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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옷 가게
김일광
1. 고민
‘새로운 세상은 바다 너머에 있다!’
한바다는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고 호미 둘레길을 걸었다. 자갈길을 따라 숲실 마을을 지나자 나무 덱이 나타났다. 한결 걷기가 좋았다.
‘이 시골구석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
마음은 바빴지만 천천히 걸었다.
어느새 하선대 앞에 와 있었다. 눈앞에서 파도가 하얗게 부셔지고 있었다. 쉼 없이 밀려와서 부서지고 다시 밀려와 부서졌지만 파도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한다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바다는 자신의 처지가 그 파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쩍하지 않는 갯바위를 향해 자꾸만 달려가는 파도였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는 갯바위를 넘어설 거라며 생각을 다져 먹었다.
‘그래, 어머니 마음은 안타깝지만 서울로 가야 해. 진학을 하든 일을 배우든 서울로 가야 성공할 수 있는 거야.’
그때 한바다의 눈앞으로 뭔가 휙 지나갔다.
“아악, 이를 어떡해!”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뒤따라왔다. 돌아보니 십 미터 남짓 떨어져 낯선 여자가 덱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한바다는 그 여학생의 눈길을 따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위에는 그 여학생이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스카프가 파도에 밀리고 있었다.
“아유 어떡해, 어떡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여학생을 그냥 못 본 척 할 수가 없었다. 한바다는 서둘러 계단을 타고 바다로 내려갔다. 스카프는 이미 손이 닿을 수 없는 데까지 밀려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한바다는 바지를 걷고 물로 들어갔다. 무릎 깊이쯤에서 스카프를 잡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한바다가 물에 들어간 사이에 바닷가로 내려온 여학생은 연거푸 허리를 굽혔다.
한바다는 스카프를 건네기 전에 손바닥에 올려 물를 빼고는 다시 펴서 가볍게 펄럭여 충분히 물기를 빼주었다. 그러는 한바다의 모습을 그 여학생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 갖고 가셔도 돼요. 집에 가셔서 바로 세탁해요. 그냥 두면 바닷물에 섬유가 상할 수도 있어요.”
“고마워요.”
여학생은 무척 고마워하며 스카프를 건네받았다.
2. 인연
“혹시 섬유 쪽 공부했어요?”
스카프만 받고 그냥 물러설 수 없었는지 그 여학생은 한바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얼굴에는 이미 그럴 거라는 믿음이 나타나 있었다. 돌아서서 가려던 한바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보여요?”
“예, 젖은 스카프를 다루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아서요.”
한바다는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그 여학생과 눈을 마주보았다. 그 여학생도 한바다를 바로 보았다.
“어릴 때부터 옷 속에서 살았거든요.”
“학교도?”
“예, 패션 디자인 고등학교 다녀요.”
“그럼 몇 학년…, 졸업반? 맞지요?”
여학생은 어려운 문제를 푼 것처럼 좋아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또 물었다.
“졸업한 뒤 계획은요?”
한바다도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그 여학생이 싫지는 않았다. 같은 또래 같아서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옷과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네요.”
“패션 일이 다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바다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왜, 그래요?”
“혹시 낮에 중앙상가 청년창업지원센터에 가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곳에 갔지요. 그곳에서 나를?”
여자는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
“맞아요. 거기서 보았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는데 역시.”
한바다는 답답한 마음에 청년창업지원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한바다는 실업고등학교 패션 디자인학과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진학을 할 것인가, 전문 학원에 등록할 것인가, 아니면 외국으로 튈 것인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를 이어 중앙시장 ‘라사’ 골목에서 양복점을 하였다. 어머니도 그 곁에서 양장점을 하였다. 솜씨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이 지역 사람이면 누구나 <부티크 sea sun>의 옷을 한 번은 입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양복이나 양장을 맞추어 입는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그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한바다는 손님 없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패션 디자인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부모님이 하던 <부티크 sea sun>을 브랜드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금 마련을 위하여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를 팔려고 내놓았다. 그러나 어머니 생각은 달랐다. 아들이 자신들을 이어 고향에서 <부티크 sea sun> 양복점을 열어 주었으면 했다. 한바다도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찾는 손님이 없을 게 뻔했다.
“그런 걱정이 있었군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한바다가 괜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생각에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우리 같은 또래 같은데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내 이름을 ‘한바다’ 라고 해요. 말 편하게 해도 되지…요?”
“편한 게 하는 게 좋지…요. ‘봄빛나’ 라고 해…요.”
어색한 말꼬리에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봄빛나! 이름 예쁘네.”
