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몽골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던 곳이란 인식 때문이다. 말로만 듣던 몽골의 끝없는 초원을 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흥분으로 우리 일행은 모두 들떠 있었다. 김포공항을 떠난지 3시간 여를 지나서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했다. 1992년 6월 30일이다. 햇살이 쨍쨍했지만 10월의 가을 날씨처럼 대기는 서늘하여 기분이 산뜻하고 상쾌했다.
우리가 투숙한 바양골 호텔은 울란바토르의 중심지인 징기스칸 거리 한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데 15층 건물이다. 7시30분에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식당의 큰 홀에서는 중요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음악이 웅장하고 장엄해서 국가를 연주하고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식사는 몽골식 빵과 약간의 고기, 그리고 만두가 나왔다. 이곳에서 만두는 ‘만쉬’로 발음하는데 평안도 사투리의 ‘만티’와 비슷한 발음이어서 만두의 전래과정을 생각하게 했다. 만두 속의 양고기는 그 크기가 매우 작았다. 우리의 송편과 비슷했다.
저녁식사 후 호텔에서 가까운 정부청사와 광장, 시청건물, 국립중앙도서관, 미술전시관, 인쇄소, 상가, 아파트 등을 둘러보았다. 건물들이 모두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큼직큼직 지어있어서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공공건물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이지만 거리에 사람의 인파가 적고 한가해서 우리의 시골 도시를 연상케 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대체로 둥글고 투박한데 우리의 시골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햇빛에 그을려 거무스름해진 모습이 다르다고 할까. 대부분 서구화된 양복차림이고 어쩌다 전통복장의 나이든 노인들을 대할 수 있었다.
울란바토르의 첫날은 해맞이에 대한 기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6시 45분경(썸머타임 실시중, 실제는 5시 45분)에 해가 뜨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빛이어서 급히 색안경을 꺼내 썼지만 색이 연한 것이라 빛을 막아내지 못했다. 먼 구릉의 저쪽에서 붉은 해가 불쑥 솟았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태양의 빛은 강렬했다. 동쪽으로 펼쳐진 끝없는 녹색의 구릉, 그 구릉이 물결치는 푸른 언덕으로 불쑥 솟은 태양, 그 광경의 성스러움 때문에 주위는 너무나 조용했다.
울란바토르에서 남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복드산에는 전쟁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일본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벽화기록물로 남기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울란바토르의 시가지가 한 눈에 보였다. 건물들이 툴강을 따라서 이어지는데 수십 개의 시가지가 강과 나란히 병렬되고 있었다. 현대식 아파트가 많이 눈에 띄어서 이곳이 신흥도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울란바토르 대학엘 방문했지만 시험 중이어서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총장도 시험감독 중이어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이공대학에 잠시 들러 정문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백화점에 들렀다. 3층의 건물인데 사람들이 제법 붐볐다. 특히 1층에는 한국 상품 코너가 있었는데 매우 인기였다. 과자류와 음료수 장난감 종류가 많았다. 자유시장에 들려 수박, 사과 귤을 샀다. 농민들이 스스로 생산한 채소며, 과일, 소시지 등을 좌판에 내놓고 팔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빈곤상이 느껴졌다.
저녁에는 이곳 전통 음악을 감상했다. 국립민속 음악당 격인데 전통악기인 마두금 등의 현악기와 징과 같은 타악기, 그리고 피리 등의 관악기가 등장했다. 춤과 노래가 선보였고, 더러는 우리의 아리랑이나 도라지 타령을 연상케 하는 리듬도 있었다. 어떤 음악은 일본적인 음색으로 여겨졌고, 또 중국풍도 많았다. 대몽골제국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동북아시아 문화 교류의 현장을 발견하게 되는 듯 했다. 춤은 빠르고 단조로운 반복이었고 현대춤의 가미와 더러는 써커스를 방불케 하는 몸동작도 있었다.
