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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월 중순(10수)
하루시조042
02 11
각씨님 외배미 오려논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각씨(閣氏)님 외배미 오려논이 물도 많고 걸다 하데
병작(倂作)을 주려 하거든 연장 좋은 나를 주소
진실(眞實)로 주기곳 줄 양이면 씨 지어 볼까 하노라
외배미 – 외진(외딴, 동떨어진) 논배미(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역).
오려논 – 올벼(제철보다 일찍 여무는 벼)를 심은 논.
병작(倂作) - 竝竝作. 지주(地主)가 소작인(小作人)에게 소작료(小作料)를 수확량의 절반으로 매기는 일. 뭇갈림.
소작할 양이면 겸손해야 할 터이나, 다소 불손할 뿐만 아니라 외 오려 물 걸다 연장 등의 은유가 자못 성적(性的) 상상(想像)을 자극하고 있네요. 끝내는 씨를 지어 볼까 한다네요.
정월 대보름께면 소작의 연장 여부나 도지 조건 등을 새로하거나 재확인하는 일도 농촌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병작 조건이라면 해볼 만하다니, 지금 농촌의 현실과는 매우 다릅니다. 지금은 영농비가 급상승하고, 기계화로 인한 농부의 역할이 별로 없어져서인지 1마지기에 2가마 정도라더군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도 내막적으로는 무너진 지 오래고요.
초장 첫구의 ‘진실로’는 해석을 잘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소작을 주는 입장에서 이런 연장 좋은 소작인의 속셈을 못 알아차리는 가운데 어찌어찌해서 주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고, 이런 결과에만 치우쳐서 저한테밖에 줄 사람이 없다고 확대해서 ‘내 뜻대로’라는 의미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들이 민 단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3
02 12
금조옥토들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금조옥토(金鳥玉兎)들아 뉘 너를 좇니건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에 허위허위 다니는다
이 후(後)란 십리(十里)에 한 번씩 쉬엄쉬엄 니거라
금조옥토(金鳥玉兎) - 금과옥조(金科玉條)라는 말에서 비슷하게 조립한 모양입니다. 새와 토끼를 높여서 부른 표현이지요. 이 작품 안에서는 빠른 속도로 바삐 움직이는 특징을 살려 뽑았습니다.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 아득히 높고 먼 하늘.
허위허위 - 손발 따위를 이리저리 내두르는 모양. 또는 힘에 겨워 힘들어하는 모양.
니거라 – 가려무나
십 리는 4킬로미터입니다. 중국에서는 1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열 배인 셈인데요, 어쨌든 쉬엄쉬엄 다니는데 최소한의 구간을 정해준 모양새입니다.
구만리장천은 하늘을 나는 금조몫인데, 땅에서 뛰는 옥토몫은 특별히 따로 없습니다.
허위허위에 대립히는 쉬엄쉬엄이 돋보이는 표현입니다. ‘발밤발밤’이라는 말도 있지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을 뜻합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작자를 김상헌(金尙憲)으로, 아니면 조식(曺植)으로 표기된 가요집도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4
02 13
꽃이면 다 고우랴
무명씨(無名氏) 지음
꽃이면 다 고우랴 무향(無香)이면 꽃 아니요
벗이면 다 벗이랴 무정(無情)이면 벗 아니라
아마도 유향유정(有香有情)ㅎ기는 님뿐인가
쉬운 어휘로 님에게 바치는 찬사(讚辭)입니다.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꽃에 향기가 없으면 꽃으로서 의미가 반감하고, 벗이 정이 없으면 벗이라 이르기 어렵다는 일반론(一般論)으로 초장과 중장을 사용하고, 종장에서는 돋보이게 내 님은 향기롭고 다정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뜯어볼 점은 남녀간의 ‘님’ 역시 ‘벗’이라고 본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남사친’ ‘여사친’이라고 하여 ‘여친’ ‘님친’과는 다른 의미를 주는 것과 비교하면 옛사람들의 정서가 다른 점입니다.
