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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29일로 자유 여행을 출발한지 닷새가 되는 날이다.
Ibis Budget Nuremberg City M에서 조식을 마치고 다시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로 이동했다.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가 로텐부르크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로텐부르크(Rothenburg)까지는 166k미터다.
규정된 속도로 이동한다면 1시간 35분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다.
5번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하다가 다시 6번 고속도로로 이동했다.
창가는 파노라마처럼 변해가고 있다.
파란 하늘과 구릉, 들판이 초원과 어우러지는 전경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고 있다.
그 중의 백미는 초원위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으며 이동하는 양떼들인 것 같다.
진스하임(Sinsheim) 안내판이 스치며 지나치고 있다.
진스하임(Sinsheim)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도시다.
행정 구역 상으로는 라인네카어 군에 속한다.
렌트 카는 120k미터 이상 속도로 달리고 있다.
다시 네카르줄름(Neckarsulm)이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네카르줄름(Neckarsulm)은 독일 북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도시이다.
슈투트가르트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일브론 지역의 일부이다.
우리의 목표지인 로텐부르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로텐부르크의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정표의 지시대로 좌회전하여 다시 7번 고속도로로 이동했다.
시간은 오전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로텐부르크(Rothenburg)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북서부 타우버(Tauber) 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 숙소를 아직 예약하지 못했다.
숙소를 예약하기위해서 로텐부르크 성 근처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캠핑장아라고 하지만 이것도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기때문이다.
로텐부르크(Rothenburg) 시를 우회하여 외곽으로 달리고 있다.
언덕을 올라 챈 다음 다시 꾸불꾸불한 도로를 돌아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좌회전 신호를 받아 캠핑 장이 위치한 방향으로 진입했다.
도로는 임도나 다름없었다.
임도는 차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으며 승용차 2대가 겨우 교차할 수 있었다.
도로 양쪽은 삼림이 울창하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문명 권하고는 거리가 먼 태고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주택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로텐부르크 이정표
날씨가 화창하고 청명했다.
좁은 임도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는데 주택이 몇채 보였다.
지역 주민들의 보금자리인 주택이었다.
주민들은 문화의 혜택을 일찍이 포기하고 있는듯 했다.
헐어진 상태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기때문이다.
캠핑장으로는 최고의 입지 조건이었다.
조금 더 임도를 따라 내려갔더니 캠핑 장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캠핑장은 외부세계와 단절되어있었다.
사방이 숲으로 우거져있고 녹색 활엽수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커서 귀청을 울리고 있었다.
로텐부르크 캠핑장
숲속의 그늘에 캠핑 카가 주차되어있었다.
그늘은 천연의 휴식공간이었다.
그늘 여백에 텐트도 들어서 있었다.
캠핑장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공간을 확보한 것 같지는 않았다.
숲속의 공간을 그대로 캠핑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자연사랑에 대한 진면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연사랑과는 개념이 달랐다.
독일인들에게 캠핑 장은 삶의 가치를 높이는 제2의 보금자리나 다름없었다.
거부 들의 초호화 캠핑 카가 주차되어있는가 하면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텐트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격식이 없었다.
경제적 신분차이도 느낄 수 없었다.
로텐부르크 성문
캠핑 카는 사적 생활공간이다.
텐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보금자리를 떠나 마음껏 삶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은 은퇴 자와 젊은이들의 천국이었다.
날씨가 무덥기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냇가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거나 타월을 등에 두르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있었다.
노후까지 해로할 수 있는 부부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마치 20대 연인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웃음도 잃지 않고 있었다.
천생연분의 원앙이었다.
태초에 지구에 등장한 인류가 이러한 모습 이었을 것이다.
욕심이라는 개념이 없었기때문이다.
로텐부르크 성내부
하늘에 흰구름이 정지되어 있다.
