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 : 하양허씨의 유래
( 허씨의 연원 부분)
삼국유사》(가락국기) 발췌 한 내용입니다.
허씨의 연원은 멀리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에 두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허황후는 원래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서기48년)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했는데, 김수로 왕이 의장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허황후가 김수로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동토의 객이니 사후에 오성을 전하지 못함이 한이 되옵니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맏아들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왕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 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했다고 한다.
그 뒤 김수로왕의 10세손 구형왕이 신라에 양국케 됨으로써, 가락국은 망하고 그 자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갔다고 한다. 그때 옛 땅인 김해에 눌러 살게 된 후손은 김해허씨(수로왕의 35세손 허염), 하주(하양)에 옮겨 세거한 후손은 하양허씨(수로왕의 33세손 허강안), 공암에 터잡은 자손은 양천허씨(수로왕의 30세손 허선문), 시산에 이거한 후예는 태인허씨(수로왕의 30세손 허사문)로 각각 고려 초에 관향을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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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유래 부분)
하양허씨(河陽許氏)는 고려 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에 호장을 지냈고 하주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으로 개관하였으며 그 후 하양으로 하고 있다.
하양 허씨의 시조는 허강안으로 김수로왕의 33세손으로 고려 현종때 하양지방의 대표적 호족으로 세력을 형성, 호장이 되었다가 조정으로부터 하양자사로 임명되어 그 지방을 통치하였다
하양허씨(河陽許氏)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후(許黃后)의 33세손이다. 그는 고려 현종 때 호부낭장을 역임하고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낸 후 하주(河州) 자사(刺史)가 되었다. 그래서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개관하였다. 그 후 하양(河陽)으로 하고 있다.
하양은 경상북도 경산시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다.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대표적인물 부분)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안의 손자 작린(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신(愼)은 호부주사, 동정 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귀룡(貴龍)의 아들 주(周)는 우왕 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고, 조선이 개국한 후 한성부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개성유후사유후,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주(周)의 동생 조(稠))는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조선 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경사(經史)에 밝았던 성(誠)은 한성부 판윤 주(周)의 아들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재냈다. 조(稠)의 아들 후(詡)는 문종 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단종 때 좌참찬이 되어 황보 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 외 중추원 부사 척(倜)의 아들 계(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하양 허씨 분파는 간숙공파, 문경공파, 부사공파, 참의공파, 정순공파, 판사공파로 나누고 있다.
후면
하양허씨세전가훈 (河陽許氏世傳家訓)
家傳忠孝 世守淸白 :
가정에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 에게는 효도하는 법도를 이어나가 고 사회에서는 대대로 청렴하고 결백한 가풍을 지키도록 하라.
持身勤儉 友愛敦睦 :
몸가짐을 잘 닦아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형제간 에 우애하고 친척들과 화목 하라.
接人恭謹 敎子義方 :
남을 접대 할 때는 공손하고 삼가 하고 아들딸을 가르칠 때 는 옳고 바른 도리를 지키게 하라.
處事必公 不求名利 :
일을 처리 할 때는 반드시 공명 정 대하게 하고 세상을 살아 가는 데 는 명예나 이익을 탐구하지 말라.
仁智忠信 博聞禮節 :
인자하고 지혜롭고 참되고 미덥고 널리 배워 견문을 넓히고 예의 범 절을 잘 지키도록 하라.
하양허씨2.hwp
하양허씨의 유래2.hwp
아래글 1400자 가량 됨 → 800~1000자로 줄여야 함
허씨의 연원은 멀리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에 두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허황후는 원래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허황후가 김수로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동토의 객이니 사후에 오성을 전하지 못함이 한이 되옵니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맏아들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왕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 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황후의 30세손인 선문은 공암(양천), 사문의 후손은 태인, 33세손 강안의 후손은 하양, 35세손 염의 후손은 김해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그러니까 김해 김씨는 부성, 허씨는 모성을 각각 계승했다고 하여, 오늘날에도 두 성씨는 상혼을 피하고 있다.
하양허씨(河陽許氏)는 고려 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에 호장을 지냈고 하주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으로 개관하였으며 그 후 하양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안의 손자 작린(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신(愼)은 호부주사, 동정 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귀룡(貴龍)의 아들 주(周)는 우왕 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고, 조선이 개국한 후 한성부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개성유후사유후,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주(周)의 동생 조(稠))는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조선 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경사(經史)에 밝았던 성(誠)은 한성부 판윤 주(周)의 아들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재냈다. 조(稠)의 아들 후(詡)는 문종 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단종 때 좌참찬이 되어 황보 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 외 중추원 부사 척(倜)의 아들 계(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하양 허씨 분파는 간숙공파, 문경공파, 부사공파, 참의공파, 정순공파, 판사공파로 나누고 있다.
