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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불교조각의 개요
Ⅰ. 불상(佛像)의 뜻
절에는 여러 부처님을 모셔놓은 갖가지 집(佛殿)들이 있다. 이 부처님들을 우리는 통칭해서 불상(佛像)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상들은 나름대로 각기 다른 교리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불격(佛格) 또는 덕이라 한다. 불격은 각 상마다 모두 있게 마련이고 또 그 격을 달리한다. 이 격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불상(佛像), 보살상(菩薩像), 조사상(祖師像), 神將像)이다.
불상은 불교의 궁극 목표이며 최고의 경지인 깨달은 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보살상은 깨닫기는 했지만 아직 중생제도를 위해 부처님 되기를 잠시 보류하고 있는 분, 조사상은 부처님의 직제자와 지금까지의 모든 덕 높은 스님들을 통털어 부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각기 격을 달리하는 4종류의 불상이 있는 셈인데 이렇게 불상이라는 불격이 따로 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해서 모든 불교의 상을 그냥 불상이라 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상들을 통털어 말할 때는 불교상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불상은 넓은 뜻으로 불교상 전체를 뜻하는 것도 사실이어서 구태여 좁은 뜻으로의 부처님상만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쨌든 이러한 불교의 모든 상(相)들을 환조든 부조든 어떤 방법으로든지 조각으로 만들면 바로 불교조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림으로 그리지 않고 조각으로 형상화된 불교의 상을 우리는 불교상 또는 불상이라하며 이것이 바로 불교조각이다.
Ⅱ. 불상의 기원
불상의 출현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卷28, pp, 705-6)등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석가부처님이 기원정사(祇園精舍=Jetavana)에서 사부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불법을 믿게하기 위해서 아무도 몰래 33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Maya)부인에게 설법하였다 한다. (昇三十三天爲母說法傳說) 지상에서 부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코삼비국(Kausambi=橋賞彌)의 국왕이던 우진왕(Udayana=優眞王=오타연나)과 코살라국(Kosals=拘薩羅, 수도는 Sravasti=舍衛城)의 파사익왕(Prastnaji=波斯匿王)은 병까지 들게되어 마침내 우진왕은 전단나무로, 파사익왕은 자마금(紫磨金)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 이미 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은 대승불교 경전에서 보편적으로 언급되어지는 불상기원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적 불상기원은 남전(南傳)계통의 증지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어서, 오늘날 이것은 후세에 첨가된 내용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서력기원경까지는 불상이 조성된 물적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개 서력기원을 전후한 때부터 불상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약 500여년간은 불상이 전혀 조성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 동안은 대개 탑(사리)에 대한 예배나 보리수, 불족적(佛足跡)같은 추상적이고 도형적인 것을 예배하였다.
특히 불교의 교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시청각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탑의 문이나 난간, 사원의 벽등에 부처님의 전생설화나 일대기를 조각이나 그림으로 나타낸 것은 초기 불교미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그림이나 조각은 부처님의 위대성을 점차 돋보이게 하였으므로 이 자체가 대단한 위신력을 가지는 것으로 변모되어 후에는 예배의 대상으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예배의 주체인 부처님의 형상에 대한 사모심이 자연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그 형상을 이러한 조각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단독의 불상을 만들어 예배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불교 교세의 확대로 인한 일반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의 절대적인 요구와 이를 f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교계(敎界)의 정세가 그대로 작용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다시말해 예배대상으로서의 불상은 교훈적인 교재로서의 형상이 불교도들을 크게 감동시켰기 때문에 점차 숭배대상으로 부각되었다는 말이다.
