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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촛불』에 비친, 변증법에 대하여
우병택(시인. 문학평론가)
『촛불』 원고를 받아들고 먼저 장봉이 시인의 제1집 『손등에 핀 꽃』을 떠올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시가 어떻게 모양을 바꿔서 나왔을까?’ 궁금했다. 1집 표제작 「손등에 피는 꽃」을 처음 대했을 때 뭉클했던 기억 외에 서로가 文人이라는 공통분모뿐, 10년을 넘게 이런저런 문인 행사에서 스치고 지나간 많은 이들 중에 ‘시인’이라는 타이틀만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시인의 말’에 눈길이 갔다.
-아직도 남아 있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오는 무분별한 정력의 소비, 인간 근원인 자연에 대한 무참한 파괴와 오염 등이 야기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사회, 불확정성 시대의 단면을 보고 살고 있습니다.-
문학에서 ‘현실참여 논쟁’은 1960년대, ‘문학이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지, 순수한 문학성을 지녀야 하는지’를 두고서 벌였던 때가 있었다.
이 논쟁은 문학평론가 김우종이 당시의 문학이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이형기 시인이 순수 문학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또다시 김수영 시인과 이어령 평론가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김수영 시인은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라며 문학을 한 가지 흐름에만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을 비판했다. 본질적으로 4·19 혁명을 경험하면서 싹튼 사회 참여적 흐름이 문학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인이 젊은 시절에 현실적 문제에 저항했다고 해서 현실참여 시를 쓸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시인의 말을 좀 더 살펴보자.
-화자의 제2 시집에는 문명의 형식을 부정하고 인간의 원점으로 돌아가, 인간의 순수한 목소리를 찾아 백지 위에 옮기는 데 최대한 노력하였습니다.-
‘인간의 순수한 목소리’라니, ‘불꽃’이 가지는 현재 일고 있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필자한테 관심을 끄는 이런 말이 무슨 의미를 지녔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소재를 다루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으나 언제나 독자에겐 두렵기만 합니다.-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왜 독자가 두려운 것인지? 살펴볼 동력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촛불』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촛불』에는 모두 5부로 나누어 실린 작품이 총 99편이 된다. 그중 5부는 동시 13편이니, 순수시는 86편이 되는 셈이다. 전체를 한 편씩 鑑賞하면서 느낀 것은 ‘투박함’이었다. 시 창작의 기본 요소인 ‘이미지의 비유에 의한 형상화가 제대로 되어 있느냐?’ 하는 불편함 말이다.
1부 ‘사람’은 20편으로 크게 두 부류로 나눠볼 수 있겠다.
앞서 실린 「촛불」부터 「손전화」까지와 「용문사」 이후는 그 결이 다소 달랐다. 앞부분을 감상하며 퍼뜩 장 시인의 삶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었다.
*[시인은 오 형제 중 막내로, 아버지는 한의사였지만 피난처라 양평에 자리 잡기까지 어머니의 행상 노고는 필설로 다할 수 없으리만큼 어려우셨답니다.]
前作 表題 詩인 「손등에 핀 꽃」과 용문역사 대합실에 걸렸던 「어머니의 노래」를 감상하다 보면 시인의 부모께서 생활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 얼핏 풍기는 첫 느낌이 고생 없이 자란, 사람 좋게 보이는 외모와 털털한 막걸리 냄새 밴 시골 부호의 風采에 이런 가족사가 배어 있었다니 의외였다. 아마도 「촛불」로부터 드러나는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은 부모의 적극적인 사랑과 지독했던 가난과 사회적 갈등을 목격한 장본인으로 표출된 바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設使) 내가 주어진 세상이 공평한 일체가 된다 해도
나는 문명에 치여 살아가는 의미와 존재를 또다시 부인하며
보잘것없는 초 덩어리의 신세를 한탄하며 구석에 처박혀 묵묵히 있을 것입니다.
