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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문학
정삼조
한 지역의 문학을 서술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문학의 시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는 문제로부터, 문학단체들을 중심으로 서술해야 하느냐하는 문제가 있고, 지역이 고향인 문인만을 다루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 작고 문인과 지금 활동하고 있는 문인의 비중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문제 등의 난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또 객관적인 시각에서 쓰여져야 하는 난제도 있다.
그런데 이 글의 진짜 난제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사천 지역이 옛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합쳐서 된 지역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원래는 사천군의 수남면과 문선면이 합쳐져 삼천포면(1918)과 삼천포읍이 되고(1931), 그 읍이 남양면을 편입하면서 삼천포시(1956)로 된 것이었으니 옛 삼천포 지역과 사천 지역은 삼천포읍 시절부터 헤아리면 분리돼 독립된 생활권을 유지해 온 세월이 60여 년을 헤아리게 된다. 문학 활동도 양 지역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고, 공교롭게도 이 글의 시발이 되는 시점도 양 지역이 분리된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니, 통합 사천시(1995년) 이전의 문학은 옛 삼천포 지역의 문학과 옛 사천군 지역의 문학을 분리하여 정리할밖에 없다. 이를 위해 삼천포시지와 사천군지를 참고하였는데, 특히 옛 사천군 지역의 문학 서술은 이에 힘입은 바 컸다는 것을 밝힌다.
1. 통합 이전 삼천포 지역의 문학
전술한 바와 같이 삼천포는 사천군에 속한 외곽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어업이 흥성하면서 항구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차츰 사천군을 벗어나 독자적인 생활권을 갖춘 곳이다. 한적한 곳이다보니 조선시대에 큰 문장가가 배출되었다는 기록은 없고 조선조말
개화기 무렵에 팔문장이 나고, 그분들이 남겼다는 시들이 전해져 지역의 문학적 자존심을 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에도 초등학교가 생기고, 그와 병행하여 야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야학인 勞動夜學校(노동야학교)를 주축이 되어 이끌던 박대준 선생이 작시한 교가가 이 지역 최초의 현대시로 알려져 있기에 인용한다.
갈귀소리와 품꾼 노래에/ 오늘 하루해 다 넘어간다/ 남의 터에 사는 동무네들아/ 밤동산 저기 배우러 가자/ 밤일지라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글을 알기 위하여/ 낫과 괭이를 든 동무네들아/ 밤동산 저기 배우러 가자
고달픈 노동의 현실을 ‘갈귀소리와 품꾼 노래’, ‘낫과 괭이를 든 동무네들’로 표현하고 ‘밤일지라도 배워야 한다’고 함으로써 배움의 당위성을 강조한 노래인데, ‘남의 터에 사는 동무네들’이라는 구절이 이채롭다. 결국 이 구절이 항일의 정신을 담았다하여 이 노동야학교는 일제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다고 한다. 궁벽한 어촌의 초라한 야학이었지만 그 정신의 꼿꼿함이 어떠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박남조 선생에 이어 초기 삼천포문학을 이끈 이는 초정 김상옥 시인이다. 통영이 고향이고 1939년 문장에 시조 ‘봉선화’가 추천되어 등단한 김 시인은 일제강점기 말엽에 반일 활동을 한 관계로 삼천포로 잠시 피신해 있던 몸이었는데, 당시 신분을 숨기고 米倉(미창)의 서기, 도장파는 일, 행상 등에 종사하면서 문학수업을 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김 시인은 삼천포문화동지회를 결성하고 농어촌계몽대를 조직하여 한글보급운동과 농어민계몽운동을 실시하면서 <참새>라는 타브로이드판 어린이신문을 私財(사재)로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다. 1946년 11월 그 해 개교한 삼천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한 김 시인은 당시 박재삼 같은 학생에게 많은 영향을 남기고 삼천포를 떠났다.
