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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디도서 제 1 강 메시지_아산UBF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책망하게 하라
말씀 / 디도서 1:1~16
요절 / 디도서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는 사도바울이 크레테 교회를 섬기는 디도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크레테 교회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해결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디도를 크레테 교회에 남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크레테 교회에서 주의 양들을 어떻게 돌보며 주의 교회를 섬겨야 할지 서신을 통하여 권면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숙한 주의 제자들을 키우고 모두가 믿음과 내면이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1.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1~4)
사도 바울은 편지 첫머리에 중요한 사실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1~3절까지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핵심적 방법이 ‘전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는 우리가 떠올리는 ‘노방전도’ 의미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는 ‘말씀 선포’입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순종하여 나가 백성들에게 엄중하게 선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하지 않고 싶어서 하지 않는 것일 수 없습니다. 말씀 선포는 명령에 순종하여 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전도, 말씀 선포 명령에 절대 순종하여야 하는 이유를 서신 첫머리에 명확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말씀 선포 명령에 순종하여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예수 그리스도 믿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의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경건하고 거룩하여 지는 변화의 역사가 말씀 선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죄와 사망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이 사망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소망의 역사도 전도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택하신 자들의 구원과, 거룩한 백성으로의 성화와 하나님 나라 소망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전도’, ‘말씀 선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말씀 선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중요한 ‘말씀 선포’,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자신을 택하시고 맡기셨음을 영접하고 확신하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디도가 같은 믿음을 따라 참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구원 이르는 믿음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기초한 삶의 변화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 사도 바울과 같으며,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성화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거룩한 성도가 되도록 하는 말씀 선포에 부르심 입은 것이 사도 바울과 디도가 같습니다.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도 말씀 선포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살면서 인격과 내면이 거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주의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많은 인생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를 알아 거룩한 삶을 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말씀 전파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A-men!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로마에 1차 투옥되었다가 석방됩니다. 이 기간 동안 복음을 전파하고 여러 교회를 돌아보았습니다.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스페인에도 갔을 것으로 보며, 크레테섬에도 방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크레테섬을 떠날 때 디도를 남겨두었습니다. 크레테 교회에 만연하여 있는 심각한 문제를 디도로 하여금 해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크레테 교회에 장로와 감독을 세우라고 합니다. 크레테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해법이 장로들을 세우는 것임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로’는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어른’이자 ‘리더’를 말합니다. 이어서 언급하는 ‘감독’은 직분을 칭하는 것으로 봅니다. 사도 바울은 크레테 교회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것이 분명한 리더를 세우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장로와 감독은 세상 조직에서 권세가 있는 높은 자리로 여겨집니다. 교회에서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서의 하나의 직분입니다. 직분에는 역할이 있는데, 진리의 말씀을 견고하게 지켜서 성도들에 파고드는 악한 세력을 분별하고 제거하며 믿음 어린 형제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양육하는 역할입니다. 이런 직분을 잘 감당하는 올바른 지도자가 있어야 교회는 거짓사상과 복음을 훼방하는 것들을 파하고 주의 양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누구나 감당하지는 못하므로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을 장로와 감독으로 세워야 하는지 자격요건을 알려 줍니다.
6절을 보십시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우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보편적인 시각으로 볼 때, 두드러지는 인격과 성품의 결함이 없어야 합니다. 인격적 결함이란 과도한 욕심이 드러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거짓말 일삼는 것도 해당됩니다. 말을 지나치게 경솔하게 하고,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며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수준 낮은 사람으로 보는 오만함도 해당됩니다. 열등감이 깊고 마음에 품은 반발심이 자주 드러나며 매사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일삼는 사람, 일상적으로 약속 지키지 않는 사람, 일을 맡았을 때, 대충하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불성실이 일상화 된 사람도 해당됩니다. 이런 사람을 교회가 감당해줄 수는 있지만, 리더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리더역할에 부적합 합니다. 당시는 일부다처가 사회적으로 허용되거나, 잦은 이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리더로 직분을 수행하려면 이혼경력이 없고 성경적인 일부일처 가정을 이룬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소유처럼 여겨졌었던 만큼 부모의 책임도 컸습니다. 자녀가 방탕하고 불순종하도록 방치하여 사회적으로 비난 받는 자녀가 있다면 그런 아버지 역시 교회의 리더로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장로와 거의 같지만 ‘감독’은 구체적인 직무를 수행합니다. 따라서 사무처리에 관련한 덕목을 강조합니다.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금전관리에서 신뢰가 있고 사무처리가 공정한 사람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음악 좋아한다고 해서 쓰지도 않을 악기를 과도하게 구입한다든지, 자기와 잘 맞는 사람을 위해서는 물질지원을 풍성하게 해주고 자기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재정집행에서 과도한 엄격함을 보이는 것은 청지기 직분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비난과 책망의 소지가 발생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은 공정하게 일한다는 자부심 있어서 문제를 더 키웁니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교회 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줄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관용성, 수용성이 있어서 다른 의견에 대하여 대화하고 협의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MZ세대가 가장 싫어하는 기성세대의 모습도 ‘어른 인 척하며 뭐든 가르치려 드는 사람’ ‘아는 것이 없으면서 마치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 인 척 하는 사람’입니다. 진심 가지고 들어줄 줄 알고 좋은 의견이면 받아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UBF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잘 수습한 훌륭한 목자님들의 특징은 잘 들어주는 분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학사 목자들에게 불려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책망까지 듣고도 ‘알겠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하기를 여러 번 하였습니다. 이런 분들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서 우리 모임을 견고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좋은 의견이든, 건설적인 비판이든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기를 반복하면 교회는 갖가지 갈등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화내는 사람도 부적합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여기의 ‘폭력’에는 물리적인 폭력 뿐 아니라 집요한 ‘가스라이팅’으로 영혼을 억압하는 ‘인격 폭력’도 포함 합니다. 이런 사람에 의하여 당장은 사람들이 눌러질지는 몰라도 반드시 때가 되면 문제가 터집니다. 주먹질이든 ‘집요한 가스라이팅’을 동원하는 인격폭력이든 리더는 폭력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양들에게 비난당하고 비판받고 반발 당하면서도 잘 참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목자의 길입니다. 술, 도박, 포르노에 집착하는 것은 실생활과 인격, 영혼, 자녀들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문제도 없어야 합니다. 물질과 명예에 과한 탐욕이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득을 취려는 사람도 ‘감독’으로는 부적합합니다. 호의를 갚을 길 없는 나그네조차 잘 대접하는 섬김의 성품,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줄 줄 하는 선행, 좋은 분별력과 악을 미워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며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절제가 있는 것은 직분에 합당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다른 사람을 돕는 직분을 감당하는 지도자는 자신이 먼저 예수님 말씀과 교훈대로 살아야 합니다.