불상의 발생지역에 대하여는 구구한 설이 많지만, 간다라지방과 마튜라지방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점차 주위로 번져 갔다는 설이 최근 유력해지고 있다. 간다라(健陀羅=Gandhara)지방은 인도의 서북부지역으로서 서쪽과 동쪽의 여러 곳을 연결시켜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문화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서력기원 전후에 희랍신앙의 영향을 받은 희랍풍의 불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마튜라(摩偸羅=Mathura)지방은 델리 동남쪽 약 140km 쯤 떨어진 옛 도시인데 중인도지방의 서북쪽에 위치한 역시 교통의 요지이자 문화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인도 재래신앙의 영향을 받아 불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설이 있지만 어쨌든 불상은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교재적인 형상의 위신력 때문에 점차 예배장으로 발전한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희랍적인 또는 인도 재래적인 신앙이나 기법의 영향이 작용해서 이들 지역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제2절 종류
Ⅰ. 재료
불상은 금, 은, 동, 돌, 흙같은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 진다. 물론 불경에도 있다시피 초기에는 금과 전단향나무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수 많은 불상이 조성되면서 부터는 다양한 재료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재료가 다르면 만드는 기법도 달라지게 된다. 나무나 돌은 조각(彫刻)하고, 금 내지 기타 금속은 주조(鑄造)하며, 흙은 빚어(塑) 만든다.
(1) 금불상(金佛像)
불상을 만드는 의궤인 32상(相) 80종호(種好)에 부처님은 금빛이 나야한다는 것은 불상이 금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원칙이 일찍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파사익왕이 만든 최초의 불상이 바로 자마금이었다는 것은 이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불상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순금상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신라시대의 황복사탑순금불상 2구 같은 것은 대표적인 걸작들이다.
(2) 은불상(銀佛像)
은불상 역시 그렇게 많이 조성되지는 않았다. 신라나 고려시대의 작은 금속상 가운데 은상이 더러 있지만 걸작품에 속하는 것은 별로 없다.
(3) 금동불상(金銅佛像)
희귀한 순금상을 만들 수 없는 경우, 많이 생산되던 구리에 도금(鍍金)을 한 금동상을 주조하였기 때문에 금동상은 유난히 많다. 대부분의 호신불(護身佛)은 금동상이며 거대한 상도 금동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4) 철불상(鐵佛像)
철불은 금동상 만큼 많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말인 9세기 중엽경부터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다. 가령 보림사철불(寶林寺鐵佛), 실상사철불(實相寺鐵佛), 도피안사철불(到彼岸寺鐵佛)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걸작들이 모두 철불들이며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어 광주철불같은 많은 철불들이 조성되었다.
(5) 나무불상(木佛像)
주로 향나무로 만들었는데 가령 우진왕이 최초로 만든 우두전단으로 된 불상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로 많이 만들었다. 아마도 나무로 만든 불상은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많이 조성되었던 것 같다.
(6) 돌불상(石佛像)
돌불상은 매우 일째부터 만들어졌다. 인도에서는 탑의 문이나 난간 또는 석굴의 벽에 부조로 새긴 것이 초기부터 나타나는데 이런 전통이 처음부터 돌로 입체조각을 만들게 했다. 인도에서는 붉은 사암제불상이 특징적인 것이고 중국에서는 흰 대리석 불상이 대표적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양질의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다.
이 외에 옥(玉)으로도 불상을 만들었는데 옥 역시 돌의 일종이므로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7) 소조불상(塑造佛像)
흙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풍부한 재료이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불상을 흙으로 많이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흙으로 불상을 많이 만들었는데 신라의 양지(良志)가 만든 작품들은 가장 유명했다.
순수한 소조상은 나무같은 것으로 불형상 모양의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삼베같은 천이 섞인 진흙을 빚어 불상을 만든 후 그 위에 고운 흙을 바르고 다시 베같은 것에다 황금으로 도금하는 것이다.
전상(塼像)도 있는데 흙으로 빚은 후 이것을 불에 구워낸 것으로 이 역시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다. 흙으로 된 상을 「泥像」 또는 「塑像」등으로 불렀다.
(8) 도자불상(陶磁佛像)
흙으로 만든 전상과 비슷하지만 도자로 만든 불상도 상당히 있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청자로 만든 불상이 유행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가끔 백자로도 불상을 만들었다.
(9) 협저상(挾紵像)
흔히 「漆像」으로 알려진 불상인데 종이나 천같은 것으로 불상을 만든 후 옻칠을 입히는 것인데 보통 「乾漆佛像」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 외에도 유리나 파리 같은 7보로 된 불상은 물론 일체의 재료로 다양하게 불상을 만들었다.
