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케쥴에 맞추어 진도를 약간 빨리 해 봅니다....ㅎㅎㅎ
カスバの女.swf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유명 가수들의 노래와 비교를 해 보아도 패티김의 노래 보다는 2% 부족한 것 같습니다.....
カスバの女 - 패티김 - 作曲:久我山 明(くがやま あきら) (孫牧人 손목인)
淚じゃないのよ 浮気な雨に 눈물이 아니에요 변덕스런(바람기가 있는) 비에
ちょっぴりこの頬 濡らしただけさ 조금 이 볼을 적신 것 뿐이야
ここは地の果て アルジェリヤ 이곳은 땅끝 알제리
どうせカスバの 夜に咲く 어차피 카스바의 밤에 피는
酒場の女の うす情け 술집 여인의 얄팍한 情
歌ってあげましょ わたしでよけりゃ 노래 불러 드리지요 나라도 좋으시다면
セ-ヌのたそがれ 瞼の都 세느강의 황혼 눈에 아른거리는 도시(파리)
花はマロニエ シャンゼリゼ 꽃은 마로니에 샹젤리제(거리)
赤い風車の 踊り子の 빨간 풍차의 무희의
いまさらかえらぬ 身の上を 이제 와서 돌아오지 않는 신세를
貴方もわたしも 買われた命 당신도 나도 팔린 목숨
恋してみたとて 一夜の火花 사랑을 해본들 하룻밤의 불꽃
明日はチェニスかモロッコか 내일은 튜니스인가 모로코인가
泣いて手をふる うしろ影 울면서 손 흔드는 뒷모습
外人部隊の 白い服 외인부대의 하얀 옷(군복 / 전투복 / 제복)
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랭 루즈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 1864-1901
1864년 프랑스의 귀족가문에서 출생하여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나 유전성 골격질활인
<농축이골증 : 뼈가 잘 부러지고 키가 자라지 않는 선천성 질환>으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154cm 난쟁이
였으며 왜소하고 허약하기만 한 두 다리로는 지탱을 할 수 없어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했다. 비정상적인 외모로
인해 평범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으며 가문의 수치로 여겨져 다른 친척들로 부터도 외면당하게 된다
이러한 로트렉은 자라면서 그림에 몰두하게 되고 파리의 밤 문화에 빠져들었다. 늘 술에 취해 창녀들과
어울렸다. 파리의 환락가인 몽마르트의 카바레, 식당, 극장 등지에서 시간을 보내며 창녀나 부랑아 등 사회의
낙오자들과 어울렸다. 그러면서 파리의 유명 댄스홀에서 춤추는 무희 등 그들을 소재로 많은 화폭을 완성해
나간다. 1901년 알콜중독과 매독으로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물랭 루주(Moulin Rouge ; 빨간 풍차)
1889년에 만들어진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카바레
<빨간 풍차>라는 뜻의 이름은 건물 옥상에 있는 빨간 풍차 장식 때문에 붙여졌다.
프랑스 근대 유흥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
1914년 화재로 전부 타버리고 1918년 뮤직 홀로 개축했는데, 댄스 홀은 별도로 그 옆에
세웠다. 오늘날 뮤직 홀은 영화 산업의 발달로 영화관으로 탈바꿈하였다.
오늘날 물랭 루주라고 하면 댄스 홀 <발 뒤 물랭 루주(Bal du Moulin Rouge)이며,
인기 연예인의 쇼가 공연되고 있다.
이 노래의 작곡가는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를 작곡한 손목인 선생입니다
카스바 Kasbah(아랍어)
카스바 지역은 고대 로마시대의 도시성벽 위에 세워진 성채이다.
알제리의 옛 건물들은 대부분 16~18세기 알제리를 지배하던 해적들에 의해 건축된 것들로 외부의 침입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성채이기도 하다.
해적의 시대에는 성벽에 둘러쌓인 채 해적이나 오스만 제국 영주들의 저택이었으나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는
가난한 알제리인들이 거주하는 빈민가로 쇠락했고 알제리 시내에서도 가장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 되고 만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리는 1529년 오스만 제국의 통치기시에 항구도시로서 번영의 역사가 시작됐으나
1830년 프랑스가 침공하면서 옛 도시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만다.
그러나 알제리의 카스바는 아직까지 전통적 도시구조를 가진 이슬람 도시를 형성하며 지중해 연안의 가장
훌륭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알제리의 카스바는 199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아랍권 지배자가 거주하는 지역. 아랍 어로 본래 성새(城塞)를 뜻하는 말로 술탄(sultan / 왕)이 거주하던
성 / 건물을 이르지만 주변의 주거 구역을 포함한 성곽 도시 전체를 이르기도 한다. 특히 북아프리카 지역에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外人部隊
외인부대는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중세 이후 프랑스의 외인부대가 대표적이다.
프랑스의 외인부대는 루이 11세가 외국 용병을 모집한 것을 시작(총알받이로 평가)으로 나폴레옹 1세때
전 유럽을 대상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유럽 및 이집트 원정에 사용하며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된다.
오늘날 외인부대의 대명사로 알려려 있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주둔 외인부대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루이 필립이 1831년에 창설한 것이다.
외인부대의 편성원칙은 지원에 의한 계약제도이며, 지휘관은 거의 프랑스 본국인으로 되어 있다.
용병에 대해서는 과거의 전력(前歷)이나 국적 등 신상에 대한 일체의 것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 때문에
범죄자, 망명자 또는 방랑자들이 인생의 역전의 기회로 삼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