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밥 나무와 장미
최유나
나는 꽤 오랫동안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내 생각과 감정은 결이 하나하나 만져질 만큼 세심했고 그건 나의 삶이 고달픈 이유가 되었다.
내가 여느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느낀 건 스무 살 즈음이었다. 책을 읽다가 혹은 영화를 보다가 떠오른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진 채 무수한 가지로 뻗어나갔다. 가끔 생각의 방향이 나를 향할 때면 그것은 푸른 하늘을 다 덮을 정도로 가지와 잎을 펼쳤다. 마치 ‘바오밥 나무’처럼 무섭게 자라나는 생각 탓에 나는 몸과 마음을 어둠으로 뒤덮은 채 괴로워했다. 가슴은 요동쳤고, 그 떨림이 멈추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의 현(絃)은 여리고 섬세했고 울림은 깊고 오래오래 이어졌다.
친한 이들과 함께 있을 때의 유쾌하고 농담을 좋아하는 모습도 나였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정체를 드러내는 퍼런 심연의 마음도 분명 나였다. 넓은 간격을 두고 공존하는 모습은 혼란스러웠고, 멈추지 않는 생각을 부여잡은 채 살아가는 것도 참 별로였다.
그래서 성격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타고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뀌어야 한다는 다짐은 내면을 끊임없이 파고들어 자신을 몇 번이고 평가하는 일이 될 뿐이었고 거기엔 여전히 탐탁지 않은 내가 있었다. 자괴감으로 시작된 변화에 대한 소망, 그리고 내면에 대한 고민. 그것은 다시 자괴감으로 이어지는 무한궤도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스무 살 즈음에 시작되었던 이런 고민은 젊음을 맞이하고 그 정점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최근까지도 늘 함께였다.
그러다 얼마 전, 산책 중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섬세한 감정과 생각이 많은 건 부정되거나 바꾸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끝없이 자라나는 생각의 가지를 잘라버리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잘 정리하고 다듬어서 글로 빚어내는 것이 나의 임무이자 정체성이라는 뜻밖의 결론이었다.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정리하자 그렇게 떨쳐내고 싶었던 마음의 혼란은 신기하게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끝없이 가지를 뻗던 생각도 어느덧 주춤해졌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그동안 가볍게 여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기타 선생님은 음표와 쉼표만 있는 악보로 곡의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신다. 고흐의 밤하늘은 찰나의 모습이지만 여전히 별빛은 눈부시게 흐르고 있으며, 삶의 불안과 고통을 작품 곳곳에 숨겨놓은 카프카와 도스토옙스키의 문장을 나는 사랑한다. 이 모든 것은 섬세한 감정과 생각, 그리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다.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의 나무가 가지와 잎사귀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끔 잘 돌봐줄 생각이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자랄까 봐 미리 두려워도 말고, 마음의 결이 남들보다 여리고 섬세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도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신비와 의미, 아름다움을 예민하게 느끼고 거기에 내 생각까지 덧붙여 풍요롭게 이야기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내 마음에서 자라던 그것은 ‘바오밥 나무’가 아니라 고운 장미 한 그루였음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에세이 21> 2023년 겨울호 수록
첫댓글 나만의 고운 장미 한그루~!! 잘 돌봐주시길요~ 늘 응원합니다 ^^
고맙습니다,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