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공기가 차갑다. 그믐 달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아파트 위 동쪽하늘 나즉이 실눈을 뜨고있다.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서는데 갖 구운 듯 바게뜨 빵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스크린도어 속 보이지 않는 철로로 들어올 전철은 미명의 어둠 속 터널을 질주하여 더 크고 넓은 도심으로 공항으로 근교 산으로 또는 각자의 목적지로 사람들을 태우고 가서 내려놓을 것이다.
태평에서 전철 문이 막 닫힐 무렵 검은 색 롱-패딩 차림 여학생이 달려들어 옆 빈 자리에 앉는다. 애써 참는 가쁜 숨결이 어깨를 타고 전해온다. 숨이 고르게 돌아오자 전철 앞줄에 앉은 젊은 남녀들처럼 이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수서에서 환승한 3호선 전철 안은 대체로 한산하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던 시인 유하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공장, 국화빵기계, 지하철 자동 개찰구"라고 했던 그 압구정을 통과한다. 그의 말처럼 지금도 압구정동은 "욕망의 평등사회이자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인지 궁금하다.
올해 겨울 패션의 이이콘 중 하나는 롱-패딩이지 싶다. 가벼우면서도 추위를 잘 막아주는 기능성 비교적 저렴하다는 경제성 그리고 보기에 좋은 디자인의 유려한 멋이 잘 어울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롱-패딩은 바람부는 날 압구정식 비뚤어진 욕망의 분출이 아니라 보통사람 삶의 지혜로운 투영이다.
연신내에서 전철을 내려 친구 M과 H를 만나 버스로 북한산로를 달려 우이령길 입구로 갔다. 우이령길은 도봉산과 삼각산이 경계를 이루는 고갯길로 장흥면 교현리와 서울 우이동을 잇는다. 68년 일어난 1.21사태로 폐쇄되었다가 2009년 7월부터 인원수를 제한하여 출입을 허용하고 있단다.
하루 천 명까지만 출입을 허용하는데 친구 M이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인터넷 사전신청을 했던 터였다. 버스에서 내려 500 미터쯤 떨어진 탐방지원센터에서 예약여부를 확인하고 옛 신작로처럼 넓고 평탄한 그 고개길로 들어섰다.
맑은 하늘과 차갑고 청량한 공기가 시리도록 눈과 가슴을 치고들어온다. 길에 내린 눈이 기포를 머금은채 녹지 않고 얼어 등산화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낸다.
고갯마루 쪽으로 올라가다 도봉산 자락 석굴암 입구에 다다를 즈음 좌측으로 거대한 바위 봉오리 다섯 개 즉 오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머리 위에 돌덩이를 이고 있는 모습들이 장관이다.
반대편 우이동쪽에서 햇살을 등지고 고개를 넘어오는 몇몇 탐방객들과 스쳐지나며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시간 반이면 고갯마루에 닿는다. 전차 방어벽이 양쪽으로 늘어선 고갯마루에는 기념 표지석과 함께 '좁은 소로였던 이 길을 65년 미군 36공병단 소속 2개 대대가 차량통행이 가능한 작전도로로 뚫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햇볕이 잘 드는 우이동 방향으로의 내리막길은 눈이 대부분 녹아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길고 완만히 뻗은 그 길을 빠져나오니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신발끈을 조이고 스틱을 펴는 등 탐방객들이 미끄러운 길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북한산 둘레길을 벗어난 영봉쪽으로 오르는 길 산 기슭에 용덕사와 신검사가 자리하고 있다. 북한산 용의 머리부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용덕사는 증개축 공사가 한창이다. 법당 사이 비탈에 마애불이 각인된 거대한 바위는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듯 위태해 보인다. 신검사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고 미끄러운데 그 절집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개 두 마리만 낯선 산객을 향해 짖어댄다.
우이동 만남의 광장에서 화계사까지 강북구에 속하는 북한산 둘레길은 덕성여대 부근 솔밭근린공원까지의 소나무숲길, 이준열사 묘역까지의 순례길, 북한산생태숲까지의 흰구름길로 이어진다.
백운천을 따라 걷는 소나무숲길 구간은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의 삼각산이 온전히 웅자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어 딴 곳으로 눈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오후 한 시경 덕성여대 입구가 눈에 들어오는 솔밭근린공원 가장자리 식당에 들러 잠시 쉬며 점심을 들기로 했다. 유명산 자락에 있는 본점의 분점이라는 이 식당 주 메뉴라는 'ㅂㅇ해장국'은 얼고 경직된 몸을 풀어주고 마음까지 녹여주었다.
둘레길 제2구간 순례길은 의암 몽양 심산 유석 해공 이준 등 구한말 일제 그리고 광복전후 시대의 독립투사 정치인 등 선각자들 묘역과 4.19 민주묘지가 있다. 산자락과 능선을 따라난 길은 곳곳에 내린 눈이 녹지않고 얼어붙었지만 마음은 금새 뜨거워진다.
통일교육원 좌측으로 돌아서며 시작되는 흰구름길로 들어선다. 사유지를 비껴 능선 위로 놓인 계단을 오르내리며 걷는 길이라 이마에 살짝 땀이 스며나온다. 태양은 여전히 북한산 능선 위 한 뼘 높이로 여유롭다.
삼각산 아래 수유동 화계사는 조선 중종때 창건된 사찰로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범종각 등이 있다. 템플스테이 등을 위한 객사가 입구 양쪽을 높이 가리고 있고 그 뒤에 자리한 대웅전을 비롯한 법당들은 오히려 낮고 소담하다.
화계사를 뒤로하고 능선 마루로 올라서면 구름전망대가 맞이하는데 그 위에 서면 강북과 성북 두 인접 지역을 비롯해서 멀리 수락 불암 아차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위를 둘러보며 한참 동안 전망대에 머물다가 대궐 궁중 무수리들과 주민의 빨래터이자 휴식처였다는 빨래골로 내려서며 애초 정릉까지 계획했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북한산과 도봉산 외곽을 한 바퀴 도는 20개 구간과 우이령 구간 등 총21개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네 개 구간을 걸은 셈이다. 올레길 오솔길 마실길 달맞이길 자락길 등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길을 따라 사람들은 돌고 돈다. 탑돌이 하듯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는 바램을 쫓고 쫓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