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늘과 같이 두려워하고 내가 사랑을 구했던 분이 나를..
지금 생각해보면 큰 잘못들이 아니었는데... 아니 전혀 잘못이 아니었는데...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저주의 말들이 그의 곁에 있는 내내 쏟아져 나왔으나 나는 평생을 제대로 그에게 크게 대든 기억이 없다.
다만 19살 어린 놈이 제 손가락을 송곳이로 깨물어 몇 번의 구멍을 내고 찰고무보다 더 질겼던 생살을 질겅 질겅 씹어 그 살 점을 뜯어 내어 혈서를 썼을 때 그는 아마 기겁을 하셨을 거다. 이 놈이 이 놈이...
몰랐다. 영화에서 보듯이 혈서를 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게 될 줄 알았다.
과감하게 이빨로 세게 한 번 깨물면 피부가 툭하고 터져서 피가 흘러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되지 않아서 너무도 처참하고 잔혹하게 진행 되었다.
너무 어리석은 방법으로 피를 내려 하였다.
칼을 사용했었으면 참 쉬웠을 텐데...
엄청난 긴장은 온 몸에 퍼져 말초혈관까지 말라서 손가락을 이로 씹어 살점이 떨어져 나갔어도 피가 나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속에 다시 살을 잘근 잘근 씹어 대었다.
차라리 칼로 손가락 한마디를 순식간 자르는 게 쉬웠을 것이다.
여린 그는 그 과정들을 지켜보았다...
내가 그를 질리게 만든 최고의 반항이었을 것이다.
그 상처는 수 십년이 지난 아직도 내게 흉터로 새겨져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남겨질 거 같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 부터 나는 증오에 가득 차 있었다.
고등학교 수업시간 커터칼로 내 팔목을 몇 번을 죽 죽 그으면서 그 피를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여러 날을 그랬다.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 때 부터였다.
강릉초등학교 1학년 신입생 구슬 뺑뺑이 반배정... 마지막 반 12반...
추첨으로 되어진 12반. 나는 아주 실망 섞인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럼 그렇지.. 재수 없는 녀석...
나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잘 보이려 평생을 노력했다.
그 후로도 45년 동안...
8살 때도 바나나가 정말 귀한 과일이었을 때...
어린 마음에 아버지께 감사해 하며 하루 한 개 씩 아껴 먹으려 면도칼로 100조각을 내어 100일 간 먹으려 책상에 고이 넣어 두었다.
두 조각을 먹은 이튿 날...
그걸 누가 보고 말을 했는지... 먹지는 않고 장난질 했다면서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그 아이의 마음을 보셔야 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항상 조심스러웠고 무척 어럽고 두려운 존재였다.
내가 다 큰 후 50이후에 안 당시의 사실은 반전이었지만...
초등학교 2~3학년 나는 이미 지옥에 다녀온 적이 있다.
캄캄한 저녁 안방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2~3시간 여 뺨을 수도 없이 맞아본 적이 있다. 백 대는 넘었던 거 같다.
그는 나를 버릇 고치려 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 나이의 아이에게 그러면 안되었다
그 근본 원인을 알려고 했어야 했다. 아이가 왜 그랬는지 마음을 보아야 했다.
나는 그 이후로 ㅇ이 들어간 첫 마디 단어를 아주 가끔 더듬고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엔 교과서를 읽지 못해 울 정도었다.
그와 같이 사는 내내 어머니와 나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저주의 말들을 들어왔다.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그러나 나는 다 듣고 있었다. 같이 밥 먹는 내내 그가 내뿜어 내는 독사의 독을 밥과 함께 꿋꿋하게 다 받아 먹었다.
그와 같이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저주의 말을 밥과 같이 먹었다.
나는 집을 떠나 몇 년 있다가 다시 그 집에 다시 들어갔다.
어머니와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장남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젠 내가 이 상황들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여겼다. 오만하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나에 대한 비난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변하게 하고 싶었다.
충청도에 계산 조부모님을 집에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았고...
그 선택은 더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할아버지의 폐암과 사망.
그리고 몇 년 뒤에 아버지를 신앙처럼 따랐던 할머니의 치매와 사망...