아무튼 남녀를 불문하고 ‘유정(有情)’이 중요한 관건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종장 끝 구 세 글자는 창법(唱法)에 따른 생략으로 ‘하노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45
02 14
내 홀로 긴한 생각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 홀로 긴(緊)한 생각 언약(言約)이 지중(至重)ㅎ기로
아니 불 잊을 망을 폐부에 새겼으니
지금(至今)에 말 같고 정 다른 일 낸들 어이 하리오
긴(緊)하다 – 굳게 얽히다.
폐부(肺腑) - 마음의 깊은 속.
지금(至今) - 지우금(至于今). 지우금일(至于今日).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기서는 지금(只今- 말하는 바로 이때에)으로 좁혀 해석해야 할 듯합니다.
언약이 틀어졌음을 아쉬워하는 노래입니다. 살다보면 한두 번 맞닥뜨리는 일이겠습니까, 어디. 오죽하면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법이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생겼을라고요.
우리말의 맛깔나는 부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불망(不忘)을 풀어서 운률을 살렸고, 같고 다르다며 말과 정을 대조시켰습니다.
종장의 ‘낸들 어이’에는 숙명(宿命)으로 받아들이는 체념(諦念)이 드러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6
02 15
너같이 무정한 님
무명씨(無名氏) 지음
너같이 무정한 님 생각느니 내 그르다
돌치면 잊을 줄을 번연히 알건마느
지금에 알고도 행ㅎ지 못하기로 그를 답답
돌치면 – 돌이키면.
전연히 - ‘번히’의 본말. 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이 분명하게.
무정한 님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읊었습니다.
잊지 못하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자책(自責)하면서도, 마음 하나 돌이키면 되는 쉬운 일임을 왜 모르겠느냐고 그 방법조차 알고 있음에도, 끝내 답답할 정도로 못잊겠노라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게요, 어디 남녀간의 정이란게 이론처럼 쉽나요.
‘님’ 자리에다 ‘술’이나 ‘담배’를 넣어도 뜻이 통하네요.
종장 끝 구 세 글자는 창법(唱法)에 따른 생략으로 ‘하노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7
02 16
넓으나 넓은 들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넓으나 넓은 들에 시내도 길도길사
눈같은 백사(白沙)는 구름같이 펴 있거든
일 없는 낚대 든 분네는 해 지는 줄 몰라라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읊었습니다. 초장의 반복어법과 중장의 직유 수사가 전원의 풍광을 잘 나타냈습니다. 백사는 희고 깨끗한 모래밭인데, 구름같이 널찍하게 펴 있군요. 종장의 등장인물은 한가한 왈 가어옹(暇漁翁)이거늘, 이 시조의 작자는 그를 ‘분네’라고 불러 ‘맘에 들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군요. 벼슬을 버리고 귀촌 또는 귀향한 선비라 할지라도 쉬는 일 별로 없이 허리 굽혀 일해야만 하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어울릴 수 없는 ‘~분네’일 뿐이지요. 더하여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어떻든 성급한 조사(釣士)들께서는 벌써 손맛들을 봤다고들 하던데요, 올해도 낚시와 더불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기를 바랍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8
02 17
노세 젊어 노세
무명씨(無名氏) 지음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인생(人生)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아니 놀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어릴 적에 어른들이 여럿 모여서 춤추고 놀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 가사가 여기에 있군요. 초장은 아예 옮겨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른이 되고 보니 이 노랫말이 딱 맞습니다. 다릿심이 받쳐줘야 어디든 간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해외여행이 많이 늘어났기에 ‘젊어서는 후진국에, 나이 들면 선진국에’라는 팁도 딱 맞는 말씀이고요.
등산도 젊을 적 얘기고요, 나 많아지면 둘레길이 제격이죠.
화무십일홍에 이어지는 말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고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은 <천자문(千字文)> 책에 일월영측(日月盈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 여러분, 놀면서 즐기면서 일합시다. 일중독증에 걸린 사람들 의외로 많습니다.