내 비록 자신을 자해하는 한이 있어도 행복과 슬픔이 공유하는 곳이 언젠가 생긴다면, 기쁨과 평화와 행복과 사랑이 일체가 되는 곳이 있다면, 내 한 몸 부서지고 녹는 것에 망설일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 「촛불」 중 일부
이 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가 /내 비록 자신을 자해하는 한이 있어도 행복과 슬픔이 공유하는 곳이 언젠가 생긴다면,/의지이고 또 하나는 /기쁨과 평화와 행복과 사랑이 일체가 되는 곳이 있다면,/참여이다. 그리고 /내 한 몸 부서지고 녹는 것에 망설일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이라는 결연함이다. 이 기조는 다음 시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촛불이 타는 것은
심지만 태우려는 것이 아니요
더덕더덕 밀만 녹이기 위함도 아닙니다
심지와 밀, 그 둘이 엉긴 자신을 태우며
주위를 밝혀주기 위한 불빛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국민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은
자신을 밝히기 위함이 아니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도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심지와 자유의 밀이
타고 떨어지는 것을 헛되지 않기 위하여
두려움과 용기를 밝히는
불빛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촛불은 믿음이 함께하면 꺼져 있고
실망과 함께하면
세상을 더 밝게 비추고자 합니다
촛불은 자신을 죽여서라도
상대를 이롭게 하고
세상을 희망지게 하기 위해
원하는 곳이면 잡아 주는 곳이면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태우고 또 태울 뿐입니다.
- 「촛불이 타는 이유」 전문
시인은 두 작품에서 ‘촛불의 본질’과 ‘속성’을 충분히 숙성시켜 詩語로 쓰고 있다. 물론 이 정도쯤의 시 엮음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졌다면 그리 낯설어 보이진 않을 터다. 그래서 자칫 놓치기 쉬운 愚를 범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결연한 의지가 뻗어 나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주위를 밝혀주기 위한 불빛’ 이라니, /촛불은 자신을 죽여서라도/상대를 이롭게 하고/ 세상을 희망지게 하기 위해/ 원하는 곳이면 잡아 주는 곳이면/아무런 대가 없이/자신을 태우고 또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초가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면서 자신은 서서히 소멸되어 가듯이 세상의 희망을 위해 주위를 밝혀 이롭게만 할 수 있다면 스스로는 사라져도 좋다는 결연함이 ‘촛불’이 가진 속성이라는 것이리라.
광화문의 ‘촛불’로 태워버린 前 정권의 허상과 現 정권의 허울이 그의 머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시인이 자신을 희생해 가며 밝힌 저항의 대상은 ‘보수’ 혹은 ‘진보’ 그 어느 한쪽이 아니라 권력의 무능과 횡포로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맞서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기희생도 불사하겠다는 거였을까? 툭 던진 시인의 말속에서 ‘무엇인가 집히는 게’ 있었다.
“허, 다 지난날의 이야기지요. 뭐”
前 정권의 무능을 불태우며 부풀었던 새로운 정권의 탄생에 촛불처럼 온몸을 살랐던 때가 있었단다. 그런데 희망과 기대는 날이 갈수록 새롭기는커녕 더 무능과 부패의 극치를 달리는 현실을 目睹했으니 더 어떤 말이 필요할까.
총칼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했던
소녀야! 소년아!
어린 너희들이
한없이 흘렸던
그 피맺힌 눈물이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미래였다는 것을
모두가
잊지들 않았으면 좋겠다.
여린 눈동자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민주주의를 당차게 흔들며
힘차게 부르던 자유의 노래가
참다운 세상을 여는 노래였다는 것을
국민이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문
시인의 詩心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詩’뿐이라는 생각에 이른 게다. 민중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떻게 어루만져 줄 수 있는 ‘詩’를 어떻게 창작해내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시인의 언어는 그 어느 부류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思考 말이다. 장 시인은 그 당연한 인식을 바탕으로 詩를 쓰는 것인 게다.