직장 때문에 멀리 있어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할아버지가 병 중에 누워 내게 남기신 말...
나는 네 아버지가 이렇게 성장 했을 줄 몰랐다. 네 아버지가 멀리 나가 있어 몰랐다.
너에게 미안하다...
당시 40대 초중반이었던 당신의 그 나이보다 훨씬 내 나이가 많아졌다.
여러 해석을 하고 그를 이해해 볼 수는 있겠지만 지금도 이해 하기가 싫다.
초등 5~6학년 때
어머니가 어딘 가에 가신 저녁.
뭔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가 음식을 하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룽지탕..
퉁퉁 불어 있었고 나와 동생들에게 배당을 해 주셨다. 다 먹어야 한다고...
나는 동생들의 배 였고...
아무 말 할 수 없었고 보통 먹던 몇 배나 많은 양을 위로 밀어 넣어야 했다.
그리고 위가 차고 차서 또 차서... 도저히..
말로 거역할 수 없는 그런 관계였다. 우리는...
구토를 했다.... 결국 못난 녀석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건 고문이었다.
중1~2 때 왠일인지.. 놀러 가자고. 동생들과..
용인 에버랜드..
정말 재미 없었다. 의무감에..
내 느낌엔 아버지도 어떤 의무감에 가셨을 듯 하다.
사진 속 내 표정도 그러했다. 무표정...
그게 내 기억 속에 남겨진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이다.
40년 이상을 아프셨던 거 같다. 계속 계속 약해지셨고 계속 계속 악해 지셨다.
거의 놀러 가 본 적이 없어서 지금도 놀러 간다는 것에 엄두가 안난다.
나는 증오심이 아직 남아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난 하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 체험들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이 체험들을 말하지 않고는 나를 말할 수 없다.
1남 5녀의 독자... 면허만 있었지 운전을 못하셨던 성격적 소심함과 좌절감과 현실의 냉혹함...
정말 치열하게 살아오셨던 건 맞는 거 같다.
내가 기아자동차 공채로 신규사업팀 에어백 개발팀에 들어갔을 때...
그 당시 나는 몰랐지만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를 주변에 많이 자랑 하셨다고 나중에야 들었다.
그 분은 당연히 나를 사랑하셨다. 그 분의 방식으로...
내가 단기사병으로 복무하게 되었을 때 훈련병 시절...
누군가의 언질이 있었는지 높은 계급의 누가 나를 호명하여 나갔고 갑자기 뜬금없이 팔굽혀 펴기 100번을 시켰고 나는 70여 번 이상을 했을 때 그만~ 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몰랐다.
그 날 헌병대에 배정 받은 나는 헌병 교육을 막 받고 있었는데 군용 짚차 한 대가 급하게 도착하고 나를 또 불렀다.
교육자는 그들의 말을 듣더니 명단 서류를 바닥에 내 팽개쳤다.
나는 그 길로 골프장으로 재배치 받아 가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릉지부 충청도 모임에서 알게 된 얼굴만 몇 번 본 보안대 대장을 서점에서 가장 큰 옥편 사전을 갖고 가셨고 저를 부탁하셨다고 들었다.
여리신 아버지가 어떠한 마음으로 당시 두려운 곳 보안대에 가셔서 어렵게 말을 꺼내셨는 지 ...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던 몇 번의 기억...
그러나 내가 가장 절실한 사자성어.
새옹지마...
그러나 나의 인생의 크나 큰 어긋남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고교 1년 때 담임선생님외 몇 분과 잘은 모르지만 진한 술자리를 가지셨다고...
저를 잘 봐 달라고...
공부를 해 본 사람은 안다...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건 태도의 문제이고
태도 이전의 적성과 성향의 문제이고...
공부를 잘하는 것과 사회에서의 성공은 다른 거라고...
지금도 단 하나 내가 아주 당연하게 내 딸에게도 강조했던 게 있다.
공부는 강사의 말을 들어서 뇌에 새겨지는 게 아니라...
좋은 강사도 중요하지만 공부는 내가 하는 거다.
누에고치가 되어야 하고 단군 설화에서 곰이 동굴에 들어가 듯 해야 한다.
어릴 때 몇 년의 그런 생활이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
아버지는 아버지 만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셨다.
