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兪) 씨(氏) 스토리(이야기)
1.유(兪)씨 성(性)씨의 관찰
유씨의 본관(本貫)은 조선 씨족 통보에 기계(杞溪). 창원. 인동. 장사. 고령. 무안. 천령.등 105본으로 등록 되여 있으나 모두가 신라(新羅) 아손(阿飡)(17관등 급증 6등급째)을 지낸 유삼재(兪三宰)을 도시조(都始祖)로한 동원분파족이며 그 중에서도 기계 유씨가 대종으로서 유씨 전체의 인구중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 15개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동정공파(同正公派) 2. 주부공파(主簿公派) 3. 전서공파(典書公派)
4. 월성군파(월성군파) 5. 군기사공파(軍器侍事公派) 6. 부정공파(副正公派)
7 부재학공파(副堤公派) 8.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9.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10. 여림(汝霖) 후손 계열 6개파
(1) 신계공파(新溪公派) (2) 단성공파(丹城公派) (3) 충목공파(忠穆公派)
(4) 진사공파(進士公派) (5) 자산공파(慈山公派) (6) 학생공파(學生公派)
이와 같이 동원 분파의 족보상 나열이 되어 잇지만 유삼재(兪三宰)시조를 다같이 모시고 있는 위의 타본들도 분파 명을 수록 필자 의견으로는 대동 합본하여야 하지않을가 생각한다. 기계 유씨는 이처럼 족보 명목상 15개분파족을 이루나 15개파중에도 이조 중엽 판서를 지낸 여림(汝霖)의후손들인 6개파 (신계공. 충목공. 학생공. 자산공. 진사공 .단성공 )가 과반수의 인원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사실상 기계 유씨를 조선조 역사에서 반석에 오르게 하고 중흥의 길을 연 종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선조 때부터 정조 때에 이르는 200여년간 유문의 찬란함이 가장 꽃을 피운 성세를 보였으며 그리 특출한 성씨는 아니나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한 청족의 인물이 가내에서 전통적으로 배출 되여 사육신의 한 분인 유응부(應浮)와 같은 충신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으며 경안(景安) 여림(汝霖)과 같은 덕망 높은 인물이라든가 명재상 이율곡을 발굴해 낸 암행어사 출신 충목공 좌의정 홍(弘)이며 영조때 기계 유씨 최고의 벼슬 정승과 영의정을 지낸 후 나이 들어 기로 소에 들어 봉조하가된 지수재 척기(拓基) 라든가 구한말 우리 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홍집 내각에 들은 후 아관파천 사건으로 실각 개화 운동가로 종두법과 우표 제도를 실시한 길준(吉濬)이며 해방후 고려 대학 총장과 야당 총재로서 우리 나라 헌법의 재청자 진오(鎭午) 박사등 고금의 역사 속을 빛낸 유문의 인물
- 1 -
들이 가내를 중흥시켜 가문을 이여 왔다. 그리고 기계 유씨의 분포도를 살핀다면 1987년 현재 전국에는 약 10만이 분포되있으며 주로 경기. 충청. 경북. 지방에 집성 생활 하고 있다. (일부는 한국인의 성보중에서 편취). 기계 유씨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성씨가 생긴 유래는 모두가 옛날 중국으로부터 실행되고 전래 되여 내려온겄을 우리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때 부터 주로 왕족이 먼저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국가에 공이 있는 공신이나 신하들에게 성씨를 왕이 하사하여 사용하였고 그 성씨 제도는 사대 부가에서 흔히 가질 수 있는 특권 제도엿지만 점차 세월이 가면서 중인. 이하 계급층도 성씨를 같게 되였으며 이조 초중엽 인조 조를 중심으로 전국의 성씨들이 대동보를 편집 간행함이 유행하였다 따라서 우리 집안도 관찰사 철(撤) 어른과 참의시남(市南) 어른이 집안 대소 가와 상의하여 최초에 족보를 이때 발간하였다 사실 그 이전에도 각집안마다 미미하나마 족보가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가승에 지나지 않는 초보적 상태였었다 우리 집안도 비교적 가승 보가 가장 잘짜여젓다는 숙민공(肅敏公)이 제작 간직한 가승을 중심으로 족보를 만들 때 참고하였다 고한다. 아무튼 우리 집 안도 시남과 철 어른이 중심이 되여 인조 23년 서기 645년 기계 유씨 대동 보를 편집 간행하였으나 처음 시행함이라 거칠고 아쉬운 점이 있어 25년후 숙종 10년 족보를 다시 간행한다 그 역대 족보 편찬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을유보(乙酉譜) =인조 23년(1645) 시남(市南) 계(綮) 와 취웅 철(撤) 등 이 편찬.