박재삼 시인(1933-1997)은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고 할 만한 큰 시인으로 생전에 <春香(춘향)이 마음>을 비롯하여 15권의 시집과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 등 10권의 수필집을 내어 한국서정시의 전통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이다. 박 시인의 아버지는 사천군 용현면 출신으로 생활고로 인해 혼인 후 동경으로 이주했는데, 이로 인해 박재삼 시인의 출생지는 일본 동경으로 되어 있다. 박 시인이 네 살 때 박 시인의 외가가 되는 삼천포 팔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쭉 살게 되었고 박 시인의 성장 배경은 삼천포가 된다. 행상에 종사하는 부모의 가난으로 인해 초등학교 졸업 후 신문배달, 여학교 급사, 야간중학교 입학, 삼천포중학교 편입학 등의 과정을 거쳐 삼천포 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1회)한다. 삼천포중학교 재학 시절 운명처럼 김상옥 시인을 만나게 되는데 박 시인은 이 때, 교과서에 작품이 실린 김상옥 선생을 우러러 보고 그분의 첫시집(시조)인 <草笛(초적)>을 공책에 필사하여 읽으면서 문학에의 열정을 싹틔웠다고 한다. 습작 시절인 1949년 제1회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에 참가하여 시조를 써 차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장원은 시를 쓴 이형기 시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문예 지 1회 추천을 받은 그는 서울로 가 현대문학사에 근무하게 되고 1955년 같은 잡지에 서정주 최종 추천으로 등단하게 된다. 그 무렵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3학년까지 다녔고 그 이후 신문사 기자, 출판사 편집, 신문 바둑 연재, 전업작가 등의 일을 하면서 영면하기까지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하지만 그의 시에 나오는 자연은 대부분 그가 자라난 삼천포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삼천포에서의 생활이 그의 문학적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몸은 서울에 있어도 고향 삼천포를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박시인은 돌아가실 때까지 삼천포와의 인연을 놓지 않고 지역 문단과 늘 연락이 닿던 분이었고, 지역 문단의 활력에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이후 60년대 후반 무렵부터 80년대까지 삼천포 문학을 주로 이끈 이들은 여상영, 박재두, 방인영, 박건, 최송량 시인들이었다.
여상영 시인은 박재삼 시인과 같은 해 나서 박 시인과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부산 중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를 나와 고향에서 쭉 교편을 잡은 분이었다. 문협삼천포지부장을 오래 역임하는 등 각종 문학 활동을 주도하였고 끝까지 지역시인으로 남으며 시집 <흐르는 강물처럼>을 상재(1990)하였다.
박재두 시인은 원래 통영이 고향인데 부산사범을 나와 교사로 처가가 있는 이 지역에 근무하게 되어 이 지역 문학 활동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진주로 이사한 후에도 이 지역 문학과의 인연을 계속 이은 분이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1965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로 등단하였다. 시조집 <유운연화문>(1975)을 남겼고, 주요 시조문학상을 거의 받았으며,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방인영 시인은 진주에서 출생(1933)했으나 여러 지역에서 살았으며 젊은 시절과 말년을 삼천포에서 지낸 분이다. 초대 문인협회 삼천포지부장을 지냈고, 시집으로 <상남의 기적소리>를 상재하였다. 1951년 ‘嶺文’(영문) 추천으로 詩作(시작) 활동을 했다 한다. 이제 이 시인을 기억하는 이도 드물겠기에 그분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억새들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는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선 채/ 허리가 휘어지도록/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고 산다
이곳에서는/ 억새들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은 채/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허리가 휘어지도록/ 울부짖으면서 밤을 샌다
이곳의 억새들이/ 밤을 새워 허리가 휘어지도록/ 울부짖으며 견디는/ 슬픔과 외로움을/ 이곳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외로움과 슬픔을/ 억새들이 밤을 새워/ 대신 울며 죽고 있기 때문이다.
- 시 ‘신덕리 시편 7’ 전문
박건 시인은 196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입선되기도 했으며 특히 60-70년대 지역 문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분이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작고하였다. 삼천포시가를 작사했는데, 삼천포시가 없어짐에 따라 부르지 않는 노래가 되었다. 아래에 일절만 소개한다.
와룡의 높은 봉에 안개 걷히고/ 한려의 앞바다에 해가 돋았다/ 충무공 그 용맹이 길이 넘친 곳/ 영광과 새 희망의 꽃을 피우자/ 어화야 번영의 땅 우리 삼천포/ 영원토록 빛나리라 우리의 향토
최송량 시인은 1940년 삼천포에서 태어나 부산대학을 졸업 후 줄곧 삼천포에서만 공직생활을 한 분으로 60년대 이후 삼천포 문학의 산 증인이 되었다. 문협 삼천포지부장 및 초대 사천문협지부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여 <삼천포 육자배기> 등 6권의 시집을 내었다.
한편, 지역 문학 활동과는 별도로, 대부분의 문인이 시인들인 이 지역에서 소설로 등단하여 한국의 대표작가로 이름을 올린 김인배 작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 작가는 1948년 삼천포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진주교육대학 동아대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75년 소설 ‘방울뱀’으로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하늘 궁전> 등 다수의 소설집을 내고 있다.
