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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4章 靑 山 面
연천군 2읍 8면의 하나이다.
이 면은 본래 양주군의 지역으로, 청송면(靑松面)이라 하여 백호(白虎)·의요(蟻腰)·평촌(坪村)·궁촌(宮村)·탄동(炭洞)·장연(長淵)·대전(大田)·초촌(哨村)·금촌(金村 지금의 전곡읍 신답리)·이패(二牌 지금의 대전리 아장동)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조선 광무 10년(1906) 9월 24일 "칙령 제49호"인 지방 구역정리에 의하여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포천군 산내면(山內面)의 덕둔(德屯)·사정(射亭)·금동(琴洞)·지동(紙洞)·삼정(三政)·간자(艮子)·갈월(葛月)·송둔(松屯)의 8개 동리를 병합하여 청송의 "靑"자와 산내의 "山"자를 따서 청산면이라 하여 백의·궁평·장탄·초성·대전·덕둔·금동·삼정·갈월의 9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3·8선 북쪽 지역인 장탄·궁평·백의 전지역과 초성·대전리 일부 지역이 북한 공산 치하에 놓여 면사무소를 궁평리에서 3·8선 남쪽 지역인 삼정리로 이전하여 삼정·갈월·금동·덕둔 등 4개의 법정리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후, 6·25로 전지역을 잃었다가,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초성리로 면사무소를 이전하여 9개 리를 관할하여 오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덕둔·금동·삼정·갈월의 4개 리(남청산 지역)는 포천군 신북면에 편입되었고 그 외 백의·궁평·장탄·초성·대전의 5개 리는 연천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동쪽은 포천군 창수면, 남쪽은 포천군 신북면과 동두천시, 서쪽과 북쪽은 전곡읍과 경계가 된다.
□ 일반현황
·면사무소 소재지 : 청산면 초성1리 440 - 15
(1994년도 통계연보 기준)
+-------+------+-------------------+---------------+---------------------------+
| | | 인 구 수(명) | 인 구 밀 도 | 리 수 |
| 면 적 |가구수+-----+------+------+ +------+------+----+--------+
| (km ) | | 계 | 남 | 여 | (1인 / 1km ) | 법정 | 행정 | 반 |자연마을|
+-------+------+-----+------+------+---------------+------+------+----+--------+
| | | | | | | | | | |
| 38,73 |1,997 |6,469|3,269 |3,200 | 167,0 | 5 | 12 | 61 | 16 |
+-------+------+-----+------+------+---------------+------+------+----+--------+
1. 초성리(哨城里)
본래 양주군 청송면의 지역으로, 초성리역 남쪽에 있는 산성(山城)인 초성(哨城)의밑이 되므로 '초촌리(哨村里)'라 하였는데, 조선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에 의해 양주군에서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지금의 초성2리 지역에 있는 토성(土城)에서 '城'자를 따서 초촌리를 '초성리'로 개칭하여 청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3·8선에 의하여 초성리 북쪽의 일부 지역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 되었고,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포천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4개의 행정리, 21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큰골 : 초말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2 딱지봉 : 초말 북쪽에 있는 뾰족한 모양의 봉우리. 상처 표면이 말라붙어 돌기한 '딱지'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이 봉우리에서 초말 주민들이 소를 제물로 하여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3 둔말 : 초말 북쪽에 있는 마을. 구정산 동쪽의 완만한 산등성이 뒤쪽으로 마을이 위치했다 하여 '둣말'로 불리우던 것이 음이 변해 '둔말'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마을 뒤편에 공동묘지가 있다.(경기도 일부 지방에선 '뒤'를 '두'라 한다.)
4 큰고드롱골 : 딱지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5 작은고드롱골 : 큰고드롱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6 구정산(九政山, 九政非) : 초말 서북쪽에 있는 큰 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어떤 풍수가가 명당을 찾으러 각처를 다니던 중 이 곳에 와서 보니, 이 산의 형상이 정승 아홉이 나올 명당자리가 되어 산에 올라 그 혈을 찾았으나, 멀리서 보기와는 전혀 다른 명당터가 되지 않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양주의 옛 지리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이 산이 '영근산(嶺斤山)'으로도 표기되 어 있다.
7 삼밭골(麻田谷) : 작은고드릉골 위에 있는 구정산에 딸린 골짜기. 예전에 삼밭이 있었다 한다.
8 작은삼밭골 : 학담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삼밭골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9 학담(鶴潭) : 초말 북쪽에 있는 마을. 풍수지리설로는 이 곳의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 있던 선대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길 적에 곽(槨) 안에서 학이 날라 갔다 하여 학담이라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지금은 군부대와 농협 김치가공공장이 들어서 있다.
10 뒷골 : 구정산에 딸려 있는 골짜기. 학담마을의 뒤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11 구정약수(九政藥水) : 학담 북쪽, 한탄강 옆에 있는 구정산 북쪽 끝에 딸린 약수.
12 귀웅소 : 학담 북쪽, 한탄강에 있는 크고 깊은 소(沼). 모양이 소의 먹이통인 구유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3 놀미( 味) : 초성리 북쪽, 신내와 한탄강이 합류하는 아래에 있는 마을. 예전에는 이 곳이 원산과 서울의 중간지점이 되어 여행객과 상인이 모여들어 장이 형성되었던 곳이었으나, 1925년 을축대홍수 때 큰 물이 이 곳을 휩쓸어 폐허가 되었다가 6·25 이후 새로 입주가 되어 지금은 '새터(新基)'라 불리워지는 곳이다.
14 초성리 토성(哨城里 土城)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15 삼팔선 돌파기념비(三八線 突破紀念碑) : 초성3리 238번지에 있는 6·25전적기념비. 1951년 5월 28일 이 지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3·8선을 돌파하여 용감하게 싸운 타일랜드 보병 제2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의 훌륭한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기념비이다. 규모는 가로 15m, 세로 10m, 높이 3m이다.
16 초성리 선사유물 출토지(哨城里 先史遺物 出土地)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17 신내(莘川) : 양주군에서 발원하여 동두천시를 경유, 한탄강에 합류하는 초성리중앙의 큰 준용하천.
18 너븐소 : 법수동 북쪽, 신내에 있는 넓은 소(沼). '넓은'의 옛말인 '너븐'이 그대로 쓰여지고 있는 이름이다.
