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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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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스크랩 법전리 진주강씨종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113 12.03.12 10: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법전리 진주강씨종택(法田里 晋州姜氏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1165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
건 축 주 :  강각(姜恪)
건축시기 :  1636년(인조 14년) 경
중건시기 :  1798년(영조 46년)
소 유 자 :  강신중 (관리자 : 강희직)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0호 , 1982-12-01 지정, 일곽(6동)


건축 구성
강씨종택은 여러 건물들이 한데 모여져 있다. 一자 형상의 사랑채와 ㄷ자 형상의 좌우 건물채가 연결되어 口자형의 살림집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어른 몸통만한 자연석을 5줄로 높이 쌓아 대좌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안채는 영남지방의 안채 중 가장 크고 넓고 높은 편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중앙에는 마루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안채의 대청 전면에는 굵고 높은 두리기둥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연결채는 안채 아래쪽으로 2칸이 나가 있다. 왼쪽 연결채도 역시 2칸 규모인데, 제 2칸은 위는 마루, 아래는 기둥만 있는 빈 공간으로 작은 누각이라고 하겠다. 아래채와 위채 사이의 간격은 담으로 막고 측문을 두었다. 그 측문을 통해 뒤편으로 나가면 정자가 나타난다.

 

문중 이야기
- 모각으로 대신한 현판
현판의 원본은 다른 곳에 보관 중이고 모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각 역시 쉽게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큰 현판의 경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라고 한다. 원래 현판을 내걸 수 없는 것은 불안한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법전리 진주강씨 종택에서는 많은 유품뿐만 아니라 50여 매의 교지도 잃었다. 현 종손인 강신중은 이에 대해 초연하게 말한다.
“교지는 이름이 써져 있는 것이니, 남의 조상 이름 써진 걸 갖다가 무얼 하겠어요, 또 그걸 가져갔다고 해서 미국으로 내가겠어요, 어디로 내 가겠어요. 어차피 한국에 있을 거 아녜요. 누군가가 갖고 있어도 한국에 있을 테니 내가 갖고 있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하고 살아요.”
잃을 것을 다 잃고 난 다음에 현 종손이 얻은 깨달음이다.
- 꿀맛과 밥맛
현 종손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법전리 진주강씨 종택의 입향조 강각의 셋째 손자에 강재항이라는 사람이 있다. 당대에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이다. 경상 감사가 안동에 올 때 안동부에 들리지 않고, 먼저 강재항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갔다. 안동부에서는 감사를 모실 때 어찌 해냐 하나 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감사 행렬에 사람을 딸려 보냈다.
강재항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마땅히 대접할 것도 없어서 아직 덜 익은 보리를 이삭 채 베어다 가마솥에 둘러내고, 시골이라 꿀은 한 병 있었던지 꿀을 반찬 삼아 내어 식사를 대접하였다. 감사는 맛있게 잘 먹었다.
감사 일행이 강재항의 집을 나서서 안동부에 이르렀다. 안동 부사는 딸려 보냈던 관원의 말을 듣고 보리를 베어다 덖어 내었다. 감사는 “이것을 사람이 먹으라고 낸 것이냐.”하며 화를 내었다.
안동 부사는 할 말이 많았다. 잘 드신다고 해서 일껏 그대로 준비해 올렸더니 웬 까탈인가? 감사는 사정을 눈치 챘다. “아, 이놈들아! 그거야 꿀맛으로 먹은 것이지, 밥맛으로 먹은 것이더냐?” 감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관련유물
- 유물링크


