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문학 세미나(2016.7.9.)
아무리 삼복더위라지만 숨이 찰 정도로 더위가 지속되는 장마다. 년 중 계획의 예정대로 문학춘추 작가회가 설립한 지 스물한 번째 세미나 행사가 장흥 일대에서 개최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약속된 집결지를 향해 움직여야만 했다. 출발지에는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보이지 않고 많은 분이 서성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늦어서 바동거렸던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교통 사정으로 잠시 지연되었던 버스가 도착했다. 아침부터 후텁지근함과 끈적거리던 몸과 마음이 버스 안의 에어컨 덕분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차는 출발했다.
유인물을 배부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간식이며 세세하게 시종일관 세미나 행사를 위해 땀을 훔치며 수고하시는 몇몇 회원님들의 모습에서 가족처럼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버스는 장흥 문화예술회관 앞에 도착했다. 그 순간도 차에서 내리기가 싫을 정도로 햇살이 따갑고 숨쉬기조차 힘든 불볕더위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장맛비가 추적거렸던 날들을 생각하니 이 또한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이리라. 오전부터 더위에 가쁜 숨을 무겁게 쉬시며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시는 원로 작가님들의 모습을 살피며 강당으로 들어갔다. 지방에서 따로 늦게 도착한 문우들과 안부를 나누며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문학 세미나 주제에 맞는 그 지방의 출신 문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장흥의 거사인 기산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 유적지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전남대학교 명예 교수이시며 한림 문학재단 고문이신 손광은 교수님이 강의해 주셨다. 세월의 무게만큼 깊고 값진 내용들로 어려울 것 같으면서 알차고 쉽게 들려주시는 강의에서 고개가 숙어진다.
강의 내용 속의 백광홍 님의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분의 약력을 요약한다면 그는 조선 중기 1522년에 장흥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미,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이며 아버지는 세인(世人)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씨이다. 어려서는 봉 명재라는 서당에서 수업하였고, 후에 시산, 지금의 태인)에 있던 李恒(이항)에게 가서 공부하였다고 했다. 1549년 (명종 4년) 28세에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52년(명종 7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단다.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 (명종 8년) 시부회(詩賦會)에서 장원하여 선시 십 권을 상으로 받고 호당에 뽑혔고, 그 뒤 1555년(명종 10년) 봄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관서 지방의 절경과 생활상, 자연 풍물 등을 읊은 기행가사인 관서별곡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듬해 1556년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려놓고 귀성하는 도중 음력 8월 전라북도 부안에서 3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성품이 올바르고 천생 자질이 뛰어난 것으로 보나 집안에 아우인 광안, 광훈, 사촌 동생 광성 등과 함께 문장가들로 이름을 얻음도 과히 짐작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고 했다.
두 번째 강의는 (문장 바로 쓰기)라는 주제로 목포대학교 교수님께서 열강해 주셨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쓰이는 단어들을 바르게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여러 가지 단어들을 각인시키는 시간이었다.
두 분의 강의가 끝난 후 장흥에서 이름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와 더불어 전통 막걸리와 회원님이 직접 담그신 약술과 곁들여 정담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다시 탐방하기 위해 장흥의 명승지를 소개하는 장흥군 문화유산 해설가님도 함께 버스에 합승하였다. 곳곳의 유산과 유물들을 설명해 주시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이 시대의 소설가 장흥 출신 한승원 작가님의 작품집과 요즈음 중요뉴스로 화제가 된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영국에서 세계 3대 문학상에 꼽힌 영국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되어 화제가 되었던 한강 작가가 한승원 작가님의 자녀라는 데에 더 큰 의미가 부각된 것이다.
국내 작가의 해외 유수 문학상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문학인들에게도 큰 영광이라고 자부한다. 이런 희소식을 공유하며 한승원 님의 시비가 줄지어 세워진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닫이 바닷가’ 해안 도로 600m의 거리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으며 한 편 한 편 시어들을 감상하는 여유로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바닷가 이름이 참 맘에 들었다. ‘여닫이 바닷가’ 또 다른 이름은 ‘연꽃바다’라고도 한단다. 한승원 작가는 「연꽃바다」라는 제목의 동화로 쓰셨다.
해설사의 감칠맛 나는 얘기를 들으며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곳곳에 해당화의 무리가 아기의 주먹만 한 붉은 열매들이 탐스럽게 열려 있어 행락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따금 바람과 염분이 섞인 해풍을 맞으며 정자에 걸쳐 앉아 시원한 수박을 쪼개 나눠 먹으며 잠시 더위를 식히기도 했다.
우린 다시 버스를 타고 문화유산 해설사와 함께 아름다운 곳 몇 군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장흥은 계곡의 맑은 물은 장흥 댐으로 흘러들어 탐진강을 만들고, 특산물인 친환경 농법으로 자연의 명품 한우, 표고버섯과 토요일마다 열리는 토요시장에는 인파로 북적대는 날로 전국에서 모여드는 곳이란다. 무엇보다도 편백 숲 우드랜드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 힐링을 맛보는 곳이라고 한다. 장흥의 유래를 보면 고려 인종은 이곳 출신 공예태후를 맞아 의종, 명종, 선종을 낳아 고마움으로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길이길이 흥하라고 ‘장흥’이란 이름을 내린 것이라 한다.