19 고애고개(과고개) : 봇들에서 대전리 곧은길로 넘어 가는 고개. 지형이 산부리 끝을 굽어 돌아가는 모퉁이처럼 생겼다.
20 거물래산 : 너븐소 동쪽에 있는 산. 모양이 곡식이나 재 등을 글어 모으고, 펴거나 밭의 흙을 고르는데 쓰는 농기구인 고무래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무래의 방언인 거물래로 씌어지고 있다.
21 무당소 : 신내와 열두개울이 합쳐지는 곳에 있는 소(沼). 옛날에 무당이 빠져죽 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2 봇들 : 법수동 북쪽에 있는 들판. 열두개울을 막은 봇(洑)물로 관개하여 농사짓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들이름이다.
23 분두골 : 봇들 뒤편, 노적봉과 고양이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
24 고양이산 : 거물래산 동쪽에 있는 산. 풍수지리설로는 고양이형국이라 한다.
25 노적봉(露積峰) : 법수동 북쪽에 있는 바위산. 멀리서 보면 이 산 모양이 곡식을 쌓아 놓은 큰 낟가리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6 머개너머 : 법수동에서 대전리 수누골로 넘어가는 고개.
27 선녀바위(仙女岩) : 법수동 동쪽, 산 중턱에 외따로 서 있는 큰 바위. 약 20m 높이로 특이하게 우뚝 솟은 이 바위는 주변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목이 어우러져 동양화의 한 폭을 연상케 하는데, 이 바위의 기경(奇景)과는 달리 아래와 같은 비련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아주 오래 된 어느 옛날, 한 나무꾼이 마당같이 넓은 이 바위 꼭대기에 아름다운 선녀가 내려와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선녀를 아내로 맞으려는 생각에 이 바위를 오르려고 하다가 하도 가파르고 오를 수가 없어 바위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리려고 하루종일 바위를 찍었는데 이미 선녀는 하늘로 올라간 뒤였고, 이에 상심한 나무꾼은 발만 동동 구르다 마침내는 시름시름 앓다가 병들어 죽었다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나무꾼의 일화에 따라 '선녀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28 핑그재 : 선녀바위 남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29 열두개울(山內川) : 초성4리 법수동과 포천군 신북면 덕둔리의 경계에 있는 관광지. 약 6km에 이르는 이 개울을 처음부터 끝까지 올라가자면 열두번을 건너가야 한다 하여 지어진 개울 이름으로, 예전에 양주군 산내면(山內面)의 중앙을 흐른다 하여 '산내천(山內川)'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깊은 계곡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과 기암괴석, 울창한 수림이 어우러진 명소가 되어 많은 피서객이 찾아 오는 관광 명소이며, 최근에는 온천휴양지로도 각광 받고 있는 곳이다.
30 보안 : 법수동으로 흐르는 열두개울을 막은 보의 안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1 마른개울 : 법수동 남쪽, 절골에 있는 개울. 골짜기는 깊으나 돌이 많아 여름철 우기 때에만 물이 흐르는, 늘 물이 없이 말라 있는 개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다.
32 절골 : 법수동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현재 사지(寺址)에는 약간의 와편이 수습될 뿐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사명(寺名) 및 연혁 또한 자세하지 않다.
33 다락터 : 법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다락처럼 높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 오나, 원래는 '산(山)'의 뜻으로 쓰인 고어의 '달'과 '터'가 합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다락(樓)'과는 무관한 '산(山)의 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천읍 부곡리 '다락터' 참고)
34 법수동(法水洞) : 열두개울 입구에 있는 큰 마을. 포천의 국사봉과 종현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차디찬 물이 이 마을 앞을 흐른다 하여 불교에서 '불법(佛法)이 중생(衆生)의 마음속 때를 깨끗이 씻어 정(淨)하게 하는 물'의 뜻을 빌어 법수동이라 했다는 설과, 이 마을 남쪽 절골에 있던 절의 이름이 법수사(法水寺)가 되어 법수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 내려오나, 모두 고증이 어려운 이름이다.
35 새청배소 : 법수동 북쪽, 열두개울에 있는 소(沼).
36 쥐산 : 법수동 서쪽에 있는 바위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산이 동북쪽에 있는 노적봉(쥐의 먹이 형국)을 바라보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상인데, 고양이산이 내려 보고 있어 쥐가 기가죽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한다.
37 새창고개 : 법수동에서 초말로 통하는 조그만 고개.
38 사기막골(沙器幕谷) : 초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시대에 도요지가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최근에 농지로 개간되면서 가마터가 멸실되어 소량의 백자편들만 수습될 뿐, 현재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39 초말(哨村) :초성리역과 청산면사무소 부근에 있는 마을. 이 마을 남쪽에 위치한 초성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0 말뚝고개 : 초말 남쪽, 동두천시와 경계에 있는 고개. 예전에 삼국의 경계였던 이곳 초성에서 적의 침공을 신속히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늘 관측을 하며 군마(軍馬)를 항시 말뚝에 매어 놓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이 곳이 연천군 입구가 되어 연천군 표석 및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41 초성리 산성(哨城里 山城)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 제보자 : 유 창 은(76) 청산면 초성4리
최 학 룡(76)
서 진 호(67) 초성2리
서 승 후(60) 초성1리
2. 대전리(大田里)
본래 양주군 청송면의 지역으로, 한탄강 옆에 큰 밭이 있으므로 '한밭' 또는 '대전리'라 하였는데,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인 지방 구역정리에 의해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많은 지역이 3·8선 북쪽의 공산 치하에 놓였으나,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83년 대통령령에 의하여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8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한밭(大田) : 한탄강 옆에 위치한 대전리의 유래가 되는 큰 밭. 그 넓이가 약 11,000평(7일 한나절갈이)이 된다 한다. 이 곳 한밭의 '한'은 일부 명사 앞에 붙어서 '크다' 또는 '넓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넓은밭'의 뜻을 가진 곳이다. 김시습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 곳 한밭을 지나던 중 아래와 같은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大田途中 한밭 도중에서
日暮人稀飢 鳴 저물녘에 사람은 드믈고 비둘기는 주려우니
途中秋思正 嶸 도중의 가을 생각 그야말로 쟁영하다.
何當一上逍遙頂 어찌 한번 소요산에 올라감에 당하랴 ?
快得逍遙不世情 시원하게 소요산의 불세정(세상에 볼 수 없는 경치)을 얻자 하네.