살아있는 자연만 존재할 뿐이다.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만물의 호흡소리가 산간에 울려퍼지고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잠깐동안이나마 자연과 함께한다면 속세에서 묻은 떼가 사라질 것 같다.
이것이 복잡한 생활공간을 벗어나 자연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캠핑은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나 이곳은 그러한 것과는 동떨어져있었다.
서양사람들이 우리나라사람들과는 가치관이 다르기때문이다.
돈은 어느 때나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저없이 직장을 팽개치는 쪽은 서양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직장을 팽개치지 못한다.
직장이 많지 않을 뿐더러 삶의 가치관이 서양사람들과 다르기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직장생활을 접어두고 자연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독일은 캠핑생활이 일반 적이다.
캠핑생활이 진정한 힐링 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때문이다.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캠핑장을 로텐부르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캠핑장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노후라고 할 수없을 정도로 젊어보였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있기때문일 것이다.
돌로 깔린 보도불럭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계곡에서 흐르는 냇물소리가 가야금소리 만큼이나 청아하게 들렸다.
“로만틱(romantic) 가도” 라는 안내판도 보였다.
평소에 이곳이 낭만적이라고 들었는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닐듯 싶었다.
산하가 수려하여 감탄이 절로 나왔다.
로텐부르크(Rothenburg)성 부근에 캠핑 장이 많았다.
은퇴한 부부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숲속에 앉아 있으면 모든 생각이 사라질 것 같다.
창공을 바라보니 이곳이이야말로 별유 천지인가 싶었다.
완벽한 자연환경을 갖추고있었기때문이다.
하루동안 만이라도 캠핑장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방의 유무를 물었다.
그러나 노라고 답변이 돌아왔다.
뒤를 돌아볼 틈을 주지 않았다.
황소가 드리박고 있다.
아쉬웠지만 로텐부르크(Rothenburg)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도심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해서 지은 성곽이다.
성을 감싸고 타우버(Tauber)강이 “S”자 모양으로 흐르고 있다.
북쪽은 천 길 벼랑이 적군을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서쪽과 남쪽은 평야지대를 안고 있어서 군량미를 쉽게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쪽과 북쪽에 군영을 설치한다면 천연의 요새가 되었다.
중세시대 지방 영주들이 정착 했던 입지조건이다.
서쪽과 남쪽에 두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것은 클린겐 문(Klingentor)과 갈겐문(Galgentor)이다.
이 두개의 성문만 봉쇄하면 시가지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이것도 불안했던지 성곽 밖에 해자를 설치했다.
때문에 성문을 통하지 않고는 왜적이 성으로 진입할 수 없다.
가게를 알리는 광고가 한글로되어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로텐부르크 성은 중세때 건조된 성이다.
일부는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거의 파괴 되고 말았다.
방치되어 있었던 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그래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겼다.
성곽 밖에 주차를 한 후 Pulverturm 문을 통해 성 내부로 걸어갔다.
도로는 로마시대 도로처럼 돌을 깎아서 만든 보도 블록이었다.
도로의 폭은 비교적 좁아서 마차 두대가 겨우 비껴 갈 수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카페와 레스토랑이었다.
건물 앞의 입구나 난간에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깜찍해서 발길을 자주 멈추곤했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한글 간판을 발견했다.
이곳은 “정통 일식 점입니다.
우동 있습니다.
다꽝(takuan, 단무지) 있습니다.
라면 있습니다” 라는 간판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식점일까?
아니면 한국인이 경영하는 일식점일까?
궁금했다.
가게 안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더니 한국인이 미소를 짓고있었다.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한국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역동적인 정착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개인적인 사업문제나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원인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적 불안이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문제는 대한민국이 이들은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씁쓸한 감정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한다.
그래서 이웃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지언정 주도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역사적 기록이 없다.
갑자기 고국이 뇌리에 스쳤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다.
한국전쟁은 민족의 분단을 고착시키고 국토를 초토화시켰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빈국으로 몰아넣었다.
