갬성 제주 05
추사관
제주 관광에서 추사관과 적거지는 유관심자에게는 성지와 같으나
요즘 젊은이들 제주 트렌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럴 만한 하나의 징표로는
제주 관광지도에 도드라져 보이는 여타 정보와는 달리 숨은 듯 작은 글씨여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번 제주행의 네 군데 중점 대상 중 하나가 추사 연관 지역이었음에 가능한 한 저세히 보고자 공을 들였습니다
추사 김정희, 호가 너무 많거늘 그 중 하나가 완당인데
청나라에 가서 만난 대학자 완원 선생을 흠모하여 자호했다는군요
추사는 1786 정조10년에 태어나서 1856 철종7년에 돌아갔습니다
나이 55세인 1840 헌종6부터 1848까지 제주에 유배되어 9년간 머물렀으니 적지 않은 기간이며
한 인간의 완숙기에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추사 선생은
병조참의까지 오르고
생부와 양부 모두 고위직에 있었고 재산도 넉넉하여 모자람이 없는 행운아였던 셈입니다
청나라 연행길에 만난 옹방강 등 대학자들과의 교류로
이미 이루어진 개인의 학문적 성과에 더하여 해동의 통유 通儒 라 불렸던 추사
북학파
실학파
시대를 관통하는 통섭과 융합
그의 제주 유배는
자칫 분망 번다해질 수 있었던 말년을
학문적 완숙을 위한 겸손과 절제로 문걸어 닫아준 또다른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아들인 자신도 동일선상의 유배길이었는데
제주로 유배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긴 해도
여봐라 저 죄인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참으로 지엄하여 어길 수는 없겠으나
어찌 이리 먼길을 가라 하시는고 했을 겁니다
올봄에는 해배령을 내리시겠지 했지만도
아홉 해를 견디게 하다니
조금 가혹했다 싶은데
추사는 또 다른 건으로 북방 변경에 2년 유배 되었다가
과천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영욕점철의 파란만장 인생이었습니다
저는 추사가 획정했다는 황초령과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 이야기로 금석학의 실사구시
빼도박도 못하는 엄정한 진실
그 중요성을 깨달았던 적이 있거니와
서울의 봉은사 판전 현판의 늙수구레 굽은 획에서도 필의 힘을 느끼면서
늘그막에 과천에 머물며 글씨와 그림과 다선 茶禪에 몰입했다는 사실에서
당시는 과천현의 경계가 한강에 닿았다는 새삼스런 인식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저를 울리는 또 한 가지 일
제주로 건너기 전 들른 해남 대흥사
이광사 필 대웅전 현판을
저건 글씨가 아니라며 내리게 했다가
제주 유배 9년의 해배길에 다시 들러
내 생각이 바뀌었네 다시 걸게 했다는
사람은 생각을 쟁기질해야 오래 사는 법
기나긴 유배로 글씨 추사체가 완성되고
북학 경학과 동국 실학의 융합을 이뤄낸 추사를 단적으로 표현한 일화려니 여깁니다
제주 추사관의 특징은 이름에도 있습니다
기념 이라든지 미술 이라든지
상세 표기를 아니하고 뭉퉁거려 그냥
추사관 입니다
예산의 고택
과천의 기념관 등과 구별짓는 명명이려니 싶은데
추사의 여러 가지를 모았다는 의미도 되는 듯 싶더군요
특히 적거지와 정낭을 경계로 이웃하여 관람동선이 이어집니다
추사관 정문 입구는 서쪽으로 난 지하층입니다
코로나 대비 입장을 통제하느라 정문입구로만 드나들어야 하는데
저는 하마트면 임시휴관인 줄 알고 돌아설 뻔 했지 뭡니까
추사관은 전시물이 대부분 모사본 영인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딱 1점, 대정향교에 걸렸던 의문당 疑問堂 이 진품입니다
그래도 건축 자체는 봐줄 만 합니다
우리나라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인데
국보로 애지중지 하는 세한도에 그려진 내용을 구현하여
뭉툭한듯 1층만 있고 동그란 창 하나가 상징적으로 동향으로 났으며
세한도 소나무 세 그루가 적당히 벌려져 조경을 단순 심원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제주목 대정현
유배지로 가는 길이 거칠고 황량하다면서도 붉은 단풍이 뭍엣것에 비해 부드럽고 곱다던 기록이 있는데
지금도 제주 서남쪽은 북동쪽에 비해 덜 다듬어진 모습입니다
그만큼 제주의 자연풍광이 살아 있다는 것이지요
추사 유배길을 거치는 올레길이 세 갈래나 되고
대정현 읍성이 복원되어 있고
위리안치 圍籬安置 집을 둘러싼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상징적인 적거지도 볼만 합니다
밀납인형으로
추사와 초의 선사가 마주 보고 앉아 있네요
불교학
종교에 학문이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만
나중에 추사를 수식하는 말이 될 정도로 추사는 불교의 선지식이 되었다는데
저는 추사를 위해 바다를 건너 차 茶를 가져온 정도로만 읽었습니다
세한도를 받아간 제자나
차를 나눈 선사나
고독한 추사에게는 함께 시간을 나눈 고마운 사람들이었을 겝니다
외로운 사람과 시간을 나누는 일
왜 미리 깨닫지 못했을까요
추사관과 적거지 이곳저곳 사진 찍어 올려보면서
갬성 제주 5탄을 마무리합니다
다음은 추사의 교육현장이었던 대정향교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