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무엇을 듣거나 배우는 것은 물(水) 위에 쓰는 것과 같고,
젊은이가 무엇을 듣거나 배우는 것은 돌(石) 위에 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노인세대도 노년청년기, 노년중년기, 노년노인기로 나눈다지만
노년의 구분에 관계없이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한계에 부딪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기억력의 퇴조로 노인은 그만큼 새로운 문물(文物)을 익히기가 힐들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면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도전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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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사님! ‘마다바’에 안 오실래요?” ‘마다바’는 성서 속의 ‘메드바’ 이다.
“내가 ‘마다바’에 가서 뭐 할 일이 있나?” 그러자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김 목사의 제안에 솔깃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한 후에 아랍어공부 합니다.”
아랍어 학원 ‘켈시’라는 곳에서 기초아랍어를 익히긴 했지만
영어와 아랍어를 더 익혀야 했기 때문에 ‘아랍어공부’라는 말에 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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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쎄크’(남)와 ‘주마나’(여) 그리고 김 목사와 나, 이렇게
네 명이 ‘Ss센터’에 모여서 윤번제로 설교를 했다.
그런데 나에겐 이게 큰 문제가 되었다.
“난 설교를 할 수 없어요. 아랍어는 물론이고 영어를 못합니다.”
“그냥 짧게 하시면 됩니다.”
“짧게도 못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간단하게 하시면 된다니까요.”
“간단하게도 못한다니까요." 이건 사실이었다.
나는 영어구사도 못한 채 아랍어에 도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김 목사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나는 한국어로 설교 할 테니, 통역 하세요.”
목사가, 그것도 ㅅㄱ사로 나온 사람이 간단하게 하라는 영어설교도 못하다니...!
이렇게 ‘마다바’ 생활이 시작 되었다.
월화수목 4차례 아침 9시부터 예배를 드릴 때 교대로 영어와 아랍어
그리고 한국어로 설교하고 대화하면서, 그리고 오후 4시까지 아랍어 공부를 하거나
현지인들을 만나면서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되었다.
내가 한 주에 한 번 한국어로 설교하면 김 목사는 영어와 아랍어로 통역을 했으며,
‘와쎄크’나 ‘주마나’의 영어 혹은 아랍어 설교는 나를 위해 한국어로 통역했다.
기회가 되면 함께 가정방문을 하기도 하고,
우리를 환대하는 집에 들어가 성경 말씀을 나누며 교회개척을 꿈꿨다.
동시에 ‘마다바’는 얼결에 나의 작은 일터가 되었고,
이라크전쟁 직후엔 김 목사가 모 NGO지부장이 되면서 '왈리드'목사와 함께 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나는 젊은이를 돕는 역할에 만족하며 열심히 왕래했다.
드디어 김 목사의 기도응답에 따른 교회창립에도 송부장과 함께 아주 적은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서툴지만 아랍어와 영어를 섞어 쓰면서 그 교회의 성찬식집례도 두번이나 해 보았고,
시리아에서는 현지가이드의 영어설명을 우리말로 통역해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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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처음으로 파송된 사역자는 적어도 2년 이상 현지언어를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못해도 사역자로 인정한다는 불문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현장언어를 익히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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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레바논을 넘나들면서 오랫동안 요르단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마다바에서 아랍어와 영어를 좀 더 익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김 목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관-
첫댓글 목사님
슈크란 - 감사합니다.
참으로 엉뚱하게도 이런 아랍어 습득은 내 나이 환갑을 넘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대단하세요ㆍ환갑을 넘어서 그곳에 가시다니ㆍ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