Ⅱ. 형태
불상을 크기(丈量)에 따라 분류하는 것으로 흔히 장육상(丈六像)이니 등신상(等身像)같은 것으로 널리 쓰여지고 있다.
(1) 장육상(長育像)
몸의 길이가 1장 6척(一丈六尺) 즉 16척의 불상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들의 신장(身長)이 8척이었는데 부처님은 사람보다 배나 크기 때문에 16척의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좌상(坐像)일 경우는 7내지 8척이면 장육상으로 본다. 신라 황룡사금동장육상이나 범림사장육상등이 가장 유명하다.
(2) 반장육상(半長育像)
장육상의 반인 8척의 불상을 말하는데 좌상일 경우는 4,5척의 크기이다.
(3) 등신상(等身像)
불상을 만든 사람의 키와 같은 불상을 등신상이라고 말한다. 특히 불상을 만들고자 발원한 원주(願主)의 키 높이와 같은 크기로 불상을 만들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보통 5척 쯤의 높이로 만들고 있는데 감산사아이타불상(甘山寺阿彌陀佛像)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4) 1걸수반불상(一傑手半佛像)
1걸수는 손 한 뼘 길이로 얼굴길이와 같은 것인데 1걸수반은 1주로서 중국척수로는 1척 3촌(1尺3寸)으로 번역되고 있다(陀羅尼集經第四). 대개 12cm 정도의 불상을 말한다.
(5) 대불(大佛)
장육불보다 큰 불상으로 장육불의 배나 그 10배인 160척불상, 그 반인 8장(丈)등 다양한 크기의 불상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불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괴산미륵당리의 불상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Ⅲ. 교리
모든 불교상의 격(格)에 따라 분류하는 것인데 크게 불상, 보살상, 나한(조사)상, 신상 등으로 나눌 수 있고 그에 따라 각기 많은 상들이 있다.
(1) 불상
불상은 깨달은 이(覺者)로서의 격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다 부처(覺者)가 될 수 있고 어느 때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수 많은 부처님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면 수 많은 불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53불, 1000불, 3000불, 10,000불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 어느 시대건 즐겨 만들어진 불상은 흔한 편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불(釋迦佛),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불(藥師佛), 미륵불(彌勒佛) 등과 53불, 1,000불, 3,000불, 10,000불 같은 다불(多佛), 또는 4방불(四方佛), 5방불(五方佛) 같은 방위불(方位佛) 등도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불상들만 언급하고자 한다.
① 석가불상(釋迦佛像)
알다시피 석가불은 불교를 창시한 교주이다. 그는 기원전 6-5세기경 인도의 카비라국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인생의 무상을 절감한 나머지 출가(出家)하여 6년간의 고행을 거친 후 진리를 깨닫고 수 십년 동안이나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그의 교리를 열심히 전파한 역사적 인물로서, 그리스도교를 창시한 예수와 함께 가장 위대한 성자(聖者)의 한 사람으로 교주인 석가불은 그가 돌아간 수 세기 후에는 완전히 신격화되는데 이때 최초로 석가불을 형상화해서 예배하였다. 이것이 불상의 기원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 후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와서 다양한 부처님이 예배되고 불상 또한 다양하게 만들어지지만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주인 석가불이 가장 숭앙받았으며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이 석가불상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인도에도 초기의 불상은 거의가 석가불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시대나 석가불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룡사 장육불상은 바로 석가불상이며 석굴암의 본존불도 아미타불이라는 설이 새로 주장되고 있지만 세상에는 석가불상으로 더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석가불은 초기에는 서 있는 입상일 경우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의 수인(手印)을 지으며, 좌상일 경우에는 선정인(禪定印)의 수인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특히 조선시대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는 것이 거의 통례로 되었다.
협시보살상은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과 普賢菩薩像)이 좌우에 배치되거나 관음보살상과 허공장보살상, 관음과 미륵보살상도 배치될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불교사원이 대웅전(大雄殿)에 주불(主佛)로 봉안되거나 응진전(應眞殿), 나한전(羅漢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등에도 주불로 봉안되었다.