한바다는 소리 내어 이름을 웅얼거리며 어색한 분위기를 날렸다.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 한 번 보고 싶은데 어때?”
봄빛나는 한바다의 마음과 달리 부모님이 하시던 <부티크 sea sun> 양복점이 보고 싶었다. 왠지 호기심이 일었다. 보물창고 랄까, 먼지와 거미줄이 엉킨 전설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아유, 몇 년째 문을 닫아둔 곳이라서 엉망, 먼지투성일 걸.”
“그럴수록 좋아. 정말 보고 싶어.”
봄빛나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한바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선뜻 보여주겠다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3. 까치 노을
“아, 저기 봐. 해가 지고 있어.”
봄빛나가 외치듯 탄성을 질렀다. 까치 노을을 머금은 하늘과 바다는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바다가 타들어가듯 붉은 빛줄기를 길게 펼쳤다. 한바다는 무덤덤하게 봄빛나가 가리키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늘 보아오던 광경일 뿐이었다.
“저 색깔을 뭐라고 해야지. 분명 붉지만 붉다고만 할 수 없는 느낌, 주황도, 다홍도 아닌 그 오묘한 빛깔. 나는 바다가 만들어내는 포말의 저 하얀 색, 하얗다고만 할 수 없는 그 빛, 막 잡아 올린 생선의 푸른 빛 그 반짝이는 빛깔, 이런 살아있는 색을 붙잡아 내 캔버스에 앉히고 싶은 게 꿈이야.”
봄빛나는 꿈을 꾸듯이 혼잣말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덤덤하던 한바다도 봄빛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스럽게 석양어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석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어둠에 덮이고 말았다.
“예술고 다녀?”
한바다가 물었다.
“그림을 중학교부터 그렸는데 별로 인정받지 못했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꼴이 되어 버렸거든.”
“……?”
한바다가 눈을 크게 뜨며 자세히 말해달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봄빛나는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마침 마을버스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버스에 올랐다.
4. 약속
한바다와 봄빛나는 환승센터에서 헤어졌다.
“꼭 구경시켜 줘.”
봄빛나는 다른 버스에 오르며 한바다에게 다시 졸랐다. 양복점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오래된 가게가 주는 신비함이 봄빛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것만 같았다.
“알았어. 그럼 내일 전화해.”
한바다는 봄빛나를 실은 버스가 떠난 뒤에도 한참동안 환승센터에 서 있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먼저다.’
진로를 고민하다가 찾아갔던 창업지원센터에서 들은 말 중에 머리에 뱅뱅 도는 한 마디였다. 고향에 있는 가게를 팔아서 서울로 가겠다는 한바다의 이야기를 들은 상담원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예전에는 새로운 세상이 바다 건너 있다고 했지요. 너도나도 유학을 떠나던 때도 있었고요.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고도 했지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디서 시작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랍니다. 그 말은 자신만의 참신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애써 서울로 가시겠다면 저희들은 도울 방법이 없네요.”
나만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중요하다는 조언을 들은 한바다는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작정 서울로 가겠다는 생각만 했지. 아이디어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는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서울에 가서 승부를 걸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좋지?’
5. <부티크 sea sun>
약속대로 봄빛나는 아침 일찍 전화를 했다. 그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용케도 중앙시장 라사 거리 양복점을 찾아왔다. 불을 켜자 숨죽이고 있던 가게 안 물건들이 기지개를 켰다. 손길을 기다리는 원단, 가지런히 걸린 옷, 재봉틀, 거울, 가위, 자, 칼이 두런거렸다.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봄빛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았다. 잠자던 빛깔들이 봄빛나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와우! 보물창고야.”
봄빛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한바다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이제 곧 사라질 구닥다리들이야.”
“무슨 소리야. 여기 봐. 얘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 번 들어보라고.”
봄빛나가 한바다를 구석으로 불렀다.
한바다는 마지못해 봄빛나가 가리키는 옷장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봄빛나는 무슨 소리를 들으려는 듯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뭐가 있어? 쥐가 있는 건 아니지?”
한바다는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했다.
봄빛나가 집개손가락을 펴서 입을 막았다.
“쉿, 가만히 들어봐. 이 옷들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
“뭔 소리야. 이 옷들은 주문해 놓고는 찾아가지 않은 것들이라고. 우리 부모님 호주머니를 힘들게 한 놈들이야.”
“그래? 그럼 이건 뭐야?”
봄빛나는 옷장 선반에 얹힌 푯말을 들어보였다. 먼지가 뽀얗게 묻어 있었다.