관련이야기
- 넓고 높은 누각식 건물군
법전리 진주강씨 종택은 여러 건물들이 한데 모여져 있다. 사랑채는 一자 형상으로 앞을 막고 서 있고, 안채는 좌우 건물채와 ㄷ자 형식으로 연결되어 사랑채 쪽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다. 그 사이의 틈은 따로 벽을 쌓고, 지붕을 덮어 메웠다. 그래서 본채는 결국 口자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본채의 왼쪽으로는 정자 건물이 바짝 붙어서 따로 서 있고, 그 왼편으로 조금 떨어진 지점에 사당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채와 하나의 지붕을 하고 있고, 또 서로 붙은 한 건물이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사랑채라는 이름보다는 아래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랑채 건물은 바닥에 5줄 또는 6줄의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쌓기 하여 만든 기단 위에 건물을 올려 세운 것이다. 전면 6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정면 6칸 중 오른쪽 2칸은 행랑 영역이다.
오른쪽 제 1칸은 방인데, 오른쪽 측면으로 방문이 달려 있고, 그 앞에 쪽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오른쪽 제 2칸은 중문으로 아랫부분에 2쪽의 나무판 문이 달려 있다. 윗부분의 약 1m 쯤 되는 벽면은 시렁을 올린 통나무의 옆면이 일선으로 나와 있는 위에 사각 창문이 달려 있는 흙벽이다.
행랑 영역은 뜰이 좀 넓다. 왼편의 사랑채 영역과 기단 면이나 지붕 면은 같은데 건물이 조금 뒤로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 건물은 반 칸이 약간 못 미치는 앞마루를 두고 있는데, 이 부분은 행랑채 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다. 이 부분의 양쪽 측면은 나무판으로 막혀 있다. 따라서 이 사랑채 영역은 측면 1칸 반 정도가 된다. 앞마루의 앞쪽 끝에는 수직의 자세로 간략화 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 영역 4칸 중 오른편 2칸은 앞마루를 두고 있는 방이고, 왼쪽 2칸은 정면만 터 있고 나머지 부분은 벽과 문으로 막혀 있는 마루방이다.
안채는 법전리 진주강씨 종택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에 속한다. 안채는 어른 몸통만한 자연석을 5줄로 쌓아 올려 대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상당한 높이이다. 가슴 높이 정도 된다. 안마당의 오른편 끝 부분으로는 5단의 계단이 있어 뜰로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뜰 위에는 두툼한 판석으로 된 섬돌이 있다.
안채는 영남지방의 안채 중 최고로 크고 넓고 높은 편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중앙에는 마루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이 마루는 오른쪽 연결채 부분으로 1칸이 더 나가 있고, 왼쪽 연결채 부분으로는 1칸 정도 쪽마루로 연결되어 나가 다시 1칸의 앞마루를 둔다.
마루에서 보는 양쪽의 2칸 측면구조는 동일하게 처리되어 있다. 방이나 광의 위편 벽면은 2개의 각재횡보를 겹쳐서 설치하고, 양쪽 끝에서 기둥을 세운 후 다시 동상의 경우보다 아주 굵은 원형 들보를 놓았다. 이 사이의 약 1m 벽면은 아래 2단 횡보에서 사선으로 오므려 붙이고, 그 위편은 길쭉길쭉한 돌을 쌓아 굵은 들보와의 사이를 완전히 막았다. 이 굵은 들보는 가운데 부분에 약 2m 정도 사이를 두고 다시 특별하게 깎은 두 뼘 정도 높이의 각재 기둥을 양쪽으로 벌려 세우고 그 위에 두툼한 각재 횡목을 끼워 맞췄다. 이 부분의 각재 기둥과 각재 횡목 사이로는 또 좌우 방향으로 각재 횡목이 맞물리고, 그 위에 좀 넓은 좌우 방향의 각재 횡목이 중첩 가설되었다. 위 아래로 연결된 2m 정도 넓이의 각재 횡목의 한가운데는 또 사다리꼴 모양으로 깍은 두꺼운 판목을 세우고, 그 위에 좌우 방향으로 달리는 마지막 들보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 위에 서까래가 위 아래 방향으로 걸쳐진다.
좌·우 연결채는 높은 안채의 기단 면과 아래채의 기단 면 사이에 경사면을 마련하여서 건물을 앉혔다. 그러므로 좌·우 연결채의 주초는 이 경사면을 따라 서로 다른 높이에 놓여진다.
현 종손인 강신중은 “우리 집 특징은 주초가 오르내린다는 겁니다.”라고 하였다. 우리의 옛 건물 중에서 여러 군데에서 이러한 사례가 발견된다.
오른쪽 연결채는 안채 아래쪽으로 2칸이 나가 있다. 제 1칸은 앞에서 말했듯이 좁은 앞마루가 안마당 쪽으로 붙어 있다. 제 2칸은 누각식으로 처리되어 2층의 바닥 면을 구성하는 각재 나무의 옆면들이 안마당 쪽으로 일선으로 보인다. 아래쪽 벽면은 앞마당 쪽으로만 터져 있고, 위쪽 벽면은 2단으로 횡단하여 아래는 벽, 위에는 벽 가운데 창문을 두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다락으로 쓰이는 구조인 듯하다. 아래는 부엌이다. 여기까지는 옆 건물의 지붕구조 아래 위치한다.
옆 건물의 지붕은 안채의 지붕 아래로 직선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이 옆 건물과 아래채 건물 사이에는 1칸 정도의 틈이 있다. 이 틈은 아래채의 지붕 아래 선을 타고 간이 지붕을 만들어 메워 두 건물을 연결하였다. 이 연결 부위는 뒷면에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어 용도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측문이 있는 부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왼쪽 연결채도 역시 2칸 규모인데, 제 2칸은 위는 마루, 아래는 기둥만 있는 빈 공간으로 작은 누각이라고 하겠다. 아래채와 위채 사이의 간격은 담으로 막고 측문을 두었다. 그 측문을 통해 뒤편으로 나가면 정자가 나타난다. 굵은 기둥과 견고한 목구조, 높이가 강조되는 건물구성 등이 시원시원한 느낌을 준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강찬(姜?),강재항(姜再恒)
- 병자난을 피해 태백산에 숨어 의리를 지키다