알려진 유적으로는 ‘간단사’를 들 수 있다. 몽골은 공산주의가 되면서 사회적 폐해가 컸던 절간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문화유산으로 남겨진 유일한 절간이 울란바트르의 ‘간단사’다. 예전의 규모를 엿볼 수 있을만큼 웅장한 규모였다. 유목민들의 생활의 특성상 큰 건축물이 많지 않은데 이 절간은 궁궐보다 큰 규모였다고 한다. 동서의 대문이 있고 공부를 연마하는 곳과 대웅전, 불탑이 있었다. 그리고 불교대학이 있었다. 시내의 가장 중심부에 있다.
절간으로 들어서니 십여 명의 아이들이 노스님의 감독 아래 경전을 외고 있었다. 붉은 또는 노란 색의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관광객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옆 눈으로 훔쳐보며 불경을 외는 모습이 아직은 관광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듯했다. 대웅전은 타원형인데 수리중이었다.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 잇고 둥근 통을 돌리는 것으로 수도를 겸하는데 그리 진지한 것 같지는 않았다.
박물관으로 보전되고 궁전엘 들렀다. 겨울 궁전이라 불리는 생활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생활실은 2층이고 두 개의 복도가 있었다. 한 복도 양쪽에 두 개씩, 4개의 정전이 있었다. 16개 정도의 방에는 임금의 용상, 왕비의 용상, 집무실, 침실, 접견실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여름 궁전쪽은 공자묘에서 보았던 특징 있는 문루가 세워져 있고 깃봉 2개가 우뚝했다. 대문과 중문, 후문의 문루가 있고, 문루 사이에 몇 개의 방이 있고, 문루 사이의 공간에는 군사들이 숙위할 수 있는 건물과 집무실이 있었다. 큰 문루에는 간단사에서 보았던 종류의 사천왕이 모셔져 있었다.
이곳은 청나라 말에 등극한 임금의 궁전이라고 한다. 원래 몽골의 고도는 하라호름이었지만 원나라 이후 명나라, 청나라를 지내면서 지리멸렬하였기에 이곳은 청나라 말에 세워졌다고 한다. 왕도 추대되었고 건축양식도 라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불교적이라고 한다.
몽골은 중앙 아시아 고원지대 북부에 자리잡은 면적 156만㎢의 나라다. 인구는 246만 정도이고 수도는 울란바토르, 나라의 정식 명칭은 몽골인민공화국이다. 몽골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북서쪽으로 러시아 연방과 접하고, 남동쪽으로는 중국과 경계를 이루며 이전부터 '외몽골'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몽골은 국토 전체가 아주 높은 지대로, 해발 약 1,600m의 고원국가이다. 지형은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국토 중앙부에서 동부에 걸쳐 목축에 알맞은 대초원이 전개되고, 서쪽으로 갈수록 높고 험준하지만 이 지역도 천혜(天惠)의 고원성 초원지대를 이루어 목축이 가능하다.
북서에서 남동부에 걸쳐 몽골알타이, 고비알타이의 두 산맥이 이어지고, 중앙부에 한가이․헨티이산맥이 완만한 높이로 이루어지며, 북부에는 탄울 및 사얀산맥이 형성되어 있다. 북부지역을 관류하는 셀렝가강, 동부지역을 흐르는 오논강,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을 흐르는 툴강, 중앙지대를 흐르는 오르혼강, 서부지역의 자브한강․테스강․호브드강․이데르강 등의 강이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혹한이 계속된다. 강수량은 연간 350mm 안팎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수도인 울란바타르(붉은영웅)는 몽골의 중앙에 위치하고 동서로 크고 넓은 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도시는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인구가 70만 정도이니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된다. 산업은 전기공업, 경공업과 식품 생산 분야에 집중되어있다. 산업과 주거공간, 문화 시설들이 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몽골에 거주하는 민족은 크게 할카 몽골, 카자흐, 부리야트 등 10여가지 소수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할카 몽골은 전 인구의 79%를 차지하고 있으며 바양얼기를 제외한 22개 아이막에 거주하고 있다. 몽골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 민족을 제외하고는 부족들 간에 언어나 문화면에서 서로 구별이 없으며 단지 사투리로 그 지역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몽골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는 이례적으로 민족간의 구별이나 갈등이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우선 몽골 영토가 넓고 각 종족간의 인구수가 적어 주업인 유목을 하는데 큰 갈등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울란바토르 이외의 유적지로는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을 들 수 있다. 서기 1220년에 건설되어, 한 때는 북방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우랄아시아아 각지에서 사절, 전도사, 상인이 모여 번성하였다. 불교의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흰 기둥에 둘러싸인 외벽이 정방형을 이루며 각 면에서 4개의 문으로 구성된 엘데쭈 사원의 유적이 남아 있다.
