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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바다가 그리워질 때> 해설
● 사랑 찾기, 그 여유와 넉넉함의 미학
-조영돈의 시 세계-
김명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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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시인이라면, 가장 행복한 자도 시인이다.
어쩌다 사람들과 만나 수인사를 나눌 때 시인이라고 하면 다들 "시를 써서 생활이 되느냐."는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질문에 그냥 웃고 말았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을 보면 역시 시인은 가난한 자임에 틀림이 없다. 또 어쩌다 시인이라고 하면 "참 좋겠네요."라는 부러움의 시선을 느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고 보면 또한 시인은 행복한 자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 시는 밥이 되는 것도 아니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시인은 이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는 자이다.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말과 가장 정교한 틀을 가지고 감성과 체험, 예술적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만든 언어 예술을 가지고 꾸준하게 인간을 감동시켜 온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이다.
조영돈은 늦깎이 시인이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문단에 나왔으니 틀림없이 늦깎이 시인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어설프고 설익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의 작품 속에는 20, 30대의 깜짝 놀랄만한 재기 발랄함이나 기상천외한 발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속에는 세상을 달관한 넉넉한 마음과 맑고 투명한 철학적 명상의 세계가 담겨 있다. 특히 일상을 담담하게 엮어내는 솜씨와 여유는 많은 습작 후에 얻어진 결과이리라.
내가 알고 있는 조영돈은 매사에 서두르는 일이 없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바쁠수록 천천히"라는 말처럼 그는 언제나 느긋하다. 말투도 걸음걸이도 목소리도 전혀 바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나 똑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조영돈의 매력이다. 그의 시 또한 독자를 끌어당기는 독특한 맛이 있다. 일상의 경험을 쉽고 평이한 언어로 형상화시킨 편안함과 압축과 함축을 통한 적당한 긴장감, 모호함,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한 몫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시는 이해되지 않고서도 전달될 수 있다고 했지만, 그의 시에서 여유와 넉넉함으로 무장된 암호의 의미를 요리조리 따져보고 생각하기 위해서 형사 콜롬보처럼 부지런히 물증을 모아서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고 명쾌한 논리적 추리력을 발휘하여 그가 직조한 암호의 해독자가 되어 보자. 이 암호를 해독하는 일이야말로 조영돈의 시세계를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리라 믿는다.
그의 암호는 나와 그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는 그대를 익명으로 무장시켜 놓고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가는 길
얼마나 멀기에
새벽부터 촉촉이 비를 내려
먼지를 재우십니까?
한 나절 걷고 걸어도
그대 얼굴 아득히 멀어
망연히 바라보다
눈에 파란 물이 들었습니다
이따금 지나는 바람에
한숨 같은 전갈
하얗게 오르는 걸 보아
내 한 마음
짐작이나 하실런지요.
<하늘>의 전문
사랑은 나와 그대의 관계라고 했다. 그 관계를 만들기 위해 그는 첫째, 그대에게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대에게 가는 길은 쉽지 않다고 했다. 둘째, 아무도 그 길이 얼마나 먼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나절 걷고 걸어도/그대 얼굴 아득히 멀어/ 망연히 바라보다/ 눈에 파란 물이 들"어 버렸다고 그대와의 관계 맺기가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물론 이런 걱정은 그대를 의도적으로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적 숨김은 오래가지 못하고, 나와 그대의 관계가 양방향 소통이 아닌 일방향 소통관계였음을 고백한다. 타고 또 타서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내 한 마음/ 짐작이나 하실런지요."의 고백처럼 나와 그대의 코드는 아직도 연결되지 못한 일방향의 관계였던 것이다. 또, 그는 연결 코드가 사랑의 관계임을 넌지시 고백하고 있다. 즉, 서로에게 갇혀서 사는 것이라고, 긴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대/ 그대는 내 눈 속에 갇혀서/ 짧은 언어로/ 영원히 살"(<사랑을 위하여>에서)아가는 관계가 그가 넌지시 비친 암호 해독의 첫 번째 단서였다. 사랑은 불입문자다. 문자로 표현하는 사랑은 꾸민 사랑이다. '예' 아니면 '아니요'에 익숙한 현대인과 '자유' 아니면 '구속'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은 어쩌면 서로에게 갇혀 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하는 이들을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여길런지도 모른다. 말초적이고 극단적인 사랑에 익숙한 현대인을 향해 그는 사랑의 코드를 그대에게 연결하기 위해 "망연히 바라보다/ 눈에 파란 물이 드는" 것이라고 한껏 부린 여유와 멋은 결국 그대와 관계를 맺기 위한 사랑의 코드가 일방향 코드 즉 짝사랑이었음 들키고 만다.
