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이 다시 불붙을 조짐을 보인다.
마음이 급해진다.
정치적 목적의 개헌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민들은 정말 국민주권주의를 보여 주어야 한다.
순서를 바꾸어 정부형태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본다.
전직 대통령이 여럿이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 분은 외무부장관을 거쳐 국무총리에 낙점이 되었는데 총리시절에 정치적 역할은 거의 미미한 것으로 알려졌고(이 부분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사실은 아니다) 주사총리니 대독총리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하였다. 역할이 요즘 급수로 6급 주무관이 하는 정도라거나 정부행사에서 대통령을 대신하여 기념사를 대독하는 역할이나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다가 10.26이라는 엄청난 국가적 사태를 맞게 되어 갑자기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것도 제왕적 권한을 부여받은 유신헌법상의 대통령직이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집무를 개시하자마자 초미의 현안으로 대두된 개헌문제를 놓고(10.26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유신헌법 철폐논란이었으니까) 법제처장에게 3가지 지침을 주었다.
첫번째가 바로 대통령의 권한을 국무총리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다(나머지 2가지는 국가안보를 보장할 헌법과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시키는 헌법이었는데, 국가안보 역시 갑자기 국군통수권자의 지위를 승계한 처지에서 가장 먼저 북한의 위협에 대하여 주사총리로서의 위기감을 나타낸 것이었다).
10.26을 겪자 말 그대로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고 법제처장에게 술회하였다는데 그것은 평소에 국무총리에게 국정의 중요부분에 대해 전혀 참여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갑자기 정부형태가 개헌정국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부각되었다.
원래 유신헌법 폐지주장은 3공화국 헌법 초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이고 이는 임기 4년 1차 중임허용의 대통령제로 회귀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국무총리의 권한 강화 방안이 나오니까 야당과 재야에서는 이를 구세력의 집권연장 음모이고 특히 12.12 사태로 전면에 부상한 신군부와 TK세력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정부 주도의 개헌에 강력한 반발을 보였고 1980년 봄 치열했던 학생시위의 이슈가 되었으며 마침내 5.18과 같은 비극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법제처에서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시에 따라 세계각국의 헌법과 운영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유럽 여러나라에 헌법연구반을 출장시켜 자료를 수집하도록 하기도 하였다(단기간의 출장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아마도 그 출장에 참여한 학자들의 협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대상국가 중에는 포르투갈 터어키 프랑스 등 이른바 이원집정부제를 택한 국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대통령 간선제를 취한 나라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법제처에서는 세계 각국의 헌법전을 일일이 찾아 정부형태에 관한 규정들을 집중 분석하였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세계각국의 정부형태를 보고하였다.
여기에서는 입헌주의적 헌법을 순수 대통령제와 순수 의원내각제 그리고 행정적 이원집정부제와 의회적 이원집정부제 그리고 반의원내각제라는 다섯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각 유형간의 구별징표로서 국회와 정부의 구성방식, 특히 정부구성에 대한 의회의 관여 정도와 국회와 정부의 상호 독립성, 정부내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간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헌법에 문외한인 최규하 대행도 손쉽게 정부형태의 유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보고서였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기자들도 법제처의 연구에 거다란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하였는데 어느 기자는 대통령께 보고할 자료를 통째로 입수하여 특종을 하였다.
특종도 보통 특종이 아니고 권한대행께 아침 9시반에 보고하기로 일정이 잡혔는데 그날 아침 조간에 보고서 내용이 대서특필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그 다음에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 같았으면 몇사람이 옷을 벗고도 남을 사건이었으나 권한대행은 신문을 보고 예습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말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위에서 보듯이 이원집정부제가 다섯가지 중 세가지를 차지하고 있어 언론에서는 정부가 이원집정부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보도하였다.
물론 특종을 놓친 대다수 신문들이 좋은 논조를 보여 주었을 리 만무하다.
권한대행은 자신이 겪은 경험에 비추어 평소에 국무총리에게도 권한을 나누어주어야 유사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을 법제처에 주문한 것이고 법제처는 그 주문에 충실한 보고서를 작성하다보니 이원집정부제에 주목하게 된 것이며 또한 순수대통령제와 순수 의원내각제야 하나씩 밖에 없지만 절충형 정부야 수도 없이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으며 그때까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에 대하여서는 우리나라 헌법 교과서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설명은 다소 생소하였기 때문에 법제처 보고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최규하 대행은 법제처에 지시한 것 외에도 과외수업을 받았는데 당시 유명한 헌법학자가 연결이 되어 대행의 관심사항을 듣고 이원집정부제라는 정부형태를 소개하였다고 한다.