② 비로자나불상(毘盧舍那佛像)
현상세계에 나타난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님이 비로자나 부처님이다. 그래서 진신(眞身) 또는 법신(法身)이라 말하고 있다. 비로자나는 범어로 Vairacana 인데 한문으로는 「遍一切處, 光明遍照, 遍照」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즉 불의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대광명전(大光明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불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불전이 클 경우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불이 협시하는 이른바 삼신불(三身佛)로 화엄종에서 주예배불로 존숭받아 크게 유행을 본 불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가 시작되면서부터 비로자나불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의 화엄종에서는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시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9세기 중엽이 되어야 서서히 그 지위를 회복했던 것 같다. 특히 9세기 중엽부터 약 반 세기 정도는 비로자나불상이 가장 인기있던 불상이었던 것 같다. 당대의 걸작들은 물론 가장 많이 만들어진 불상이 바로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이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주먹을 가슴에서 아래위로 포개고 밑의 왼손 검지를 오른손 주먹이 감싼 모양(智印)이다. 이런 지권인은 고려시대 후기부터는 주먹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拳印)이 유행되어 신라시대의 지권인의 손 모양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만다.
신라시대의 보림사 비로자나철불, 동화사 비로자나석불, 도피안사 철불, 축서사 비로자나석불 등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무수히 있다.
③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남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이란 유명한 불경 구절처럼 아미타불상은 관음보살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던 불상이었다.
아미타불은 영원한 수명(無量壽=Amitayus)과 무한한 광명(無量光=Amitabha)을 보장해 주는 즉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영원한 부처님이라는 뜻인데 서방극락(西方極樂)을 주재하면서 ant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분이다. 이 부처님은 어떤 중생이거나 착한 일을 하고 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부르면 서방극락의 아름다운 정토(淨土)로 맞아 가는 그런 부처님이다. 보다 평안한 삶과 안락한 정토세계를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보장해주는 부처님이어서 특히 하층민들에게는 구세주로 절대시 되었다.
이 부처님에 대한 설명은 이른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는 경전(無量壽經, 阿彌陀經, 觀無量壽經)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극동에서는 이 부처님만을 특별히 신봉하는 정토종이라는 종파까지 생기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삼국통일시대부터 화엄종, 법상종 등의 많은 종파에서 아미타불을 보편적으로 신앙하는 경향이 풍미하게 되어 인기절정의 부처님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상으로 가장 많이 조형화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백률사의 소조아미타불상, 중생사의 소조아미타불상 같은 것은 신라 아미타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며, 감산사 아미타석불, 굴불사 석주 아미타불상,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상, 황복사 탑순금아미타불상 같은 것은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걸작들이라 하겠다.
아미타불의 형식적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수인(手印)이다. 보통 아미타정인(定印)과 9품인 (九品印)을 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러한 수인은 통일신라불상(비암사비상)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8세기 중엽부터는 완전히 정착되는 것 같다.
좌우협시보살은 관음, 세지(勢至)보살이 가장 보편적이며 관음과 지장(地藏) 또는 8대보살(八大菩薩)도 고려시대부터는 즐겨 배치되는 것 같다.
이 불상이 봉안되는 불전을 고려시대부터는 무량수전(無量壽殿=浮石寺 등), 극락적(極樂殿=泉隱寺, 無爲寺 등), 아미타전(阿彌陀殿=通度寺 등) 등으로 불렀다.
④약사불상(藥師佛像)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의사적인 부처님도 크게 요청되었고 여기에 부합해서 출현한 부처님이 바로 약사불이다. 특히 민중들은 극락의 아미타불과 함께 의사로서의 약사불을 절실히 고대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약사불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중엽경 부터이지만 8세기 중엽부터 크게 유행한 것 같다. 분황사의 금동약사불상과 같은 대작불상이 조성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백율사의 금동약사불, 방어산마애약사불 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당대의 걸작들일 것이다.
약사불은 다른 불상과는 달리 손에 지물(持物)을 가진 계인(契印)을 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손에 약이 든 약합(藥盒)같은 약그릇(藥器=無價珠)을 들고 있는 것이다.