<옷 빌려 줍니다>
한바다는 멋쩍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였다.
‘옷을 빌려 주기도 했나?’
6. 어머니
“맞아. 빌려주기도 했지.”
언제 들어왔는지 한바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서 있었다.
“아니, 엄마, 놀랐잖아요. 언제 오셨어요?”
“응, 불이 켜져 있기에 들어왔어.”
“안녕하세요.”
봄빛나가 재빨리 인사를 했다.
“집 보러온 분이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바다에게 물었다. 가게를 구입하러온 줄 알았다.
“아뇨. 어제 우연히 만났는데 가게 한 번 보여 달라고 해서요.”
안심이 되었는지 어머니 얼굴이 펴졌다. 그제야 봄빛나를 바로 바라보았다.
“참한 아가씨네. 우연히 만났는데 어떻게 가게까지 데려오고?”
어머니의 물음에 한바다와 봄빛나는 둘 다 대답이 궁해졌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 우연히 만났는데 함께 가게까지 구경하고 있었다. 민망해진 두 사람은 그냥 환하게 웃어버렸다. 어머니도 따라 웃었다.
“한바다! 이름 뜻을 이제 이해하겠네. ‘sea sun’ ‘한바다’. 느낌이 다르지 않아. 부모님이 이 가게 이름 그대로 아들을 부르셨네.”
“눈치 한 번 빠르네.”
봄빛나와 한바다의 이야기 끝에 어머니가 설핏 웃었다.
“이 가게를 쟤네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남편하고 둘이서 정말 아들 돌보듯 애지중지 키웠지.”
어머니의 그 말에 한바다 가슴이 아릿해 왔다.
7. 이야기가 있는 옷
봄빛나는 문득 이 가게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 이 가게 제게 빌려 주실 수 있나요?”
어머니는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고는 슬쩍 한바다 눈치를 살폈다. 한바다도 의아한 얼굴로 봄빛나를 보았다.
봄빛나는 졸업을 앞두고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 대부분은 미대로 진학하며 화가로서 길을 나섰지만 봄빛나는 그림 그리는 일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부전공으로 삼았던 패션 디자인에 오히려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일도 만만치 않았다. 디자인 공부를 하기에는 돈이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날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창업지원센터를 찾은 것이었다. 그곳에서도 뾰족한 답이 없었다. 그러나 “sea sun"에 들어선 순간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것만 같았다.
“얘가 서울 가겠다며 집을 내놓았는데 어쩌누?”
어머니가 힘없이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 집이 팔릴 때까지만 이라도 안 되겠어요?”
봄빛나가 어머니에게 다시 부탁했다.
“하기야 요즘 다들 어려워서 시장통에 있는 이 가게가 쉬이 팔리지는 않을 게야.”
어머니는 봄빛나가 아닌 한바다에게 말하고 있었다. 가게를 닫아두는 것보다 열어놓는 게 그나마 파는 데 수월할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지 뭐.”
한바다는 의외로 어머니의 그 말을 선선이 받아들였다.
“와우, 감사합니다. 집세는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뭔 장사를 하려는지 몰라도 손님이 없을 게야. 전기세, 물세만 해도 만만찮을 텐데 그러니…….”
어머니는 장사가 안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봄빛나가 부담해야 할 돈 걱정을 하였다. 한바다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집세 걱정 말고. 여기 있는 물건들 따로 치울 곳이 없으니까 그대로 두는 조건으로.”
봄빛나는 환하게 웃으며 한바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바다가 멋쩍게 그 손을 잡자 봄빛나가 힘껏 흔들었다.
“여기 있는 물건? 물론 그대로 둬야지. 나도 그 조건을 원해. 야호, 감사합니다. 어머니.”
8. 맞춤 옷
이튿날부터 봄빛나는 ‘sea sun’ 으로 출근하였다. 먼지가 쌓인 옷 하나하나를 끌어내어 먼지를 떨고 정리하였다. 재봉틀과 재봉도구들도 일일이 닦아서 제자리를 찾아주었다. 그러자 침울하던 가게 물건들이 모두 밝게 얼굴을 드러냈다. 말끔하게 정리된 가게 가운데에 재단대를 옮겨 놓았다. 그 곁에는 이젤을 세웠다.
“뭘 하려고 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누?”
어머니가 들어왔다. 몹시 궁금한 얼굴이었다.
“어머니, 이 옷은 좀 다른 느낌이 들던데 누구 옷이에요?”
어머니는 봄빛나가 들고 나온 옷을 받아들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니!”
