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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구왕경 하권
[왕이 변명하다]
왕은 말하였다.
“존자여, 그런 말 마시오. 내가 혹 당신 말을 좇아 후세가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오.
무슨 까닭인가? 지금 이 나라 사람은 곧 이렇게 말할 것이오.
‘왕은 옛날부터 인과(因果)를 믿지 않아 항상 후세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또한 화생도 없다고 말하더니,
오늘 도리어 가섭의 교화를 따랐다.’”
[가섭의 비유 9, 두 상인(1)]
가섭은 다시 말하였다.
“대왕이여, 저는 기억합니다.
옛날에 두 상주(商主)가 있었는데, 그들은 재물과 보배가 많기로 그 나라에서 제일이었습니다.
그 후 언젠가 그들은 짝이 되어 다른 나라로 같이 가서 재물을 팔아 이익을 구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두 상주는 각각 상인들을 모아 짝을 삼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각각 많은 수레를 준비하고 말을 나란히 하여 같은 날에 길을 떠났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나라에서 멀어지자 어렵고 험한 곳이 가까워졌다.
한 상주는 본래 그 길 앞에 어렵고 험한 곳이 있는 줄 알고, 다른 상주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지금 아는가? 이 길은 어렵고 험해 사람이 살지 않는다. 상인 무리들이 많으니 마땅히 준비가 있어야 한다.’
두 상주는 의논한 뒤에 사람이 적어야 필요한 것이 쉽고 풍족하다는 생각에 한 상주가 앞서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진 쌀ㆍ국수 등의 음식과 섶나무까지 모두 가져갔습니다.
앞으로 가던 차에 갑자기 마주 오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큰 몸집에 얼굴빛이 검으며, 두 눈이 빨갛고, 머리는 벗겨지고, 옷은 누더기 같으며, 나귀 수레를 탔는데 그 모양이 귀신 같았습니다.
상주는 물었습니다.
‘어진 자여, 앞쪽에는 음식과 섶나무를 구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앞 길에는 음식과 섶나무 등이 많이 있어 모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길 가는데 무거움으로 지장되는 일이 없게 싣고 오던 것을 모두 버리시오.’
그때 상주는 이 말을 듣고 여러 상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은 다 내 말을 들으라. 앞 길에는 음식 따위의 물건이 모자라지 않다는데, 무엇하러 필요 이상의 물건으로 수레와 말을 피곤하게 하겠는가?’
상주와 그 일행들은 다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어서 가진 물건을 다 버리고 갔습니다. 간 지 첫날에 해가 저물도록 오직 넓은 벌판만 있고 마을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득할 뿐 가져다 쓸 만한 것이 없었고, 음식은 이미 떨어져 모두 다 굶주리고 목 말랐습니다. 그들은 괴로움을 참으면서 밤을 지내고 다시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틀째에도 또 길을 갔지만 밤이 되도록 넓은 벌판만 있을 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 상인들은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전날에 만난 그 사람은 그 모양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귀신임을 알겠다. 우리는 지혜가 없어 그 말을 믿었다. 요망한 것이 사람을 속여 이렇게 만든 것이다.’
사흘째가 되자, 사람과 말은 다 같이 힘이 빠져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어, 서로 돌아보며 말도 없이 죽기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다른 한 상주는 하루 뒤에 출발해 나아가다가 또한 마주 오는 그 사람을 만나서 곧 물었습니다.
‘앞 길에는 음식과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전과 같이, 낱낱이 거짓말로 대답했습니다.
‘음식과 필요한 물건은 다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무엇하러 그것들로 수레와 말만 무겁게 합니까? 가진 물건을 다 버리시오. 당신은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뒤에 출발한 이 상주는 지혜롭고 총명하여,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생각하였고, 평소에 이 길에는 넓은 벌판의 어렵고 험한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길 잇수(里數)를 계산해 보니 험하고 어려운 곳이 멀지 않았고, 또 그 사람의 얼굴이 이상한 것과 모양이 추악한 것을 살피고는 혹 요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믿을 수 없어, 여러 상인들과 의논하고는 나아갔습니다.
사흘째가 되어 갑자기 길에서 먼저 떠난 상주와 여러 상인들이 굶주려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과연 그들도 또한 추악한 사람을 만나 요망에 속았던 것입니다. 여러 상인들은 서로 의논하고 곧 가졌던 음식을 고루 나누어 구제한 뒤에, 그 상인들로 하여금 어렵고 험한 곳을 같이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대왕이여, 먼저 출발했던 상주는 어리석었기 때문에 요망을 믿어 험한 길에서 큰 고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왕께서도 어리석음 때문에 스스로 단견을 고집하신다면, 반드시 오랜 세월 동안 큰 고뇌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대왕은 이 말을 듣고 존자에게 말하였다.