협시상은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또는 약사 12지신상을 거느리고 있는 것 역시 독특한 점이다.
⑤ 미륵불상(彌勒佛像)
메시아로서 널리 알려진 미래불(未來佛)이 곧 미륵불(Maitreya)이다. 사회가 불안하고 마라가 혼란할때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지상낙원세계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알맞은 복음적인 부처님이 바로 미륵불이다. 후삼국시대의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 자칭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원래 미륵은 불상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보살이었다. 도솔천을 주재하는 보살인데 5억년 후가 되면 석가불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해서 용화수라는 나무 밑에 부처님의 모습으로 내려온다(下生)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容華殿)이라 불렀던 것이다.
미륵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은 고신라시대 단석산마애미륵불상, 금산사의 미륵불상, 중원 미륵당리 미륵석불상 등이다.
⑥ 방위불(方位佛)
4방, 8방, 10방 등 방위는 계절과 함께 우리 인간생활에서는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여러 쪽(各方面)으로부터 들어고기 마련이다. 좋은 일은 즐겨 받아들이고 나쁜 일은 끝까지 막아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예부터 방위에 대한 믿음이 깊지 않ㅇ르 수 없었다. 방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면 동, 서, 남, 북의 4방이고 여기에 중앙을 더하면 5방, 4방에 상, 하를 더하면 6방, 4방을 둘로 나누면 8방, 여기에 상하를 합치면 10방이 된다. 자기 이외의 전 우주는 이 10방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가령 불교에서 시방세계(十方世界)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우주 전체를 상징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방위신앙도 습합(習合)해서 4방에 부처님이 상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부처님을 흔히 4방불이라 부르고 있다. 4방불은 경전이나 종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부터 4방불이 나타난 것 같다. 경주 탑곡마애불 즉 신인사 4방 석주불(神印寺四方石柱佛) 등이 당대의 상황을 알려주는 4방불이다. 동의 아촉(아축), 남의 보상(寶相), 서의 무량수(無量壽), 북의 미묘성불 등으로 생각되는데 금광명경 내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의 경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8세기 중엽부터의 4방불은 좀 다르게 표현된다.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과 약사신앙의 영향으로 동에는 약사가 나타난다. 유명한 굴불사(掘佛寺)사방불, 경주 남산 칠불암 4방불 등이 이 예에 속하며 이후부터 탑의 1층탑신사방불에도 보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4방불의 사상을 발전시킨 밀교는 중앙에도 부처님을 두어 4방불을 통괄하는 본존불로 삼았다. 중앙불은 경마다 다르지만 일자불정륜왕경(一字佛頂輪王經)같은 경전에서는 석가불로, 대일경(大日經)등에서는 비로자나불로 보고 있다. 칠불암에는 이러한 5방불이 나타나고 있다.
⑦ 천불(千佛)
대승불교의 위대한 특징은 어느때,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철저한 평등주의 사상이다. 이 점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천불의 표현이다. 즉 과거에도 천불(有限의 千이 아닌 無限數임), 현재에도 천불, 미래에도 천불이 있다는 것으로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특징을 웅변해주는 이러한 천불은 예부터 많이 조성되어 예배되었다. 유명한 고구려의 연가 7년명불상, 성주사의 소조 3천불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보살상(菩薩像)
보살상은 대승불교의 특징을 상징하는 대표적 존재이다. 부처님처럼 깨달았지만 중생구제에 전심하기 위해서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는 보살의 자세는 대승불교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上求菩提 下化衆生) 보살의 이상은 모든 대승불교도들의 이상이기도 한 것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보살을 훨씬 더 믿고 따랐다.
①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문수보살은 불교의 2대 성격 가운데 하나인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인데 석가불의 한 속성이어서 석가불을 왼쪽에서 협시하기도 한다. 후대에는 비로자나불의 왼쪽협시보살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문수보살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석굴암의 문수보살상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경북대학교에 소장된 사자탄 문수보살석상도 신라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후대에는 단독으로 봉안되어 신앙되기도 했는데 이 불전을 이른바 문수전(文殊殿)이라 했고, 특별히 문수보살상만을 신앙하는 사찰까지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문수원(文殊院)같은 사원이다. 문수보살의 신앙은 화엄경이나 반야경등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다.