봄빛나가 은근히 대답을 재촉했다.
“우리 아이 아버지 옷이었어.”
어머니는 어렵게 말을 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서 가장 안쪽에 보관해 두었군요.”
어머니는 옷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눈가가 촉촉이 젖고 있었다.
“아버지 옷이라고요?”
언제 들어왔는지 한바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한바다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말을 이었다.
“네 장가가는 날 입겠다며 가게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든 옷이야. 그런데 옷을 입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구나.”
한바다는 말을 삼킨 채 어머니 곁으로 와서 물끄러미 옷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먹먹해 졌다. 봄빛나도 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참 뒤, 어머니가 가게에서 가장 큰 옷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옷들도 빌려주는 옷이지만 다 주인이 있었단다.”
어머니는 옷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주인 이름을 들려주었다. 시장 난전에서 구두 수선을 하던 최 씨, 과일가게 석실 아주머니, 어물전 윤 씨, 공단에서 작업복만 입던 박 씨, 먼지투성이로 농사짓던 석 씨. 배 타느라 고무 옷만 입던 편 씨 …….
“일만 하던 사람들이 무슨 양장, 양복이 필요했겠어. 딱 하루 이런 옷이 필요했지. 집안 큰일 말이다. 그 하루 입으려고 비싼 돈 주면서 맞출 수는 없잖아.”
모두들 옷을 맞춰 입을 형편이 되지 않아서 빌리러 왔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그들의 특별한 날을 위하여, 그들에게 꼭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두었다가 빌려 주었다고 하였다.
봄빛나가 가만히 어머니를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봄빛나의 말을 들으며 어머니는 뭉클했다. 그러다 이내 봄빛나를 마주 안았다.
“고마우이.”
한바다가 빌려주려고 만든 옷을 쓰다듬었다. 옷들이 담고 있던 이야기가 선명하게 들렸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차곡차곡 담아 두었던 시장 사람들의 모습이 이야기가 되어 들려왔다.
‘아버지, 어머니!’
9. 봄빛나의 일
봄빛나에게 빌려준 “sea sun"에 한바다도 날마다 들렀다. 새삼스럽게 부모님이 만든 옷들을 뒤적이며 하나하나 사연을 읽어나갔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이 만든 옷들은 그냥 옷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던 이웃이었다. 그 옷을 통하여 그동안 몰랐던 이웃을 만나고, 느낄 수 있었다. 이웃의 삶을 보듬어 안으며 알뜰하게 살아왔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느꼈다. 옷 한 점 한 점이 다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봄빛나는 어디 갔지?’
가게 문만 열어두고 봄빛나는 자꾸만 밖으로 나다녔다.
봄빛나는 시장 사람들을, 바다를, 또 산을 만나러 다녔다. 한바다의 부모님이 만났던 이웃과 바다, 바람 그리고 푸른 들녘이 보여주는 지역의 색깔을 찾아다녔다.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가게로 돌아온 봄빛나는 소나무의 기품 있는 녹색, 농부를 품은 흙빛, 느긋하게 흘러가는 강과 그 물빛, 품이 넓은 바다와 하얀 포말, 시장 사람을 닮은 싱싱한 빛깔들을 재단대 위에 펼쳐 놓았다. 오래 된 양복점 그 재단대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 얼굴이 살아났다.
봄빛나는 그들을 위한 옷 그림을 그렸다. 밤을 새는 날이 많았다.
10. 깨달음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늦게 한바다가 다시 “sea sun"을 찾아왔다. 봄빛나는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한바다가 인기척을 냈지만 봄빛나는 알아채지 못하였다. 재단대 위에는 바로 한바다 아버지의 입어보지 못한 옷이 펼쳐져 있었다.
한바다는 한참동안 봄빛나가 하고 있는 작업을 지켜보았다.
봄빛나는 그 옷을 통해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바다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봄, 빛, 나!”
봄빛나가 깜짝 놀라서 연필을 떨어뜨렸다.
“놀랐잖아요. 언제 왔어?”
“30분도 넘게 기다렸다고.”
“몰랐어.”
약간 짜증이 났던 한바다가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언제까지 있을 거야?
“기분 나쁜 일 있었어? 화난 사람 같애.”
“화를 무슨 …. 언제까지 작업이 끝나냐고?”
한바다가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다.
“이 작업? 비우라고 할 때까지 할 거야. 집이 팔렸어?”
봄빛나는 의자를 찾아 앉으며 한바다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아니. 떠나지 말고 여기서 계속 작업해.”