2. 갑신보(甲申譜) = 숙종 30년(1704) 이는 본시 지평 명성 공이 숙종 10년 에시작하였으나 갑자기 별세하는 관계로 20년후 판서 명건공이 감사 명 응. 명걸외 2인과 더블어 편찬 완성하였다.
3. 무오보(茂午譜) = 34년후 영조 14년(1738)영의정 봉조하 지수재 척기 공 이 직기.언진.광기.등이 참여하여 편찬 완성하였다.
4. 병오보(丙午譜) = 48년후 정조 10년(1786) 충문공 언호 외 4인등이 편찬.
5. 갑자보(甲子譜) = 78년후 고종 원년(1864) 치선 외 다수 등이 편찬.
6. 갑인보(甲寅譜) = 50년후외정시(1914년) 길준외 5인등이 편찬.
7. 을사보(乙巳譜) = 51년후 대한민국 1965년 치웅 당시문장외 다수 편찬. 8. 신미보(辛未譜) = 32년후 1987년 인구 증가 및 구보의 참신을 위하여 총 문장 치웅 종친 회장 영준. 족보 편찬 의원장 및 후일종진회장 동준공 외 다수 인원이 동승 편찬하였다.
-2-
이재 바야 흘러 현대는 과학 문명의 시대인바 혹자는 뿌리가 무엇이며 족보가 무엇이냐고 부정적 사고를 갖은 분들이 태양계인 이 우주가 약 50억만년 후에는 소멸 되여 영원히 살아지는 현실에 무슨 소용이냐고 반논를 재기하겠지만 인간은 귀소 본능이라 하였는가 조상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후손 있으니 불멸의 진리를 가지고 동양 최고의 가정 보존 전례 우리 나라의 특특한 문화 유산을 관점을 가지고 지켜 나아가 자손만대 기리 빛내자.--
(이야기는 6개파를 중심으로 썼으며 편집필한 직조상이 좀더거론 되엿음을사전
살펴보면서 이해요망 합니다.)
2,기계유씨(杞溪兪氏)본관(本貫)과 인물유래사(人物由來史)
시조(始祖) 유삼재(兪三宰)는 신라때 아손(정승과 같은)이라는 벼슬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후손중 의신(議臣)이라는 분이 있어 신라(新羅)가 패망하고 난후 고려(高麗)가 개국하자 왕건(王建)의 신하가 되기를 불복하니 고려 태조가 미워 하고 대노하여 그로 하여금 신라 기계현 호장으로 강등한다. 그때부터 세거를 그곳에 정하고 본관을 이루워 천천 만만년 대를 이어 기계인(杞溪人)이 되여 세계를 물줄기 흐르듯 방방곡곡 세월을 질주하여 오늘에 이른다 .옛날로부터 유씨는 절 의가 도도하였으며 지조가 청렴한 인사가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안타까웁게 병(炳) 자에서 24대조 이전 어딘가 에서 약 10세대 정도 대동 보가 정돈되지 않아 실전 되여 우리 유문은 이때 이전부터 대수를 헤아리지 아니한다. 그로부터 기계 유씨들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다 보니 고려 초에는 여러대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던차 고려초 후기에 들어 그 후손 일족이 경기도 남쪽 지방에 이주하면서 벼슬에 뜻을 두어 조상중 여해(汝諧)라는 분이 주부(主簿)라는 작은 벼슬로(炳자에서 24대조)입문하고 그가 청렴하여 고려조 최충헌 부자(父子)가 정권을 잡고 우매하게 폭정 함을 개탄하고 탄식하여 그들의 폭정을 시를 써서 풍좌하다가그 들의 노여움을사 보복과 불이익을 당하니 역사 또한 그를 말하기를 충신이라 일크른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나래를펴 벼슬길에 안좌하니 형무(逈務)는 동정(同正)이고 득항(得瑄)이 좌복시(左僕射)요 득선(得宣)은 좌복야이다 그리고 손자 선(僐)이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이며 승계(承桂)역시 판도판서로서 4대가 크게 조야에 입문 하니 기계 유씨는 다시 두각을 나태나기시작한다 승계의 아들 천경(千慶)이 전서(典書)요 성리(成利)는 군기시사(軍器恃事)
이며 성보(成保)는 부정(副正)이고 성복(成福)은 판사재감사 (判司宰監事)등 4형재
-3-