다만, 여기에서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당부의 대상은 불편부당한 정권이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촛불을 들고 나설 수 있는 민중이 있음을 알아달라는 시인의 염원이기도 하다.
다음은 「용문사」와 관계되는 몇 편을 살펴보자.
시인의 오랜 생활의 터전이 고찰 용문사와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이니 새벽은 물론 이려니와 朝夕으로 울리는 쇠 북소리와 늘 함께하며 육십 평생을 살아온 시인이다.
새벽의 산사는
아직 어둠의 그늘이지만
골짜기를 불태우는 쇠 북 종소리와
탐욕을 일깨우는 목탁 소리와
대웅전의 해탈 어린 촛불은
부처의 윤곽을 만능처럼 드러내 준다
자비만을 빌며
불자들에게 연꽃 웃음을 보내는 스님들
거울처럼 다가오는 온화한 불심
왜란의 침략을 산증 하는 천백 년의 은행나무가
법문을 익히며 용문산과 어깨를 하고
두 손을 담그면 수정으로 물들일 것 같은
운무에 에워 두른 새벽 계곡물
울창하고 절개 있는 고송들의 군락과
손에 잡힐 듯, 한 부처님의 미소가
나는 새의 날개를 쉬게 하면
보쌈해간 밝음이 풀어지며
돌아오는 불자의 발자국마다
산사는 늘 !과? 을 남기게 한다
-「용문사」 전문
어찌 보면 천년 고찰인 용문사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살아온 시인이란 생각이 든다. 앞서 상재된 시의 면면을 살펴보았지만, 촛불을 들고 현장에 섰을망정 상식의 도는 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새벽 산사의 쇠 북과 목탁 소리와 함께 촛불로 밝힌 만능처럼 느껴지는 부처의 윤곽에 모든 번뇌를 씻어내는 시적 화자의 모습에서 추측해 본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등장하는 ‘대웅전의 해탈 어린 촛불’에 이르러 ‘촛불의 미학’을 더듬어 논자의 머릿속에서 담긴 이론 중 하나를 꺼내 돌이켜볼 필요를 느낀다. 바슐라르1) 는 『촛불의 미학』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상승의 불꽃에는 두 개의 것이 있다. 하나는 희고 빛나며 그 뿌리는 파랗고 꼭대기에 이어져 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붉고 그것을 태우고 있는 나무나 심지에 연결되어 있다. 흰 편은 똑바로 위로 향해서 오르고 붉은 편은 타며 빛나는 것을 다른 편에 제공하고 있는 재료에서 떠남이 없이 밑에 멈추어져 있다.
여기에서 수동적인 것이 능동적인 것, 움직여지는 것과 움직이는 것, 태워지는 것과 태우는 것과 변증법. 어느 시대의 철학자도 만족을 줄 수 있는 과거분사와 현재분사와의 변증법이 시작된다.
이 이론에 따라 ‘위로 가는 불꽃과 아래로 누르는 불꽃이 변증법적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천백 년을 굽힐 줄 모르고 하늘을 향해 우뚝 선 은행나무’에서 상승의 이미지를, ‘부처님의 미소가/나는 새의 날개를 쉬게 하면’에서 하강의 이미지로 또 돌고 돌아와 ‘산사는 늘 !과? 을 남기게 한다’에서 ‘!과 ?’에 와서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소환해 놓고서야 비로소 시인의 詩心을 설명하는 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이론을 정립하고 나서야 다음 시가 마음속에 시원하게 들어와 자리를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찬란한 저- 문명이란 오만이
역사에 굴레에서
성공이란 이름으로 새겨질 때
기쁨의 눈물 위에 새들이 똥을 싸고
똥 묻은 발전위에 언제나 발전비를 새기며
축복과 환희로 춤을 춘다.