≪梅月堂詩集 卷十 遊關東錄에서≫
2 뱃나드리(뱃터개) : 한밭에서 전곡으로 건너다니던 한탄강 나루터. 전곡 3번 국도쪽으로 다리가 생기면서 나루가 자연히 없어졌다.(나드리는 나루의 방언임) 옛날에는 이 나루 아래에 있는 '한여울(大灘)'로 인하여 한탄강의 어원이 되었다. (산천편 "한탄강" 참고)
3 구무소 : 뱃나드리 북쪽, 한탄강에 있는 깊은 소(沼).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가고도 모자라는 깊이라 전해 오는 곳이며, 항시 물이 크게 휘감아 돌아 이 소에 빠지면 살아남지 못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 소의 이름인 '구무'는 강물이 크게 도는 것으로 보아 '구멍(穴)'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인 '구무'와 '소'가 합쳐져 이루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4 대전리 산성(大田里 山城)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5 아랫모탱이 : 아랫대전리 마을에서 한밭으로 가는 사이에 있는 길 모퉁이.현재 322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대전리 마을에서는 가장 아래에 위치한 모퉁이이다. 6· 25 전까지 이 곳 주위에는 부여 서씨가 15호 살았다 한다.
6 우묵골 : 성재 동쪽에 있는 우묵한 모양의 골짜기.
7 성재고개(城峴) : 우묵골에서 장탄리로 넘어가는 고개. 대전리 산성의 옆으로 넘어다니던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성(城)'과 같은 뜻인 '재(고재)'와 '고개(峴)'가 합쳐져 불리워지고 있는 땅이름이다.
8 한원군 이 목 묘(韓原君 李穆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9 말무덤 : 대전리 마을 뒤에 있는 말을 묻었다는 무덤.
10 외룡골 : 수누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11 막은데미고개(= 되네미고개) : 윗한밭에서 궁평리의 평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궁평리편 참고)
12 깃대봉(旗峰, 157m) : 궁평리편 참고.
13 소경고개 : 대전리 연미골에서 궁평리의 의요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궁평리편 참고)
14 화장골(火葬谷) : 연미골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화장을 했던 곳이라 한다.
15 무쇠말등 : 대전리·궁평리·백의리 경계에 있는 높은 산.(궁평리편 참고)
16 당차골 : 무쇠말등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17 절골 : 무쇠말등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조가지골 : 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19 쇤골 : 조가지골 옆에 있는 골짜기.
20 산안골(山內谷) : 연미골 가장 막바지, 깊숙한 산 안에 있는 골짜기. 포천군 신북 면 삼정리와 통하며 삼형제바위가 있다.
21 밤나무골 :산안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던 곳이 되어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22 된박골 : 조가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23 동이저골 : 당차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24 신주번댕이 : 아장동 동쪽에 있는 큰 산.
25 연미골(燕尾谷) : 윗한밭 동쪽에 있는 깊고 큰 골짜기. 지형이 제비의 꼬리와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현재는 '연못골'로 불리워진다.
26 잿말둔덩 : 윗한밭 동쪽에 있는 넓은 둔덕. 막은데미고개(=재) 옆에 있는 잿말(윗 한밭의 다른 이름)의 뒤편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군부대가 있다.
27 윗한밭(上大田) : 막은데미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 아래한밭의 상대되는 지명이며 잿말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6·25 전에는 전주 최씨가 15호 살았다 한다.
28 풀무골 : 아장동과 윗한밭 사이에 있는 좁은 골짜기.
29 아장동(亞將洞 = 中大田) : 수누골 입구에 있던 마을. 예전에 아장벼슬을 지낸 사람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장수 황씨가 3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며, 옛 양주군 이패리(二牌里)의 중심 마을이다.
30 건지산 : 아장동 동쪽에 있는 동그랗고 조그만 봉우리. 이 곳에서 아장동 주민들이 산제를 올렸다 한다.
31 일아리때 : 아장동 남쪽에 있는 산.
32 샘못골 : 일아리때 남쪽에 있는 골짜기. 바위 틈에서 솟구치는 샘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33 작은황개터골 : 샘못골 옆에 있는 골짜기. 큰황개터골의 옆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34 큰황개터골 : 작은황개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5 됫박골 : 큰황개터골 아래에 있는 작은 골짜기. 작은됫박골, 큰됫박골로 나뉘어 진다.
36 싸리두묵골 : 수누골 막바지에 있는 큰 골짜기. '둥금(圓)' 과 '둘러싸임(四圍)' 또는 '산(山)'을 뜻하는 고어의 '둠'이 '두무'에서 '두묵'으로 옮겨 간 것으로, '싸리나무가 많은 산 골짜기'란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는 곳이다.
37 종현산(鍾懸山. 588,6m) : 대전리와 포천군 신북면 덕둔리 경계에 있는 높은 산. 예전에 이 산 정상에 큰 종을 매달아 놓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8 큰직절(- 直寺) : 종현산 북쪽에 딸린 골짜기. 직절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직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전해 오지 않는다.
39 승지골 : 큰황개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40 이비장골 : 작은황개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이비장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한다.
41 머개너머 : 아장동 남쪽에 있는 고개. 초성리 법수동으로 통한다.
42 수누골 : 윗한밭에서 종현산까지 있는 대전리에서 가장 큰 산골짜기.
43 샘물터 : 외룡골 남쪽에 있는 우물.
44 도당재 : 수누골에서 아랫대전리의 검단이골로 통하는 고개. 예전에 이 고장의 수호신을 모셔 놓고 위하는 단인 도당(都堂)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5 비선골 : 검단이골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비석 한 기가 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 강점 초기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조선 헌종 11년(1845) 양주목사로 부임하여 2년간 재직했던 조석우(曺錫雨. 1810 ∼ ?)의 선정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이 비석은 확인되지 않는다.
46 검단이골 : 외룡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47 방아골 : 검단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48 잔방골 : 검단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작다(小)는 뜻의 옛말인 '잔'과 산(山)의 고어 '받'이 음이 변한 '방'에 골(谷)이 합쳐져 이루어진 복합지명으로 '작은 산골짜기'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곳이다.
49 삼신골 : 검단이골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50 버들골 : 아래한밭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버드나무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1 수려울 : 버들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52 회꼽부리소 : 한밭 남쪽, 신내에 있는 소(沼).
