다면 마땅히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머무름이 없는 모습은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머무름이 없는 법이니, 따라서 모든 행중에 모든 차별의 행과 상응한다.
만약에 그 하나하나의 성품이 얻는 것이 있다면, 차별이 없는 행을 어떻게 대치하겠는가?
그러므로 차별의 행 중에서 성품은 생할 수 없다.
거듭해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안(眼) 등의 여러 식은 현량(現量)의 성품이 있다.
대지니사(大至尼師)가 친히 설한 것이다.
만일 현량 성품을 떠나서 따로 양(量)과 비량(非量)을 취한다면, 그것은 여기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세간이 가진 먼저 지어진 일은 모두 의지하는 바가 없다.
모든 지어진 것에 작용성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그것이 이와 같이 모든 현전하는 현상[事]이라면, 그 현전하는 것처럼 또한 이루어지는 바가 없다.
[허공과 같다]
이 가운데 만약 행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아닌 것이 있다면 곧 모든 작용의 뜻은 모두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일체는 실로 일을 짓는 것이 없어 모두 허공과 같다.
항상함과 무상함을 모두 집착할 수는 없다.
[허깨비와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모두 연(緣)으로부터 생하여, 비록 생한다 할지라도 또한 조그마한 법도 얻을 수 없다.
연은 허깨비와 같으므로 생한 것도 허깨비와 같다.
즉, 그것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출생하는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모든 법은 성품이 없으면서 또한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와 같은 뜻이다.
정등정각께서 널리 설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집착이 없고 장애가 없다. 대승에서 이 진실을 설하고 있다.
[설법의 방편]
이와 같이 헤아려 알아야 한다.
즉, 보리심은 본래 평등하여 시방 삼세의 모든 여래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방편을 생하여 모든 깊고 깊은 법문을 널리 설하신다.
그 응하는 바대로 명언(名言)으로 분별하신다.
그러므로 각각 밝혀 설함은 모든 법을 생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이른바 그 하나하나의 법이 사제법(四諦法)이며 그 하나하나의 법이 유식법(唯識法)이다.
비록 설한 것에 항상 진실이 있을지라도 그 하나하나의 법은 모두 다 허깨비와 같고,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가히 찾을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으며, 나타내 보임도 없고, 거두어 갈무리함도 없다.
[해탈]
만일 이와 같은 것들을 떠난다면 곧 법의 진실을 알 것이고, 진실을 알기 때문에 보리심이 속히 해탈을 얻는다.
만일 보리심이 이와 같이 해탈한다면, 곧 모든 부처님 또한 해탈하게 되고, 중생 또한 해탈한다. 생사 또한 해탈하며, 열반 또한 해탈하고, 법계 또한 해탈한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 둘은 평등하며, 생사와 열반 또한 평등하다.
만일 이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여실하게 이 뜻을 헤아려 안다면,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설하여 모든 부처님의 보리라고 하며, 나아가 모든 것에서 행한 바와 지은 바 모두를 능히 이루어 갖춘다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