야마르바야스가란트 사원은 울란바타르에서 360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1727 - 1736년 사이에 지어진 이 불교 사원은 하라호름의 엘덴쭈 사원 다음으로 중요한 사원이다. 만치르 사원은 터브 아이막(중앙)에 있는 보그드산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이곳은 1733년에 20사원과 300명의 스님으로 설립됐다. 만치르 사원은 1932년에 파괴됐고, 근래에 일부 복구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연경관으로는 고비사막을 들 수 있다. 사막이긴 하지만 모래가 아니라 초원이다. 몽골 국토의 30%를 넘는다. 이 지역은 대부분은 초원이어서 야생 동, 식물의 서식지며 가축의 방목지로서 매우 적당하다. 몽골인들은 33 개의 다른 고비가 있다고 생각하며 모래사막은 전체 지역의 3%밖에 안된다.
흑진주라고 알려진 몽고의 가장 크고 깊은 호수인 허브스걸은 북쪽 지방에 자리잡고 있다. 허브스걸 호수는 바이칼 호수의 가장 큰 지류이다. 허브스걸 호수는 해발 1645m에 있으며 겨울에 1월부터 4월까지 얼음에 덮여 있다. 칭기스칸의 태어난 수림지대로 명소로 보호 되고 있다. 수도의 동북쪽에 있다. 허러그 화산은 아르한가이 지방에 있는 휴화산이며 현무암으로 덮여 있다. 이는 국립공원인 테리힌 차간 호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몽골과 티벳에서만 볼 수 있는 야크를 방목하는 사람들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바양 올기는 지구의 지붕이라고 알려진 높은 산과 (몽골 알타이산맥의 타완 보그드 봉우리 4,373m높이 ) 급류, 빙하의 지역이다. 이곳에는 몽골의 소수민족인 카자흐족이 살며 야크와 염소를 기르며 훈련시킨 독수리를 사용하여 사냥도 한다.
몽골의 휴양지로 소문난 테렐지는 울란바토르에서 1시간쯤 떨어진(동남쪽 84km) 툴강 상류에 있다. 수량이 풍부하고 숲이 우거져서 물이 귀한 몽골에서는 휴양지로 이름을 떨칠만 했다. 강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강바닥엔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몽골은 초원지대라 나무가 귀하다. 그래서 징기스칸 때부터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말똥이나 소똥을 땔감으로 사용한다. 나무를 베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나무를 베거나 때거나 할 엄두를 전혀 내지 못한다. 사실 강바닥에 숲을 이루는 나무들을 베어 낸다면 강물은 햇빛에 증발되어 물줄기가 끊길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강물을 보전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는 셈이다.