문인단체 활동은 1972년 정식으로 한국문협삼천포지부가 결성된 것과 1990년 마루문학회의 결성을 크게 들 수 있겠다.
문협지부의 결성은 50년대 후반 여상영 박건 등이 주축이 된 청포도문학동인회에서부터 싹이 텄는데, 그 후 최송량 김홍태 박재두 조정만 장용근 등에 의해 미완성, 야항선 등의 동인지가 나왔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1963년 야항선의 동인들이 박남조 방인영 등의 회원을 확충하고 회색문학동인회를 결성하고 가두 벽시화전 등의 문학 행사를 가졌고, 1964년에는 어화문학동인회로 이름을 바꾸고 시화전 백일장 주최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2년 진주의 시인 이경순 박재두 등의 협조로 한국문인협회의 인준을 받아 그 해 12월 문인협회삼천포지부의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지부장 방인영 부지부장 최송량 사무국장 조정만을 선출하고 문협기관지 <삼천포문협>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들 외 창립회원은 박남조, 여상영, 조종만, 정시운, 김홍태, 지계생, 박건, 정상길, 박일, 황순옥 제씨였다. 73년 6월에는 <삼천포문협> 2집이 나왔고 73년 문협 회장 등의 이주로 새로 임원진을 뽑았는데 회장 여상영 부지부장 최송량 사무국장 정상길이었다. 이후 문협기관지는 어화로 이름을 바꿔 3(1986),4(1987),5집(1988)이 나왔으며 1989년에는 다시 <삼천포문학>으로 이름을 바꿔 6집이 나왔다. 1991년 다시 임원을 개선하여 최송량 시인이 새 지부장이 되어 문협을 이끌게 되었다.
한편, 1990년에는 정동주 시인이 이끌던 창작교실을 모체로 하여 마루문학회가 결성되고 6월에 마루문학 창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마루’는 삼천포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지역의 문학과 문화를 드러내는 데 의의를 두고 그 회원의 자격을 지역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 창간 동인은 김관식, 김정호, 김진환, 김태웅, 박종현, 배소영, 성창경, 이용우, 이종만, 전용문, 정동주, 정삼조, 정인진, 천덕찬, 최송량, 최인태, 허길수 제씨였다. 처음 계간으로 출발하여 4호(1991.6)까지 나왔으나 5호(1991.6)부터 18호(1998.9)까지는 반년간으로, 19호부터는 년간으로 하여 2012년 32호가 나왔다. 처음에는 회장을 두지 않고 주간 정동주, 총무 허길수 체제로 나왔으나, 3호 이후는 김정호, 김진환(5-12호, 주간 정삼조), 정삼조(13-18호, 주간 임화주 송창섭), 송창섭(19-22호, 주간 김관식), 김경(23-25호, 주간 박종현), 윤덕점(26-30호.,주간 박종현 하재청 김경), 이미화(31-32호, 주간 강애란) 제씨가 회장 직을 수행하였다.
마루문학의 성과는 우선 동인활동 중 소설로 김진환, 동화로 허길수, 시로 박종현 이용우 이종만 정삼조 천덕찬 김은정 박구경 김경숙 이만수 제씨가 등단한 것을 꼽을 수 있겠다. 지역 문화를 밝히고 드러내는 데에도 많은 애를 썼는데 이 중 특히 고 정인진 씨의 노고가 컸다. 정인진 씨는 지역의 민요 채취에 많은 공을 세웠고 특히 향촌동의 매향비를 밝히는 최초의 학슬논술을 발표하여 지역 문화 창달에 이바지한 공이 컸으나 과로로 요절하였다.
2. 통합 이전 사천군의 문학
사천군의 문학은 지리적으로 삼천포와는 거리가 다소 떨어져 왕래가 거의 없는 편이었고 상대적으로 큰 문학권인 진주의 영향 때문인지 독자적인 문학 운동이 다소 침체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큰 문인이 나오고 문학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천의 큰 문인은 아무래도 조향(1917-1984) 시인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조향 시인은 고향이 사천군 곤양면이라 하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지역 문학과 교류하였다는 언급이 없고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객지로 나가 교육을 받고 생활하다보니 고향과의 왕래가 없었던 듯하고, 지향하는 문학 세계가 향토색과는 거리가 멀어 지역 문인과의 관계가 소원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시의 개척자로서 조향 시인이 가지는 문학적 의의는 우리 시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에 이분의 문학에 대해 지역 문학계에서는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조향 시인의 대표시격으로 알려진 짧은 시 한 편을 인용해 본다. ‘에피소드’라는 시인데, 사람마다 감상은 다 다를 것이나, 기성의 관념을 파괴하고 나타난 신세계를 조명하려 했다는 평을 하는 사람도 있는 시이다.