“아이쿠 감사해라. 내놨던 집을 거두어 들였구나.”
봄빛나가 활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또 조건이 있다고?”
“나도 여기서 작업할 거니까 막지 말라고.”
봄빛나는 허리를 세우며 한바다를 보았다.
“작업? 어떤 작업?”
한바다도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디자인 일을 할 거야. 여기서.”
“서울이나 외국 가는 거는 포기?”
“가지 않을 거야. 내가 꿈꾸는 세상은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그래? 그러면 그 세상은 어디에?”
“내 못난 생각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었어.”
“못난 생각 너머! 오 대단한 생각. 철이 든 거야, 도를 깨달은 거야? 하 하 하. 내 친구 한바다의 가능성을 보고 그 조건을 수락할 게.”
봄빛나가 손바닥을 활짝 펴고 다가왔다. 한바다가 마주서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우리 함께 작업을!”
11. 아버지의 옷
“저 옷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옷 같은데 지금 뭘 해?”
봄빛나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알아 맞춰 봐.”
“글쎄, 작업복을 입은 사람?”
봄빛나는 아버지 옷을 들어 한바다에게 대 보았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지? 너와 많이 닮았겠지?”
“글쎄…….”
한바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늘 일만 하시는, 가위를 쥐고 있거나 재봉틀 앞에 앉았던 아버지 정도였다.
“내가 한 번 말해 볼까?”
“어떻게? 만난 적이 없잖아.”
봄빛나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바다의 눈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신 분, 그러나 이웃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시는 분, 가난했지만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신 분, 골목을 오가는 분들과 창 너머로 늘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시던 분 …….”
한 가지, 한 가지 아버지를 드러낼 때마다 한바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버지!’
한바다는 가만히 아버지를 떠올렸다.
바로 그런 아버지였다. 가슴이 아릿해져서 더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울컥 설움이 북받쳤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봄빛나가 이야기를 마무리할 즈음 한바다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봄빛나는 다시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옷이 들려주었어.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은 그런 아버지에게 꼭 맞는 옷을 그리는 거야. 아버지를 가장 아버지답게, 당당하게 드러내 주는 옷.”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바다는 벌떡 일어나 재단대 앞으로 걸어갔다. 재단대 위에 놓인 그림을 보았다. 아버지가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채.
12. 맞춤옷 가게《sea sun & see sun》
맞춤옷《sea sun & see sun》 말끔한 간판을 내걸었다.
가게를 열게 된 두 사람, 가게 이름은 한바다 부모님이 이웃 사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던 부티크 “sea sun”을 이어받아, 바다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듯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보겠다는 뜻으로 지었다.
봄빛나와 한바다는 간판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네 결혼식 때 입으려고 준비했던 아버지 옷을 네가 입었구나.”
어머니 눈에는 그 옷이 너무나 크게 보였다.
“아버지에게 오늘 행사를 꼭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 아들과 함께 사진 찍어야지요. 곁에 서세요.”
어머니가 손 사례를 쳤다.
“아니야. 나는 아들보다 먼저 봄빛나와 찍고 싶어.”
그 말에 한바다가 일부러 심통을 부리는 척 서둘러댔다.
“느긋하게 사진 찍을 시간 없어. 빨리, 빨리.”
봄빛나가 어머니와 사진을 찍고는 한바다를 쫓아갔다.
“어머니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까 시간 맞춰 오세요.”
“알았어. 알았어. 내 곧 뒤 따라 가마.”
그녀의 목에서 스카프가 나풀거렸다. 바로 바다로 날아갔던 그 스카프였다.
맞춤옷 《sea sun & see sun》이 개업하는 날에 맞추어 한바다와 봄빛나는 그동안 디자인한 옷으로 졸업 작품 겸 패션쇼를 열었다.
13. 졸업 패션쇼
중앙상가 실개천을 따라 런웨이가 설치되었다. 모델들이 그 위를 당당하게 걸었다. 그런데 그들은 키가 크고 날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욱이 서울에서 데려온 낯선 사람들도 아니었다. 모델은 이웃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다. 여태껏 패션에서 소외되어 왔던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크기와 모양의 옷으로 이웃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한바다는 지금까지 패션이란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며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것인 줄 알았다. 한바다와 봄빛나는 그 모든 것을 떨쳐 버렸다. 패션은 사람의 이야기가 담기고, 사람의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졸업 작품은 겉모습보다 그 사람이 꾸려온 삶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기를 담아서 그 사람에게 꼭 어울리는 옷을 만들었다. 바로 그런 패션쇼였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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