②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나 비로자나불을 협시하는 2대보살의 하나이다. 불교의 자비나 이(理)를 상징하므로 매우 인기가 있던 보살이어서 즐겨 조형되었다. 석굴암의 보현보살상, 경북대학교의 코끼리탄 보현보살상 등 그 예가 많으며 이른바 보현전(普賢殿)에 단독으로 봉안되기도 한다.
보살 가운데 가장 유명한 보살이 되기도 하였다.
③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Avalokitesvara)
관음보살은 보살중의 보살로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보살이다. 그것은 보살의 특징인 자비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자비의 화신(化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음보살은 대승불교경전에서는 가장 인기있던 보살이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보살이나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아미타를 협시하는 8대보살로서도 많이 표현된다. 그 외에 석가불의 협시보살 또는 기타불의 협시보살로서도 표현된다.
후대에는 관음보살상을 단독으로 모시고 신앙하는 경우도 많은데 원통전(圓通殿)은 관음보살이 사원의 주불일 때 붙이던 이름이고, 관음전은 부속 불전일 때 붙이던 이름이다.
관음보살은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새기고 손에 보병이나 연꽃을 잡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이 외에 백의관음(白衣觀音). 양유관음(楊柳觀音=水月觀音), 11면관음(十一面觀音), 성관음(聖觀音), 33관음,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등 헤아리기 조차 어려울 만큼 다양한 관음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관음보살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음보살상 가운데 가장 저명한 것은 석굴암 11면관음보살상, 경주서악관음보살상 등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④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
관음보살상과 함께 아미타불상을 협시하는 보살상이다. 보관에 보병을 새기거나 손에 보병이나 연꽃을 든 모습인데 서악아미타삼존상의 대세지보살상이나 벽도산대세지보살상등이 손꼽히는 상으로 생각된다.
⑤ 일광, 월광보살상(日光, 月光菩薩像)
약사불을 협시하는 보살상인데 이마나 보관에 해와 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어산마애약사삼존불상의 좌우협시 일광, 월광보살상, 울산어물리마애약사삼존불의 좌우협시상들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 대표작이다.
⑥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
불상편에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현재는 33천의 하나인 도솔천에서 도솔천을 주재하는 보살이다. 원래 유가유식학을 체계화시킨 실재했던 인도의 학승이었는데 법상종의 교조로 신비화되어 보살로 변신한 것이다. 그래서 법상종에서는 주존불(主尊佛)로 신앙하고 있다. 감산사의 미륵보살상이나 용장사의 미륵존상등은 바로 법상종의 주존불로 신앙되었던 당대의 걸작품들인 것이다.
⑦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지장보살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 등 6도(六道)의 윤회(輪廻)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들을 구제해 주고, 지옥의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인도하여 정토의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이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지장보살을 신앙해서 죽은 후에도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현실의 고통에서 해탈시켜주는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과 함께 민중들의 아낌없는 귀의를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지장보살을 신앙한 것은 신라 경덩왕대(8세기 중엽)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서지만 고려시대에는 더욱 열렬히 환영받은 것 같다. 특히 명부전(冥府殿)이 보편적으로 세워진 조선시대에는 사원마다 지장보살상과 그림을 다투어 조성하여 열심히 예배했다. 선운사(禪雲寺)의 금동지장보살상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단독의 지장보살상 외에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상의 협시로 많이 등장하였으며 아미타 8대보살의 하나로서도 자주 표현되고 있다. 지장보살의 특징은 머리를 깎은 스님머리칼 아니면 머리에 특수한 가운형 두건을 쓰고 손에는 보주(寶珠)와 석장(錫杖)을 지닌 것이라 하겠다.
이 지장보살은 명부전에 주불로 봉안되면 좌우에 명부를 주재하는 10대왕을 거느리게 된다. 10대왕은 다음과 같다.