가 번창하였으나 마침내 그때 고려 역시 패망하고 위화도에서 회군 백성들로부터 신세대의 참신함을 안겨다 준 조선(朝鮮)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새움으로서 기계인 들도 나래를펴고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면 여기서 조선조때 조상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조 초기 군기시사 성리의 아들 효통(孝通)이 중과(重科)에 장원급제하고 세종때 집현전 재학이 되였으며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약용 식물을 맨 처음 정리한 예서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장자 목로(牧老) 부인이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인의 딸인 관계로 황보인 이 수양 대군에게 참변을 당한 뒤 유효 통의 일가도 박해를 받았다 (세종이 승하고 병약한 문종이 대를 이은 후 그가 재위 이년도 체 못 마치고 승하하니 이른바 단종이 보좌에 오르나 조선 초엽 이 왕가에 왕자의 난 이후 다시 한번 종족간의 비극이 발생하니 이름하여 단종이 그의 삼촌 손에 제거 되여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맛난다 이에 불복한 충신들이 절 의를 지키니 유명한 대표적 인물들로는 사육신(死六臣)이있다 여기에 우리 가내의 충신 유응부(兪應浮)가 있으며 생하신 해는 상세히 상고할 수 없으며 세조2년(1456년)옥사 하였다 공의 자는 신지(信之). 또는 선장(善長)이며 호는 벽량(碧梁)이오 시호는 충목(忠穆)이시다 그는 일찍이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표본적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재하여 평안도 절재사를것쳐 동지 중추원 사가 되였는데 명나라 사신 초대연에서 별운검이 되여 왕을 호의 하는 자리에서 성삼문의 선친 성승과 함께 세조(世祖)를 제거하고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다가 거사를 함께 하자던 김질이라는자가 두려운 나머지 세조에 고하여 사전에 발각돼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여섯 신하가 수양대군당에 의하여 참수를 당하였으며 노량진에 그들의 육신묘가있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기전 고문을 하던 세조가 그에게 [너는 무었을 하려 했는고]하고 묻자 응부 왈 [잔칫날 족히(세조)를 한칼에 배어 버리려 했소] 하고 답하였으며 또한 그때 그가 지였다는 유명한 충절의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하여 내려온다. [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말인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지단 말인가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일러무삼하리]라고 하는 단장의 피끓는 한편의 시가 전한다 한편 응부의 죽음을 전해들은부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살아서 다기 울어러지는 초가에서 변변치 못하게 살더니 죽어서도 편치못하군아 ] 하며 슬프 우니 그의 청렴하고 액국순절의 참신함이 엿보였다. 또한 세조 조에 문과에 급제 부제학에 이른 학촌 (學村) 진(鎭)은 역학에 정통 하였고 성종 조에 문과 급재후 벼슬길에 오른 효인(孝仁)은 시문과 명필가로
-4-
서 효사상이 투철하여 효행이 극진하였고 성복의 손자요 효통의 재종재인 해(解)는 성삼문의 아버지와는 동서지간 처가의 인연을 맺었으며 훗날 해공은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나 처가동리 냇물 가에서 목욕중 24세 젊은 나이에 독충에 물려 조졸 했다 그러나 사실상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기계 유씨를 명문 족으로 발전시킨 때 는 해공의 자손때 부터 이다. 그리고 우리 기계유씨 문중의 전설인 죽산박씨 할머니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해공의 부인이 되신다.사육신중 성삼문(成三文)은 炳자에서 17대조 서호공(西湖公) 중추부사 기창(起昌) 어른과는 이종사촌간이다 서호공은 세종19년 생하시고 (1437-1514) 중종 5년 졸 하시니 75세로 장수 하신 분으로 자는 자성(子盛)이오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참판(증) 해의 아드님이시다 젊어서 무과에 급재후 이종 성삼문과 종친 유응부의 일로 화가 미칠가봐 여기저기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훗날 연산조때 연산의 난폭한 정치를 비판하던 영의정 성준의 친당인성준당 사건에 연루 되여 거재에 유배되고 훗날 죄에서 풀려 병조참의을 재수 받았으나 종친 응부의 죽음과 이종 성삼문의 죽음 등을 탄식 이를 거절하고 절의를지키고 향리인 비인에 청절사(淸節祠)를 창건하고 입산수도의 길을 걸었으니 역사는 그를 사절신 이라 말한다 그리고 훗날 청절사에는 그와 그의 아들 여림을 같이 배향하고 그청덕(淸德)을 추모한다. 