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인을 찾아서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리라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2025.8.26)
도산면 원천리 생가터에 세운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
버스는 도산서원을 거쳐서 퇴계종택과 퇴계묘소를 지나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너른 벌판이 보이고 왼쪽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이곳이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 고향이다. 퇴계 14대 손인 이원록이 이육사이다. 친가는 오랫동안 글과 벼슬을 하였고, 외가는 의병장으로 이름난 왕산 허위(경북 구미) 집안이다. 왕산은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된 최초의 의병장이다.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가는 길 왕산로는 그를 기려 붙인 이름이다. 왕산의 후손은 안동으로 시집갔으니, 한 분은 이육사의 어머니요, 한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손부이다. 육사는 친가와 외가 모두 강경 항일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육사는 베이징에 있는 중국대학에 입학하였다가 다음 해 1927년(23세) 여름에 귀국하였다. 그해 대구에서 장진홍의거에 얽혀 1년 7개월 감옥에 갇혔다. 이때 수의 번호 264가 그의 아호 육사(陸史)가 된 것은 익히 아는 일이다. 이육사의 딸은 "어머니가 새 한복을 넣어주면 며칠 뒤 옷은 피범벅이 되어 나왔다"라고 증언하였다. 4형제가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육사 형제들은 자신을 고문하라며 굴복하지 않았다. 옥고를 치른 육사는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40년 삶 중에서 20년을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거듭 잡혀 17번이나 감옥에 드나들었다.
그를 알고자 한다면 그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시 속에 그의 삶이 묻어있다. 시 '청포도'를 발표한 것은 1939년(35세)이다.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청포를 입고 고운 님이 오기를 바랐다 (詩 '청포도'에서). '절정(絶頂)'은 그다음 해에 지은 시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북방으로 휩쓸려 오고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섰다 (詩 '絶頂에서). 1945년 해방되던 해에 동생 원조가 이육사 유고시 '꽃'과 '광야(曠野)'를 소개하였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는 그런 일념으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시인으로 시를 쓰는 일은 행동의 방편이라 했다.
이육사문학관을 나오면 바깥에 이육사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陸友堂)이 있다. 원래의 생가는 수몰되어 안동 시내 태화동으로 옮겼으나, 남의 손에 들어가고 원형이 변형되어 되돌리지는 못했다. 문학관 옆으로 100여 m를 올라가면 이육사 묘가 있어 절을 하고 나왔다. 생가는 원래 원천리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있었다. 댐 건설로 수몰지가 되어 집은 다 옮기고 벌판이 되었다. 거기까지가 만수위 지점이라 건축물은 들어설 수가 없다. 왕모산까지 시원하게 펼쳐진 광야가 되었다. 길 왼쪽 생가터는 청포도 시비(詩碑) 공원으로 가꾸었다. 그곳에 청포도 시비가 있다. 배롱나무와 전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 안동시내 낙동강변에 있던 것보다는 의미가 있고 분위기가 아늑하다.
이육사는 1943년 국내 항일 조직에 무기를 반입하고, 어머니와 큰형 소상(小祥)에 참여하려 귀국했다가 일경에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독립을 이루기 한해 전 1944.1.16 그는 이국 땅 북경 차가운 감옥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그의 기개를 되새기고자 다시 육사의 시를 읽었다. 육사야말로 꼿꼿한 절개로 진정 조국을 사랑한 민족시인이요 지사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시인이었다.
※ 이육사 : 본명은 원록(原祿) 호는 陸史. 1904년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 향제에서 퇴계의 후손 李家鎬와 항일의병장 집안 허형의 딸인 어머니 許길 사이에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남. 조부 이형직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도산 공립 보통학교 졸업. 1921년 결혼 9개월간 교편을 잡음. 1924년 도일하여 1년간 유학 후 1926년 유월한국혁명동지회 가입. 1927년 잠시 귀국하였다가 조선은행 폭탄사건에 연좌되어 2년 형을 받음. 그 뒤 북경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의열단 설립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 독립운동단체에 가담. 그 뒤 잡지사와 언론사에 몸 담았으나, 국내외 대소사건에 연루 17 차례 투옥. 1944년 1월 북경 감옥에서 41세를 일기로 돌아가심. 부인 안 씨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고, 끝의 아우 源昌의 아들 東博으로 대를 이음. 유고시집은 동생 源朝가 엮었으며, 유골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장조카 東英의 손으로 고향 선영에 안장되었음. 2004년 육사 탄신 100 주년을 맞아 이육사문학관 개관. 2017년 육우당(이육사 생가) 복원 개관.
※ 교통편
(갈 때) 안동 시내버스 512번 (단천리행) 교보문고 건너 10:57 - 원천 (이육사문학관) 11:50
(올 때) 급행 3번 (안동터미널 행) 원원천 14:07 - 안동시청 15:05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이육사 친필
어머니 회갑 기념 병풍. 병풍 끝에는 회갑연에서 형제의 역할을 써 놓았다.
이육사가 쓰던 벼루
이육사가 그린 난초 그림
이육사 시집. 맨 오른쪽이 초간본이고, 나도 수십 년 전 오른쪽에서 세번째 청포도 시집을 청계천책방에서 구했다
시비 '절정'과 이육사 동상
이육사기념관 옆 이육사 부부 묘
2017년 복원한 이육사 생가 육우당
수몰지에서 안동시내로 이전한 이육사 생가 / 안동시 태화동
수몰지가 된 이육사 생가터
이육사 생가터. 멀리 이육사문학관이 보인다
생가터는 수몰지이다. 안동댐 만수위 표시가 보인다
청포도 시비 공원에 있는 청포도 시비
이육사 시비 공원에 있는 청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