강줄기가 있다고 해서 그 주변에 나무숲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강의 양안은 그저 풀밭의 구릉일 뿐이고 강물이 흐르는 강바닥에만 버드나무 종류의 활엽수들이 숲을 이룬다. 수량이 풍부해서 낚시를 즐기는 관광객들도 제법 되었다. 저녁 때 생선 요리가 있었는데 이 강에서 잡은 것이라고 했다. 강의 폭이 넓어서 늪지대가 형성되고 있는데 물이 범람했을 때는 강이 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숲지대가 된다. 오래된 고목들이 자라고 있어서 광릉의 수목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 강은 하이텔 산맥에서 흐르는 것인데 울란바토르 시가지를 지나서 멀리 바이칼 호수에 까지 이르는 것으로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숲은 강줄기가 형성되는 계곡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 옆의 구릉은 그저 풀들만이 자라는 초원이다. 산의 구릉으로 약간의 숲이 보이긴 했는데 말갈기 털처럼 부분적으로 자라는 침엽수로 강바닥에 자라는 거대한 나무들과는 그 종류가 달랐다.
해발 1700m의 고산지라 아주 시원했다. 이곳의 구릉지에서 말을 탔다. 여행객들을 위해서 훈련된 말들이라 고분고분했다. 말들은 일정한 풀밭 언덕을 천천히 줄을 지어 달렸다. 말의 고삐를 잡은 목동들이 말을 몰았다. 처음 타 보는 말이라 떨어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말안장에 지나치게 밀착하여 매달리다 보니 나중에 엉덩이의 허물이 벗겨져 쓰리고 아팠다. 몽골의 말이 순하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승마가 처음인 우리 일행 모두가 낙오 없이 말을 탈 수 있었다. 2시간 정도 지나자 마부의 도움 없이도 고삐를 잡고 말을 재촉할 수 있었다. 푸른 언덕을 말을 타고 달리는 체험은 특별했다.
이곳의 초원은 야생의 꽃들이 일제히 피어 있어서 풀밭이라기 보다 꽃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정도였다. 몽골은 기후가 추워서 5월이나 되어야 봄이 온다. 그리고 9월이면 벌써 눈발이 날리는 겨울이 되니 꽃이 필 기회가 쉽지 않다. 그래서 6월말이나 7월초가 야생화의 만개시기다. 모든 야생화들이 이 때를 놓지면 안되기 때문에 일제히 피는 것이다. 그리고 힘들게 피는 꽃이어서 그런건지 그 색채가 산뜻하고 찬란했다. 빨강, 노랑, 분홍, 파랑, 흰색 등 갖가지 꽃들의 찬란함은 지상의 낙원을 방불케 한다. 재미있는 일은 이 찬란한 야생화 중에서 가장 개성이 없고 눈에 띄지 않는 꽃이 에델바이즈란 점이다. 회색 꽃대에 희끄므레한 색상이 너무나 멋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설악산에서만 핀다는 귀한 종의 에델바이즈가 이곳에서는 가장 천덕꾸러기다. 낮은 구릉의 들판 가득 핀 에델바이즈는 우리의 들국화보다도 흔하고 생기가 없다.
생명의 귀함이란 이렇게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기호에 맞추어 귀함의 순번을 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기호일 뿐, 꽃 자체는 모두 스스로 귀할 뿐이다. 부처께서 말씀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생명 하나하나가 가장 소중한 존재일 뿐이다. 생명의 귀함에 있어서 나와 타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동물과 식물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 우주의 중심이고, 가장 존귀하며, 소중한 것이다.
테렐지에서 유목민들의 가장 큰 행사의 하나가 양을 도축하는 일이었다. 관광객에게 구경시키고 있었는데, 목동이 양의 머리를 쓰다듬고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어느 순간에 숨통을 끊어 놓고 말았다. 양은 평온한 모습 그대로 죽어 있었다. 양을 고통 없이 죽인다는 유목민들의 삶이 모습을 소개한 것이지만 왠지 고통 없이 죽는 양이 너무나 불쌍했다.
생명이란 모두 귀한 것이다. 그런 값진 생명이 순식간에 끊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더 없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귀한 생명인 만큼 죽음에 이르러서는 거기에 어울리는 고통이 함께해야 한다는 느낌이다. 사람의 손놀림이 속임수가 되어 웃으며 죽는 양이란 얼마나 불쌍한가?