그의 아들 여림(汝霖)은 성종7년 생하시고(1476-1538) 중종 33년 졸 하신 덕망 높고 청렴한 신하로서 자는 계옥(啓玉)이며 호는 정당(政當)이며 시호는 경안(景安)으로 서호공 기창의 아들이다 문과 급재후 교리와 부재학. 세자빈객. 예조판서와 지중추판서 형조판서를 지냈고 우암 조광조. 심여원등과 더불어 중종반정에 납록된 자들과 김안로의 죄를 논핵하는 문제를 거론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파직당하는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으며 기계 유씨를 중흥의 반석에 올려놓은 중시 조이시다 그리고 그의아우 여주(汝舟)는 중종 23년생 (1480) 하시였으며 자는 사성(師聖)이며 우암 조광조가 제도하여 만든 과거제도에 일환인 현랑과에 제일먼저 추천 되였으나 왼 일인지 벼슬을 버리고 문학과 서예가로 전념하였다 또한 여주는 아호를 선취처사(仙醉處士) 또는 임벽당(林碧當)이라고 부른 관계로 여주의 부인도 임벽당 김씨라고 하였으며 이조중엽 신사임 허난설등과 더불어 문학의 3대규수로 불리워젔다. 여림은 천성이 담박하고 부귀영화를 꺼려 칠 년간의 비인 의 은둔생활을 할 때도 평범한 촌노와같았으며 여림의 형들을 더듬어보면 먼저 순거(舜擧). 여필(汝弼). 여익(汝瀷)이 잇고 큰아들은 기계부원군 관(綰) 이요 둘째는 서흥부사 진(鎭)이 있
으며 그의 호는 서흥(瑞興)이며 우리 수원 유씨의 15대 양조부가 되신다 진은 대
-5-
를 이을 손이 없어 그의아우 숙민의 차 자를 양자들여 대를 잇는다 그리고 마음씨가 온순하고 대내외 호의적 이였으며 효행이 지극한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진의 아우 숙민공(肅敏公) 강(絳)은 중종5년 생하시고(1510-1570) 선조3년 졸하시엿다 그리고 자는 강지(絳之)요 시호는 숙민(肅敏)이며 판서 여림에 아들이고 수원 서면 유씨의 15대 생조부가 되신다 문과 급재후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으며 부정 을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이라 윤원형을 논핵하다가 여러번 지방장관으로 (평양감사등) 축출되고 다시 중앙으로 복직 한성부윤과 형조와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그는 스스로 30년간 입조에 권세 잇는 문전에 발을 들여 놓지않았다고 말하였으며 문풍을이르켜 관서의 유생들을 수학시켜 중앙에 대거 진출시켰고 두아들 영(泳)(자산공)과 함(涵)(진사공)중에 함을 형 서흥부사에 양자 한다. 그럼 여기서 여림의 손자요 관의 아들이고 숙민공 강의 조카인 홍(弘)을 알아보자 공은 중종19년 생하시고(1524-1594) 선조 27년 졸 하시였으며 자는 지숙(止叔)이요 호는 (송당(松塘) 이며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시다 그는 명종때 문과에 급재후 암행어사 출신으로 삼사를것처 각도 관찰사와 임진외란때 왕을 호종하였으며 좌의정에 올랐다 일부 왜곡된 야사에서는 임난당시 그가 가족을 임금보다 먼저 피난 시켰다는 비난의 일화가 있지만 사실과 다르며 그는 분명히 왜군이 노도와 같이 북상 할때 모든 대신이 왕가를 버리고 도주하였으나 단신으로 임금을 호종 임진나루를 건너 피난한 사실이 실록에도 기록 되여 잇다 그리고 명재상 이율곡이 일등으로 과거 급제하자 그가 잠시 불문에 들은 이유로 문제삼자 시험관인 충목공은 열변을 토해 정당성을 증명하자 모든 신하가 이를 이해하여 훗날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조선조의 명재상이된다.그리고 왕가 태조의 선친 이자춘의 함자가 우리 나라는 중국 명나라를 대국으로 모시는 사대주위 때문에 소국의 입장에서 임금의 조상을 대명 실록에 기록보관하고 매년 사은사가 조공과 선물을 가지고 소국의 예를갖추는등 행사를 한다 그러나 중국조정 대명실록에 기재된 이성계의 선친 이자춘의 함자가 고려말 권신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 된겄을 명나라에 가서 혼심을 다하여 수정하여 중국 산해관을 떠나 고국으로 가지고 와 상께 올리니 광국일등공신으로 책록 되였으며 따라서 그대명실록을 말하기를 대명회전이라 말하며 그 사본과 충목공이 중국산해관을 떠날 때 마씨라는 그곳관리가 시를 두어 편 지어 주엇는대그 화답 시로 선조 임금과 문무백관 30여명이 어전에 모여 축하 시를 썻는대 그를 말하기를 실록과 역사는 광국지경록이라고 일크르며 그 목판이 아직도 우리 보은문중에 보관 되여 있어 문화재로 지정되여있다. 그리고 정여립의난 사건