그 학자의 교과서에는 이원집정부제가 간단하게나마 소개되어 있었고 강의시간에도 후진국에서는 대통령제가 독재로 흐를 염려가 있다는 점과 함께 내각제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이원집정부제도 우리 여건에서는 상당한 매력이 있는 제도라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그 학자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다른 헌법교수 교과서 서문을 보면 이 부분을 거론하고 있는데 평소에는 내각제가 지론이라고 했다가 이원집정부제를 끌어들였다가 나중에 다시 정세가 변하니까 대통령제가 좋다는 식으로 지조없는 주장을 한 학자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우리 헌법은 명문규정만 가지고 본다면 이원집정부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유진오 박사가 헌법을 기초할 때 한민당 세력의 주장을 받아 내각제를 채택하였다가 이승만 박사의 질책을 받고 부랴부랴 대통령제로 바꾼 까닭에 제헌헌법도 대통령 부통령과 함께 국무총리제도를 유지하는 등 내각제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어떤 사람은 국무총리제가 왕조시대의 유물인 1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제도의 변형이라는 주장을 한 것을 들었는데 상당히 일리있는 주장이다. 사실 세계 각국의 헌법을 비교하여 보면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함께 둔 헌법은 거의 없었다), 또한 1차개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되기 위하여 직선제를 강행하면서 야당의 내각제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이른바 발췌개헌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 헌법은 과거부터 내각제적 요소가 많았고(1공화국 말기에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질 때 국무총리제를 폐지하고 비교적 순수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기도 하였다) 3공화국에서도 국무총리제를 부활시켰기 때문에 우리 헌법은 일종의 절충형 헌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국무총리제를 두고 국무총리는 국회의 인준을 얻어 임명하게 하며 일반각료들은 국무총리의 추천(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무총리는 행정각부통할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내각제 국가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운영에 있어서 헌법을 변형시켜 강력한 대통령제의 특징을 나타내었다는 점이다.
유럽의 내각제 국가들 중에는 국왕이나 대통령이 국가원수이면서 행정부의 수반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도 실제는 의회의 통제하에 총리가 실권을 행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나라가 많은데 우리 헌법도 이와 유사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제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초기부터 국회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국무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하여 미국 대통령제에서 각료의 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지위로 변형을 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입장은 자신의 주장은 처음부터 미국식 대통령제였기 때문에 유진오 박사가 무슨 뜻으로 국무총리제를 두었든지 간에 자신은 거기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는지 모른다.그에게는 국무총리야 국왕이 마음대로 임면하던 이조시대 영의정처럼 대통령의 인사권의 객체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헌법규정을 무시하고 국무총리를 국회의 뜻과 달리 임면한 것을 가능하게 한 제도가 바로 총리서리제도이다.
즉 국회가 인준을 거부하더라도 대통령은 총리서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독단적으로 임명한 국무총리가 총리직을 수행하도록 한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총리서리는 총리가 아니므로 각료임면제청권도 없고 총리서리의 제청으로 임명된 각료는 인정될 수 없는 것임에도 헌법에 전혀 근거가 없는 서리제도로 정부형태를 헌법과 전혀 달리 운영할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총리서리제는 김대중 대통령 당시에도 여소야대 국회에서 김종필 총리를 서리로 임명하여 내각을 구성하려 할 때까지 그 여진을 남겼다.
그리고 총리서리제가 당연시 되던 때에는 각료도 당연히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하는 것이어서 대통령은 내각 일괄사표를 받고 총리와 각료들의 명단을 동시에 발표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는데 총리가 서리일망정 각료제청의 절차를 밟았다는 흔적이라도 보여야 함에도 이런 점은 깡그리 무시되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내부사정이야 어떻든 총리후보를 먼저 임명하고 국회의 동의를 받은 후 총리와 각료인선을 협의하는 모습을 보여준 후에 각료들을 임명하는 절차를 취하고 있어 헌법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총리를 그런 식으로 마음대로 임명하다 보니 총리가 각료제청권을 실제로 행사하려 한다든지 하여 대통령과 대립할 기미가 보이면 아무때나 해임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 내각제 국가에서는 총리가 국회의 신임을 유지하는 한 국왕이나 대통령에 의하여 경질되는 법은 없다. 그것은 임명과정에서 국회의 관여가 필수적이라는 점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2번이나 무산되었는데 그것은 여소야대라는 정치상황 때문에 가능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청문회제도의 위력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청문회제도는 국무총리의
잦은 경질을 방지하는 장치로 기능을 할 수 있고 그러다보면 우리나라도 자연히 분권형 정부 내지 이원집정부제로 이행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이다.
최규하 대행의 견해를 듣고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법제처에서는 내부적으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을 모델로 한 이원집정부제 헌법안을 기초하여 검토하다가 12.12 사태를 맞이하였다.
아무튼 1979년 말 당시에는 이원집정부제는 우리나라에 아주 생소한 제도였고 신군부가 구 세력과 야합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음모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어쩌면 신군부는 그러한 오해를 일부러 조장하여 격렬한 학생시위 등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이를 빌미로 정권을 통째로 차지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고 순진한 학생들과 야당, 그리고 국민들은 거기에 놀아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듬해 5.18로 정권의 전면에 부상한 후에는 바로 강력한 간선제 대통령제를 밀어 부친 것이 그 증거이다.
전에 탄핵정국 하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여당이 단숨에 과반수를 훨씬 넘는 괴력을 목격하고서야 일부에서 탄핵유도의 술책에 넘어갔다는 탄식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고검장은 파업을 유도한 죄로 평생의 공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는데.
그리고 대통령은 내 손으로 뽑고 싶다는 우리 국민들의 단순 소박한 열정을 교묘히 이용하여 권력찬탈의 야욕을 채운 사태는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이원집정부제에 대하여는 좀 더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