자연의 모습은 흉할 때로 흉해지고
그대로 간직해야 할 이 땅은
모순을 향한 비극을 치닫고 있고
없어야 할 곳엔 버젓이 서 있고
있어야 할 곳엔 텅 비워져 없는
금수강산의 이 나라 이 강토가
새들의 똥만 묻혀가며
몸 저리를 치며 앓고 있다.
-「몸부림치는 강토(江土)」 전문
때론 촛불을 들고 도심을 누벼도 보고, 용문사 쇠 북소리에 두 손 모아 이 강토가 늘 찬란히 빛나기만 바라고 또 바랐건만
/문명이란 오만이/역사에 굴레에서/성공이란 이름으로 새겨질 때/기쁨의 눈물 위에 새들이 똥을 싸고/똥 묻은 발전위에 언제나 발전비를 새기며/축복과 환희로 춤을 춘다//
라고 한 시심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향토 시인으로 불리며 장 시인이 고향 땅을 복된 터전으로 가꿔보고자 한 적이 있었단다.
*[당시 사회는 무분별한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이에 대한 회의로, 시인은 15만 평의 논밭을 가꾸는 농사꾼의 길로 접어들어 문명을 회피하는 ‘새똥’을 청소하는 일조에 노력했다. 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詩心에서 이런 시가 탄생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1부 ‘사람’에서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까지 들먹이며 장 시인의 시심을 요리해 보겠다고 덤비다가 드디어 숨을 가라앉히고 2부‘인생’으로 넘어왔다. 좀 더 시를 제대로 鑑賞해 보겠다는 나른함으로…….
그랬는데 이번엔 팔뚝에 울퉁불퉁했을 광장에서 외침이 오히려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허둥지둥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돈」부터 「살다 보면」를 거쳐 「갈 곳이 없다」까지 이어지는 시인의 인생 역전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니라는 우리네 인생살이
고초 애초 눈치코치 보며 살다가
이젠 살아남았나, 뒤돌아보니
몇몇 알던 사람들은 아주 많이 멀리 떠나갔고
그나마 잘 나간다는 친구들 찾아가 보니
먹고 살기 바쁘다며 얼굴도 내밀지 않는다
내 자식 내 마누라 호의호식 핑계로
이 험난한 삶도 버티며 살아왔건만
나를 남처럼 죄책감에 살게 될 줄이야.
삶이 바빴다는 이유가 이리도 잘못된 것일까?
머슴처럼 열심히 일만 한 내가 잘못된 것일까?
척추가 휘도록 평생을 일한 나에게
남보다 뭘 잘해준 게 있냐며
싸늘하게 쏘아보는 눈초리에 오금마저 저린다
내 품에 안기어 뛰고 놀며 행복해하던 자식들과
항상 반기며 미소 짓던 아내의
곱고 어질고 순수하던 지난날의 흔적들이
사랑이 아니라 생계의 이유로 나를 대했다면
나는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내 갈 곳은 그 어디며, 내 쉴 곳은 그 어디란 말인가?
믿음도 사랑도 이유도 목적도 없는 발걸음은
허구한 날 죄 없는 산 중턱에 한숨만 쉬게 하고
막걸리 한잔에 요동치는 마른 멸치의 비린 냄새가
목구멍에 걸린 내 입안에서 바다를 잃고 헤엄만 친다
-「갈 그 곳이 없다」 전문
한반도에서 태어난 1960년대 전후 사내들은 대개가 이렇게 살았다. 스물 전후로는 ‘배워야 산다.’라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 주연들처럼 열심히 배우고 익히며 살았다. 서른 전후에는 ‘잘살아 보세!’를 구호처럼 외치며 소처럼 일하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마흔 넘어 ‘내 집 마련’과 ‘자식은 나보다 더 가르쳐서 고생 안 하고 살게 해야지’라는 신념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드디어 쉰 넘어 예순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주변에 함께 달려오던 이들 하나둘 멀리 가고 곁에 남은 이 별로 없다. 그나마 잘 나간다는 친구를 찾아 가 보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뿐이니 어이할꼬.