-6-
이 있엇는대 난이 평정되자 그로 인한 공으로 충목공 홍은 평난공신에 책록 됐으며 공은 문장과 시문에 능하여 그가 쓴 글을 후손들이 모아 간행 하엿는대 그 간행본을 송당집이라고 말한다. 잠시 여기서 여림의 손자요 숙민공 강의 친자이며 서흥공 진의 양자인 진사공(進士公) 함(涵)에 대하여 집고 넘어가자 함(涵)은 중종21 병술년 생하시고(1526-1581) 선조14 신사년 졸하시였으며 자는 덕용(德容)이시며 공께서는 일찍이 성균관 진사과에 들어 진사가 되고 장가들어 아들 정실 여섯과 척실여섰 12형재와 따님여덟을두신다 장남은 대숙(大俶)으로 감찰이요 둘째는 대수(脩)는 문과급재 부사요 셋째는 대경(大擏)으로 문과 급제하엿다 군수 증이조판서 이며 자산고진사공파 유씨 중시조이시다 넷째는 대엄(大儼)으로 효력부위요 다음 다섯째는 대칭(大稱)이니 첨정 증좌승지이고 여섯째는 대우(大佑)로서 문과 급제하엿다 현감이시고 척실로는 대중(大仲과 대신(大伸)과 대검(大檢). 그리고 대길(大佶)로서 추증 공조참판이 있으며 다음이 무과급재하여 중추부사가된 대현(大俔) 등이 있고 장녀는 군수 김좌에게 출가 하였고 차녀는 영의정 충정공 심열에게 출가 하였다 이와 같이 진사공 함은 과히 다복 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이분은 적실 여섰에 척싯 여섰 합 열두아드님을두신다 그리고 훗날 진사공 함 어른을 시남 선생과 관찰사 철 어른이 족보 제작시 진사공파의 기점으로둔 진사공 중시조 장본 이시다. 그러면 경안공 유여림(汝霖)의 후손이요 진사공 어른의 사촌인 축목공 홍(弘)이라든가. 같은 형재 항렬의 인물을 살펴보자 먼저 순(洵).신계공. 호(灝) 단성공. 함(涵) 진사공. 영(泳) 자산공. 홍(弘)충목공. 준(俊) 학생공. 억(澺.)등이 있고 그들의 자손들중 유명인 들을 간추려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대수(大脩)는 명종때 사람으로 진사공의 둘째이며 명종1년 생하시고(1546-1586) 선조19년 졸 하신 분으로 자는 사영(思永)이오 이황(李滉)의 문하생이며 문과급재한 부사출신이다. 그리고 다음 대기(大祺)의 자는 경수(景綬)이고 호는 치연(치淵)이오 시호는 양간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또한 대칭(大稱)의 자는 경선(景宣)이며 호는 관원(灌圓)이고 진사공의 넷째이며 선조 29년 이몽학이 난을 이르키자 홍가신을 도와 난을 평정하였다. 대정(大楨)은 명종7년 생하시고(1552-1616)광해 8년 졸 하신 어른이며 단성공 호의 아들이시며 자는 경휴(경休) 문과급재후 검열을 지내다가 기옥사화에 연루 파직 되였고 중추부사 참판을 재수밭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다음 대경(大擏)은 진사공(進士公 함(涵)의 세쩨아들이며 대수의 아우이다 이분은 명종6년 생하시고(1551-1615년) 광해 4년졸하신 어른이신 으로서 자는 성오(省吾)요 호는 엄옥헌(嚴玉軒) 이시다 선조9년 생원 시에 합격하고
- 8 -
1591년 문과에 급제하고 주서. 정언.지평. 수안군수. 병마절도사겸 부호군 을 지냈으며 사후 이조 판서를 재수 받앗다또한 임진난당시 수안군수로서 궁중여인들을 보필 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분이후 이분의 아들이신 양증(養曾) 참봉어른이계신대 좌찬성 증직을 밭으신 분이게시다 다음은 대진(大進)이다 대진은 명종9년 생하시고(1554년-1599) 선조32년 졸하신 충목공 홍의 아들로 자는 신보(新補) 문괴 급재후 참의를 것처 임난당시 의병장을 지냈다. 또한 대일(大逸) 은 선조5년 생하시고(1572-1640) 인조18년 졸하신 충목공의 아들이시며 자는 덕휴(德休)이고 이황의 문인으로서 호는 용은거사(傭隱居士)이며 현감. 군수. 부사를 지냇다. 그리고 다음이 대건(大建)이다 공은 문과 급재후 대사헌 을역임하였다. 이들모두가 선조조와 광해조에 출중하여 기계 유씨를 만고에 빛낸 분들이다.