53 화전골(火田谷) : 수려울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화전밭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골짜기 이름이다.
54 서낭당고개 : 화전골과 고애벌 사이에 있는 고개. 6·25 전까지도 돌서낭당이 있던 곳이다.
55 작은미락골 : 고애벌 동쪽에 있는 골짜기.
56 고애벌 : 신내 동쪽, 미락골 앞에 있는 벌판. 고애고개의 부근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7 곧은길 : 고애벌에서 초성리 법수동으로 통하는 사이에 있는 곧은 길.
58 큰미락골 : 고애벌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현재 연천군 쓰레기 매립장이 있다.
59 큰미락골 백자요지(-- 白磁窯址. 대전리 백자요지)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 참고.
60 고애고개(過峴) : 고애벌과 초성리 법수동 사이에 있는 고개.(초성리편 참고)
61 거물래산 : 초성리편 참고.
62 고양이산 :
* 제 보 자 : 서 상 복(84) 청산면 대전1리 3반
어 연(74) 궁평1리 3반
황 달 주(72) 대전1리 3반
서 양 호(62) 대전1리
3. 장탄리(長灘里)
본래 양주군 청송면의 장연리(長淵里) 지역인데, 조선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인 지방 구역정리에 의해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탄동리(炭洞里) 지역을 병합하여 장연리의 "長"자와 권탄동(拳灘洞)의 "灘"자를 따서 장탄리라 하여 청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해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83년 대통령령에 의하여 포천군에서 연천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3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성재소 : 장탄리 가장 남쪽, 한탄강에 있는 소(沼). 대전리산성(=성재)의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새골 : 대전리 산성 북쪽에 딸린 좁은 골짜기.
3 성재(大田里山城) : 장탄리와 대전리 사이에 있는 산성. 성(城)과 산(山)을 뜻하는 옛말인 '재'가 합하여 이루어진 땅이름으로, '성산(城山)'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곳이다.
4 작은성재 : 새골 동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대전리 산성(=성재)의 북쪽에 딸려 있는 작은 골짜기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 큰성재 : 작은성재 옆에 있는 골짜기.
6 자랑골 : 큰성재 옆에 있는 골짜기. 좁거나 작은 것을 뜻하는 말인 '잘'이 '자라'로 음이 옮아 가면서 '골'과 합쳐지는 과정에 '자라'가 '자랑'으로 변하여 굳어진 이름이며 '작은 골짜기'란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7 홀짝골 : 자랑골과 외룡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큰홀짝골과 작은홀짝골로 나뉜다.
8 외룡골 : 홀짝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9 삽재골 : 외룡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사이'의 뜻을 가진 '삿'이 다른 낱말과 합하여 복합어의 앞 음절이 될 때 ㅂ소리나 ㅎ소리가 덧나는 음운첨가현상으로 '삿'이 '삽'으로 발음이 옮겨 가므로, 이 곳 삽재골은 '삽(間) + 재(峴) + 골(谷)' 즉, 장탄리에서 대전리로 넘어 가는 '좁은 고개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곳이다.
10 함정골 : 정주동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산짐승을 잡기위해 함정을 파 놓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1 정주동산(定州東山) : 함정골 북쪽에 있는 공원묘지. 평안북도 정주군민회와 평안도민회에 의하여 조성된 실향민 묘원(墓園).
12 정주군민회 망향탑(定州郡民會 望鄕塔) : 장탄리 산 913번지에 있는 7,7m 높이의 망향탑. 평안북도 정주군민회와 평안도민회, 연천군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1982년 건립되었으며, 고향을 그리며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13 외딴묘골 : 함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묘가 있었다 한다.
14 긴여울(長灘) : 성재소 북쪽, 한탄강에 있는 큰 여울. 지금은 한탄강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수량이 증가하여 여울의 옛 모습이 많이 변하였다.
15 안말(內洞) : 한탄강 수력발전소 남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16 능안 : 불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큰 릉(묘)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지금은 그 릉이 확인되지 않는다.
17 된봉 : 능안 남쪽에 있는 봉우리. 정상부의 지형이 되고 험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양성골 : 큰잣터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산골'로도 불리우며, 6·25 전에는 강릉 김씨들이 마을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한 집만 살고 있다.
19 도당골 : 양성골 안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도당(都堂 - 시골 사람들이 자기 고장의 수호신을 모셔 놓고 위하는 단)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 텃골 : 장수개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터에 대한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21 매봉재(烽火山. 183m) : 텃골 동쪽에 있는 봉우리. (궁평리편 참고)
22 궁논(宮畓) : 양성골 북쪽에 있는 논. 예전에 궁궐에서 관리하던 논이라 한다.
23 새말(新村) : 궁논 옆에 있는 새로 형성된 마을.
24 큰미골 : 궁논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25 큰잣터 : 장수개 가운데 있는 마을의 옛 이름. '산(山)'의 옛말인 '잣'과 '터'가 합하여 '큰 산골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26 장수개(長水浦, 長淵洞) : 한탄강 수력발전소 부근에 있는 큰 마을. 긴여울 위가 되어 항상 맑은 물이 호수처럼 모여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이 마을은 조선 명종 13년 경 서봉천(徐奉川)이란 사람이 양주에서 이 곳으로 이주하여 처음 개척했다 하는데, 지금도 그의 후손인 이천 서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산다.
27 불당골(佛堂谷) : 큰잣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터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28 한탄강 수력발전소(漢灘江 水力發電所) : 한탄강 동쪽, 장수개 마을에 있는 발전소로 1983년 6월 1일 착공하여 1984년 10월 31일 준공되었으며 연간 28,900,000kwH의 전력을 생산한다.
29 도란말(回洞) : 한탄강 수력발전소 북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산부리 끝의 모퉁이
처럼 되어 있어 장수개 마을에서 이 곳을 지나려면 굽어 돌아가야 한다 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현재는 발전소가 세워진 후 예전의 도로가 없어진 상태이다.
30 새터 : 도란말 북쪽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 지금 그 자리에는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다.
31 고탄교(高灘橋) : 장탄리와 전곡읍 전곡리의 고탄동 사이에 있는 한탄강다리. 일명 '높은여울다리' 또는 '에반스교'라고도 불리워지고 있으나, 현재 이 다리 아래 큰 다리가 최근에 새로 가설되어 있다.
