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을 읽을 때 주의 사항
1.품(品) 하나하나가 완전한 경전 따라서 품 하나에서 완전한 화엄을 봐야
2.화엄은 佛行이 펼쳐지는 곳
부처의 자리에서 봐야 알든 모르든
특히 해가 아니라 행의 관점
3.화엄 수행은 십바라밀이 아니다
1.품(品) 하나하나가 완전한 경전 따라서 품 하나에서 완전한 화엄을 봐야
정통 화엄 해석은 소위 7처 9회라, 화엄경을 부처님이 7군데서 9번 설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화엄경 전체 품(品)을 따로가 아니라 연장선 상으로 해석합니다. 저는 이런 기존의 화엄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화엄경은 집성경전이라는 탄생 비화에서도 일러주듯, 처음부터 39품이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품들이 독립 경전으로 화엄세계를 설하는 것이 화엄경 탄생 과정에서 하나의 경전으로 묶어진 집성(集成)경전입니다. 비록 품들이 화엄경 한 권 안에 하나의 chaptor처럼 들어있지만 사실은 품 하나하나가 모두 독립된 경전인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경의 품들을 하나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연장선 상으로 볼 게 아니라 품 하나 하나에서 완전한 화엄을 봐야 합니다. 따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품 하나하나가 설하는 화엄 세계의 모습을 그 품에서 보고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화엄은 부처의 자리에서 봐야 합니다. 깨치든 못 깨치든 부처의 자리에서 화엄경을 읽어나가는 것이 올바른 화엄경 공부법입니다. (왜냐하면 화엄경은 부처님 밖에 없습니다. 중생은 없고 부처님만 있는 경전이 화엄경 입니다. 설하는 불보살이 있고 듣는 대중이 있지만 법좌의 불보살이나 청중 속 중생이나 사실은 모두 부처입니다. 그것이 화엄경 입니다)
2.화엄은 佛行이 펼쳐지는 곳
화엄은 부처님의 행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가 화엄세계가 되는 이유는 부처님의 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엄경에는 이해(解悟)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가령 이 세계는 모두 중생의 업력으로 만들어졌다든가, 이 세계가 이렇게 괴로운 세계가 된 것은 모두 우리의 일념과 너와 나를 나누는 분별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이해 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화엄은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것은 행(行)입니다.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니라 그런 이해가 실지로 행으로 실천되는 가르침을 설하는 경전이 화엄경입니다. 행과 실천이 없으면 화엄경이 아닙니다. 화엄은 많은 부분을 어떻게 부처님 행이 실천 전개되는가에 배치합니다. 십행 십회향 같은 곳이 대표적인 화엄 실천 품입니다.
이론보다 행을 중시하는 것이 화엄인데, 행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願)입니다. 원이 있어야 행이 올바르게 실천됩니다. 그래서 화엄은 행원을 이야기합니다. 깨치고 나서 맨 나중에 행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행원입니다. 그리고 중간도 끝도 행원입니다.
보현행원이란 것이 무엇인가? 보현이란 단어는 일체의 선(善)을 널리 꽃피우는 것인데, 일체의 선과(善果)를 꽃피우는 모든 행이 부처님의 행입니다. 부처님의 행은 우리에게 원래 깃든 그 넉넉한 마음을 현실로 꽃피웁니다. 우리가 본래 가졌던 생명성, 자비성, 무한 창조성... 이런 것들을 부처님 행이 과(果)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편찬자들은 경전 시작 처음부터 보현보살을 문수보살보다 먼저 배치했고 처음부터 보현행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일체의 불행(佛行)이 보현행입니다.
행원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信)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강력한 실천이 가능합니다(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맹신도들의 자살테러 같은 걸 참고). 그래서 화엄은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으로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믿음으로 화엄세계를 이루어 나갈 것을 가르칩니다. 보현행원품에도 행원의 첫 번째 행인 모든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禮敬諸佛)을 ‘보현의 믿음(我以普賢行願力故)’으로 시작하게 합니다.
