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선각자
-그리스도의 교회 선각자는 누구인가-
들어가는 말
역사가는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 ‘과거’에 관련된 정보나 사실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 과거에 관련된 정보의 의미나 의의, 중요성과 타당성을 판단하게 된다. 역사가가 신문기자와 다른 것은 기자는 기사를 기자의 주관을 너무 많이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역사가의 눈에 비친 ‘과거’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시대를 따라 재해석 될 수 밖에 없다. 에드워드 카아(Edward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듯이 2000여년 동안 이스라엘 사해지역의 동굴 속에 있던 ‘사해사본’은 우리와 상관이 없었지만, 1947년 사해주변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나 양피지 등에 히브리어 알람어, 헬라어 등으로 기록된 사본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들이 사는 현재와의 대화를 할 수 밖에 없다.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변하지 않을 ‘과거’가 없듯이, ‘과거’와의 대화로 통하지 않은 ‘현재’도 없다.
현대 역사가 역할의 중요한 예로는 영국 역사가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이 청교도 혁명을 이끌고 공화정권을 수립했던, 왕정복고 때 역적으로 몰린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을 200여년 뒤 그의 서간과 연설을 모아 분석 검토 끝에 그를 영국 역사의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캐내어 추려 놓은 것도 중요하지만, 농부처럼 시절을 분간할 줄 알아, 씨를 뿌릴 때와 곡식을 거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 놓은 지혜를 갖추어여 한다. 즉 역사의 전체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역사의 어느 부분이나 한 단편을 옳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3.1독립운동이나 안중근 의사 등 역사적 사건을 일본의 역사가와 한국의 역사가가 꼭 같이 다루기는 어렵다. 일본의 일부 사가의 관점으로 보면 폭동이나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볼수있지만,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거국적으로 일어난 민족운동이며, 식민화의 원흉으로 지목된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의사의 국민적 영웅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란 전문적이고 다각적인 시각이 필요하며 이를 史觀(사관)이라 한다.
근래 우리 주변에서 모모 인사가 그리스도의 교회 선각자 또는 지도자라고 하는 글을 접하면서 역사 전공자로 고민하게 된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각자 또는 초기 지도자는 동석기와 강명석이라 할 수있다.
우리는 왜 이들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각자 또는 초기 지도자라고 하는가?
이들의 선각자적인 삶과 지도력에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를 위한 선구자
동석기는 90여생의 생을 살았다. 미국에서 그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된 프랭크 팩(Frank Pack)의 코리아 리포트에서 Another Pioneer Passes와 신시내티 신학교에서 쓴 석사학위 논문인 환원운동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등이 있다.
반면 강명석은 일제 치하 한국 기독교의 활자 매체로 발간되는 주간 기독교 신문인 「긔독신보」와 감리교에서 발행되던 월간 청년 등 여러 매체를 통해 글을 발표하였고, 당시 한국 신학계의 거두들과 같은 대열에서 자신들의 신학사상이나 기독교 문학을 교계 언론을 통해 발표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동석기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국 전래는 1930년 11월 8일 동석기(1881. 4. 6 - 1971. 12. 26)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동석기는 1930년 11월 그의 고향 함경도 북청을 중심으로 이곡면 초리에 함전교회, 덕흥면 시흥리교회, 수동리교회, 하거서면 임자동교회, 수서리교회, 맹경리교회, 진산리교회 등 7개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초기 교회 설립이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기보다는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은 아직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와 공식적인 활동을 하기 이전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의 설립도 선교사들이 아직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석기 도미(渡美)와 하와이 노동 이민
미국은 중국인들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활용했으나 노동인력이 증가하면서 인금인상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자, 사탕수수 노동자들을 일본에서 조달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의 전철을 따르자 한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하기에 이른다. 동석기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할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1903년 지원하였다. 그의 나이 22세로 농장으로 가게 된다.