돌아와 안길 곳은 가족뿐인데 그들마저도 지아비요, 아버지인 중년 넘긴 사내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회적, 가족적 현실, 그나마 산들이 있어 그 중턱에서 한숨 내쉬고 막걸리 한 잔에 마른 멸치 비린 냄새라도 맡으려니 ‘목구멍에 걸린 내 입안에서 바다를 잃고 헤엄만 친다’
「갈 그곳이 없다」는 한반도 남쪽에서 삶을 영위한 사내 모두를 대변해 준다. ‘척추가 휘도록 평생을 일한 나에게/남보다 뭘 잘해준 게 있냐며/싸늘하게 쏘아보는 눈초리에 오금마저 저린다/에서 가지는 공감은 현실이 주는 큰 아픔이기도 하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무엇으로 이 세상을 맞추겠는가
어떤 날은 청명한 것 같고
어떤 날은 아지랑이가 가리고
어떤 날은 포르노이고
어떤 날은 희비극의 주연배우이고
어떤 날은 낙타 구름처럼 권태로운데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명분으로
좋은, 참다운 인생만 뽑아 올 수 있겠는가
-「인생은」 중 전반부
과거에 씨앗은 소금에 절여 놓고
소주로 숨을 태우고 허파를 씻어가며
살아서 천국과 지옥을 만끽하는 사람들
인생 최고의 환승역에서 인생역전 전환점에서
자신의 가슴을 향해 칼끝을 세우고
다짐과 다짐을 수없이 하는 사람들
또 하나의 타인으로 프로필을 만드는 사람들
-「노숙자들」 중 후반부
이 두 편에서 시인의 詩心이 잘 드러나고 있다. ‘노숙자’라는 타이틀이 ‘과거의 씨앗은 소금에 절여 놓고’라는 말로 ‘결코 이 속칭이 끝’이 아니라는 속내가 배어 있다. 그래서 ‘인생 최고의 환승역’에서 인생 역전 전환점’을 계획하는 것이다. 절인 배추를 생생한 김치로 탄생시키는 대전환의 꿈 말이다.
2부‘인생’은 희망을 찾아 서울을 향해 걸었던 그의 청춘 기록과 氣運이 꺾여 본거지로 다시 돌아온 뒤의 혼재된 상식이 잘 드러나 있다. ‘서울 생활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라는 반증이 곳곳에 박힌 ‘아지랑이’ ‘포르노’‘희비극의 주연배우’‘낙타 구름’ ‘권태로움’ 이런 類의 하강 이미지의 단어들이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조건을 잠시 생각해 보자. 시상의 감동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선택함은 낱말들이 유기적으로 배치됨으로써 작품 전체를 위해 조화롭게 통일되어야 한다. 이러한 낱말의 유기적 연관뿐 아니라 시행, 시절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을 통해 시는 산문과는 다른 함축적 언어의 암시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2부 22편이 실린 ‘인생’에 사용된 단어를 뽑아놓고 보면 시인의 ‘인생’은 종내에 ‘팔자’라는 말로 귀결되고 있다. 이것을 ‘함축적 언어의 암시력’이라고 하자. 이러한 언어의 암시력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선미한 조화 속에서 효과를 발휘하며, 특히 회화적이고 음향적인 이미지를 통해 두드러지게 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다음은 제2 시집 『불꽃』에서 유일하게 ‘이미지의 비유에 의한 형상화’에 성공을 거두고 있는 시 한 편을 골랐다. 여기서 ‘형상화(形象化)’란 말은 불가사의 세계나 무형의 관념을 감각적으로 불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사물, 상상에 의한 감각적 조형을 말한다.