32 칠성배미 : 고탄교 동쪽, 37번 국도 남쪽에 있는 고래실논. 일곱군데에서 샘이 솟아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3 행주골 : 숯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현재 목장이 자리하고 있으나,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34 박아지골 : 칠성배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수복후 어떤 사람이 박아지를 심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5 봉화봉(烽火峰) : 숯고개 북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봉화를 올렸던 곳으로 전해 오나, 지금은 그 터가 멸실되어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36 이농골 : 아랫거저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37 아랫거저울 : 이농골 북쪽, 한탄강 옆에 있는 마을. 거저울 마을의 아래에 위치한다.
38 느릅나무골(楡木谷) : 아랫거저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큰 느릅나무가 있었다 한다.
39 너래들비냥 : 아랫거저울과 윗거저울 사이에 있는 넓은 암반으로 이루어진 벼랑. 수복후 이 곳으로 도로를 개설하여 윗거저울로 가는 길이 원활하게 틔어 있다.
40 분토골(盆土谷) : 윗거저울 남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지형이 항아리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1 사냥골 : 분토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42 후동(後洞) : 윗거저울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43 윗거저울(居士洞, 拳灘洞) : 너래들비냥 북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어떤 거사(선비)가 살았다 하여 거저울이라 불리웠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실제 뜻은 '가(邊)'와 '자리'가 합쳐진 복합어 '가장자리'가 변천되면서 쓰이고 있는 곳이다.
가장자리란 뜻의 옛말은 원래 ' ( )'이었으나, 이 ' '은 '가사','가자', '가재','거저' 등으로 전음되어 전국 땅이름에 많이 쓰이고 있고, 이 곳의 '거저울' 또한 옛 양주군 청송면에서 가장 외진 '가장자리 마을'이라는 뜻의 거저울이 한자지명으로 음차되면서 엉뚱하게도 '居士'가 되어 선비와 관련된 해석을 낳은 곳이다.
이 곳은 지금부터 약 300년 전에 통덕랑 박필익(朴弼益)이 정착한 후부터 반남박씨의 집성촌이 되었고, 또한 이 마을 앞을 크게 곡류하는 한탄강이 주먹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권탄동'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는 곳이다.
44 사동(蛇洞) : 거저울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뱀이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뱀밭골'로도 불리워진다.
45 안골(內洞) : 사동 안에 있는 골짜기.
46 마즈쟁이 : 윗거저울 앞에 있는 한탄강 여울.
47 굴여울 : 이링기리 앞에 있는 한탄강 여울. 일제 강점기 때 한탄강 건너 신답리에 금광굴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8 이링기리 : 거저울 북쪽, 한탄강 옆에 있는 큰 밭. 그 넓이가 7일 갈이가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49 뒷벌(後坪) : 이링기리 옆에 있는 벌판. 윗거저울의 뒤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0 장구맥이 : 윗거저울과 뒷벌 사이를 넘어 다니던 목. 지형이 장고와 같은 곳이다.
51 수리봉 : 뒷벌 동쪽, 한탄강 남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리와는 연관이 없고 단순히 '높은 봉우리'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신서면 대광리 "수리봉" 참고)
52 장구산(杖鼓山) : 수리봉 동쪽에 있는 바위산. 그 모양이 가운데가 잘룩하여 장구와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고장의 전설에는 이 장구산을 안산(案山)으로 하는 연천읍 고문리 느즌모루 마을에서는 이 산으로 인하여 무당이 끊이지 않고 난다 한다.
53 장독바위 : 장구산 남쪽, 한탄강변에 있는 장독처럼 생긴 큰 바위.
54 큰범골 : 수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 이 마을에 살던 부자(父子)가 보리를 지고 이 곳을 지나던 중 아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55 오위장 이경빈 묘(五衛將 李慶彬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56 작은범골 : 큰범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57 능안(陵內洞) : 작은범골 남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도가니혈의 명당(풀무산편 참고)이 있는 이 곳에 임금의 능자리를 잡으려고 명지관이 와서보니 그 자리를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능자리가 아니라 하여 '능안'이라 했다는 설과, 오위장 이경빈의 묘가 있다 하여 능안이라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오고 있는 곳이다.
6 ·25 전까지 오위장 사패지(賜牌地)인 이 곳에 경주 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58 거저울고개 : 숯골벌과 아랫거저울 사이에 있는 고개. 현재 레미콘 공장이 있다.
59 숯고개(炭峴) : 거저울고개 남쪽에 있는 고개.
60 숯골(炭洞) : 숯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 옛 양주군 청송면의 탄동리(炭洞里) 지역이 된다.
61 숯골벌 : 능안 남쪽에 있는 장탄리에서 가장 큰 들. 숯골 마을 앞에 펼쳐져 있다.
62 성주개 : 숯골벌 동쪽에 있는 우묵한 골짜기 이름.
63 우무소 : 풀무산 아래, 한탄강에 있는 소(沼).
64 풀무산(冶山, 仙峰) : 능안 동쪽에 높이 솟은 바위산. 산의 외형이 대장간에 있는 풀무와 같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능안에 있다는 도가니혈(穴) 형세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어떤 풍수가가 능안 뒷산에 올라서서 주위 산세를 보니, 전방에 솟은 이 산은 풀무와 같고, 남쪽의 숯골은 숯가마, 동북쪽 신답리의 쇠춘이(金村)는 쇠빛깔, 북쪽 연천읍 고문리 느즌모루는 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 놓고 망치로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인 모루 형상을 하고 있어 풍수학상으로 쇠를 녹일 수 있는 도가니혈을 찾기 위해 능안 골짜기를 뒤졌으나, 그 위치를 찾지 못했다 한다.