사자가 제게 가장 귀한 고기를 주는 데 안먹는 실은 못먹는 사슴...
실망과 비난의 것이 아니었다.
먹어주길 기대하는 마음은 사자의 마음. 못 먹는 사슴의 마음...
사랑은 나의 방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고기를 먹는 사슴은 죽는다.
태어나 아버지께 처음 반항 아닌 반항을 했던 기억이 있다.
초등 5~6학년 때 봉고차 뒤에 타고 동생들과 저녁에 집에 갈 때였다.
아버지는 내가 기린을 사슴이라고 하면 뭐라고 할 지에 대해 물으셨다.
나는 사슴이라고 바로 말씀 드리는 게 맞다고 했고 아버지는 무척 대노하셨다.
아버지가 기린을 사슴이라고 하면 사슴으로 알아야 한다고 하셨고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바로 알려 드려야 한다고 했다.
동생은 기린 맞다고.,.
그게 아버지와 나의 어긋남의 시작이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완전 달랐다. 완전히...
나중 아버지는 혀에 꿀을 바른 자들에게 큰 사기를 몇 번을 당하셨다.
나중에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고사가 있음을 알았다.
지록위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지역 서점 카르텔의 엄청난 텃세에도 불구하고 서점을 열게 되었다.
두 분이 모두 나가셔서 일을 하셨고 나는 두 동생들과 같이 집에 있었다.
어린 아이들끼리만 있는 집.
불안했던 거 같다. 생일 때 어머니가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 거라고 답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아이들만이 남겨진 집. 불안을 잊는 길은 티비를 보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귀가 하셔서 티비 뒤를 만져 보시고선 화를 내셨다.
배고픈 개와 생선만 남겨 두고 생선을 먹었다고 개를 때리는...
그리고 나는 다음 부터는 얼음과 수건을 준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동생들을 데리고 걸어서 서점에 가면 얼굴을 울그락 불그락 하시며 호통을 치셨다.
공부는 안하고 왜 왔냐고...
왜? 왔는 지 그 분은 돌아가실 때는 아셨을까?
그래도 그래도 참기 어려울 때면 며칠 후 다시 서점에 갔다.
안정적인 정서 형성.. 어려웠고 평생을 걸쳐 그 영향이 있음을 느낀다.
아침에 나가셔서 밤 10시 넘어서 들어오셨다.
년 중 추석과 설날 며칠을 제외하고는 쉬늘 날이 없었다.
그나마 추석엔 충청도 홍성에 가서 친척들을 뵙고 조상에 성묘를 해야 했다. 외가인 서산엔 아주 몇 년 마다...
내 기억엔 그때부터 아버지는 몸이 점점 더 아프시게 되었고 그 원인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잡지와 참고서 총판을 많이 하던 탓에 중노동인 서점 일을 어머니가 도맡아 하셨다.
영업부장으로 앉혀놓았던 사람의 배신으로 어머니가 학교를 다니시면서 참고서 영업까지 하셨다.
아버지는 항상 카운터 책상만 지키고 계셨다. 아주 너무도 당연하게 ..
그 속 마음을 나는 모르지만 내가 보는 시점은 그러했다.
운전에 엄두를 못내시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화물차 운전을 배우시고 직접 운전 하셨다.
서점을 그만 두시는 60세 까지 어머니 차는 3인승 스타렉스 화물차 였다.
사람을 쓰긴 했지만 많은 부분 어머니가 감당하셨다.
지금처럼 책을 묶는 밴딩기가 없어서 매달 수 백 박스 씩 손으로 묶어야 했고 더 많은 수의 박스를 해체하고 배분하고... 서점은 정말 최강의 노가다이다.
가구 배달하셨던 분이 직원으로 와서는 이건 최악이라고 할 정도였다.
화물비를 아끼려고 사과박스를 초과해서 포장을 하곤 했다. 40kg이상 이었다.
그걸 여자의 몸으로 해내셨다. 수 십년을...
요즘은 20kg 미만의 박스가 아니면 아예 가져가지 않는다.
그래도 화물처나 택배기사 분들은 책을 싫어 하신다.