그리고 대(大)자의 아래항렬에서는 성증(省曾) 대의(大義)의 아들이 문과급재후 병자란때 척화신으로서 관찰사와 참의를지냈다 다음 수증(守曾)은 대정의아들이며 문과급재후 주서와 부사를 지냈다. 그리고 선증(善曾)은 문과 급재후 군수를것처 정사공신에 책록되고 병자호란때 돈적 하였다. 또한 백증(伯曾)은 대일의 아들 이며 문과 급재후 대사간과 경상도 도사와 대사헌을 역임 하엿고 인조반정에 공이 있어 정사공신에 책록되고 병자호란때는 척화신으로 강화 실함을 가장 강도잇게 논박 여러번 파직당한 강직한 분이다. 다음은 증(曾)자 이후의 항렬들을 알 아보자 먼저 황(榥)은 선조32년 생하시고 (1599-1655)효종6년 졸하신 성증의 아들이며 관찰사 철의형이시다 자는 숙전(叔涏)이요 호는 봉주(鳳洲)공 시호는 충간(忠簡)공 문과급재후 교리와 형조참의 승지를 지냈으며 후금이 청으로 개청하자 이를 반대하는 배청파로 몰렸으며 청을 축하는 장소에 참석한 나덕현을 처단할겄을 주장한 충신이며 인조실록을 편찬하고 병자호란의 척화신이였다. 그리고 아우님 철과 삼종간인 시남선생 3분이 한날 한시 과거에 등과하신다. 다음이 철(㯙)인대 철은 선조39년 생하시고(1606-1681) 현종12년 졸하신 분이시다 또한 성증의 아들이요 황의 아우이다 자는 방숙(方叔)이오 호는 취옹(醉翁)으로 문과 급재후 병자난당시 오달재. 윤집. 홍익환 등이 청으로 끌려가자 그 가족에게 은율을 배
풀게 하였다 벼슬은 검열과 사간을 거쳐 관찰사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친명파로서 예의를 주장한 사람이며 숙믹민공 의 시호가 우리집안에서 백여년 상게 윤허를 청하였으나 불허 되여 온겄을 공께서 간곡히 주청하여 시호 숙민공을 얻어낸 분이다 그리고 이분역시 형 황과 시남선생 3분이 한날 등과 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숙민공 시호를 대사헌 철어른이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던날 대사헌 진영에서
- 9 -
잔치를 배풀때 수안공 증손자요 시남의 형님이신 서촌(西村 )진사 집(集)의 손자인 참군공 정기(鼎基)어른이 숙민공 시호가 내려 지는 날 이분 진영에서 축하 시를 썻는대 관찰사 어른에 시와 참군공의 시가 정당유고 부록 숙민공 유고에 실려 있다.