하와이에 도착하여 노동조건이 열악한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게 된다. 많은 한국 노동자들은 기후 조건과 저임금으로 노동 의욕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동석기는 성실하게 일했다. 농장 주인은 열심히 일하는 그를 불러서 “당신은 누가 보던지 안 보던지 열심히 일하여 내가 많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사탕수수 밭에서 노동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당신의 앞날을 위하여 내가 무엇인가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공부를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한다. 농장 주인은 본토로 들어가서 공부할 것을 제의한다. 그는 농장주인의 특별한 배려로 9개월만에 청운의 뜻을 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하와이를 떠나기 직전에 그곳의 감리교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노스웨스턴 대학
미시간 호수에 인접된 노스웨스턴 대학(Garrett School of Divinity, Nerthwestern University)은 감리교 계통의 명문 대학으로 아마 농장주인의 주선과 세례를 베푼 감리교 목사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리노이(Illinois)주 시카고(Chicago) 근교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치게 된다. 이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지진을 만나게 되며, 그는 참혹한 지진의 현장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에 도착한 그는 첫 해에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하다가 후에 신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신학을 전공한 후 1913년 노스웨스턴 갈렡 신학부(Garrett School of Divinity, Nerthwestern University)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 노동자로 온 10년만의 영광이다. 그는 고국에서 일할 것을 결심하고 귀국하게 된다.
동석기의 귀국과 3. 1 운동
그의 귀국은 한국 감리교로서는 큰 기대를 갖게 되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1913년 원주 지방에서 순회 목회를 시작으로 1914년에는 인천 내리교회 교역자로, 1917년 서울의 마포교회에서, 1919년 경기 수원 지역 남양교회에서 14년 동안 목회 하였다. 1916년 「긔독신보」의 “감리회통신(監理會通信)”에서 ‘김씨의 신앙심’과 ‘박부인의 별세’라는 글을 기고한다.
1919년 3월 1일에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 전체의 거족적 운동이었고 또 천도교나 기독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단체가 선도한 것이 사실이었다. 조선시대의 정통에서 항상 이단시되던 신앙으로 늘 체제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의 종교들이 주동되어 3.1운동은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참된 근대 한국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한편 동석기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희도와 절친했고 수원지방의 독립운동 책임자였던 김세환도 자주 만났다. 또한 그가 관할하던 경기 사강, 비봉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위한 활동 이외에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력으로 그의 목회 지역인 수원지방 일원이 3.1운동의 성역이 되도록 하였다.
3월 1일 상경하여 오후 2시에 회집된, 파고다 공원의 집회에 참가하였고,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에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 의주로를 경유하여 정동의 미국 영사관,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프랑스 영사관 총독 관저 등을 다니며 시위를 하였고, 미국 영사관에 민족자결주의 운동의 정황을 파리 강화회의에 타전 의뢰하다가 검거되어,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개월을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복역 후 충남 청양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22년 교회를 사임하고, 만주 봉천의 영고탑교회에서 1년간 목회를 하였다.
동석기는 1927년 도미하여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신학교(Cincinnati Bible Seminary)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미국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에서 운영하는 신학원이다. 그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그것이 주의 섭리라고 믿었다. 이 학교는 우리가 가르치듯이 진리를 성서의 말씀 그대로 가르쳤다. 그러나 예배 때에는 악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라고 하면서 이때 신약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견하고 1929년 5월에 환원운동에 관한 졸업논문을 쓰면서 성서적인 올바른 가르침을 깨닫고 구원의 침수세례를 받는다. 곧 이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역할 것을 결단하고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한다.
그 이듬해 5월에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대빗 립스콤 대학 신학부(David Lipscomb)에서 신약교회 원리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다.
동석기는 귀국 준비로 여행 경비를 모금하기 위해 미국 중남부 지역으로 여행중에 알라바마주 몽고메리(Montgomery)에서 톰슨 (T. B. Thompson)을 만난다. 톰슨의 추천으로 테네시주에 있는 내쉬빌(Nashville)로 가서 홀(Hall Calhoun)과 샘(Sam Pettman) 교수로부터 신약교회에 대한 성서 공부를 하게 된다.
웨이볼리 벨몬트 교회는 그의 귀국 경비를 지급해 주었고 한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매월 선교비를 보조해 주기로 하였다. 이런 격려로 1930년 11월 한국에 돌아와 이 땅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교(傳敎) 하게 된다.
한국 기독교 선교회 (Korea Christian Mission)
신시내티에서 학위 논문을 쓰면서 구원의 세례가 침수 세례임을 깨닫고 매디슨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트램(S. W. Tram)에게 침례를 받는다.
이후로 저명한 교계 지도자와 친구들에 의하여 1929년 8월에 한국 기독교 선교회가 구성된다. 1930년 6월 동석기는 신시내티 신학교 졸업 후에 선교비를 모금을 위해 성서를 판매한다. 알라바마주 버밍햄에 갔다가 톰프슨(T. B. Thompson)과 댁커(F. A. Decker)를 만나게 되며, 그들의 소개로 테네시주 내쉬빌로 간다. 내쉬빌 교회들의 후원으로 그가 선교사로 파견되어 1930년 10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을 타고 11월 8일 한국에 도착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가 되어 고국에 온 동석기 전도자는 북청 고향집에서 1930년 11월 29일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국에 세운다.