=============주부공회장 제공
종친회부회장 허극열
1. 하양허씨의 연원
문헌에 의하면 허씨의 연원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인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서기48년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용양리에 도착했는데 수로왕이 의장을 갖추어 영접하고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허왕후가 수로왕에게 “첩은 동토의 객이 되었는데 사후에 나의 성을 전하지 못하여 한이 되옵니다.”하니 왕이 감동하여 장자는 왕통을 잇게하고 이자는 허씨로 사성하였으니 이 분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허씨는 하양을 비롯하여 김해, 양천, 태인 등 분관이 있다. 하양 허씨의 시조는 허강안으로 김수로왕의 33세손으로 고려 현종때 하양지방의 대표적 호족으로 세력을 형성, 호장이 되었다가 조정으로부터 하양자사로 임명되어 그 지방을 통치하였다. 지방호족의 토성화 과정에서 무반이직의 출사로를 따라 상경하여 무반으로 종사하다가 시조공의 5대손 혁부, 6대손 득서 때부터 현달하여 7대손 유, 8대손 수가 당시의 명문대가 한양망족인 판태복시사 한균, 대학자이며 최고관인 문성공 안향의 사위가 됨으로서 혁세분별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9대손 윤창은 도관정랑으로 장인은 익산 이씨 대사성 이직으로 그의 사돈은 원나라 순제의 기황후 친정인 기자오로 고려의 대표적인 권문세가였다. 이직의 제는 감찰두정 애이며 그의 자 공수는 최고관으로 공민왕 묘정에 배향된 명문대가였다.
10대손 판도판서 및 개성윤인 귀룡의 장인은 흥양이씨 통례문부사 이길이며, 11대손 조의 장인은 대사헌 박경으로 그의 혼맥이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친정 기유걸가, 대학자이면 문신인 익제 이현보, 목은 이색, 권보등 당대의 명문과 혼사가 겹겹이 얼키어 있는 집안으로 명문 사돈이 됨에 따라 하양허씨도 개경 신흥 명문가로 자리 매김하였으며, 여말선초에는 삼한갑족이 되었다. 조선조 초기에는 경세제가인 좌의정 허조를 비롯하여, 전라 경기관찰사, 한성윤을 역임한 허주, 예조,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한 허성, 형조,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좌참찬 벼슬을 한 허후, 집현전 수찬, 사가독서를 한 허조등이 배출되었으나 허후, 허조 부자가 단종복위 운동 핵심인물이 되어 세조로부터 3대가 참화를 입고 멸문지경에 이르러 유일한 혈족인 조의 손자 충이 어머니를 모시고 하양으로 환고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에 이르렀다.
===위 조형물은 가상하여 제작한 것입니다. 앞면은 성씨유래 뒤면은 세전가훈 과 보계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종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수정한후 심의하고 또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를 거칠까 합니다.
좋은 의견 주십시오.
* 지금까지 의견 종합
물고기 문양을 양쪽 날개에 새겨 넣자는 의견도 있고,
전체 조형물은 그대로 두고 아래 단을 하나 더 만들어 하양허씨라는 글자를
크게하여 하단에 넣으면 좋겠다.
유래문을 넣을 오석판을 크게하여 위로 올리고 금관은 완손이기에 그대로
둠이 좋을 것같다.
==== 대전 뿌리공원 조형물 설치에 따른 "하양허씨유래"를
800자 ~ 1,000자 정도 요약하여 기록하고자 합니다.
아래 예문은 참고 자료입니다.
추가하거나 삭제할 내용이 있으면
의견을 주십시오. 의견과 여러 자료를 수합하여 전문가에 조언을 얻어서
문안이 작성되면 뿌리공원과에 제출하여 최종 심사를 받을 계획입니다.
하양허씨의 유래 - 예문
1) 시조 : 허강안[許康安]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군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으며,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하양허씨(河陽許氏)는 고려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에 호장을 지냈고 하주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으로 개관하였으며 그후 하양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안의 손자 작린(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신(愼)은 호부주사, 동정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개성 부윤 귀룡(貴龍)의 아들 주(周)는 우왕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고, 조선이 개국한후 한성부윤,·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개성유후사유후,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주(周)의 동생 조(稠))는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두루 역임한후 조선세종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에 밝았던 성(誠)은 한성부 판윤 주(周)의 아들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재냈다.
조(稠)의 아들 후(詡)는 문종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단종때 좌참찬(좌찬성제수거절)이 되어 황보 인, 김종서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외 중추원 부사 척(倜)의 아들 계(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양허씨(河陽許氏)는 남한에 총 3,596가구, 14,7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삼국유사》(가락국기) 내용입니다.