우리국민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이웃들에 의해서다.
국민은 살길이 막막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목놓아 통곡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고 울부짖었다.
이것은 운명 이겠거니 하고 살았다.
위의 모든 원인은 정치지도자의 그릇된 사리사욕에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여유도 없었다.
가족의 생계문제가 목을 조이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는 해외를 떠돌다 그곳에서 정착하고 혹자는 지게를 짊어지고 선창가로 갔다.
혹시나 일거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가도 일거리는 없었다.
뉘엿뉘엿 해가 사라질무렵이면 항시리 몇 마리를 길가에서 주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 라고 생각했던 시대가 5~60년대였다.
그러했던 대한민국이 어느덧 G20 국가의 회원국이 된다는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뻤다.
한국전쟁 당시 다른 국가들로 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는데 우리도 이들 국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있다는 희망적인 기대감때문이다.
외국에 나갈때마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할 수있었다.
한글 간판이 날로 증가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이곳 독일도 아직까지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휘젓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위상이 몇년 전과 극명하게 달라 지고 있다.
한글 간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기때문이다.
아름다운 성곽
다시 뉘른베르크시로 이동했다.
뉘른베르크 까지는 64k미터다.
규정된 속도로 이동한다면 50분이 소요될 것 같다.
로텐부르크에서 7번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다시 6번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뉘른베르크시 근교에 있는 Ibis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호텔에 도착한 것은 태양이 뉘엿뉘엿 할 무렵이었다.
호텔은 비교적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숙소 하고는 비교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루하고 어두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조식 후 다시 뉘른베르크 시로 이동했다.
뉘른베르크 시는 성곽도시다.
중세 때 건립된 성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성곽을 제외한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 눈으로 볼 수있는 건물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원된 것들이다.
카이저부르크(Kaiserburg)성으로 이동했다.
카이저부르크(Kaiserburg)성은 뉘른베르크 시를 상징하는 성곽이다.
12세기에 착공하여 15∼16세기에 완공되었다.
내부는 황제의 방과 예배당, 우물 등이 있다.
성 중앙에 감시탑인 짐벨탑도 있다.
짐벨탑은 카이저부르크(Kaiserburg)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시를 조망하기에 최적이었다.
탑이 있는 건물은 본래 왕실 외양간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유스호스텔로 사용 되고 있다.
광장을 구경하고 다시 성 로렌스교회로 이동했다.
부르크 가르텐
성 로렌스 교회가 있었던 자리에 본래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를 헐고 그 자리에 1250년에 고딕 바실리카 양식으로 새로운 교회를 지었다.
이것이 성 로렌스 교회다.
구시가지 북쪽에 있는 성 제발두스 교회(St. Sebalduskirche )가 모델이었다.
높은 두 첨탑 사이에 정교한 박공 지붕이 특색이다.
박공지붕은 우리나라 말로 맞배지붕을 말한다.
제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가난하고 헐벗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성 로렌스 정신이 성 로렌스교회에 새겨져있다.
그래서 성 로렌스교회는 성 로렌스 정신에 충실하고 있다.
내부로 들어갔다.
로마 교황청 소속 교회 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
분위기가 경건하고 엄숙했다.
장미 창 사이로 스며 드는 햇볕이 교회 내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루터의 종교사상때문일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와서
밤베르크(Bamberg)로 이동했다.
밥베르크로 이동하기위해서 73번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에를랑겐(Erlangen)을 지나고 있다.
에를랑겐(Erlangen)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 있는 도시다.
바이에른 주의 북부, 마인 강의 지류인 레그니츠 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북쪽 20k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밤베르크의 대주교 관할하에 있다가 1361년 카를 4세에게 팔렸다.
1398년 자치를 인정받았으나 1402년 호엔촐레른가에 넘어가 브란덴부르크 쿨름바흐 제후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686년 프랑스에서 위그노파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상공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다시 22번 지방국도로 이동했다.
