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해 1944년 5월 강제 폐교된 혜화전문학교는 그 이듬해 8.15 조국광복과 더불어 재개교하였다. 이로써 혜화전문학교는 다시 그 본연의 교육과 연구활동을 통해 조국재건과 민족문화 부흥의 대열에 함께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식민 지배하의 학제나 불교전문교육만으로는 민주주의 등 세계적인 신사조를 흡수하여 새 시대의 인재를 길러내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뚜렷하였다. 보다 높은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며 조국의 번영과 인류복지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부응하는 학제 및 교육내용의 충실화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불교정신을 기반으로 흡수할 지식의 폭을 넓혀 새로이 창조되는 새 국가 이념을 모색하는 한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야 함은 단지 우리 학교만의 염원이 아닌 전 국민적인 요망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에 직면하여 불교종단과 학교 당국자들은 혜화전문학교의 발전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혜화전문을 전 국민의 공공교육기관으로서의 건전한 사학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 위에서 내려진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이로부터 종단, 당시의 재단법인 조계학원, 허윤 혜화전문학교장, 그리고 교수ㆍ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어 대학승격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대학 승격의 요건에 맞는 학교시설 및 재정적 뒷받침과 재단의 기본 자산 증자문제 등으로 적지 않는 난관이 있었지만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 결과 1946년 9월 20일 혜화전문학교는 동국대학으로 승격 인가되었다. 근대 한국불교가 처음 설립ㆍ성장 시켜온 불교전문교육기관이 이제 불교종단만의 학교가 아닌 전 국민의 공공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새로운 거보(巨步)를 내딛게 된 것이다.
혜화전문학교에서 동국대학으로 승격되었지만 불교정신에 입각한 건학이념은 여전히 불변의 가치이며 지향점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학제와 교육에도 그대로 반영 되고 있다. 우선 동국대학의 학칙 제1조에서부터「본 대학의 건학이념은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응용방법을 교수ㆍ연구하는 동시에 지도적 인격을 도야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불교정신을 기반으로하는 건학이념과 교육목적 아래 새롭게 마련한 동국대학의 학제는 전문 1ㆍ2부와 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주간인 전문 1부에는 불교학과ㆍ문학과ㆍ사학과, 야간인 전문 2부에는 국문학과ㆍ문화학과ㆍ역사학과의 6개학과가 소속되고, 학부에는 불교학과ㆍ문학과ㆍ역사학과의 3개 학과를 두었다. 여기서 전문부는 5년 과정의 구제(舊制) 중학교 졸업자가 진학하여 3년간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혜화전문과 동일한 교과과정이어서 신제(新製) 교육법의 실시에 따라 연차적으로 소멸되는 잠정적인 학제였다. 따라서 당시의 현행 학제에 따라 대학으로 인가된 것은 학부의 불교학과ㆍ문학과ㆍ역사학과의 3개학과 뿐이었다. 이 가운데 문학과는, 혜화전문학교가 다시 문을 연 직후 일본의 대륙정책과 관계있는 흥아과를 폐지하고 대신 설치했던 문과를 문학과로 고친 것이다. 대학 승격 당시의 이 같은 학부는 다시 1947년 5월에 이르러 학과를 증설하고 문학부와 정치학부로 분리되거니와, 이때 불교학과는 국문학과ㆍ영문학과ㆍ사학과와 더불어 문학부에 소속 편제되었다.
혜화전문학교의 재개교 당시는 물론 동국대학으로의 승격에 따른 이 같은 학제 구성의 변동 속에서도 불교학과의 위상과 그 독자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불교학과는 전문부나 학부(문학부)에서 다 함께 수석학과의 위치에서 불교종립학교로서의 동국대학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전문 1부와 문학부에 편제된 불교학과는 조명기ㆍ김동화가 각각 주임교수로 임명되어 학과의 운영을 전담함으로써 새로운 기대를 모았다.
혜화전문에서 개편된 전문부는 혜화동 교사에서, 3개 신설학과로 출발했던 학부는 새로 마련한 필동 3가의 교사에서 교과과정에 따라 개강하였다. 이제 우리의 유능한 중견 불교학자들에 의해 불교전문교육의 옛 터전이던 혜화동과 함께 다시 목멱산 기슭이 불교학 연구와 교육의 새로운 도량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2) 해방ㆍ전란기의 불교교육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혜화전문학교는 조국의 광복으로 재개교하여 다시 교육에 나섰다. 그러나 불교교육에 있어서는 내용상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굳이 변화가 있었다면 일본윤리학사 등 일제 통치를 반영하는 일부 과목을 폐지하거나 일본인 교수가 담당해온 과목을 한국인 교수가 맡게 된 정도였다.
그러나 대학 승격이후의 불교학과 교과목은 놀랄 만큼 큰 폭의 변화를 보여준다. 혜화전문의 교과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는 관계로 1학년 과목을 제외한 불교관련 과목만 해도 이부종윤론(異部宗輪論)ㆍ구사철학(具舍哲學)등 28개 과목이며, 그 밖에 교양 및 선택의 일반과목 수는 그 보다 훨씬 더 상회하였다. 우선 그 양에 있어서 대대적인 교과목의 확대가 눈길을 끄는 것이다. 이 같은 교과목의 양적 확대는 대학 승격에 따른 당시 불교학과의 강한 교육적 의욕과 기대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불교학과의 교과목은 상당한 조정을 거치고 있다. 여기서 그 대비를 위해 대학 승격이후 문학부 불교학과 교과목을 (1)ㆍ(2)로 구분하여 함께 제시해 둔다.