허씨의 연원은 멀리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에 두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허황후는 원래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했는데, 김수로 왕이 의장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 했다고 한다.
그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하루는 허황후가 김수로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동토의 객이니 사후에 오성을 전하지 못함이 한이 되옵니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맏아들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왕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 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황후의 30세손인 선문은 공암(양천), 사문의 후손은 태인, 33세손 강안의 후손은 하양, 35세손 염의 후손은 김해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그러니까 김해 김씨는 부성, 허씨는 모성을 각각 계승했다고 하여, 오늘날에도 두성씨는 상혼을 피하고 있다.
하양 허씨는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조(稠)와 아들 후(詡 . 좌찬성), 손자 조(慥)의 3대가 모두 사육신가 깊은 관계를 맺어 충절의 집안으로 꼽힌다. 분파는 간숙공파,
문경공파, 부사공파, 참의공파, 정순공파, 판사공파로 나누고 있다.
하양허씨(河陽許氏)의 유래
허씨 성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성을 따르게 한 데서 유래한다.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 허황후(許黃后)가 아유타국(阿踰陀國, 인도)의 공주로서 16세(서기48년) 때 배에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군 능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은 10남 2녀가 있었는데 왕비가 자신이 죽은 후에 성씨를 전하지 못함을 슬퍼하자 맏아들 거등(2대 居登王)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둘째(居漆君)와 셋째는 어머니 성을 이어(賜姓) 허씨가 되었다. 남은 일곱 아들은 외삼촌인 장유화상의 제자가 되어 승려(河東七佛)가 되었다.
그 뒤 김수로왕의 10세손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양국(讓國)케 됨으로써, 가락국은 망하고 그 자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갔다고 한다. 그때 옛 땅인 김해에 눌러 살게 된 후손은 김해허씨(수로왕의 35세손 허염), 하주(하양)에 옮겨 세거한 후손은 하양허씨(수로왕의 33세손 허강안), 공암(陽川)에 터잡은 자손은 양천허씨( 수로왕의 30세손 허선문), 시산(泰仁)에 이거한 후예는 태인허씨(수로왕의 30세손 허사문)로 각각 고려 초에 관향을 삼게 되었다.
또 인천이씨도 허씨에서 갈려나온 성씨이다. 따라서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는 이성동족(異姓同族)으로 한 핏줄이라 할 수 있다.
하양허씨(河陽許氏)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후(許黃后)의 33세손이다. 그는 고려 현종 때 호부낭장을 역임하고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낸 후 하주(河州) 자사(刺史)가 되었다. 그래서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개관하였다. 그 후 하양(河陽)으로 하고 있다.
하양은 경상북도 경산시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다.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하양허씨는 2000년에 5,081가구 16,344명이 있다. 경북 경산군 하양읍 부호리, 전북 고창군. 정읍시 일원, 경북 경산시 와촌면 용전리, 전북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경남 합천군 일원이 집성촌이다.
* 인구조사 변동이 많고 집성촌을 떠나 외지에 살고 있는 분들이 많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는데 한계가 있어 인구와 집성촌은 넣지말자는 의견입니다..
허강안의 손자 허작린(許綽麟)은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허신(許愼)은 호부주사, 동정 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허귀룡(許貴龍)의 아들 허주(許周)는 우왕 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다. 조선 개국 후에는 한성부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아들 허성(許誠)은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허주 의 동생 허조(許稠))는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조선 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아들 허후(許詡)는 문종 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단종 때 좌참찬이 되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중추원 부사 허척(許倜)의 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그 뒤 병조참의와 경주부윤을 역임했다.
첫댓글 참으로 내용도 좋고 상세히 잘 되어 있읍니다.
천천히 한번 읽어 볼만합니다.두고 두고 읽어보기 위해서 스크랩합니다.감사 또 감사합니다.
나로서 하나 아쉬운점은 그래도 집성촌을 기록하는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나처럼 타지에 있어도 조상들이 어디서 세거를 계속 이어왔다는 뿌리찾기가 좀 흔들릴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많은분들이 도시의 여려방면으로 진출하여 객지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감안한 일이라고 생각되시어
굳이 집성촌을 기록하는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점 또 높이 평가합니다.수고 하시는님들 덕분에 우리들의 뿌리를 좀 명확하게 안다는것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이런데 별 관심이 없어요 아버지들이 교육을 게을리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아들만 해도 작은놈이 하는 소리가 아버지 그것 별의미가 없읍니다.해서 서운한적이 있읍니다.
나도 좀더 뿌리에 대한 공부를 시키지 못한 죄라고 생각을 하면서 기회를 보아서 또 한번 뿌리강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