또한 이 곳의 전설에 의하면 이 봉우리에 신선이 자주 내려와 노닐었다 하여 '선봉(仙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6·25 이후 수복이 되어 몇 해가 지난 뒤 이 바위산에서 어떤 사람이 몸을 던져 자살했다 하여 '자살바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65 도리소 : 풀무산 북쪽, 한탄강에 있는 소. 강물이 굽어 돌아 흐르는데 있는 소(沼)라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66 선봉나드리(仙峰渡) : 도리소 서쪽에 있던 나루. 전곡읍 신답리로 통하며, 현재 강변에는 유원지가 조성되어 있다. (신답리편 참고)
* 제 보 자 : 박 운 서(76) 청산면 궁평2리
서 신 하(69) 장탄1리
이 광 우(69) 장탄2리
서 무 혁(64) 장탄1리
박 찬 일(57) 전곡읍 전곡3리
공 근 식(42) 청산면 장탄1리
4. 궁평리(宮坪里)
본래 양주군 청송면의 지역으로, 인조(仁祖)와 귀인조씨(貴人趙氏) 사이의 둘째 아들인 낙선군 이 숙(樂善君 李潚)의 묘와 재궁(齋宮)이 있으므로, 궁촌리(宮村里)라 하였는데,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인 지방 구역정리에 의해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리(坪村里)를 병합하여 궁평리의 "宮"자와 평촌리의 "坪"자를 따서 궁평리라 개칭하여 청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직후 3·8 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83년 대통령령에 의하여 포천군에서 연천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5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되네미고개 : 궁평리와 대전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현재 322번 지방도가 지나간다.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제2진으로 상륙한 왜장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서울을 거쳐 함경도로 북진하던 중 이 고개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면서 부하들에게 이 고을의 이름을 묻자 청송(靑松)땅이라 대답하니 본국에서 자기 누이가 "조선에 가거든 소나무 송(松)자를 주의하라!"는 말이 생각나서 군사를 거두어 이 고개를 '되넘어 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대전리 마을에서는 '막은데미고개'라고도 한다.
2 호조골 : 되네미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작은 마을이 있다.
3 장시미골 : 평촌 서쪽에 있는 골짜기. 현재 군부대가 있다.
4 한자골 : 궁말 서쪽에 있는 골짜기. 크다는 뜻의 '한'과 '산(山)','성(城)','고개(峴)'의 뜻인 '재'의 옛말 '자'에 골짜기가 합하여 이루어진 이름으로, 예전에 장탄리 장수개 마을로 넘어 다니던 '큰 고개가 있는 골짜기' 또는 '큰 산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5 봉화재(烽火峴. 183m) : 한자골 북쪽에 있는 봉우리. 옛날에 봉화를 올렸던 곳으로 전해 내려오나, 현재 아무런 유구도 남아 있지 않다.
6 낙선군 이 숙 묘(樂善君 李潚 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7 궁말(宮村) : 낙선군 묘 아래에 있는 마을. 8·15 광복 전까지도 낙선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들던 재궁(齋宮)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공산 치하 때 이 사당을 헐어 양촌말에 면사무소를 세웠으나 6·25로 소실되었다 한다.
8 찬우물고개(冷井峴) : 궁평국민학교에서 찬우물로 넘어다니던 고개. 정상에 서낭당이 있었다.
9 고막은고개 : 궁말에서 돌겻내로 넘어다니던 고개. 낙선군 묘의 좌청룡이 되는 산부리가 이 곳에서 잘룩하게 생겨 지기(地氣)가 허해 인위적으로 이 곳을 흙으로 쌓아 높이 막았다 하여 붙여진 고개 이름이다.
10 황새봉 : 궁평국민학교 동쪽에 있는 봉우리.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 있던 선대 묘를 옮기기 위해 땅을 파니 곽 안에서 큰 황새가 날라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이 산의 형태가 황새처럼 생겼다 하여 황새봉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다. 6·25 전에는 궁말 주민들이 이 산 정상에서 산제를 올렸다 한다.
11 양촌(陽村) : 황새봉 아래, 사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 하루 종일 해가 잘 드는 양지가 되어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윤씨·김씨·이씨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주택 밀집지역으로 변해 있다.
12 찬우물 : 양촌 서쪽에 있는 골짜기. 찬 샘이 있어 지어진 골짜기 이름이다.
13 돌겻내 : 양촌 북쪽에 있는 마을. 양촌을 기준으로 한다면 백의리에서 내려오는 용수개울의 건너에 마을이 있다 하여 도랑건너의 뜻을 가진 '돌 건너'로 불리워오다 어휘변화로 지금의 '돌겻내'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살던 마을이었다.
14 부군터 : 돌겻내 마을에 있는 터. 6·25 전까지도 세 그루의 큰 참나무가 있어 마을에서 부군나무로 받들며 매년 제사를 올렸던 곳이었으나, 6·25로 없어져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15 비독소 : 한탄강댐 서쪽에 있는 소.
16 한탄강댐 : 아우라지 서쪽, 한탄강에 있는 댐. (전곡읍 신답리 참고)
17 아우라지 : 한탄강과 영평천이 합류되는 곳에 있는 강 이름. (전곡읍 신답리 참고)
18 도리소 : 아우라지에 있는 소(沼). 한탄강과 영평천이 합류하며 물이 크게 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9 뒷골 : 아우라지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중간말의 뒤에 있다 하여 불리워지는 이름이다.
20 중간말 : 뒷골 입구에 있는 마을. 양촌과 아우라지의 중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1 장승거리 : 돌겻내와 중간말 사이에 있는 조그만 언덕 길. 장탄리에 솟아 있는 풀무산이 중간말을 내려다 보며 억누르는 형상이 되어 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일어나자 그 액막이로 아우라지나루로 가는 이 곳에 장승을 세웠다 하여 붙여진 고개 이름이다. 이 곳에 서 있던 장승은 6·25의 와중에 파괴되어 없어졌던 것을 1994년 2월 22일 궁평리 주민들의 발의에 의해 2기의 목장승이 다시 세워졌다.
22 가운데들 : 돌겻내 동쪽에 있는 들.
23 장파골 : 가운데들 동쪽에 있는 골짜기. 고려시대 때에 장이 섰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골짜기 이름이라 한다.
24 용수개울 : 백의리 박석고개 삼거리에서 내려오는 개울.
25 봇들(洑坪) : 양촌 동쪽에 있는 들판. 의요동에서 내려오는 개울에 보를 막아 그 물로 관개하는 논이 있는 벌판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6 의요동(蟻腰洞) : 평촌 남쪽에 있던 마을. 백의리 개미산 옆에 있는 큰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전주 최씨가 12대 째 20여호, 함종 어씨가 12대 째 30여호 살았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다.
27 아랫말 : 의요동 안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마을.
28 새재고개 : 궁평리 의요동과 백의리 나븐돌골의 사이에 있다 하여 '새(間)'와 '재(峴)'가 합하여 '새재'가 되었다가 다시 같은 뜻의 '고개'가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고개 이름이다.