크레테 교회 거짓교사들의 문제는 행함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종이었다.’ ‘우리도 섬겨야 한다’ 가르치면서 본인들은 섬기지 않았고 본인들은 다른 영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의 말씀의 가르침을 지키려면 생각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다른 영혼의 존재를 낮추어보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낮추어보는 말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는 생각을 감지하지 못하고 이를 회개하지 않으므로, ‘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낮추어 보느냐?’ 지적 받아도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보는 시각, 남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보는 개념이 마음의 기저에 있어서 자기의 말이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는 것으로 나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학생은 아직 괜찮아요’라는 말을 했을 때, 말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학.생.은. 아.직. 괜.찮.아.요 무슨 나쁜 표현이나 무시하는 표현을 한 것입니까? 그런데, 마음에 학생들은 어리다. 학생들은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관념을 기저에 깔은 상태에서 이 말을 하면 달라집니다. 존중하는 마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달되는 느낌이 다릅니다. 누가 ‘목자님이 나를 무시한다’고 했을 때, 목자는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라고 하였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다’ ‘나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말씀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생각부터 회개하고 변화되었어야 말과 행함이 뒤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가르치는 만큼 행함과 실천이 있어야 하고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양들은 목자를 신뢰하고 그의 교훈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목자에게 영적 권위를 더하여 주십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
6~9절에 기록한 바와 같은 사람은 리더로 세워선 안 된다. 장로, 감독으로 안 된다 한 것은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었거나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왜 생기는 것입니까? 11절 말씀에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모내기를 통하여 벼만 심었는데, 막상 논에 가보면 다른 것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라지가 함께 자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논에는 ‘피’라는 것이 함께 자랍니다. 성경에서 가라지는 마귀가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위한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자기 이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 그룹 내에도 돈을 사랑하는 유다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크레테 교회의 할례파는 유대율법주의신자들을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써 크리스천이 된 사람중에 예수 믿었어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영접했어도 안식일 율법은 중요하다’. ‘예수 믿었어도 이거는 해야 한다 저것도 해야 한다’ 말하였는데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자기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거론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생기는 유익 때문입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절에는 그들의 입을 막으라고 하였는데, 13절에는 엄히 꾸짖으라고 합니다. 크레테 교회를 잘 돕기 위해서 디도는 거짓교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책망하여야 합니다. 싸우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갈등하고 낯붉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엄하게 책망하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여야 합니다. 감정을 개입시키는 않되 복음을 흐리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양들의 영혼을 지킬 수 있습니다. 크레테 교회에는 유대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혼합되어 양들의 영혼을 미혹하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상으로부터 양들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죄를 꾸짖지 않고 악을 책망하지 않으면 양과 자녀는 문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죄를 책망하지 않는 것은 싸우는 것이 부담되어서 피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인간적인 호불호 때문에 책망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책망할 수 있어야 하며, 책망할 때는 개인의 호불호에 영향받지 말아야 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고 자유롭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와 소화되고 배설 되는 것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먹으면 사람이 부정해진다고 하였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밖에서 손에 죄가 붙어 있다가 입으로 들어가 그를 부정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손을 씻는 것이 위생상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돼지고기 먹거나 손 씻지 않는다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다른 형제들에게 까다로운 율법조항을 제시하면서 자신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말만 잘할 뿐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금지 조항을 자꾸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행위를 자랑하게 만들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분명하게 분별하고 책망하여 죄를 제거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전도’란 (왕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여 행하는) ‘말씀 선포’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 - ‘말씀 선포’를 통하여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경건한 생활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이루시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가 하여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은 순종하여 백성들에게 나아가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전하는 바와 일치하는 삶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죄를 죄라고 책망하고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언제 역사하십니까? “자기 때에” 역사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선포하면 즉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말씀을 선포하여야 생명을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머지않아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선포한 직후일지, 말씀을 선포하고 난 지 한 참 후일지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전도자는 두 사람 친구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 둘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 받은 두 사람은 전도자가 소천 2년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는 줄 굳게 믿고 말씀 선포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에 따라 가장 합당한 때에 택하신 자들을 세우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택하신 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따라 경건한 생활을 해나가는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말씀 선포를 해나갈 때, 믿은 자들이 영생을 소망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삶과 교회가 주께 드려지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전도’를 감당하며 우리는 행함을 보이고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싸우는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선포하는 일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 따라 살고 마음과 말과 생활에서 주의 교훈을 따르는 일을 해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죄에 대하여 분명히 지적하고 책망할 줄 아는 분별력 있는 목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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