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장진론 상권
[일체법의 본성은 공하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범지여, 알아야 한다.
일체의 실체ㆍ비실체란 말은, 나는 모두 실체가 아니고 허망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성스런 가르침 및 이미 설한 것으로써 장차 도리를 말할 수 있지만 승의제에서는 실체 및 비실체를 다 세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한 것과 같은 오류는 없다.
또 그대의 생각처럼, 설한 도리에 주장의 대상이 없기에 능리 부정의 주체도 없다.
부정의 주체는 없지 않아 부정의 대상도 있다. 다만 부정의 대상인 본성은 없기에 부정의 주체도 또한 없다.
부정의 주체만이 부정의 대강이 본시 무자성임을 알 수 있지만 부정의 대상을 파괴할 수는 없다.
또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보살은 공으로써 일체법을 공이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일체법의 본성은 자체가 공하다”라고 자세히 설해진다.
또한 비춤의 주체가 비춤의 대상을 조명할 때, 마땅히 말하여
‘병ㆍ옷 등의 사물의 비춰지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비춤의 주체도 역시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또한 ‘비춰지는 사물의 속성은 본디 없지만 지금은 있다’는 말을 마땅히 해서는 안 된다.
또 내가 세운 부정의 주체와 부정의 대상, 주장의 주체(能立)와 논파의 주체[能破], 전도와 전도되지 않은 것은 다 세속에서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주장의 목적과 그 주체를 부정한다면 곧 자기주장에 위배되며, 이 부정의 주체는 마땅히 주장의 주체가 아니라고 말해야 된다. 속성은 실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석녀의 아이가 내는 소리처럼. 그대는 이미 주장의 주체인 비량이 있음을 허용한다. 우리들도 마땅히 그렇다. 세속에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여러 존재들은 번쇄한 문구를 두려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렵기에 자세한 쟁론은 그만두기로 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비량은 장애나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세우는 주장인 ‘진성에서 눈의 속성이 공하다’라는 도리는 성취된다.
또 세운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간략하게 명칭의 내용을 들어, 눈 등의 자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그밖에 이유가 있다. 이른바 ‘괴멸하기 때문에’ ‘연에 의해 달라지기 때문에, 생기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어 능히 사도 및 정도의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에’라는 이들 이유로 인하여 그 상응하는 바대로 대치되는 것을 마땅히 바르게 부정해야 한다.
다시 설한다.
‘눈은 실제 속성이 있다. 그 형상의 원인과 결과가 모두 현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속성이 공하지 않아 형상 등이 현재 있음을 볼 수 있고, 눈 등의 형상이 현재 있음을 지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눈 등은 실제로 속성이 공하지 않다’
승의제에서 동법의 비유가 없기에 속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세속에서 실제 속성이 있음을 공지(共知)한다면 다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또 동법의 비유에 의탁하면 이유에 서로 위배된다.
동법의 비유는 오로지 세속에서만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진성에서 눈의 속성이 공한 것처럼.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생각 및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의 속성이 공한 것도 역시 그렇다.
관행을 닦는 자도 마땅히 이와 같이 속성이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또 마땅히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그 진성에서 5온(蘊) 및 18계(界)가 성립한다.
연기(緣起)ㆍ염주(念住)ㆍ정단(正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ㆍ
바라밀다(波羅蜜多)ㆍ여러 삼마지(三摩地)ㆍ다라니문(陀羅尼門)ㆍ
여러 무애해(無礙解)ㆍ십력(十力)ㆍ무외(無畏)ㆍ불공법(不共法) 등과 일체지지(一切智智)는 다 자성이 공하다.
관행(觀行)을 닦는 자도 마땅히 이와 같이 속성이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또 여러 외도들의 변계소집인 대(大)ㆍ아집(我執)ㆍ유(唯)ㆍ양(量)ㆍ근(根)ㆍ대(大)ㆍ실(實)ㆍ덕(德)ㆍ업(業) 등의 유위의 구절은 모두 다 12처(處) 중에 포함되니, 즉 그것은 명상이 있기 때문이다.
관행을 닦는 자는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속성이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이 사택력(思擇力)에 의해 속성이 공함을 깨달아 증득하면 수습력(修習力)은 없어진다.
비유하면 뭇 새의 날개가 처음 생겼을 때는 아직 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다시 꾸준히 정진하여 수습력을 익힌다.
눈이 어두운 사람이 어둠을 제거하는 약을 복용하여 눈이 맑아져 거친 사대로 형성된 털ㆍ모기ㆍ파리 등이 없는 밝은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꾸준히 수습력을 익혀 유위의 형상에 관한 집착과 의흑과 삿된 지혜를 제거한다.
진실로 관행을 닦아 비로소 현전하는 순간에 다른 연으로 인하여 미묘한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체 유위의 형상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하는 자 및 받는 자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 보시하는 자와 받는 자 및 보시의 결과에 취착하지 않기에, 두 종류의 삼륜(三輪) 모두 다 청정함을 얻는다.
이에 바르게 잘 정근하여 수많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섭수하여 둘 양쪽에 메고 현재나 현재가 아닌 과보에도 탐착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의 일과 현재가 아닌 시기의 과보에 관해서도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의 일이나 미래의 과보에 친근공양하며 덕이 많은 천신을 좋아한다.
덕을 짓는 자가 되고 자아를 짓는 자가 되고 자재천(自在天)과 극미의 속성 등을 항상 닦는다는 집착을 하지 않는다.
[보살과 보리]
이러한 일은 모두 이미 말하였기에 지금 다른 이치를 말하여 일체 유위와 무위의 논파의 대상과 그 주체인 법의 성이 공함을 증득시킨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마땅히 모든 일에 안주하여 보시를 행해서는 안 되며, 모두 안주하는 것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자세히 말씀하셨다.
또 세존께서는
“만약 보살들이 유정의 상(想)을 바꾼다면 마땅히 진실한 보살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세존께서는
“조금이라도 법이 있지 않아야 보살승(菩薩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여러 보살들은 오히려 반열반을 희구하지 않고 꾸준히 범행을 닦는데 하물며 삼계(三界)의 생사를 끊는 것이랴. 이와 같이 일체 유위의 속성이 공함을 닦는 수행을 바르게 관했지만 다시 한 번 바르게 관해야 한다.
만약 자성이 공하다면 곧 출생이 있지 않다. 또한 출생이 있지 않다면 곧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고 그 삼계에 대해 장애가 있지 않다. 삼세(三世)가 모두 청정한 모습임을 바르게 관한다.
앞에서 말한 전도 없는 이치에 의탁하여 삼륜청정(三輪淸淨)하면 대보리(大菩提)로 나아간다. 물음과 같다.
“만수실리여, 어떻게 보살은 대보리로 나아갑니까?”
답한다.
“범지(梵志)여, 마땅히 보리와 같아야 한다.”
다시 묻는다.
“무엇을 보리라고 합니까?”
답한다.
“범지여, 이것은 과거도 아니요, 또한 미래 및 현재도 아니다. 이 까닭으로 보살은 마땅히 모든 삼세의 청정한 모습을 바르게 관하여 삼륜청정에 의해 대보리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