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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3강
말씀 : 디모데후서 4:1-22
요절/ 디모데후서 4:2-0
말씀을 전파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의 수신자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현재 두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바울의 순교로 상징되는 로마제국의 박해입니다. 공권력은 기독교인들을 불순세력으로 매도했으며, 교회는 싸늘한 세상의 시각에 둘러싸여 존립 자체를 위협 받았습니다. 내적으로는 거짓 교사들의 침투였습니다. ‘유대교로 돌아가자’ 혹은 ‘이방종교와 비슷하게 가자’는 가르침들이 교인들에게 쉽게 어필했습니다. 디모데는 안팎으로 몰려오는 고난앞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를 돕고자 편지를 썼습니다. 1장에서는 ‘복음을 지키라’, 2장에서는 ‘고난 받으라’, 3장에서는 복음에 거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4장에서는 ’복음을 전파하라‘ 권면합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본인도 살고 모임도 사는 비결입니다. 반면 어렵다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본문 말씀이 우리 시대의 어려움을 이기고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는 믿음으로 와 닿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바울의 압박이 엄청 납니다. 디모데가 얼마나 오래 바울과 함께 했습니까! 1차 전도 여행 때 회심하여 제자가 되고 2차 전도여행 때부터 선교역사에 동참했습니다. 대략 선교현장에서만 최소 15년 이상 동역했습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를 뛰어 넘어 아버지와 아들 같은 끈끈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심판장 그리스도, 주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를 총동원하여 엄히 명령합니다. 주변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옵션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절대명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운데 절대명령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학사들은 눈이 오든지, 눈이 오지 않든지 혹은 독감에 걸리든지 걸리지 않든지 출근해야 합니다. 엄마들은 기분이 좋든지 나쁘든지, 자녀들이 속을 썩이든지 잘하든지 때마다 케어해야 합니다. 지난 주 모 이스라엘 선교사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 미사일이 날라오는 것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 저희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무사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젊은 군인들이 죽고 있고 이스라엘과 가자 시민들이 죽고 있습니다. 특히 아들 고등학교 친구들이 부상당하고 전사한 소식를 들을 때면 가슴이 무너지고 이곳에 죽음이 가깝게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산 소망과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간절히 날마다 이스라엘의 평화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직 징집되지 않았고 학생신분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한국에 들어와 있으면 좋으련만,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선교사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절대 명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절대 명령이 무엇입니까!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말씀 전파가 중요한 것은 생명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파해야 죄를 깨닫고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을 들어야 선악을 분별하고 예수님을 따라 건강한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들어야 성령의 열매를 맺고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듣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in season or out of season"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중요합니다. 말씀역사도 그러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준비한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역사에 동참합니다. 그런 마음을 준비하지 않은 때 전파하면, 황금의 입이라 할지라도 아무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파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언제가 in season이며 언제가 out of season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예상치 못한 시기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out of season이었는데, 알고보니 in season이었던 것을 무수히 경험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새벽부터 말씀을 전하고 있었을 때,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물고기 잡으며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도전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은 베드로의 눈을 열어 사도로 출발케 했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는 사람들 눈에는 탐욕스런 돈벌레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는 말씀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러자 레위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는 성경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in season으로 보이든지, out of season으로 보이든지 가리지 말고 말씀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전파을 위해 힘쓰는 사람에게는 두가지 자세가 요구됩니다. 오래 참음과 가르침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견디는 것입니다. 경민 목자의 표현에 의하면, 엉덩이를 무겁게 하여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목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리한 분석력이나 탁월한 말솜씨같은 재능이 아닙니다. 좋은 날이든지 힘든 날이든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입니다. 그렇게 오래 인내하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침의 방식에는 경책, 경계, 권함 세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말보다 영어 표현이 좀 더 분명합니다. correct, rebuke, encourage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바로 잡아 교정하는 correct가 있습니다. 때로는 정신이 번쩍 들도록 책망하는 rebuke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책망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낙심하여 주저하지 않도록 용기를 심는 encourage도 필요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잘하면 좋겠지만, 실상은 때마다 경책과 경계와 권함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때가 이르니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바울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때가 올 수도 있음을 예고합니다. 박해의 시대보다 힘든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바른 교훈인대도 받지 않는 시대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가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자기 유익과 욕심을 채워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시대가 그런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개인주의 시대, 인공지능시대가 그런 흐름을 더욱 촉진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묻고 배우는 교제가 점점 단절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길을 모르면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혹은 옆에 서 있는 차량운전자에게 물었는데,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다 알려줍니다. 