이제 그는 나와 그대의 짝사랑을 양방향 코드로 바꾸기 위한 암호 해독의 길에 직접 뛰어 든다. 그러나 사랑의 코드는 내장된 정신의 근원적 밑바닥에 감추어진 언어의 뇌관을 건드려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데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 딴청을 부리고 있다.
초사흘 어둔 밤길
정처 없이 떠돌며
골목마다 기웃거리더니
잠 뒤채는 여인과 눈이 맞아
하얀 이부자리
가만히 들추고
동침을 한 후로는
이따금 낮에도 찾아와서
편지 한 장
써 두고 간다
<초승달>의 전문
그는 일방향 코드를 양방향 코드로 바꾸기 위한 암호 해독을 하기 위해 "초사흘 어둔 밤길/ 정처 없이 떠돌며/ 골목마다 기웃거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능청을 부리고, 사랑도 일회용품이라고 딴청을 부린다. 무제한 속력과 깜짝쇼, 즉석 복권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기다림만큼의 고역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도 스피디한 사랑과 깜짝 사랑을 원한다. 즉석 복권처럼 미련 없이 만났다 미련 없이 헤어지는 인스턴트 사랑을 원한다. 그들에게 사랑은 생리작용을 해결해 주는 일회용품의 가치밖에 안 된다. 그가 기대하는 양방향 코드는 신중함보다는 "잠 뒤채는 여인과 눈이 맞아/ 하얀 이부자리/ 가만히 들추고/ 동침을 하는" 생리작용쯤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해 버린다. '떠돌며', '기웃거리며', '눈이 맞고', '들추고'처럼 즉흥적이고 일시적이고 쾌락적이다. 사랑도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로맨스이든 불륜이든 다 똑 같은 양방향 코드 만들기이다. 나와 그대 사이의 양방향 코드는 초사흘 어둔 밤길/ 정처 없이 떠돌다 눈이 맞아 이루어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시큰둥하니 말하면서 딴청을 부리지만 그대를 향한 일방향 코드에서 그대와의 양방향 코드로 이미 이행되었음을 들키고 만다.
시의 모호함은 고의적이다. 그가 사용한 사랑 찾기의 암호는 초승달이었다. 각 개성이 이룩하는 사랑의 강도는 복합적이겠지만 우리는 사랑을 완전히 육체적이고 성적인 매력에 매료된 에로스, 서로 크게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으나 서로 만나는 게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좋아하는 장난스러우면서 우연한 사랑인 루두스, 열정이나 탐닉보다는 정과 따스함이 묻어나는 사랑인 스토르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미칠 것처럼 보고 싶은 격정적 사랑인 마니아,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현실적 사랑인 프라그마, 이해와 양보와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상 속에서만 살아 있는 기독교적 사랑인 아가페로 나눈다.
그의 사랑 찾기 또한 복합적이겠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양방향 코드의 사랑은 수많은 희생과 인내의 가슴앓이가 동반되어야 한다.
별을 훔쳐 가슴에 품었다가
화상을 입은 나는
좀체로 상처가 낫지 않아
밤마다 은하수 길어 부었더니
별 모양 딱지 흉터로 남았다.
<첫사랑>의 전문
혼돈 내지 중요한 변화의 시대에서는 J. 폴 게티의 말처럼 경험은 가장 나쁜 적일 수 있다. 경험은 나름의 예측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만 좋은 것이다. 전혀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한 상황에서 경험은 치명적일 수 있다. 일방향 코드가 짝사랑이었음을 해독했을 때의 기쁨과 일방향 코드가 양방향의 관계로 진전되었을 때의 기쁨, 그리고 그 양방향 코드가 첫사랑이었음을 해독했을 때의 기쁨은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첫사랑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그는 "별을 훔쳐 가슴에 품었다가" 그만 화상이라는 치명적인 경험을 한다. 그는 화상을 치유하기 위해 "밤마다 은하수를 길어 붓"는 새로운 접근법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모양 딱지 흉터"가 훈장처럼 남았다. 그러나 그 경험은 '품었다가', '부었더니', '남았다'고 하여 이미 과거 속에 존재함을 고백한다. 흉터의 경험은 사랑 코드의 새로운 접근법에 치명적인 적이 된다고 했다. 마치 일단 흉터가 발생하면 피부조직에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치료를 받더라도 어느 정도는 계속 남는 것과 같다. '별 → 화상 → 흉터'로 이어진 경험은 결국 '하늘 → 초승달 → 첫사랑'로 이어지는 또 다른 새로운 양방향 코드로 판을 짜야하지만 아직도 유보상태로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다.