밤베르크(Bamberg)다.
아이비스 호텔
밤베르크(Bamberg)는 바이에른 주의 북부 프랑켄 지방의 레그니츠 강과 마인 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수원이 비교적 풍부했다.
‘프랑켄(Franken)의 로마'로 불리기도 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레그니츠 강이 밤베르크(Bamberg) 시가지를 관통하고 있기때문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곳에 가톨릭교구가 설립된 것은 신성로마제국 시대다.
그러나 1802년 교회 령 토지가 소멸되고 바이에른에 귀속되었다.
이후 1817년에 대교구가 다시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르르고 있다.
독일 가톨릭교회 중심지 중의 한 곳으로 중세 시대의 성당과 수도원 및 옛 건물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하인리히 2세때 건축되기 시작했으나 화재로 파손 되었다가 13세기에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개조됐다.
뉘른베르크 시내
밤베르크 역사유적지로 이동했다.
역사 유적지는 대부분은 Obere Karolinenstraße 에 위치하고 있었다.
밤베르크 대 성당을 비롯해 신 궁전과 구 궁전, 성 야곱교회, 성 미하엘 교회, 수도원이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Obere Karolinenstraße를 따라 계속 올라갔다.
맨 위쪽에 성 야곱교회가 있었다.
건물이 소박하고 검소했다.
루터파교회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생업에 열중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교회 내부로 들어갔다.
종교적인 분위기가 물씬 감돌았다.
그러나 서유럽의 성당처럼 신성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교회가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듯 했다.
성로렌스 성당
다시 성 야곱교회에서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성 미하엘 교회와 수도원을 관람했다.
신 궁전과 구 궁전도 관람했다.
장미 정원으로 이동했다.
장미넝쿨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정원이 아름다워 장미꽃 한 송이를 사진에 담았다.
장미 정원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가식적 이지도 않았다.
자연의 섭리를 사랑하며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밤베르크 대성당쪽으로 이동했다.
밤베르크 여행의 백미는 밤베르크 대성당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첨탑이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성당건물도 장관 이었지만 4개의 첨탑은 혼을 달아나게 했다.
예수의 사상인 관용과 사랑을 사방에 전파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후스의 군상
인간이 어찌 신성에 도전할 수 있을까?
자꾸만 나 자신이 작개만 느껴졌다.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화려했다.
서 유럽의 성당 만큼 화려하지않았으나 인간 본연의 심성과 신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주교좌 성당이다.
13세기에 독일 밤베르크에 건립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성당으로 현재 밤베르크 시와 세계를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은 네 개의 첨탑이 종교의 숭고 성을 상징하고 있다.
1004년 하인리히 2세 황제의 명에 의해 지어지기시작해서 1012년 5월 6일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1081년 화재사건으로 일부가 소실 되었다가 밤베르크의 성 오토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후 13세기 후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개축되어 오늘날에 이르르고 있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길이가 94미터다.
높이가 26미터로 네 개의 첨탑까지 합치면 총 81미터에 달한다.
밤베르크 교회
밤베르크 대성당을 관람하고 제2의 베네치아로 이동하려했으나 모두가 풀이 죽어있었다.
굶주림에 지쳐있었기때문이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분위기를 되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선뜻 맥주 한 잔 먹자고 말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6명이 각각 5백만원씩을 지불하고 여행을 시작했다.
밤베르크 시내를 활보하다.
밤베르크 시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위해 여행에 동참했다.
그러나 여행동안 내내 무엇인가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이것이 누적되어 폭발 직전에 있었다.
패키지 여행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었다.
밤베르크 교회 내부
밤베르크 대성당
물의 도시 제2의 베니스(Venice)를 포기하고 체코 수도 프라하로 이동했다.
프라하 까지는 299k미터다.
규정 속도로 이동한다면 3시간 4분이 소요될 것 같다.
밤베르크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