1. 제1대왕 .. 진광대왕. 도산지옥(刀山) 2. 제2대왕 .. 초강대왕. 화탕지옥(확탕)
3. 제3대왕 .. 송제대왕. 한수지옥(寒水) 4. 제4대왕 .. 5관대왕. 검수지옥(劍樹)
5. 제5대왕 .. 염마대왕. 발설지옥(拔舌) 6. 제6대왕 .. 변성대왕. 독사지옥(毒蛇)
7. 제7대왕 .. 태산부군. 대애지옥(대애) 8. 제8대왕 .. 평등대왕. 거해지옥(鋸解)
9. 제9대왕 .. 도시대왕. 철상지옥(鐵床) 10. 제10대왕 .. 5도절륜대왕. 흑암지옥(黑暗)
이러한 10왕상은 조선시대의 작품들은 허다하게 남아 있지만 고려시대 이전의 작품은 잘 알 수가 없다.
(3) 나한. 조사상(羅漢, 祖師像)
석가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수 많은 제자들이 있다. 부처님 당시의 직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역대 여러 나라에서 성자로 추앙받은 수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흔히 나한 즉 아라한(阿羅漢)이라 하여 예부터 숭앙해 왔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각종파를 창시하였거나 종파의 지도자들을 조사라 하여 숭앙해왔는데 이 역시 엄격한 의미에서는 나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한상은 10대제자상과 16나한, 500나한이 가장 유명하다.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 500나한을 모신 불전을 500나한전들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전각들은 약간 큰 사원치고 없었던 곳이 없었으므로 이들 상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이 있었을 것이다. 석굴암의 10대 제자상을 위시해서 통도사, 천은사, 송광사, 선암사, 백양사 등 많은 사찰에 있는 나한상들은 이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사상은 예부터 많이 만들어졌다. 흥륜사의 10성이라든가 의상(衣相), 원효(元曉)의 상들은 신라의 걸작품임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것의 예로는 해인사의 희랑조사상(希朗祖師像)이나 화엄사 4사자탑의 연기조사상등을 들수 있고, 조사전을 따로 배치하여 역대의 고승들을 봉안한 예도 허다히 있다.
(4) 신상(神像)
불교나 부처님을 지켜주고 중생에게 이익되게 해 주는 수 많은 신상들이 있다. 특히 문이나 사방을 지켜주는 시장상들이 가장 유명하다. 이들은 대개 인도 재래의 신들인데 불교에서 습합하여 불교화 시켰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재래의 신들을 습합하여 불교화시킨 신상들이 꽤 많이 있는데 칠성이나 산신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① 인왕상(仁王像)
인왕은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하는데 문을 지키는 수문장 구실을 하는 신이다. 석굴암의 인왕상, 분황사탑인왕상, 장항사탑인왕상들이 가장 대표적인 상들이다.
이들 인왕상은 상체를 벗은 반나체에 손은 권법(拳法)을 짓거나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②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은 세상을 수호하는 수호신인데 불교화되면서 동, 서, 남, 북의 사방과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었다.
동 지국천(持國天), 남 증장천(增長天), 서 광목천(廣目天), 북 다문천(多聞天)의 사천왕은 불전이나 탑의 4방을 수호하는 신장으로 많이 조성되었다.
감은사사리기 4천왕상, 석굴암 4천왕상, 원원사탑 4천왕상 등이 가장 유명하다.
우리나라 4천왕상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모습이 대부분인데 북의 다문천이 탑을 든 것은 다른 상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③ 8부중상(八部衆像)
인도 재래의 여덟 신들을 불교가 습합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의 선신(善神)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신의 이름도 일정치 않고 모습 또한 정형화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8부중은 대개 무장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이나 자세도 갖가지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8부중은 대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8부중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불타 8부중이 형상화되었던 것 같다. 석굴암 8부중이나 남산리탑 8부중, 진전사탑 8부중 같은 것이 모두 불타 8부중이기 때문이다. 4천왕사탑소조 8부중이 어쩌면 사천왕 8부중일 가능성도 있지만 앞으로 좀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미술개론-문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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