녹슨 생각이
밤의 간격을 뚫고
멀리 날기 시작하면
머릿속에 펼쳐지는
녹색 페인트와 즐비한 가로수
작열하는 태양과 아스팔트 길
-「불면 不眠」 전반부
‘불면’ 즉, ‘잠 못 이룬다.’라는 의미인 추상명사를 ‘녹슨 생각이/밤의 간격을 뚫고/멀리 날기 시작하면/머릿속에 펼쳐지는/녹색 페인트와 즐비한 가로수/작열하는 태양과 아스팔트 길’처럼 ‘이미지의 비유에 의한 형상화’를 제대로 완성했기에 하는 말이다.
‘형상화’를 ‘의미화(意味化)’라고 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때 주로 비유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직유보다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정석이다. 안타깝게도 장 시인의 1집과 2집에서는 이런 시작법 상 성공을 거두고 있는 詩가 드물다.
3부 ‘사랑’은 앞 1, 2부에 비하면 훨씬 밝다. 첫째 편 「꽃 비빔밥」에 쓰인 단어를 보면 ‘꽃밥, 꽃 냄새, 꽃물’ 등의 명사는 물론 ‘사랑하다, 행복하다, 기쁘다’와 ‘비벼대다’ 등의 용언에서까지 상승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꽃과 근조 꽃등은 국민이요, 비빔밥은 정치꾼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해야 할 국민이 볼모로, 감언이설로 민주주의를 찬탈당하고 믿음을 잇속으로 챙기는 일부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을 향해 야유하고 비판하고 싶어 비유해 쓴 글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의 개똥철학」에서 ‘고난도의 기술과 노력이 필요한 행위적 예술이다’라고 하여 스스로 ‘철학’을 논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가면
그까짓 사랑
잊힌다. 들 하지만,
다른 이성 만나면
이룰 수 없다던 첫사랑
잊고 산다. 들 하지만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
사랑해보지 않은 이들
그냥 해보는 말이잖소
달뜨는 밤이면
별 반짝이는 밤이면
오십견 쑤시듯이
문득, 문득 밀려오는 첫사랑이
모두 그대의 얼굴 같아
낯설지 않은 미소와 웃음이
내 앞에 서성이고
내 맘에 흐르는데
세월 흘렀다고, 나이 먹었다고
어찌 꿈에라도 잊었겠소,
그 아름답고 순수하던
나만의 첫사랑을
-「첫사랑」 전문
* [이 땅에 세워진 민주주의가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퇴색되어 응용되고 미화되어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유한 글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의 속내가 잘 드러나 있어 흥미롭다. 여학교에서 총각 선생님이 부임해오면 첫 질문이 ‘첫사랑’에 대한 거란다. 그 질문을 건네는 여학생이나 받는 선생님이나 혹은 듣는 여학생들이 모두 귓불이 발갛게 물들게 마련이란다. 그런데 질문한 여학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총각 선생님은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군대 얘기 못지않게 자주 떠올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달뜨는 밤이면
별 반짝이는 밤이면
오십견 쑤시듯이
문득, 문득 밀려오는 첫사랑
‘오십견 쑤시듯’이라고 하지 않는가. ‘오십견’ 그 病, 앓아본 이 아니고서 어찌 그 아픔을 알까? 그래서 ‘달뜨고, 별 반짝이는 밤’이 중년들에게 아픔의 밤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상승기류는 다음 시구절에서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 아름답고 순수하던/나만의 첫사랑을
시인은 의뭉스러움도 있다. 마치 곱상한 이 도령이 춘향 후리듯 툭 던지는 애살스러움이 설핏 빛나기에 하는 시구절이다.
이 야한 밤에
저 홀로 발가벗고
저 홀로 황홀해, 하다
저 홀로 외로워한다.