조영돈이 그려나가는 양방향 코드의 대상인 그대는 과연 무엇이기에 그는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하고, 대수롭지 않은 척 딴청을 부리고, 안 그런 척 능청을 부릴까. 지천명의 나이에도 불같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조영돈은 행복한 사나이다. 그 사랑을 남에게 들킬까봐 "눈과 귀를 가슴에 숨기고/ 눈 먼 척/ 귀먹은 척/ 웅크리고 산 것은/ 속내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바위>)고 고백하는 사나이. "주먹 쥔 연민 단단하게 붙들고/ 낮에도 속으로만 사랑을 태우느라/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세월 지는 주름"(<바위>)을 고백하는 사나이. 이제는 그 사랑의 실체를 밝힐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아직도 "말문을 열려고/ 웅웅웅/ 반벙어리 흉내"(<바위>)밖에 낼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나이. 그래서 그는 더욱 더 행복한 사나이다. 사랑의 실체를 고백하지 못함이 별을 가슴에 품었던 흉터의 경험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이미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난 뒤의 여유와 넉넉함이 빚어내는 미학이리라.
2
장 그리니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여행을 필요에 의한 여행, 강제적인 여행, 침략에 의한 여행, 호기심에 의한 여행, 시간의 취급에 의한 여행, 승화에 의한 여행 등으로 나누고 있다. 조영돈의 시에는 여행의 경험을 그린 시들이 많다. <포구의 아침>, <춘천 그곳에 가면>, <수덕사의 풍경소리>, <바다가 그리워질 때>, <상심>, <산정호수>, <미륵산의 오후>, <동행> 등이 모두 여행과 관련된 시들이다. 이들 시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일상적인 삶에서의 여행은 대부분 물과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과 산, 이 양대 기반은 모두 풍요로운 생산성, 영원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 중 산이 성스러운 종교적 성역으로 추앙받는다면, 물은 여성과 관련되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모태로 인식된다. 조영돈은 흉터의 경험을 지우고 새로운 사랑의 판을 짜기 위해 산과 물을 찾아서 여행을 시도한다.
여행이란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서 그와 떨어진 장소로 가기 위해 행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적인 행위이다. 조영돈의 여행은 흉터의 경험으로 아직도 반벙어리 흉내를 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접근법의 사랑 찾기 판을 짜기 위한 여정이다.
한마디 밖에 모르는데
제각각 달리 알아듣고
고개 주억거리며 돌아간 등 뒤에서
"처얼딱서니"
같은 말 되풀이
<파도 소리>의 전문
벤자민 디즈렐리는 모든 역사는 개인적인 삶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가 가슴앓이 하면서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반벙어리 흉내를 내는 이유는 첫사랑이 남긴 흉터의 경험을 감추고 새로운 사랑을 하기 위해 종결을 보류하고 판단을 유보하기 때문이다.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새로운 세상에 맞는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해 낡은 사고방식과 선입견의 방해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판단을 늦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면한 문제에 대해 곧바로 종결로 이동하고 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한마디 밖에 모르는데/ 제각각 달리 알아듣고/ 고개 주억거리며 돌아간 등 뒤에서" 바다가 되풀이 하는 말은 "처얼딱서니"였다. 의도적으로 단순화시킨 명사 진술로의 축소는 사랑 찾기의 종결을 보류하고 판단을 유보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일상세계의 상식을 낯설게 하고 변형시켜 버렸다. "처얼딱서니" 이 한마디에 종결의 판단을 좋아했던 그는 "잘난 척하던 내 욕심/ 붙들려 생매장 당하고/ 육신만 목숨 건져 돌아왔"(<고인돌>에서)던 경험 때문에 아직도 반벙어리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반벙어리 흉내는 흉터의 경험 속에서 그가 터득한 세상살이 한 방법이리라.