ㆍ문학부 불교학과 교과목(1)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1
학
기
이부종윤론
구사철학
인도불교사상사
조선불교사
신라불교연구
경전학
불교학개론
정토교리연구
조선문헌사
조선문화사서설
문학개론
선학개론
조선한문학사
유식학
지도론
미학
심리학
화엄학
종전강설
인도철학사
불교철학
논리학
조선문학사
현대영어
2
학
기
종교학
서양철학사
윤리학개론
국어학
영어
범어
중국어
체육
중국문학사
동양철학
국사개설
중국불교사
고려불교연구
종교사
중국고전
법화경
고려대장경연구
인식론
수당불교
공사상연구
선학제강
고고학
사회학
기신학
조선문화사
교육학
교육사
ㆍ문학부 불교학과 교과목(2)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1
학
기
문예사조
국문학개설
초급중어
중국문학사
신라사상연구
윤리학ㆍ초급영어
독어
종교학
구사학
일반국어
국어학개론
현대영시
심리학
한국불교사
교육방법론
경제원론
유식학
신라불교
불교특강
영문학연습
중급영어
선학개론
2
학
기
불교개론
동양철학사
한국문화사
고급중국어
철학개론
시사영어
불교철학
국사특강
인식론
국어고전
교육학
헌법
문화사
동양사개설
논리학
국사학
불교각론
외교사
중국불교사상사
서양철학
국사개설
교육사
위 교과과정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학승격 이후 불교학과에서는 새로운 교과과정을 마련하고 의욕적으로 불교교육을 실시하고자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불교교육과 연구가 의욕과는 달리 실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길지 않은 기간 중에 정치ㆍ사회적으로 혼란이 거듭되던 해방 공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다시 6ㆍ25전쟁으로 인해 대학이 문을 닫고 피난하는 등 교육다운 교육을 실시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 체제로 또는 동국대만의 단독 대학운영으로 수업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불교교육이 제대로 이루어 질 형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해방ㆍ전란기에서는 불교학과에 국한된 불교교육 및 연구의 문제보다 오히려 당시 대학 운영을 맡았던 불교학과 교수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주목해 볼 필요도 있다. 이 역시 동국불교의 한 모습이라는 의미에서이다.
1948년 12월 동국대 제2대 학장에 불교학과의 김영수교수가 임명되었다. 김학장은 허윤 초대학장의 사임으로 혼란해진 학사행정을 정상 상태로 복귀시키는 한편 이듬해 5월에는 현 대학본부 건축 용지의 정지공사를 착공하였다. 이는 대학 승격이후 학교시설 부족을 느끼고 있던 교수ㆍ학생들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준 고무적인 첫 대학 발전사업이었다. 이런 김영수 학장이 1년 5개월 만에 사임하고, 뒤를 이어 3대학장에 임명된 것은 역시 불교학과의 김동화교수였다.
김동화 학장의 취임으로, 중단되었던 교사 건축과 시설확장을 위한 공사 재개의 움직임이 빨라진 가운데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였다. 예외 없이 미쳐오는 전쟁의 참화속에서 임시휴교 등 조회를 취해 온 김학장은 그해 12월 20일경 대학의 모든 서류를 대구시 남산동 소재 동화사 별원으로 소개(疏開)하고 대학본부를 일시 그곳으로 옮겼다. 오래지 않아 1951년 대학은 다시 부산으로 옮겨 갔다.
김학장을 비롯하여 부산에 피난 온 본교의 교수들은 영도 해동중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부산전시연합대학에 출강하며 거의 1년간 고달픈 피난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학장과 교수들은 동국대 단독 개교를 결정하고 신창동 소재 경남 교무원 시설을 교사로 하여 본교생을 위한 수업에 나섰다. 그리하여 1952년 3월에 이르러 670여명의 학생이 복교하게 되었고, 신흥대학(현 경희대)의 수임생(受任生) 85명도 함께 맡아 교육하였다. 법당은 물론 경남 교무원 마루 밑까지 판자로 칸을 막아 숙소 겸 사무실, 또는 교실로 사용하는 등 열악한 시설과 환경 속에서도 동국대만의 단독 대학이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는 불교계의 아낌없는 지원과 함께 김학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피난지 대학이지만 강의가 본 궤도에 올라 진행되던 무렵 김동화 학장은 학생과 재단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장직에서 용퇴하였다. 학내 행정의 사소한 착오를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공석이 된 학장직에는 이미 7순이 넘은 불교학과의 권상로교수가 취임하였다. 이때 김동화교수가 합동 숙사에서 침식을 함께 하며 보좌하였고, 또 권학장의 학적 권위와 불교계에서 차지하던 지도력이 무언의 도움이 되어 재단측과의 유대도 더욱 긴밀하여졌다.
해방 이후의 혼란 그리고 이어지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불교학과 교수들은 불교교육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동국대학 전체의 기능회복과 발전을 위해 정성을 쏟았고 헌신하였다. 이는 곧 한국불교를 진작시키고 나아가 국가ㆍ사회에 기여해 간 불교학과의 또 다른 일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