동석기 전도자는 1935년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한국 교회를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하여 성원과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해방 전 서울 종로구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게 된다. 동석기 전도자는 1946년부터 1949년에 서울에 4개교회, 부산에 1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949년 선교비 모금을 위하여 미국으로 향한다. 이때 내쉬빌에 있는 트리니티 레인 교회(Trinity Lane Church of Christ in Nashville)가 후원 교회가 된다.
동석기 전도자의 노년
미국에서 선교비 모금을 위해 활동을 하고 있는 때에 6.25 전쟁이 일어난다. 동석기 전도자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죠지아주 포트 배닝(Port Banning)에 있는 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훈련받기 위하여 그 곳에 온 한국군 장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 때에 약 160여명의 고급 장교들이 동석기 전도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워싱톤 D.C에 있는 16번가(街) 그리스도의 교회(16th Church of Christ)를 후원 교회로 한국 선교사 파송과 선교비를 모금하는 등 바쁜 사역의 일정을 보낸다. 동석기 전도자의 주선으로 한국에 파송된 리치슨(Dale Richeson)선교사, 홀톤(A. R. Holton)선교사, 최수열(L. Haskell Cheshire)선교사였다. 그 이후 한국선교사로 파송된 하딘(Daniel C. Hardin), 이철선(William A. Richardson), 파수리(Malcom E. Parsley), 빌 램지(William R. Ramsey)도 선교사로 오게 된다.
동석기 전도자는 틈틈이 귀국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과 선교활동을 지원하다가 1966년 은퇴 후 1971년 12월 26일 캘리포니아에서 그의 여생을 마감한다.
강명석과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강명석의 문필 활동
강명석의 문필 활동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와 사회에 대해 광범위한 지식과 사상을 가지고 활약하였다. 1922년 10월 25일에 「귀독신보」에 ‘유년 주일 학교’라는 글의 시작으로 감리교에서 발행되던 월간 청년을 통해 그의 신앙과 신학들을 기독교 언론에 발표하고 1925년에는 「긔독신보」에 오랜 기간 연재한 ‘신약성서 개론’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칼럼, 설교문, 서간문 등 다양하게 발표한다.
강명석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고, 일본 관서 대학 신학과에서 공부하였다. 한편 방학 때는 한국에 돌아와 버림받은 나병환자들의 수용소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예배를 주관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는 사역을 하는 일종의 현장 목회실습을 하였다.
반면 강명석은 교회 현장에서도 목회자들의 보다 민주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포용력 있는 이해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
교회와 사회주의에 대한 저술
강명석 전도자는 1927년 「긔독신문」에 “經濟思想의 變遷과 今日의 朝鮮敎會”라는 글을 5개월 동안 13회에 걸쳐 한국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였다.
강명석은 교회의 사회 참여 또는 사회 구원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알아야 사회를 인도할 수 있다면서 기독교인들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貧窮과 寄生蟲”이라는 글에서 오늘날 가장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은 회사나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여도 가장 가난(貧窮)한 사람들로 먹고 입고 사는 기본적인 것이 부족하다. 농민들도 농번기뿐만 아니라 농한기에도 비료를 모으는 일이나 기타 부수적인 일을 하지만 농민의 대부분은 빈궁의 삶을 넘어 의식주를 염려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부(富)가 일부 계층인 자본가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의 분배 원칙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되는 현상인데 유산계급인 자본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비대해지고 반면에 노동자 계층인 근로자들은 더욱 가난해져 상대적으로 부(富)의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명석은 1920년대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서구의 사회주의 이론들을 소개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위대한 발견’이 발표된 당시를 살펴보면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한반도의 서민들과 개신교 농민들은 교회의 전통적 설교에 회의를 품고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서는 교회를 떠나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거나 교회에 남아 있더라도 기독교 사상 속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는 대단한 것이었고 그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말 이후 근대화의 이념과 통로로 인식되었던 기독교는 사회주의에 의하여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신교의 사회주의에 대한 대처 방법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시도하는 방향이다. 사회주의의 급격한 전파에 휩쓸리는 사회적 분위기에 뒤지지 않으려는 경향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진전되었기에 기독교의 정체성(Identity)이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어 사회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였다.