시어는 기존의 의미에 따라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제작하는 결합이라는 실험적 성격을 가진다. 사랑 찾기의 암호를 해독하는 그에게 바다의 가르침은 "처얼딱서니" 한마디였다.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지고 모든 것을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들은 한 치의 손해도 보지 않기 위해 사랑도 꼭 양방향이어야 한다. 첫사랑의 경험도 꼭 흉터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을 향해 되풀이되는 "처얼딱서니"는 일상 언어와 시어 사이의 차별성, 모호함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동백 숲에 누운 선운사
지붕이 손가락질하는 곳으로
시선을 주니
구름 꽃으로 핀 그대 얼굴
당신
언제 예까지
나를 따라 왔소
<동행>의 전문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꾸면서 더 큰 것들을 열망한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의 삶에는 충분한 돈도, 사랑도, 성공이나 기쁨도 없다. 뿌듯함이나 만족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없이, 자신을 실패자라고 느낀다. 시의 목표는 미지의 것에 도달함이며,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것이다. 사랑 찾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여행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대의 얼굴을 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니다. "동백 숲에 누운 선운사/ 지붕이 손가락질 하는 곳으로/ 시선을 주니/ 구름 꽃으로 핀 그대 얼굴"이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판단을 유보한 채 모르는 척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당신/ 언제 예까지/ 나를 따라 왔소." 라고 무심한 척 묻는다. 그의 이런 우문(愚問)에 00"내 현주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시방 네가 서 있는 줄 아느냐"(<세월>에서)는 현답(賢答)에서도 세상을 달관한 여유와 넉넉함이 흠뻑 묻어나고 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넉넉함과 여유는 인고의 아픔과, 시행착오의 반복 끝에 얻은 훈장이리라.
내 삶에 눈 뜨던 날
한 발짝도 되돌릴 수 없는
먼 길 와 있었다
들풀인 척, 타인인 척하며
외면한 시간도 바로 내 그림자
진탕에 허우적인 시간
세상에 던진 각진 언어
훈장으로 새긴
중년의 얼굴
차암 못났다
잎도 진자리 새순 돋고
어렵다는 고시도 재수 삼수 있는데
외줄박이 인생
꼭 한 번만 다시 안 될까요?
<자화상>의 전문
기차든, 자동차든, 버스든, 자전거든 모든 이동 수단에는 길이 있다. 나름대로의 노선이 있고, 나름대로의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이 있다. 하지만 그 두 지점을 제외하면, 이 대부분의 탈것들의 노선 자체는 몽타주이다. 어느 차선을 가든, 인도로 올라서든, 계속해서 정상적인 경로의 이탈과 복귀가 반복되면서 과정을 이룬다. 수많은 작은 과정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연관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목표 지점에 당도한다. 목표 지점에서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우문을 한다. 그리고 찾아 헤맨 그대가 "들풀인 척, 타인인 척하며/ 외면한 시간도 바로 내 그림자"였음을 알았을 때의 자기연민. 그의 노정에 몽타주로 붙여진 중년의 얼굴, 그 중년의 얼굴에게 툭하니 던지는 한 마디 "차암 못났다." 못났기에 더욱 안쓰러운 중년의 얼굴을 향해 "잎도 진자리 새순 돋고/ 어렵다는 고시도 재수 삼수 있는데/ 외줄박이 인생 /꼭 한 번만 다시 안 될까요?" 라고 내 뱉는 우문(愚問).
그가 "한 번만 다시 안 될까요?"라는 우문을 던진 이유는 무엇일까. 정상적인 경로의 이탈과 복귀의 반복된 과정 속에서 그 동안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더러는 중량초과도 있지만/ 정속주행으로/ 탈선도 정차도 용납 안 되어/ 기적 소리 한 번 없이/ 차곡차곡 삶을 나른" (<개미>에서) 삶이었다. 수많은 이합집산을 거쳐 당도한 도착지점에서 마주친 중년의 얼굴은 일이 인생의 모든 것인 개미와 같았다. 일개미는 하루에 보통 대여섯 시간 일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 쉰다고 한다. 노동의 기쁨이 100이라면 휴식의 기쁨은 200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와 그대와의 관계, 즉 양방향 코드의 실체를 찾기 위해 허우적거렸던 시간과 세상에 던져진 언어를 보면서 그는 다시 한번 우문(愚問)을 한다. "한 번만 다시 안 될까요?"
그러나 그는 그것이 우문우답(愚問愚答)이든 우문현답(愚問賢答)이든 "사랑/ 기쁨/ 슬픔/ 모두 같은 뜻 단어임을/ 예서 깨닫는다// 한 방울로 몸을 섞었구나"(<바다>의 전문)라고 너털웃음을 웃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흔히 바다는 하늘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피안, 즉 신들의 세계이며 신들의 영토의 세계라고 한다. 그의 시에서 특히 바다는 세상을 향한 그의 우문에 현답으로 대하는 통과의례 공간인 동시에, 흉터의 경험과 사랑 찾기에 대한 재생과 회복, 그리고 회귀 의식을 내포한다. 조영돈은 여행을 통해 사랑 찾기의 새로운 판을 짰고, 드디어 여행을 통해 그대의 얼굴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모르는 척 한 것, 딴청을 부린 것, 능청을 부린 것은 모두 그대의 실체를 해독하기 위한 암호분석의 과정이었다.