시간상 곳곳을 둘러볼 수 없지만 고영완 가옥(전남 문화재자료 161호) 1852년에 건립된 고택을 방문했다 입구에는 송백정이 고요하게 자리하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연못 가장자리로 빙 둘러 늘어진 배롱나무와 연못 한가운데 푸른 소나무 몇 그루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배롱나무가 두 가지 종류였다. 가지가 반듯하게 곧은 것은 흰 나무이고, 앞에 휘어진 것은 붉은 나무다. 모심기 전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 벼가 나올 때까지 백 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 또는 쌀나무라고도 한다.
시객들은 이 연못의 이름이 풍광 그대로 ‘송백정’이라는 걸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회원들이 옛 시인들의 풍류를 따라 호흡하며 시를 읊었다. 선조의 풍류를 이어받은 문인들이기에 즉흥적으로 노래한 시조들이 연못에 일렁이는 듯했다. 그곳의 한쪽에 우뚝 솟은 시멘트 기둥 네 개가 눈에 거슬렸다. 알고 보니 그곳에 누각을 지으려고 했는데 그 당시 송백정의 주인은 독립운동가로 제2대, 5대 국회의원으로 지낸 고영완 씨가 일제 강점기 때 연못에 정자를 지으려고 기둥을 박았다가 정자 지을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급하게 돌리느라 짓지 못하고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사연을 듣고 나니 고영완 선생님의 독립심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옆으로 청아한 대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시원하게 그늘이 되어 한참 머물고 싶은 시간이었다. 도랑물이 흐르는 중심으로 고 씨 일가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의 고택답게 자연을 그대로 살렸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졸졸 흐르는 도랑을 건너 대문을 향해 경사지게 놓여 있는 고풍스러운 돌계단이 참으로 멋스러웠다. 곳곳에 이끼와 양치식물들이 촉촉하게 자라서 오랜 세월을 대변하듯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계단 입구부터 아름드리 고목 두 그루가 뒤엉켜 굵게 자리하고 옆으로 튀어나온 모형이 어찌 보면 남녀가 서로 껴안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사랑 나무’라고 했다. 참으로 신기했다. 발걸음조차도 조심스럽게 돌아보라는 무언의 품위가 전해지는 곳이다.
고영완 가옥(전남 문화재 자료 제161호)은 할아버지 고재극이 1852년에 건립했단다. 전형적인‘一’ 자형 겹집으로 목조 기와집이며 북향집이다. 원래는 ‘정화사’라고 하는 절터였다고 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퇴를 둔 목조 기와 팔작지붕(위쪽 절반은 세모, 아래쪽 절반은 네모꼴인 지붕 집이다. 1m가량 높은 축대 위에 외벌대의 기단으로 자리 잡고 다듬은 원형 주춧돌을 놓았으며 바깥기둥은 원형으로, 안 기둥은 사각으로 세웠다. 청아하고 고풍스러운 자태가 앞으로도 잘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고택 옆으로 작은 숲속에 약수터가 더위에 갈증을 해소해 주듯 반갑게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하듯 한 바가지 약수를 들이키는 순간 더위는 잠시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도란거리며 그곳을 나와 계획에 없던 즉흥의 장소로 김홍식 수필가님의 안내를 받으며 차는 움직였다.
좁다란 농로로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지나서 더 이상 차는 갈 수 없어서 임시방편으로 정지하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걸어야 했다. 해발 200m쯤 되어 보이는 산 능선에 자리한 농장을 향해 산허리 길을 따라 그늘 한 점 그리움과 불볕을 머리에 위고 민둥산을 자연 찜질하듯 걸어 올라갔다. 호기심 가득 안고 샛별 푸른 농원에 겨우 도착하니 농장주인 나상렬 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미풍에 한숨을 돌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장흥읍과 병영면을 잇는 장강로 금강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약 5만 평의 야산을 정리하여 각종 조경수와 꽃, 그중에서도 듬직하게 수형이 잡힌 소나무(반송)들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올봄에는 철쭉 축제를 열어 많은 관람객이 모이기도 했단다. 일부는 펜션을 그림처럼 지어 좋은 사람과 공유하며 훈훈한 삶으로 이어가는 꿈이 가득하셨다.
어쩌면 샛별처럼 반짝이는 주인의 후덕한 얼굴이 인간 승리로 보였다. 오래전부터 배나무 과수원과 돼지 사육장도 운영하시며 5년 전부터 샛별 푸른 농원이라는 이름을 걸고 남은 이익금은 불우한 이웃에게 건네는 참다운 사람의 정신을 엿 볼 수 있었다. 그분의 아내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시원한 수박과 간식들을 준비하여 베푸시는 모습에서 꾸밈이 없는 인정 넘치는 부부임을 알 수가 있었다.
샛별 푸른 농원, 새별처럼 일찍 일어나 세상을 비추라는 뜻이라고 한다. 부부의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그곳을 내려왔다. 짧은 하루지만 같은 생각으로 같은 시간 속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