-「달의 자위」 전문
*[사실 이글은 정치인들의 미투에 대하여 풍자해 본 글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시의 암시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가 있다. “요컨대 시는 작가나 독자가 ‘아!’ 하고 두고두고 감동할 수 있는 클라이맥스의 무엇으로서, 소설이나 그 밖의 산문에 있어서와 같이 그 전후에 이 클라이맥스 자체를 묘사하는 대신에, 사원에서 아침저녁으로 종 치는 사람이 종을 ‘꽝, 꽝!’ 하고 몇 번을 울리듯이 그 얼마 안 되는 문자로서 널리 울리게 쳐 버리고 마는 - 이를테면 打鐘的 문자 표현의 길이기 때문이다. “앞뒤 사정 다 잘라 버리고 중심만 말하마. 그나마 그것도 백천 마디로 말해야 할 것, 한두 마디로 말하고 마는 타종적 충격과 餘設의 효과로써…….” 전체 99편 중에서 요렇게 ‘꽝, 꽝!’ 하고 打鐘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4부 ‘삶’에서 「문학이 뭔지 1, 2」에서 시인이 내린 문학의 정의를 더는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어쭙잖게 시작한 ‘문학’이
해지는 노을 쳐다보는 노시인의 눈에는
한 마리의 은빛 새가 되기 위해
눈부신 문학의 나래 질을 하려 한다.
-「문학이 뭔지」 중에서
라고 하여 결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더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청년 시절에 꿈꿨던
문학의 성감대가
노년의 무릎을 흥분시킨다.
-「문학이 뭔지 2」 중에서
장 시인은 아무래도 母情을 빼놓긴 어려운 시인가 보다. 하기야 어느 문인인들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이가 뉘 있으랴. 1집에 이어 어김없이 등장하는 어머니인 걸 또 어쩌란 말인가. 지극히 당연한 걸 말이다.
나지막한 장독대
서까래 아래 묵은 끄름
호미 괭이와 멍석 걸린 흙벽으로
노을이 물지게를 지고 오면
등불 밑으로 풀려 내리는 나지막한 탄식
맞춤복처럼 몸에 딱 맞는 인생이라면
세상에 고생할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부자는 하늘이 내리고
가난은 부모와 세상이 준다고 하지만
이놈의 가난 남이 알까 두려워하셨다
여유도 인정도 베풂도 허락지 않는 가난
방 안 구석구석까지 쫓아다니며
하나에서 열까지 어머니를 괴롭혔다.
두 눈에 함초롬 눈물이 가득 머금은 아침이 되면
박절한 가난은 부엌까지 어머니를 쫓아 와
보리쌀 항아리까지 쳐다보며 비웃었다
배고팠던 어머니의 삶
눈물겹던 어머니의 삶
누구도 아무도 남모르던 어머니의 삶
어머니는 그런 삶을 사시면서도
항상 웃음으로 자식들을 키우셨다.
-「남모르던 삶」 전문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가난한 가운데도 자식들 앞에선 지조와 품위, 엄정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배우지 못한 탓으로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 또한 태산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발전하였고 많은 고학력의 불효자를 양성하는데 기여했던 것입니다. 선산을 지키는 굽은 소나무가 없듯이 말입니다.]
* [행갈이는 120에 215를 맞추어 한 페이지에 모두 넣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수정해 놓았습니다.]
두 눈에 함초롬 눈물이 가득 머금은 아침이 되면 / 박절한 가난은 부엌까지 어머니를 쫓아 와 / 보리쌀 항아리까지 쳐다보며 비웃었다
가난이 어머니를 부엌까지 쫓아 비웃었다. 보리쌀 항아리마저 제대로 채울 수 없었던 어머니의 서러운 가난. 되짚어보는 시인보다 감상하는 필자가 더 중치가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래도 다음 구절에서 안도한다. Happy end! 지금의 장 시인이 이런 경로를 거쳐 오늘에 이름의 도식임에랴!
어머니는 그런 삶을 사시면서도
항상 웃음으로 자식들을 키우셨다.