29 피아골 : 새재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피(稷)가 많이 자생하던 골짜기'라는 뜻의 '피밭골'이 변한 이름이다. (왕징면 동중리 "피아골" 참고)
30 배나무골 : 의요동 세 골짜기 중, 가운데 골짜기. 옛날에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6·25 전에는 이 골짜기 입구에 의요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31 무쇠말등 : 의요동 남쪽, 종현산에 딸린 산등. 일제 강점기 때에 이 산의 혈을 끊기 위해 무쇠로 말을 주조하여 이 곳에 묻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2 건너말 : 의요동 안에 있던 마을. 배나무골 마을에서 건너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3 매골 : 건너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산(山)'의 뜻인 '뫼'가 음이 변하여 '매'가 되어 불리워지고 있는 곳으로, 단순히 '산 골짜기'라는 의미를 지닌 곳이다.
34 소경고개 : 궁평리 매골과 대전리 연미골 사이에 있는 고개. 전설에 의하면 조선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어떤 사대부의 묘자리를 잡으러 연천읍 고문리를 지나던 중, 멀리 정남향에 있는 이 곳의 지세를 보니 5대 정승(政丞), 5대 천석(千石)이 나올 명국(名局)이 되어 한탄강을 건너 이 곳에 이르러 쇠를 놓아 보았으나, 끝내 혈(穴)을 찾지 못하여 풍수(風水)의 대가인 자신을 눈 뜬 장님과 같다 하여 이고개를 넘어가며 '소경고개'라 이름지었다 한다. 예전에는 이 고갯마루에 큰 돌서낭당이 있었다.
35 깃대봉(旗峰. 157m) : 소경고개 서쪽에 있는 봉우리. 일제 강점기 때 세부측량을 하기 위해 이 봉우리 정상에 표준기를 꽂았다 하여 지어진 봉우리 이름이다.
36 산안골 : 깃대봉 북쪽에 딸린 골짜기. '소란골'로도 불리워지고 있으나, 단순히 '산(山) + 안(內) + 골(谷)'이 합쳐져 이루어진 산골짜기 이름이다.
37 평촌(坪村) : 양촌 남쪽, 벌판에 있는 마을. 옛 양주군 청송면의 평촌리(坪村里) 지역이 되며, 6·25 전에는 파평 윤씨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 제 보 자 : 이 택 종(89) 청산면 궁평2리
어 연(74) 궁평1리 1반
최 호 복(74)
윤 경 혁(74) 2반
김 영 택(71)
이 규 찬(67) 궁평2리 8반
윤 우 현(64) 궁평1리 2반
5. 백의리(白蟻里)
본래 양주군 청송면의 지역으로, 개미와 닮은 모양의 산이 있으므로, '개미산' 또는 '의요리(蟻腰里)'라 하였는데, 조선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인 지방 구역정리에 의하여 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요리와 능안의 옛 이름인 '백호리(白虎里)'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백의리라 하여 청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 8·15 광복 이후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83년 대통령령에 의하여 포천군에서 연천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4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여우박골 : 박석고개 서남쪽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6·25 전까지도 여우가 많이 살며 새끼를 치는 굴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나븐돌골 : 개미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계곡 중간에 넓은돌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나븐자골'로도 불리운다.
3 새재고개 : 개미산에서 궁평리 의요동의 아랫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궁평리편 참고)
4 개미산(蟻山) : 박석고개 서쪽에 있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둥근 산. 산의 형상이 개미와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주위에 있던 마을도 이 산이 개미의 허리처럼 생겼다 하여 의요동(蟻腰洞)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또한 예전부터 이 산에 인위적인 해를 가하면 마을에 재앙이 일어난다 하여 지금도 신성시하여 보호한다 한다.
5 문쟁이들 : 개미산과 묘옥동 사이에 있는 들.
6 용수개울 : 문쟁이들에서 궁평리로 흐르는 개울.
7 요골모탱이 : 개미산 북쪽에 있는 모퉁이. 요골의 앞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37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모퉁이는 없어지고 곧고 확트인 길로 변해 있다.
8 요골 : 요골모탱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
9 삼밭골 : 요골 안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삼(麻)을 키우던 밭이 있었다 한다.
10 묘옥동(妙玉洞) : 개미산 북쪽에 있는 마을. '해주골'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11 삼거리 : 박석고개 정상에 있는 세 갈래 길. 37번 국도와 322번 지방도가 만나는 곳으로, 두암동·전곡·되네미로 갈라진다.
12 박석고개(薄石峴) : 백의1리와 2리 경계에 있는 고개. 지금부터 약 120년 전, 능안에 살았던 윤대일(尹大一. 호는 烈西)이 사람의 통행이 많은 이 고개에 넓적한 박석을 깔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 뒤부터 능안 마을에 악상(惡喪)이 자주 일어나 깔았던 돌을 모두 뜯어 버렸다 한다.
13 방석소나무자리 : 박석고개 북쪽, 산등성이에 있던 큰 소나무 고목. 6·25 전에는 능안 마을에서 서낭당나무로 받들었으나, 6·25 직후 베어 버렸다 한다.
14 능안고래 : 능안 마을 우묵한 곳에 있는 고래실 논.
15 능안(陵內洞, 陵內, 白虎里) : 뚝박골 북쪽에 있던 마을. 조선 현종 초에(1666년경) 죽재 윤인함의 손자이며 승정원의 승지를 지낸 윤유진(尹惟晋)이 아들 7형제 중 효성이 가장 지극했던 통덕랑(通德郞) 만경(曼卿)과 순경(舜卿, 호는 山中虎士)두 아들에게 통례공(通禮公, 尹師夏) 이하 이 곳에 있는 여러 선영의 시묘를 명하 여 이주하게 하였는데,
이 때를 시작으로 파평 윤씨가 정착하여 집성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두 형제는 현재 두둑말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지나가는 도둑떼의 등쌀에 서쪽 산밑인 지금의 능안으로 옮겨 왔는데, 이 때의 고사(古事)에 따라 두둑말에서 언덕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하여 달릴 '능(凌)'자와 안 '내(內)'자로 땅이름이 지어졌다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윤씨 선대의 큰 묘가 많다 하여 능내동(陵內洞)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백호리(白虎里)라는 이 곳의 지명이 어떠한 유래를 담고 있는지 전해 오지 않고 있지만 6·25 전까지도 '백호능안'이 라는 이름이 보편적으로 씌어 왔다 한다.