열오른 눈초리, 한 잔 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보았다.
―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갔다.
사천 출신의 시조시인으로 김호길 시인(1943-)이 있다. 이 시인은 일찍이 ‘율’ 동인으로 활약하였고, 1967년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시집 <수정 목마름> 등을 상재하였다. 조종사로 일하였고,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하고 있으나 항시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의 문학 행사에 관심을 가진 분이다.
이 지역 출신은 아니나 용현면에 자리잡고 살면서 지역 문학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정동주 시인 작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은 앞서 언급한 마루문학의 창간 및 발간에 핵심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창작교실 등을 통해 후진 양성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시집 <농투산이의 노래>, 서사시 <논개>, 소설 <백정> 등 다수와 문학 작품과 <조선천민제도연구>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이밖에도 송랑 구연식, 손기섭, 조정애 등이 출향인사로서 지역문학을 빛낸 분들이라 하겠다.
문학단체로는 1952년 최영희, 박문영, 고병석, 백용기, 이남창 등 회원 34으로 ‘수양문학동지회’가 결성되어 동인지 <조개>를 2집까지 내었다. 이후 사천문화원 중심의 문학활동이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 ‘풀문학회’가 창립되었다. 회원은 초대회장 최인태 시인을 필두로 강영자, 강원중(2대회장), 서기원, 안대현, 오정환, 이상복, 이용우(3대 회장), 정영희, 조임선, 조현래 등 11명이었다. 이들은 해마다 시화전을 3회에 걸쳐 실시하였다.
3. 통합 이후 사천의 문학
1995년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자 문학단체도 자연스럽게 사천이란 지명을 사용하게 되고, 아울러 양 지역을 한데 아우르게 되었다.
통합이 되자 먼저 문협삼천포지부가 사천문인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양 지역을 아우르는 문인단체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초대 지부장은 최송량 시인이 삼천포지부를 이어 승계하였으며 1997년 2대 천덕찬 지부장(부회장 이만수, 사무국장 강경환, 편집국장 박대을)이 승계하였다. 1999년 <사천문학> 창간호가 발간되었고 이후 해마다 거르지 않고 발간되어 2012년 13호가 간행되었다. 지부장은 이후 김진환, 박대을, 김진환, 정삼조 제씨를 거쳐 현재는 박영배 시인이 맡고 있다. 특히 김진환 회장은 두 번에 걸쳐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사천문학>과 함께 <마루문학>도 꾸준히 발간되어 지역 문학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이 시기에 특기할 일은 지역의 큰 시인인 박재삼 시인이 작고(1997)하여 그분을 기리는 문학 단체가 생기고 그의 문학을 알리고 기리기 위한 ‘박재삼문학제’가 해마다 열려 지역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박 시인이 작고한 이듬해부터 사천문인협회 주최의 추모백일장 및 문학의 밤이 열렸는데 이것이 모태가 되어 오필근 회장 천덕찬 김진환 최송량 부회장 이재용 사무국장 박대을 사무차장 체제로 박재삼문학기념사업회(2001)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문학제가 운영되었고 이후 이 단체를 이어받아 정삼조 회장, 문인 부회장 김경 윤향숙, 사무국장 조수현 손미영, 사무차장 박영숙 김순희 정재숙 등 체재로 박재삼기념사업회(2004)로 개명하고 박재삼문학제를 개최하였으며 2008년에는 박재삼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이후 2011년도에는 박재삼시사랑회(회장 김경 김정렬)에서 문학제를 주관하였고 올해에는 박재삼문학선양회(회장 김경)에서 문학제를 주관한다. 이 문학제는 해마다 풍성해지고 다양한 면모를 띠고 있어 사천 지역의 든든한 문화축제로 자리잡았다.
이상으로 사천 지역의 문학을 개관해 보았다. 언급해 드려야 마땅할 문인도 더 많고 밝혀야 할 일도 많으나 지면의 부족과 글쓴 사람의 역량 부족으로 빠뜨린 부분이 많을 것이다. 죄송스런 마음 한량없으나 이와 같은 글이 더 능력 있는 사람의 손길을 만나 완성될 날이 있을 것이라 믿고, 또 그날의 참고사항 정도는 되리라 믿으며 스스로 자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