3
옛말에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더 큰 보람과 여유를 찾기 위해 미래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복잡한 살림에 홍수처럼 밀려드는 지식을 쌓으며 현대 사회 속에서 여유 있게 삶을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유란 미래지향의 이상향일까. 대다수의 현대인은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하고 인색하게 살아간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 여유 있게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야 할 텐데 오히려 인생살이는 살벌해져만 간다.
그는 사랑을 찾아 그 코드를 연결할 수 있는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수많은 길을 돌아왔다. 그 길에서 일방향 코드 즉 짝사랑의 암호도 해독했고, 양방향 코드 즉 첫사랑의 암호도 해독했고, 여행을 통해 그대의 얼굴도 보았다. 이제 그는 형사 콜롬보처럼 물증과 확실한 증거를 수집하고 분류해서 확인하고 분해한 그대의 실체를 드디어 독자 앞에 공개한다.
詩는 나를
밤마다 끌고 다녀
홀라당 혼 빼먹고
새벽 어둠 옷 벗어야
잡은 머리채 슬그머니 놓고
줄행랑친다
詩心은
머리끝에 또아리 틀고 사는 줄 알았더니
손톱 발톱 끝 살뜰히 박혀
사지육신 난도질하고서야
알 하나 품는구나
그 알 깨어
살이 붙고
영혼 눈뜨려면
얼마나 수혈을 해야하는 건지
<시는 나를>의 전문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요, 억지로 등 떠민 것도 아닌데 가슴앓이 하고 또 가슴앓이 하다 각혈을 하고 또 다시 수혈을 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는 조영돈은 숙명적인 시인이다. 그가 형사 콜롬보처럼 함정을 파놓고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기다리다가 꼬리를 잡은 그대의 실체는 바로 시였다. 영원한 짝사랑의 대상이요, 첫사랑의 대상인 시와 그가 하나가 될 날이 언제인지 그는 모른다. 아니 영원히 모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시에게 다가가는 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詩)는 "나를/ 밤마다 끌고 다녀/ 홀라당 혼 빼먹고/ 새벽어둠 옷 벗어야" 놓아주고, 시심(詩心)은 "사지육신 난도질하고서야/ 알 하나 품는" 고통을 주고, "그 알 깨어/ 살이 붙고/ 영혼 눈뜨려면/ 얼마나 수혈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고 한 그의 고백처럼 말이다. 형사 콜롬보처럼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상대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가, 상대가 안심했을 때 뒤통수를 때리는 그의 사랑 찾기는 조급할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는 조영돈 특유의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와 넉넉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창의성의 단계를 인식하기, 저항하기, 포기하기, 아하! 라고 했듯이 그의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독자는 아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될 것이다. 조영돈에게 생활은 시이고, 시가 곧 생활이다. 그는 시인을 '옹기장이'라고 했다. 또 시인은 '물레 속에 갇힌 언어'를 풀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옹기 속에 "새콤달콤알콩보다는/ 시큼떫떨쓴 맛"을 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불가마에 밀어 넣고" 두 손 모으겠다고 했다.(<시인>)
이제 그가 꼭꼭 숨겨놓았던 사랑 찾기의 암호 해독은 모두 끝났다. 그가 한 짝사랑도 그가 한 첫사랑도 시였다. 그래서 그는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시는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형상체이며 진리도 심정의 도취도 그리고 어떠한 것도 매개하지 않으며, 시 자체로 존재할 뿐이었다. 보들레르는 말은 인간적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우주의 원일자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또, 시인은 말을 함으로써 마법적인 접촉을 하게 되고, 시인의 말은 범속한 사물들을 형이상학적인 비밀 속에 떠오르게 하며 숨겨진 유추들을 존재의 반열로 끌어올리는 마술적인 주문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시를 감상하면서 감동하고, 시인의 사상을 이해하고, 시인의 예술관에 동감하면서 마음의 경계를 풀고 즐겁게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이스에서는 시란 집을 짓고 불을 붙이고 농사를 짓는 일과 동등한 일로 보았으며, 시인이란 논밭을 갈아서 일하는 대신에 주문을 외어 비를 내리게 하고 수확의 감사를 노래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뜻에서 시인은 구체적인 시작품을 만들어내는 제작자이며 기술자이며 행복을 창작하는 사람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의 보존은 사랑의 흔적이다. 그리고 사랑의 코드는 그대가 무엇이든 어디에 있든 항상 열려 있기에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다. 사랑할 그대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믿음이기에 조영돈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앞으로 그의 알이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영혼을 눈 뜨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혈을 하는 그의 뜨거운 열정을 기대하면서 첫 시집 상재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