16 윗골 : 능안 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
17 깃대봉(160m) : 능안 마을 서쪽에 있는 봉우리. 일제 강점기 초에 토지 세부측량
을 위한 표준기를 꽂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괴목정(槐木亭) : 윤인함 묘 입구에 있던 느티나무 수종의 정자나무. 이 나무는 6 ·25 직후 베어 없어졌다.
19 큰능안 : 윤인함 묘 부근에 있던 마을 이름.
20 죽재선생 동도복성비(竹齋先生 東都復城碑) : 지정문화재편 "윤인함 묘" 참고.
21 형조참판 윤인함 묘(刑曹參判 尹仁涵 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22 아랫고개 : 큰능안에서 뒷재벌로 넘어다니던 고개.
23 구석터 : 윗골 북쪽에 있는 구석진 골짜기. 예전에 있던 건물지에서 지금도 기와편이 출토되는 곳이다.
24 뒷재너머 : 능안에서 뒷재벌로 넘어다니던 고개.
25 칼봉재 : 뒷재너머 서쪽에 있는 바위산으로, 칼과 같은 형상이라 한다.
26 신촌(新村) : 영평천 강안(江岸)에 있는 마을. 6·25 이후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한탄강댐이 건설된 후에 이 일대가 관광지로 변해 있다.
27 뒷재벌 : 신촌 마을 부근에 있는 벌판.
28 누에머리소 : 뒷재벌 동쪽, 영평천에 있는 소(沼). 누에머리산(포천군 창수면 신흥리 소재)의 앞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9 선바위 : 누에머리소 남쪽, 영평천에 서 있는 바위. 윤인함 묘의 좌청룡 끝에 위치한 바위라 전해 온다.
30 형제바위 : 선바위 남쪽, 영평천에 있는 250cm 높이의 바위.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어린 형제가 물놀이를 하던 중 이 바위 밑에 있는 깊은 소에 동생이 빠지자 형이 구하려 하였으나 둘 다 지쳐 이 곳에 빠져 죽었다 하여 이름지어진 애닯은 사연을 간직한 바위이다.
31 곧장뫼 : 능안 마을 동쪽, 영평천으로 곧게 뻗어 나간 산.
32 열수(烈水) : 두둑말 동쪽, 영평천에 있던 여울, 한탄강댐 건설후 수위가 높아져 여울의 옛 모습을 볼 수가 없다.
33 두둑말 : 열수 서쪽, 둔덕에 있던 마을. 지금은 육군 제0사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출장하던 관원(官員)과 나그네들이 이용하던 국영여관(國營旅館)인 원(院)이 있던 곳이라 전해 온다.
34 축동(築 ) : 현재 0사단사령부 정문에서 남쪽의 은판이언덕 사이에 남북으로 줄지어 있던 고목. 예전에 뚝박골 마을에서 풍수지리설에 따라 재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 목적으로 영평천이 내려다 보이는 이 곳에 나무를 심어 수구막이(水口-)를 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이후 축동나무들은 모두 베어 없어지고 지금은 백의리 시가지가 들어서 있다.
35 배회낭(俳徊 -) : 백의리시가지 동쪽, 영평천에 펼쳐진 현무암 절벽. 영평천이 포천군 창수면 고소성리에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크게 돌면서 곡류(曲流)한다 하여 붙여진 낭떠러지 이름이다.
36 은판이 : 백의리시가지 남쪽에 있는 넓은 둔덕으로, 윗은판이와 아래은판이로 나뉜다.
37 정골(鼎谷) : 은판이 남쪽, 영평천으로 뻗어 있는 좁은 골짜기. 예전에 솥을 주조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8 원비냥 : 배회낭 남쪽에서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의 군자동까지 영평천을 따라 펼쳐져 있는 긴 벼랑.
39 뚝박골(杜岩洞) : 축동 서쪽에 있는 마을. 골안에 있는 '뚝바위'에 연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지금부터 약 350년 전에 전주 이씨가 처음 개척하여 6·25 전에는 35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40 골안(谷內) : 뚝박골 남쪽, 종현산까지 있는 큰 골짜기 이름.
41 성주골 : 골안 입구에 있는 골짜기로 '승지골'이라고도 한다.
42 고시래골 : 승지골 옆에 있는 좁은 골짜기. 고사리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하나, 원래 '구석진 골짜기'의 뜻인 '구시래골'이 변한 이름이다. '구시'는 '구석'의 옛말인 '굿'이 변한 것이다.
43 샘골(泉谷) : 도둑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 샘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이 골짜기 안에 두꺼비와 닮은 형상을 한 '두껍바위'가 있다.
44 사라퀴봉 : 승지골 남쪽, 6부능선 지점에 있는 두 개의 큰 바위봉우리.
45 뚝바위(杜岩) : 사라퀴봉 동쪽 산록에 있는 큰 바위.
46 도둑터 : 뚝바위 남쪽에 있는 넓은 공지. 예전에 도둑이 들끓었던 곳이라 한다.
47 수산양지락 : 도둑터 옆에 있는 집터. 골안에서 가장 양지가 바른 곳이 되어 눈이 내려도 빨리 녹는다 한다.
48 어두니골 : 수산양지락 남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까지만 하여도 원시림이 우거져 있었고 음지가 되어 골짜기 안이 항상 어둡고 음침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작은어두니, 큰어두니로 나뉜다.
49 마당바위 : 어두니골 동쪽, 골안개울에 있는 넓은 바위.
50 신야골 : 큰어두니 동쪽에 있는 골짜기.
51 넓은마당 : 신야골 남쪽에 있는 넓은 평지. 6·25 전까지도 화전민이 살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산림으로 우거져 있다.
52 절터 :넓은마당에 있는 절터. 6·25 전까지 밭으로 경작되었던 유지(遺址)에서 소량의 와편이 보였다 하나, 지금은 숲이 우거져 있어 확인이 어려운 곳이 되었다.
53 새알번지 : 넓은마당 남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골안의 막바지가 된다.
* 제 보 자 : 윤 방 혁(76) 청산면 백의1리
윤 경 혁(74) 궁평1리
이 만 재(73) 백의2리
이 근 재(60) 백의1리
첫댓글 청산면이 그 옛날엔 포촌군이란 사실은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