그와 같이 앞으로는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는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유투브 알고리즘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자기 세계에 갇히는 모습들이 심화될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려면 이전보다 훨씬 오래 참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힘든 시대를 예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포기하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바울의 대답은 ‘그러므로’가 아니라 ‘그러나’입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신중’이란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저는 중보 기도하다가 가끔씩 심각한 염려에 사로잡혀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제 정신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매 순간 말씀을 붙들고 깨어있고자 기도하지 않으면 쉽지 않음을 절감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돈에 빠져도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전도자의 일을 하며 맡은 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순교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전제에 비유합니다. 전제란 제단에 붓는 피 혹은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은 눈에 보이지만, 전제는 보이지 않고 사라집니다. 그와 같이 바울의 죽음은 세상의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손해의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승리의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7절은 지나온 삶에 대한 확신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의 자부심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것입니다. 싸움은 치열함의 상징입니다. 인생여정에는 치열한 싸움이 있습니다. 사교육전쟁, 입시전쟁, 취업전쟁...,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웁니다. 바울의 싸움은 선함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생명을 살기 위한 싸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방인을 살리기 위해 이방인의 모습처럼 되고자 노력했고,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유대인처럼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때로는 굶주림도 겪고 때로는 매도 맞고 때로는 파선하여 목숨의 위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he race I have finished, 내가 달려갈 레이스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울 때가 언제인가를 물으면 가장 많은 대답이 완주라고 합니다. 끝까지 달리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터져버려 죽을 것 같아 그만 주저앉고 싶은 dead point가 옵니다. 끝까지 달렸다는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그만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바라보거나 사람들만 바라보았다면 더 이상 달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부르심을 소중히 여겼기에 그 길에 남은 것입니다.
그 길에 남아 엄청난 역사를 이룬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지켰음을 자랑합니다. 사람들 대부분 눈에 보이는 성취를 자랑합니다. 돈을 쌓고 명예를 쌓은 것을 자랑합니다. 자식 자랑, 역사 자랑을 합니다. 이 땅에서 무엇을 쌓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을 지킨 것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을 공격하고 의심과 회의를 심은 수많은 소리들,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바울은 동족에서 버림받고 이방인에게 배척받아 죽임당한 망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욥처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 길을 끝까지 달려간 위대한 용사였습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기에 순교라는 극한 시련앞에서도 무너지기는 커녕 담대한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죽음 이후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운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람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인생을 경주합니다. 어제는 나보다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오늘은 앞에 서 있기도 하고, 어제는 분명 내 앞에 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뒤에 서 있는 그런 모습을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현 듯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죽음을 우주 저 멀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처럼 나와 먼 세계로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옆에 늘 있습니다. 저는 어제 30여년만에 찾아온 한의대 신앙 후배를 만났습니다. 가을 제자수양회를 펑크내고 장막에 몰래 숨어있던 그를 새벽 차를 타고 붙잡아 수양회로 데려갔던 그때 그 사건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날라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잠시 있다가 떠나야 하는 세상을 살면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복있는 사람, 가장 영광스런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에서 그리고 내 안에 여러 문제들이 수북히 쌓여있을지라도 주와 복음을 위한 고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고난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24년 한해 어떤 모습으로든지 전도하고 기도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기도하기를, 요회마다 새로운 멤버들이 한 사람씩 성장하는 24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물론 저절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마다 기도하고 때마다 말씀을 전파하며 고난받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그런 고난들을 감당하는 것 자체가 승리입니다. 그로 인해 24년을 마치는 그 날에는 우리도 바울처럼 승리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9절부터 19절은 바울의 현재 상황을 엿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부탁합니다.(9)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10) 지금 바울 곁에 남아있는 제자는 누가뿐이었습니다.(11) 바울은 디모데에게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13) 몸도 춥고 마음도 추운 감옥생활을 견디기 위해서였습니다.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쳤는데, 디모데에게도 해를 끼칠 인물이니 조심하도록 주의를 줍니다.(14,15)
1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로마 감옥에 일차 투옥되었을 때, 사도행전 28장에 나오지요,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 삼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순교를 앞둔 상황이 오자, 그때 제자 되었던 많은 자들이 두려움에 빠져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자 기도합니다. 양들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위로와 소망이 되지 못할 때, 그 너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7,18절 고백입니다. 힘찬 목소리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9-2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도 동역자들을 돌아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인사를 시킵니다.(19) 에라스드와 드로비모를 걱정합니다.(20) 로마에서 바울을 도와준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와와 모든 형제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21) 지금 함께 하는 동역자들을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모습입니다.
22절을 마지막으로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남아있는 디모데를 위해 축도합니다. 죽음도 바울의 목자의 스피릿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축도한 그대로 예수님은 믿는 자들과 함께 하사 박해의 시대를 이기고 넘어서게 하셨습니다. 결국 무너진 것은 교회가 아니라 로마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또한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이 시대를 넘어서서 당신의 은혜를 드러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자리를 굳게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