“다시는 비유를 끌어오지 마시오. 내 마음은 돌아서지 않을 것이오.
무슨 까닭인가?
저 백성들이 나를 확고한 소견이 없다고 하며
‘정구대왕은 항상 진실로 사람도 없고, 후세도 없으며, 또한 화생도 없다고 말하더니,
오늘은 뒤집어 가섭에게 교화되었다’고 할까 두렵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전날 소견을 바꾸지 않는 것이오.”
[가섭의 비유 10, 두 상인(2)]
그때 가섭이 또 왕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두 사람은 얼마 안 되는 재물로 짝을 맺어 경영하면서, 돈이나 물건은 비록 다르나 이익이 있으면 서로 갚기로 하였습니다.
계약을 맺어 정한 뒤에는 날을 받아 비로소 떠났는데 며칠이 안 되어 다른 나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땅에는 삼[麻]이 많았는데 값이 헐해 장사할 만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의논한 끝에 돈을 내어 사들이고 제대로 묶어 지고 떠나면서, 다른 나라에 가서 이익이 있으면 곧 팔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 이르러 도라면(兜羅綿)을 보니 곱이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삼을 도라면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지혜가 있어 곧 그 삼을 주고 도라면을 샀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한 사람은 그 친구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삼을 도라면과 바꾸지 않겠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삼은 묶는 데 공이 들었고 또 멀리까지 지고 왔다. 그러므로 나는 바꿀 수 없다.’
두 사람은 그 날로 제각기 재물을 지고 차례차례로 앞으로 나아가 또 어떤 나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나라에는 실이 많이 나 도라면보다 이익이 곱이나 될 것 같았습니다.
그 지혜 있는 사람은 곧 그 도라면을 팔아 실을 샀습니다.
지혜 없는 한 사람은 또 먼저와 같이, 삼을 팔아 실로 이익을 구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재물을 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떤 나라에 이르자 비단이 너무도 싸 실로 남길 수 있는 이익에 비해 몇 배나 더하였습니다.
그 지혜 있는 사람은 이익이 곱이나 많을 것을 보고 곧 실과 바꾸어 비단을 샀으나,
그 무지한 사람은 삼이 아까워 멀리서 가지고 왔다 하여 기꺼이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재물을 지고 또 앞으로 나아가 어떤 나라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광산과 대장간만 있어 비단은 지극히 귀하고 은값은 매우 싸서, 비단을 주고 은과 바꾸면 그 이익이 백 배나 될 것 같았습니다.
그 지혜 있는 사람은 비단을 팔아 은을 사서 백 배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그 무지한 사람은 그 삼이 비싼 값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아까워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지혜로운 사람은 또 어떤 나라에는 금은 나지만 은은 전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곧 그 친구를 불러 그 나라로 가자고 하여, 오래지 않아 그 나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 그 지혜로운 사람은 곧 그 은을 주고 황금을 샀습니다.
금을 사서는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가만히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지난날 집을 떠날 때에는 재물이 아주 적었다. 처음에는 삼을 사서 많은 이익을 기뻐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이 황금을 얻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에 귀중한 것으로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큰 부자가 될 것이다.’
곧 친구를 불러 말하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같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제각기 얻은 대로 집안 어른들을 돕자.’
그때 삼을 진 사람은 그 친구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처음에 삼을 살 때에는 많은 이익을 바랐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이익은 더욱 보잘것없다. 그러나 이제 자네가 돌아가고자 하는데 어찌 내 혼자 처지겠는가?’
그도 또한 짐을 지고 서로 어울려 돌아갔습니다.
‘혹 값비싼 것을 보거든 어디서나 장사하자’고 서로 의논한 끝에,
날을 받아 옛길을 따라 돌아갔습니다.
고국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오자, 그 소식을 듣을 집안 사람들은 모두들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였고 몹시 기뻐하면서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금을 얻은 집에서 그 부모와 처자들이 어떤 이익을 얻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금을 얻어 부자가 되었으니, 일가들까지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 삼을 지고 온 자의 집안 사람들도 물었습니다.
‘너는 스스로 경영하여 어떤 이익을 얻었느냐?’
그 사람은 대답하였다.
‘이 삼을 얻었을 뿐이요 다른 물건은 전혀 없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괴로운 마음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처럼 경영하다가는 우리 일가들은 빈천을 면하지 못하겠구나.’
대왕이여, 삼을 지고 온 사람은 고집스런 성질에 어리석고 미(迷)해서, 진금을 보고도 기꺼이 바꾸려 하지 않아 그 친족들을 언제나 괴롭게 하였으니,
마치 대왕이 스스로 깨닫지 못해 단견을 고집하여,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후회해도 회복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존자에게 말하였다.