법전리 진주강씨 종택을 처음 연 사람은 강각(姜恪, 1620~1657)으로 마을의 건너편에 자리 잡은 강흡(姜恰)의 아우이다. 두 형제는 병자호란 때 부모를 모시고 내려와 태백산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간 진주강씨들의 입향조가 되었다.
강흡과 강각 두 형제가 영남으로 내려왔을 때, 형은 나이가 웬만하였고 아우는 나이가 아주 어렸다. 아우인 강각이 법전의 양지쪽에 자리를 잡았다. 법전리 진주강씨 종택이 있는 이 마을이 양지쪽 마을이므로 양지마(양촌)라고 한다. 양촌은 오늘날에는 척곡리가 되었다.
강각의 자는 경오(敬吾), 호는 도은(陶隱)이다. 향년 38세이다. 1816년(순조 16) 강각이 형과 더불어 병자호란을 피해 내려와 절의를 지키고 효성과 우애를 다하였다는 내용의 영남유소가 올려져 이조 참의로 추증되었다. 묘는 봉화군 상운면 운계리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홍씨이고, 아들은 강찬(姜?)이다.
강각의 후손들은 후에 소론(少論)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노론(老論)을 한 형인 강흡의 후손들과는 원만하지 못한 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노론·소론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두 후손들 사이의 알력도 사라졌다.
두 종가는 벌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방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처음 분가를 하였을 때 형과 아우가 서로를 돌아보고 챙겨주는 우애가 작용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에게서는 그런 우애가 사라지고 서로 다른 정파에 속하는 분립까지 나타났었다. 세월의 광폭한 힘은 그렇게 무정한 것임을 알려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봉화 > 법전춘양권 > 척곡리
- 세 사람의 유학자가 잠든 마을, 척곡리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는 동쪽으로는 소천마을, 서쪽으로는 풍정마을, 남쪽으로는 도천마을, 북쪽으로는 소지마을을 두고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법전마을과 접하여 있다. 법전면사무소가 있는 안마을은 척곡에서 가장 큰 마을로,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건너편의 음지마을은 법전마을이고, 진주 강씨 강흡이 정착한 곳이다. 여기 양지마을은 강흡의 아우인 강각이 정착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진주 강씨 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큰말·양촌·양지말·신기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안동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안동법전이라고도 불렸다.
양지말은 척곡마을의 서쪽 끝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양지말은 35번 도로와 철길의 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양지말 북쪽으로는 법전역이 위치한다. 양지마을의 동쪽으로 있는 작은 마을에는 법계서실이 있다.
양지마을의 남쪽으로는 결문골과 옻밭골이 있다. 결문골은 결망골·명동이라고도 한다. 밀양박씨·의령여씨가 어울려 사는 곳이다. 옻밭골은 명동 아래편에 있는데, 아랫걸문의 일부를 옻밭골이라고 한다. 양지말의 동편, 척곡마을의 한가운데 부분에는 중간들·멋질·버드나무골이 있다. 이 세 마을은 척곡리의 중앙 부분을 이룬다. 중간들은 중간마·중평이라고도 한다.
1620년경 풍정리에 자리 잡은 선비 이영기가 서원을 설치하기 위해 마을을 개척하고 자손들에게 중용의 덕목에 따라 처세하라는 유언을 남겨서 중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간들 동편으로는 버드나무골이 있다. 이곳은 골짜기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는 곳이다. 버드나무골 위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멋질이다. 멋전·내곡리라고도 한다. 중간들처럼 전주이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이 세 마을의 북쪽으로는 재챙이 고을이 있다. 자천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재창이라고도 불렸고, 붉은 샘물이 난다고 하여 자천이라고 하였다.
버드나무골의 동쪽으로는 횟돌배기·오미골이 있다. 횟돌배기는 마을 입구에 촛대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횟돌배기의 동쪽으로 있는 것이 오미골이다. 오미골의 북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삼의실이다. 삼의실은 척곡리의 서북쪽 끝 부분을 이룬다. 옛날 성거사가 여기에 묘지 셋을 써야 좋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 조선 숙종 때의 명성있는 유학자인 이시항·강찬·권석충 등의 묘가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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