종장 끝 구 세 글자는 창법(唱法)에 따른 생략으로 ‘못하리’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49
02 18
누우면 일기 싫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누우면 일기 싫고 앉으면 서기 싫어
먹던 술 못 먹고 자던 잠 아니 오네
인간(人間)에 좋은 일 적으니 흥심(興心)없어 하노라
일기 – 일어나기.
인간(人間) - 사람이 사는 세상. 여기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흥심(興心) - 흥겨운 마음. 또는 그런 마음이 일어남.
이 작품이 곧 내 얘기라고 여긴다면 제법 나이가 들었다고 하겠습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늦은 전화라도 올작시면 저걸 받아 말아 고민하고, 모처럼 앉았는데 짝꿍이 차 한 잔 타 달라고 하면 어이쿠 저 화상 하면서 지는 뭐 손이 없나 속으로 궁시렁대는 것이지요.
의사가 좀 더 인간답게 살려거든 결단코 술 끊으세요 했는데, 굳이 의사 말은 뒷전에 놓고 다른 그럴싸한 이유 찾아다가 알콜성 치매 운운하며 술도 끊어보고, 어쩐지 잠이 안 오는 밤에는 그 탓이 금주(禁酒)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아무리 기쁜 일도 내게는 기쁘지도 않은 것 같고, 슬퍼도 슬픈 척도 하지 못하는 세월이니, 이제는 딱 하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하나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뭐라고요? 제가 너무 일찍 늙었다고요? 조로(早老)라고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0
02 19
눈을 외다 할새
무명씨(無名氏) 지음
눈을 외다 할새 마음인들 옳을넨다
눈은 보거니와 못 참는 너도 외다
보거니 못 참거니 하니 아무 왼 줄 몰라라
외다 – ‘그르다’의 옛말.
초장을 쉽게 풀어보면, 보는 눈을 그르다고 할 것같으면 마음 또한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도가 되겠스비다. 종장의 ‘아무 온 줄’은 ‘누가 진짜로 그르다고 할 줄’ 정도가 되겠고요.
우리말의 옛모습과 쓰임 모양새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하던가요. 시간이 흐르면 고어(古語)로 따로 모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할새’나 ‘넨다’ 등의 어미도 이젠 옛말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눈(眼)과 마음(心)’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될 것같은데, 눈은 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마음은 참을 수가 없는 입장이니, 한 가지 일을 놓고는 서로 옳거니 그르거니 할 수는 있겠다 싶군요.
눈과 마음이 서로 옳다 그르다 하지 앟고 평온한 날을 보낼 수 있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1
02 20
눈물이 진주라면
무명씨(無名氏) 지음
눈물이 진주(眞珠)라면 흐르지 않게 싸두었다가
십년후(十年後) 오신 님을 구슬성(城)에 앉히련만
흔적(痕迹)이 이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이내 - 그때에 곧. 또는 지체함이 없이 바로.
아재개그시절, 퀴즈 – 세상에서 가장 긴 라면은?
정답은 ‘바다가육지라면’이었지요. 이 작품 저자의 대답은 ‘눈물이진주라면’이겠습니다.
우리네 유행가를 주름잡았던, 눈물을 진주로 비유한 것은 꽤 오래 된 표현이라는 걸 알겠군요. 제 속으로 아픔을 삭혀가면서 만들어낸다는 진주조개 속의 진주, 그것들을 모아 구멍을 뚫고 비단실로 꿰어 목이든 팔목이든 걸어 보석이 되는 구슬. 눈물의 고귀함을 비유하기에는 달리 따라올 물건이 없습니다.
그런 눈물을 모아 구슬로 바꾸어 성채(城砦)를 짓고 그 자리에 사랑하는 님을 앉히겠다니, 그 더욱 진실을 빛나게 하는 비유입니다.
눈물이 말라가는 세상.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네요. 요즘 안과에서 ‘인공 눈물’ 처방이 많이 나간다고 하는데, 안구건조증이라나 뭐라나. 드라마 속에 푹 빠져서 걸핏하면 울어대는 노인들은 안과에 안 가도 좋으니 하나의 득(得)이라 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음수율의 틀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노래처럼 할 수 있는 시조 형식은 아주 쉬운 우리 고유의 소통 수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