“내가 뜻을 돌이키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으니, 이 나라 사람들이 내 견해를 잘 알기 때문이오.
만일 내 고집을 돌리면 나라 사람들이
‘정구대왕은 항상 사람도 없고, 후세도 없으며, 또한 화생도 없다고 말하였는데, 오늘에 와서는 도리어 가섭의 교화를 받았다’고 숙덕거릴 것이오.
나는 결코 그런 수치는 받을 수 없소.”
[가섭의 비유 11, 똥]
가섭은 말하였다.
“대왕이여, 저는 기억합니다.
옛날에 어떤 불률인(不律人)이 많은 돼지를 먹여 그 이익으로 생활해 갔는데, 갑자기 다른 곳에 갔다가 많은 똥을 보고는, 그것을 주워 모아 지고는 집으로 돌아가 돼지를 먹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중에서 뜻밖에 비를 만나 더러운 물이 온몸에 흘러내리자 곧 몹시 후회하였습니다.
대왕이여, 여러 사람에게 천한 대접을 받는 그 불률인도 그 몸을 더럽힌다 하여 마음을 돌렸는데, 왕께서는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도 도리어 허황된 말만 돌아보며 그 마음을 고집하여 단견을 버리지 못하시는군요.”
그때 가섭이 다시 말하였다.
“대왕이여, 내가 지금까지 갖가지로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은 대왕으로 하여금 그 단견을 버리고 후세가 있는 줄 알고 또 삼보(三寶)를 믿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망령된 고집으로 제게 억지를 부리십니다.
저는 이제 다시 왕을 위해 비유를 말하리니, 당신께서 만일 믿거든 자세히 듣고 자세히 받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왕은 존자에게 말하였다.
“원컨대 나를 위해 말하시오.”
[가섭의 비유 12, 돼지와 사자]
그때 가섭은 대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기억합니다.
옛날에 대복(大腹)이라는 돼지가 있었습니다. 그 대복은 많은 돼지를 데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가 그 산에서 갑자기 사자(師子)를 만났습니다.
사자는 돼지를 보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짐승의 왕이다. 너는 빨리 길을 피하라.’
대복은 대답하였습니다.
‘나더러 길을 피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만일 나와 싸우겠다면 싸워 줄 것이니, 우선 내가 갑옷 입을 동안 잠깐 기다려라.’
그때 사자는 말하였습니다.
‘너는 어떤 훌륭한 족속이며 이름은 무엇이기에, 감히 이렇게 나와 싸우려고 하는가?
갑옷을 입어야 하겠거든 이제 네 뜻대로 하라.’
그때 그 대복은 똥구덩으로 가서 온몸에 똥을 칠하고 돌아와 사자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너와 싸우겠다.’
그때 사자는 대복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짐승의 왕으로서 항상 사슴과 같은 짐승을 잡아먹으며, 혹은 약한 자는 먹지 않고 버리는데, 하물며 너와 같이 더러운 몸이겠는가?
만일 너와 싸우면 내 몸만 더러워질 것이다.’
그때 사자는 곧 대복에게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너는 본래도 더러운 몸에
이제 다시 더러움 더하였네.
만일 네 마음 싸우기를 구한다면
나는 곧 너에게 항복하리.
가섭 존자는 대왕에게 말하였다.
“왕의 소견은 마치 저 돼지가 사자와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사자와 같이 먼저 당신에게 항복하겠습니다.”
[왕의 항복하다]
그때 정구왕은 존자 가섭의 이 말을 듣고, 깊이 참회하며 가섭에게 말하였다.
“존자여, 나는 처음 해와 달의 비유를 들었을 때에 이미 믿고 항복하였소.
다만 존자의 지혜로운 변재를 듣고 싶어 그런 말로 과격하게 말했을 뿐이오.
원컨대 존자는 내 정성된 마음을 살피고 내가 믿고 항복함을 알아 주시오.
가섭 존자에게 귀의하기를 맹세하고 원합니다.”
가섭 존자는 말하였다.
“제게 귀의하지 마십시오. 제가 귀의하는 곳인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께 다인도 귀의하십시오.”
왕은 다시 말하였다.
“존자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께 귀의하고 근사계(近事戒)를 받아, 지금부터는 맹세코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ㆍ간음ㆍ거짓말을 하지 않고, 또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몸과 목숨을 마치도록 부처님의 깨끗한 계를 지키겠습니다.”
그때 대왕은 교화를 받은 뒤에, 정성된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해 삼귀의를 받고, 길이 5계를 받들어 바라문과 장자들과 함께 기뻐 뛰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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