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에 ‘풍국면’이 대구에 설립되었단다. 그리고 1938년 ‘별표국수’ 팔아 현재 삼성이 된 삼성상회가 서문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런 설명을 먼저 하는 것은 대구가 ‘밀가리’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밀가리 반죽을 그냥 구워서 먹기엔 뭣해 속을 조금이라도 넣어 파는 것이 오늘날 그 유명한 납작만두라는 기원설이 전해져 온다. 우리는 ‘납작 만두’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납딱만두’라고 말했다.
납작만두의 원조는 어디일까? 도무지 그 기원을 찾을 길이 없다.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미성당에서 그 역사를 찾아보려 했으나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다. 납작만두하면 누가 원조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 통설은 원조 남산납작만둣집이고 미성당은 상품화시킨 집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누구는 이 소리를 듣고 펄쩍 뛴다. 미성당이 먼저란다.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그 기원설 같은 건 내겐 아무 소용없는 짓거리다. 난 맛만 좋으면 되니깐.
납작만두는 남문파와 미성당파다. 혹자는 교동파 이야기도 하는데 교동파는 칠성시장 만두골목에서 떼어다 파는 것으로 안다. 칠성시장 만두 골목에 가면 잎새만두라는 색다른 맛의 만둣집도 소개할만하다. 난 그 골목에 가면 만두도 사지만 빈대떡 재료도 같이 사서 온다. 교동 할매가 돌아가신 이후로 빈대떡을 제대로 먹을 수 없어서다. 그냥 참고로 적는다.
납작만두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선 시간 간격을 최대한 좁혀 두 집의 맛을 한꺼번에 비교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대구 시내에서 그래도 자기가 제일이라는 두 집을 시간 차로 독한 마음 먹고 맛을 음미하기도 했다. 결론은 맛은 비슷했는데 굽는 기술적 문제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두 집 다 전통이 있는 집이라 납작만두에선 별 차이가 없었다.
경북여고 맞은편 골목 안에 위치한 남문 납작만둣집은 아줌마가 고정적이고 불 조절과 뒤집는 시간을 적절히 해서 납작만두 고유의 맛을 잃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미성당은 만두 꼬락서니를 보면 누가 구웠는지 알 수 있다. 주인이 구운 것과 아줌마가 구운 것은 차이가 확연하다. 절대 태우지 않으면서 녹녹하게 굽는 비법이 만두의 맛을 좌우하건만 아무리 바빠도 대충하면 맛이 변질한다. 옛날 계명대 앞으로 이전한 미성당은 환경에선 많이 개선되었다. 노포의 이미지는 완전히 벗었다.
남문 납작만두는 미성당보다는 약간 도톰하다. 그래봤자 외지인들에겐 별 차이를 느끼지는 못할 정도지만. 외지인들이 느끼는 납작만두 맛은 ‘밀가리’ 냄새만 풀풀 난다고 한다. 하지만 대구사람들은 추억으로 먹는다.
첫댓글
납작만두는 대구에만 있는 음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멀리 사는 자식들이 대구에 오면 납작만두를 찾곤 합니다.
저는 남문만두에,
애들은 교동만두에 추억들이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납작만두에 집착하는 걸 보면
음식은 결국 '기억'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납작만두가 대구에만 있나요? 몰랐네요. 저는 그냥 만두보다 납작 만두를 더 좋아 합니다.
제주에서 만난이가 납작만두맛 그립다고 성홥니다.
일년에 한 번쯤 고교시절 그리며 계모임에서도 먹으러갑니다.추억의 납작만두 쩝!
대구 오면 연락하세요.
납작만두 사 줄게요.
@小 珍 (박기옥)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