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울진. 죽변.부구에서 해안 초소에서 바닷 바람을 마시며 근무 할 당시 야간에 해안을 밝혀주던 미제 제논 서치라이트가 고장이 나서 정비하러 오면 내가 그 미군들을 통역할 때도 있었다.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서울에서 잠시 방황을 하던 시절에도 나는 코리아 헤럴드를 조선일보와 함께 바달하던 시절에도 영어 공부를 손에서 놓지를 않고 있었던 덕분에
군에서도 그런 기회에 영어 실력으로 부대에서 인정을 받기도 했었다.
나실 구멍가게. 식수 뜨러 갔다가
만난 아주머니는 군에 간 아들 생각이 난다면서 방안에 신문지 깔아주며 군화를 신은채로 불러 들여서 명절 밥상을 차려 주며 빨리 먹고 가라던 그 친절했던 아줌마들 생각이 난다.
멀리 동쪽 수평선을 밝히며 밤새 오징어 잡이를 하던 고깃 배들
바닷 가에서 화랑.충무 태권도 연무선을 그리며 밤을 새우던 밤 바다. 그 시절이 눈에 선하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입게 될 예비군 복을 포기하고, 영천 3사관학교로 다시 들어가서 가서 관물을 받고 다시 푸른 제복을 입게되었다.
5만 촉광의 다이아 몬드. 육군 소위가 되려고 아침마다 북괴의 124군 부대보다 ㄷ 강인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듯한 나날은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멎물려서 영천에서 훈련을 받을 당시 우리는 정말 인간 병기라도 만들겠다는 정책 당국자들의 욕심의 제물이되기도 하였다. 10 키로 구보를 하면서 기록이 뒤떨어지면 또 다른 혹독한 얼차려가 기다리고 있어서 힘이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동료를 태권도 도복끈으로 묵어서 좌우로 부추겨서 한사람의 누락자도 없이 같이 목표지점으로 골인하기위하여 달렸던 그 집단 구보의 뒷날 대구 육군 병원을 실려갔던 동료들이 교육도 다 받지 못하고 죽어서 '고 소위ㅇㅇㅇ' 라고 아침 점호 시에 묵념의 기도를 드리던 날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고경 사격장, 효동 전술 훈련장, 대창 박격포 사격장, 사동 도하 훈련장, 화산 유격훈련장등 육군 쇠위가 되려고 한 그 애잔한 훈련의 고비고비마다 정말 눈물겨운 고통과 인내의 나날이 없었다면, 어찌 육군 쇠위가 될 수 있었을까 말이다. 그 당시 나는 현역 생활을 하다가 입교한 터라 민간인에서 바로 입교한 사람들보다 군의 실태를 좀 알 수 있다고 하여 중대장은 나에게 보급 담당임무를 주었다. 교육을 받는 동안 동기생들에게 필요한 보급품을 수령해다가 나누어 주고 회수하는 일들을 하기도 했다. 울진에서 영천으로 오던날 헤어지면서 당부하던 ㅂ 행보관의 말을 기억하는 나는 보병 소위가 되어 울진 해안 소대장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중대가 성적이 좋다고 학교에서 우리 중대를 모두 포병학교로 보내기로 해서 보병소위가 되려던 희망을 사라지고 말았다. 광주 포병학교로 가서 교육을 받고 나는 포병 장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 포병학교에 가서 포병 정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 다시 영천으로 돌아와서 임관을 하게 되었다. 영천은 기후가 불순하다고 하는 곳이라 훈련을 받으면서 우리는 영천 대 말좃바람이 너무도 춥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1971년 7월 16일 육군 상병에서 다시 포병 소위가 되어 영천을 떠나던 날 내어깨위에 두개으 다이아 몬드를 달아준 사람은 어머님과 진해에서 근무하던 해병대 보안부대원 이었던 덕천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군이 된나를 볼때마다
"내가 소위 계급장을 안 달아 주었으면 자네가 어떻게 장군이 되었겠나.?"
하고 지금도 나를 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