테렐지를 떠나 절간 유적지가 있는 운드로 도브를 향해 떠났다. 울란바토르에서 1시간 20분쯤의 거리였다. 복드산 뒤편인 셈인데 만취사 절간 유적이 있었다. 운드르도브는 이곳 몽골에서는 큰 도시에 속하는데 오아시스 도시로서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도심지 중간에 물이 지나가는 수로를 볼 수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구릉과 계곡의 초원에 수십 마리 또는 수 백 마리 떼를 지어 풀을 뜯는 소, 말, 양떼들을 볼 수 있었다. 전형적 시골 풍경이었다. 목초지대라 그만큼 많은 무리의 짐승들이 떼를 지어 먹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짐승들은 살이 찌고 윤기가 돌았다.
만취사는 예전엔 큰절간이었다는데 돌무더기의 유적으로 보아 그 규모를 짐작할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지은 작은 건물이다. 한 채의 절간인데 2층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었다. 중도 공무원이라 나라에서 임명한다. 이제 부임 중이어서 임시 관리인이 관리했다. 절간도 관광객을 의해 새롭게 건축되고 있었다.
몽골의 절간은 공산 정권 70년 동안 철저히 파괴되었다. 종교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것이지만 그동안 불교의 사회적 폐단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근래에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유적들의 일부가 복원되고 있었다. 암자가 바위 언덕 뒤로 3개가 있었는데 제일 밑에는 있는 암자의 벽에는 서너 명의 보살상이 그려져 있고 중간에는 관음보살상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래의 석불은 관음보살이 합장한 손의 모습이 여성의 국부를 상징했는데 그곳에 관광객들이 쏘아 올린 정액의 흔적이 무수했다. 출산을 비는 의식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산신의 모습도 여자의 모습이다. 흰수염과 흰머리 흰옷과 지팡이를 든 모습이 우리의 산신과 같지만 다만 여성이란 점이 달랐다. 그리고 그 위에 두 개의 나무 사이에 흰색 푸른색 의 네모 모양의 깃발을 매달려 있었는데 우리의 서낭당 개념이었다.
이곳의 나무는 모두 삼나무로 솔방울이 유난히 까맸다. 까마귀와 까치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았다. 산언덕에는 흰 색, 노란 색의 꽃이 만발하고 간혹 나리꽃도 보였다. 계곡의 나리는 노란 색인데 구릉지만은 빨간 색이다. 개울 옆에는 푸른색의 난초꽃도 있었다. 늪지대에는 짚신꽃이 노랗게 피었다.
이곳 들판에서 라마단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의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제각기 수 백 마리의 소와 말과 양떼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짐승들이 서로 엉키지 않게 말목을 박고 줄을 드리고 경계를 만들지만 워낙 많은 무리들이라 서로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관광객의 눈에는 그렇지만 짐승의 주인들은 자기 가축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모두 특별한 표식을 했다고 한다.
라마단 축제는 회교인들의 특별한 잔치다. 원래는 알라신에게 기도하는 금식기간이지만 지역에 따라 축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울란바토르에서는 몽골의 전통적인 경기인, 말타기, 활쏘기, 씨름 등의 경기가 벌어진다고 한다. 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멀리서부터 가축을 이끌고 몰려드는 것이다. 광막한 초원에서 가축들과 더불어 외롭게 살던 사람들이 이런 특별한 기회에 함께 모여 힘과 재주를 겨루는 동안 국민적 화합을 도모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로 어울려 사는 모습의 하나라고 할까?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은 몇 년 만에 한 번씩 전쟁을 치르므로 해서 인구의 3분의 1정도를 줄인다고 한다. 그렇게 인구를 줄이지 않으면 양식을 감당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모두가 함께 굶어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 살아가기 위한 전쟁인 셈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그리스의 올림푸스 경기처럼 운동경기를 통하여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도모하여 함께 승리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삶의 가치란 이런 축제속에서 지속되어야 바람직하지 않을 것인가? (*)
첫댓글 오랜만에 읽는 기행문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