드디어 5부 ‘동시(童詩)’에 이르러 긴장의 끈을 느슨히 하고 미소를 지으며 편하게 감상 자세로 들어간다. 사실 시인은 일찍이⟪서정문학⟫에 동시 부문 아동문학상 신인상을 받은 아동문학가이다. 그렇기에 1집에도 20여 편을 실은 바 있다. 다음 두 편의 동시도 은유법을 사용하여 소재를 형상화해 보려는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바람이 아니라
새싹이다
바람이 아니라
꽃이다
돋아나는 새싹 위로
피어나는 꽃잎 위로
까르륵 웃어대며
장난을 치고 다니는
예쁜 개구쟁이다
-「봄바람」 전문
겨울 눈은
요술쟁이
허공에는 안개꽃
나뭇가지에는 목련꽃
가시덤불에는 하얀 찔레꽃
지붕 마당 장독 위에는
함박꽃
강아지 머리 위에는 싸리꽃
엄마 아빠 모자 위에는 수선화
내 모자 위에는 기정 떡
산과 들에는
흰쌀과 흰떡 가루 가득
와- 겨울눈은
이 세상을 온통
꽃과 먹거리로 가득 피우고 채우네
-「겨울 눈」 전문
「봄바람」에서 봄바람이 ‘새싹, 꽃, 예쁜 개구쟁이’ 비유되어 재미있다. 「겨울 눈」에서도 겨울 눈이 ‘요술쟁이, 안개꽃, 함박꽃, 싸리꽃, 수선화, 기정 떡, 흰쌀과 흰떡가루’로 비유시켜 아동의 시각에서 흥미를 더할 수 있겠다.
「봄바람」과 「겨울 눈」에서 비유, 특히 그중 ‘은유법(隱喩, 暗喩, Metaphor’ 사용이 두드러진다. 물론 아동의 시선으로 감상한다는 전제하에서 볼 때, 직유보다는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동시 13편에 쓰인 제목 자체를 모두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물론 아동을 대상으로 쉬운 소재를 선택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소재 선택에서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홍문표 문학평론가는⟪시창작원리⟫에서 ‘소재’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시의 소재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고 장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의 개성에 따라 소재가 선택되고 배열된다. 시인은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시적인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천착해 가는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시적인 정당성이나 세계관에 입각하여 시를 창작할 때 그러한 정당성과 세계관에 걸맞은 언어를 소재로 택하게 되며 이를 자신의 미적인 구상에 따라 배열한다.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 시인의 독특한 육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5부에 상재된 13편의 동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사물을 보다 진지하게 관찰하고 그 내용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려고 노력한 詩이다.
지금까지 장 시인의 ‘촛불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시 세계를 航海해 보았다. 항해 중에 불꽃의 ‘희생’을 보았고, 용문사 쇠 북 종소리에서 들은 부처님의 자비도 느꼈다. 향토 시인으로서 동문과 어울림이 있었고 중년 사내로서 가지는 어깨의 짐도 함께 져 보았다. 동시에서 부드럽고 고운 시심을 공감하면서 감상하는 내내 행복했다.
시인은 불꽃처럼 타올라 쇠 북 종소리처럼 용문산을 어루만져 시심을 스스로 다스렸다. 전편에서 ‘촛불’같이 상승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세파에 뾰족함이 갈려서 닳아,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된다. 종래에는 ‘사랑’에 이르게 되는 전 과정에서 ‘삶’의 참맛을 깨쳐 평화로운 하강의 이미지로 변모하는 길 곳곳에서 ‘과거분사와 현재분사와의 변증법’이 시행되고 있음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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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감사합니다. 이정도면 우리 탄문 반연간으로 내도 되겠습니다. 이영균 시인 동화 교수님 시평 소설 하면 뭐뭐~~ 희망이 보입니다.
공부하면서 읽었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다시 들어와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