다음이 너무도 유명한 시남 선생이시다 선생의 휘는 계(綮)요 공은 선조 40년에 생하시고(1607-1664)현종 5년에 졸 하신 분으로 자는 무중(武仲)이오 호는 시남(市南)시고 시호는 문충(文忠)이시다 그리고 선친은 참봉으로 좌찬성에 추증된 양증의 아들이며 수원서 서촌공 진사 집(集)의 아우이시다 그가 어려서 출증하여 나이세살에 천자와 대학을 판독하였고 이소문을들은 선조 임금이 친히 불러 세살떼 임금을 아련한 천재정치학자 출신이시다 선생은 김장생과 김상헌의 문화인이며 우암 송시열과는 동문수학 동창생이며 서인의 같은 우두머리로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지이다 허나 안타까웁게 선생은 너무 젊어 졸하고 송시열 선생은 팔십 고령을 생하시여 천수를 누리며 높은 벼슬을 하여 오늘날 명재상으로 알려저 있을 뿐 선생 역시 역사가이며 성리학자요 도학정치가로서 그가 저서한 가류원류와 강거 문답등 의 나무판목 원판목이 그가 문인들을 길러낸 임천 칠성서원에 지금도 보관되여있다 그리고 황과 철 형재 세분 이서 나란히 한날한시에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 온장안이 유문의 세분 천재적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고 한다. 선생은 병자호란때 설서로서 척화를 주장 하다가 파직하였으며 임천으로 유배 되였다 1639년 죄에서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으로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16644년 주서로 등용되고 무안현감.부교리.로서 왕이 죽자 왕의 장례절차를 재도화하여 원류를 만들고 이어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자의 사용을 반대하다가 선왕을 욕되게 하엿다하여 온성으로유배되고 1657년 효종 8년에 풀려나 송시열.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문학에 등용 이듬해 병조 참지로서 비변사제조를 겸임 대사헌. 공조참의. 승지를 역임하였다 효종이 죽고 복상문재가 일어나자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기년설을 지지 3년설을 주장하는 윤휴. 윤선도. 등 남인을 논박하였다. 예문간 재학을것처 참판에 올랐다 그가 사후 숙종 15년(1715년) 간행된 그의 저서 가례 원류를 중심으로 노소론 사이에서는 치열한 당쟁이 벌어 젔으며 그는 칠산서원. 송림서원.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시남선생은 또한 유문이 배출한 당대의 커다란 정치가이며 학자와 역사가이시다 선생이 태여 나실 때 선친 양증공 꿈속에 현몽이 있엇는대 하늘에서 성화(별이 떨어지는)가 가슴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태여낫다고선생 시남전집은 전하고잇다 그리고 1993년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
- 10 -
생이 태여난 수원 옜 서촌땅(지금 발안 행정리)종중에서 그분의 형님이신 집자의 후손들중 병찬.병은.순재.성재등이 선생이 태여난 유허비를 제작 건립하였으며 1995년 익산 공의 묘소에서는 공의 재실을 증축하고 시남 공의 업적을 천하에 과시하였으며 지방 문화재로 지정 되였다. 다음은 철의 손자 척기(拓基)이다 공의 자는 전보(展甫)요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시다 공은 숙종 17년에 생하시고(1691-1767)영조 43년 에 졸 하신 어른이시다 공은 문과급재후 기계유씨의 작고 낮은 벼슬을 두루것쳐 최고의 벼슬인 좌. 우 정승을 역임한후 영의정에 올랐으며 나이 칠십이 넘어서는 벼슬 경지에 다달앗다는 기로소에(지금의 국가자문)입문 봉조하가 된다 공은 기계 유씨의 고금을 막논 하고 가장 존경 밭는 인물이며 언제 유씨 가문에 이러한 인물이 배출될지 모르는 가인이시다 공은 관찰사 철의 손자이며 명악의 아드님이시다 1714년(숙종40) 문과급재후 1721년(경종원년) 세제를 책립하자 책봉사의 서정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때 신임사화를 일으켜 집권한 소론의 언관 이거원 의 탄핵을 받고 홍원에 유배 되였다 1725년(영조1년) 노론에 집권으로 풀려나 참의 대사간. 