중학교 때 부터인가 나도 때가 될 때면 일요일이나 평일엔 저녁 늦게까지 도왔던 기억이 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극진히 살폈다.
바닷물로 찜질하면 신경통에 좋다는 말에 임당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3~4번을 경포에 가셔서 물을 떠서 데워 드렸던 기억이 난다.
임당동에서 경포까지 최소 40분... 왕복 2시간... 3번만 해도 6시간... 여자의 몸으로... 그 당시 30살 초중반 어린 나이에...
임당동이었으니 내가 초 3년 이전이다. 내가 10살도 이전이니...
임당동에서 집에 뱀꾼들이 와서 뱀 3~4마리를 마당에 풀고 잡아서 산 채로 껍질을 벗기고 뱀탕을 집에서 고아 드셨을 때 났던 그 진한 노린내 냄새가 생생하다.
아버지와 나 29년 차...
아버지 40세도 전 이야기다.
도대체 아버지는 언제부터 아프셨던 건지...
이곳 저곳... 신경통, 허리통증, 등등 병원에 가도 원인도 모르고... 나중엔 뇌출혈 여러 번...
매일 저희 2남1녀 도시락을 점심,저녁으로 챙겨주시고 본인들도 도시락으로 점심 저녁을 챙기셨다. 매장에서 조리해 드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당근 사과주스가 좋다고 해서 10년이 넘게 매일 아침 강판에 갈아서 천에 담아 짜서 즙을 아버지께 드렸다.
옛날엔 믹서기도 없었던 거 같다.
솔잎이 좋다고 해서 직접 솔잎을 몇 가마니 채취해서 수시로 갈아서 드렸다.
고사나 동화책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가 돌아가실 때 까지도 상상을 벗어난 폭언에 묵묵히 견디셨고 언제나 아버지의 편이셨다.
어머니의 지속된 지나친 호의가 아버지를 너무도 그렇게 뻔뻔한 사람으로 만든 건 아닌지...
지속된 호의는 당연한 권리가 되어 버린다...
아버지와 전생에 엄청난 업보가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언제나 강하셨고 모든 걸 잘 해내셨다.
60세 이전 어머니도 여린 여자라는 걸 느꼈던 기억이 없다.
음식 솜씨도 좋으시고 손재주가 많으셔서 초등학교 때까지 머리는 어머니가 깎아주셨다.
야밤에 우리 세 남매의 머리를 깎으시며 구구단을 외우게 하시던 기억이 난다.
이런 어머니 였으니 나는 어머니께 많은 걸 바랄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저 학년 때 수업 중 비가 오면 우산을 갖고 오시는 어머니들...
한 편으로는 혹시...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역시라며 당연하다는 듯 비 맞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속으로 울면서... 그리고 나는 마음이 점차 단단해져 갔다.
부모님 힘 드실까 집안 일 하나라도 도우려 동생들과 가끔 설겆이, 청소는 했던 거 같다.
그 과정에서 동생들에게 좀 강압적인 면이 있었던 거 같아 그건 지금에선 좀 미안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안하고선 말을 안들었으니...
나는 누구도 안보이는 서점 구석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3~4백 편의 세계명작들을 일 년 여에 걸쳐 만화로 보게 되었다.
당시엔 내용을 떠나 만화를 보는 것 자체가 불량스럽게 여겨졌던 때이니...
아버지의 하루 몇 번의 계속된 비난에도 꿋꿋하게 더 구석으로 파고 들었고 숨도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최대한 거기에 나는 없어야 했다.
지금 보면 그때 난 그 만화에서 교양을 많이 쌓았던 거 같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내가 보는 세상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책으로 호흡을 홀로 익히고 그로 인해 명상을 홀로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홀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다 홀로 익혔다.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한 내가 감당해 내 온 체험들이 소중하다.
그 체험들이 내게 필요해서 나는 이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가 계실 때 그리고 가장 힘들었을 때 나는 가장 치열하게 나를 찾았다.
하지만 2년 전 그가 떠나고 지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게 밥 먹을 때마다 매 번 하시던 말씀...
이 쓰레기 같은 녀석.
그래 이건 이건 아닌 거 같다.
일단 맑은 뇌를 가져야 할 거 같다. 운동을 다시 해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