3.화엄 수행은 십바라밀이 아니다
흔히 화엄수행을 십바라밀로 말하는데, 십바라밀이 화엄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화엄수행은 아닙니다. 화엄수행=십바라밀의 등식은 아닌 것입니다.
화엄수행은 바로 보현행원입니다. 보현행원이 화엄수행인데, 그러므로 화엄경은 거의 전체가 보현행원의 이야기로 차 있습니다(십바라밀 이야기가 나오는 품은 몇 개 안됨. 그러나 보현행원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함). 화엄수행을 정확하게 정립하지 못한 것은 법장 현수로 대표되는 중국 화엄종의 뼈아픈 약점인데, 이 약점 때문에 화엄은 실천의 화엄이 되지 못하고 이론의 화엄으로만 맴돌게 되어 결국 선(禪)이 중국 불교의 주류로 대체되는 결과를 맞습니다.
중국 화엄종이 화엄수행을 끝내 정립하지 못했던 이유는 보현행원을 명확히 정리한 화엄의 품이 기라성 같은 화엄 조사들 말년에 나왔기 때문으로 저는 봅니다. 보현행원을 열 가지로 정리한 보현행원품이 알려진 것은 40화엄에서인데, 40화엄이 나올 때는 이미 법장은 열반에 들고 법장의 제자 청량 징관이 화엄을 이어가고 있을 때이며, 그런 징관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열반에 들고 마지막 화엄조사인 규봉선사마저 2년 뒤에 열반에 듦으로써 보현행원품의 해석이 세밀하게 정립될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이런 이유로 보현행원품이 이후 중요하게 취급되기는 하였지만 화려한 화엄이론이 화엄의 주류가 되고 보현행원은 방계(傍系)가 되어버리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화엄수행법은 ‘보.현.행.원,입니다
-2023.8.2.
첫댓글 한가한 백중한 오후에 급히 쓴 글이라 보완 수정할 부분이 많으리라 봅니다.
일단 글 올리고 하나하나 추후에 보완 내지 수정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화엄은 부처의 자리에서 봐야 합니다. 깨치든 못 깨치든 부처의 자리에서 화엄경을 읽어나가는 것이 올바른 화엄경 공부법입니다.
---> 요 부분은 방금 추가한 부분입니다.
화엄 강의를 보면 보현행원이 중요하다, 고 말씀은 하면서도 보현행원의 관점에서 화엄을 강의하시는 분은 거의 안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거의 전무).
저는 이런 모습이 그동안 매우 이상했는데, 요즘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 듯합니다.
왜 화엄 강사들은 보현행원의 중요성은 이야기하지만 보현행원의 관점에서 화엄 강의를 하지는 않는가?
그 이유를 저는, 작금의 보현행원 강의는 거의 대부분이 중국 화엄종사들이 남겨놓은 저서에 의지해서 하기 때문으로 봅니다.
중국 화엄 조사들은 화엄경 자체의 저서는 많이 저술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현행원품의 강의는 청관징량의 저술이 아마 다일 겁니다.
왜 그런가? 보현행원품이 늦게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엄 조사 대부분이 보현행원품의 논서를 쓸 기회를 물리적으로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화엄경 강의 하시는 많은 분들이(출가자, 교수들 포함) 경전 자체를 직접 읽어보시고 화엄 강의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야말로 화엄경은 안 보시고 대신 다른 분들이 얘기해 놓으신 '화엄학'을 공부하시고 강의하시는 것이지요.
보현행원품은 학문으로 정리하신 과거 조사들이 안 계시니 당연히 후학들은 강의 못하십니다
화엄이 믿음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화엄 세계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화엄세계는 범부의 상식 차원을 넘어서 있습니다.
따라서 상식으로 사는 우리는 화엄경을 봐도 들어도 이해가 잘 안 갑니다.
그러니까 그냥 믿어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창조주를 가르치는 종교가 처음부터 믿음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창조주의 세계를 피조물이 어케 알겠습니까.
그러니 믿어라!고 하는 것이지요
보현행원과 화엄경!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