참찬관이 된후 영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후일 사도세자 사건 후 영조의 등극을도왓다 그리고 신임사화때 죽은 김창집 이이명 두대신의 복관을 신원 시켰으며 그뒤 수차 임관에 불응하여 파직후 영의정. 영중추부사를 거처 봉조하가되였다. 진정으로 총명함과 영농함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공의후덕을 삼가 기린다. 그리고 그의 사촌 등을 알아보자 최기(最基)는 대사헌과 우참판에 올랐으며 조카 언호(彦鎬)는 좌의정을 지냈으며 정조조에 뛰어난 활약으로 정조와 함께 종묘에 기계유씨로서는 유일하게 배향되여있다. 그리고 언민(彦民)은 우참판이다. 그 이외에도 언술(諺述)은 지중추부사요 서예가로 명성이 났으며 수많은 가내의 준재들이 높고 낮은 반열에올랏다 그리고 대강 순서 없이 유명 일가를 간추려본다 먼저 명윤(命胤)은 정랑이고 명뢰(命賚)는 감역이며. 하익(夏益)은 판윤과부사이고. 명일(命一)은 정언과 좌랑이며, 명악(命岳)은 도사에 수령목사이고. 명웅(命雄)은 판윤과 판서이며. 명홍(命弘)은 관찰사와 판윤이고. 광기(廣基)는 부사이며. 정기(鼎基)요 자는 한성부참군을 지내셧으며 공의 따님이 강능김씨댁으로 출가 남편을 위시하여 판서 여덟을 배출하는 대 막대한 심혈을 기울엇다하여 지금의 종로 팔판동이 생긴 전설의 주인공이시다 다음이 숙기(肅基)는 판관이고. 언길(彦吉)은 시인이고. 언집(彦鏶)은 도정가참의이고. 한전(漢전)은 군수와 참의이고. 한지(漢芝)는 현감이고. 효정공 한모(漢謨)는 정조 을묘년(1795) 경주부윤으로서 공께서 시조의 사시던 집터와 우물터를 고로 들
- 11 -
에게 물어 찾아서 단 표를 세우고 이를 부운 재기라 하였다. 본시 시조의 산소가 실전 되여 찾지 못하던 차 숙종 4년(1678) 후손중 하겸(夏謙)이 경주 부윤이되여 참혈을 기계 답게리에서 찾아 봉축을 더하고 단 표를 새우니 지금의 미원동 임자현이 시조부군의 안식처요 비학산이 주봉이된 아름다운 자리요 영남 일대의 이름난 명당이라 일크른다 그리고 숙종 경인년(1710) 장헌공 명홍(命弘)이 경상 감사가 되여 묘소16칸을 새워 부운암(浮雲庵)을 두어 승도에게 금양하게 하며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지수재 척기(拓基)가 이곳 순찰사가 되였을 때 비를 새우고 지석을 묻어 비로소 시조의 표기가 새로워 젔으며 후일 여러 후손이 증축하고 인근 일대를 매입 관리하고 근간에는 유문을 50년간 지켜 오신 치웅 문장 어른과 근간에 대종 회가 새로 생겨 회장단이 관리하고 잇다. 또한다음은 한명(漢明)이시다 공은 참군 정기의 손자이시며 자는 매원(梅元)이시다 공은 숙종9년(1683-1742)생하시고 순조2년 졸하신분으로 감역을 지내셨으며 이분 아드님은 통억란을 지내신 하주(夏柱)어른이요 자는 사안(士安)시며 숙종 44년 (1718)에 생하시고 정조15년 (1791)졸 하신 어른이시다. 다음은 길준인대 길준(吉濬)은 철종 칠년 생하시고(1856년-1914년) 외정때 졸 하신 분으로 자는 성무(聖武)요 호는 구당(矩當) 이며 진수(鎭壽) 의아들로 서울 출신이고 이분의 손자가 병덕(炳德)씨 라고하는 분인 대 이분도 출중하여 서울대를졸업후 관공서에 근무하시다 건설 사업 등을 하사엿으며 지금의 대종중 대방동 5층건물을 대종회에 선뜻 내놓아 우리대종회가 면목을 갖추었으며 대종회는 이를 이용 장학회를 운영 후손에게 도움을 줄수잇는 기회를 주신 분이시다 아무튼 구당 길준은 개화 운동가요 우리나라 최초 유학생으로 김홍집 내각에서 등용 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내각이 붕괴되자 경재회를설립 한성 부민회장를 지냈으며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서유견문록이 있으며 우두를 들여와 종두법을 실시 의학계에공헌도하였으며 우편재도실시등 수많은 개혁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 진오(鎭午)는 박사로서 대한민국 헌법 창시자요 고려 대학 총장과 야당총제를것쳐 대통령 후보에 출마도한 인재였다. 이재 우리 유(兪)문은 위대한 조상의 얼과 자자손손 만대의 홍복을 융합하기 위하여 뿌리의 물줄기가 도도하고 은은하게 흘러 기계 유씨 자손가(子孫家)를 성대히 이룩 하는 대 더욱더 정의로웁고 참신하게 매진하자 우리조상들의 한지붕및 삶을 우리 마음속 고향이요 뿌리라고 생각하고 그 터전의 경이로움과 존경을 가지고 성묘라든가 조상의 얼을 더듬을 때 잔잔하고 무아지경 과거를 회상하며 우리의 후손이 번창하기를 합장 기도 하며 천세만세 홍복을 누리자 ----------
-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