진생이라는 잡지에 “신사조에 일반인은 무조건 호기적 동감을 느끼고 비판할 여가도 없이 부화뇌동한다. 차(此)에 대한 철저한 반박론을 수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했고, “사회주의의 근본 가치를 철학적으로 철저하게 정해(正解)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에 대한 식별의 의무와 비판의 책임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는 일제의 식민정책이 조선의 민족 해방운동을 악랄하게 억압하였기 때문에 민족 역량을 모아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민족운동 세력의 연합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신간회에 참여한 개신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개신교에게는 사회주의의 문제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과제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사회주의와 개신교의 관계를 방해하는 요소는 개신교가 자본주의 발전을 기본 목표로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지도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인식의 틀로서 제국주의에 희생당하는 조선 민족을 구하려는 이념이므로 경제적 발전의 목표가 전혀 다르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명석의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2) 강명석의 미국 유학
1931년 강명석은 고향인 밀양에서 목회를 하다가 양주삼목사의 추천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는 3월 2일 부산을 떠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강명석은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에 문제가 발생되어 입국이 거부된다. 그 후 1년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긔독신보」에는 “강명석은 일즉이 신호관서학원(神戶關西學院)을 마치고 조션셔 교역 생활을 하다가 유학차로 도미한다는데 밴드빌 대학에서 연구할 터이라 하며 3월 2일 부산을 나 3월 10일 신호(神戶)에서 철부환(鐵父丸)으로 출발(出發)하리라” 라고 사고(社告)를 개재한다.
1932년 10월 19일자 「긔독신보」에 강명석의 ‘미국 오는 길에 느끼고 당한 대로’라는 서간문이 실리게 된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1년전 미국 출입국 관리국에 의해 입국 거부로 인한 불안한 마음을 피력하고 이번에도 어려움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한국 유학생들의 입국을 염려하고 있다.
강명석은 그 곳의 남감리회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설교를 듣기도 하였다. 강명석은 자신도 설교를 했는데 교인들이 재미있고 우스운 설교를 하라는 부탁에 성서 해석, 생명의 양식 등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가볍고 재미있는 설교만 추구하는 것이 그를 매우 섭섭하게 했다는 것이다.
강명석은 1933년에 ‘米國敎會 側面觀’(1)이란 글을 기고하면서 그는 ‘이 글은 問題에 따라서 무게가 잇고 內容이 充實한 글이 못된다. 이 글은 다만 禮拜堂에 도라 다니면서 본대로 느낀 대로 單純하게 쓴 글에 지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 글 中에 米國敎會의 內容 或은 本質에 接觸한 點은 조곰도 없다. 다만 外面에 屬한 一部分을 그려 놓은 것 뿐이다. 그래서 空然이 貴한 紙面만 虛費하고 이 글을 읽는 분의 時間을 無益하게 虛費하게 하는 짓이나 아닌가 하여 미리 容恕를 請해 둔다.’ 라고 한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행사와 주일 예배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가기 때문에 10시부터 11시 사이에는 길에 차가 거의 없다. 예배가 끝난 오후에는 시외나 공원으로 나가는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우리 조선에는 언제 그런 때가 올 것인가’라고 한다.
교회 광고 기술(敎會廣告術), 남녀공석(男女共席)에서는 양쪽을 비교하여 보면 어느 쪽이 기형적 현상일까? 이들은 교회에 올 때 성서와 찬송가는 가지고 오지 않는데 이는 교회당에 비치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우리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경과 찬송가를 갖고 다니는 것이 자랑이라고 성경 찬송(聖經讚頌)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 음악에서 “아메리카 敎會가 우리 나라 교회에 比하야 한가지 특별히 宏壯한 것은 敎會音樂의 發展이다. 이곳에서는 어느 敎會를 勿論하고 철취 오부 크라이스트(Church of Christ) 敎派 外에는 모다 特別한 讚揚隊가 잇다.”
‘音樂 牧師’는 교인들의 영(靈)을 깨어 주고 길러 주는 목사다. 그는 이국 땅에서 설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찬양에서 은혜를 받고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聖餐式’을 행하는 방식으로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첫째로 주일마다 오전 예배때 거행하는 교회, 둘째로 매월 한 번씩 일정하게 거행하는 교회, 셋째로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만으로 오전 예배 시간을 전부 사용하는 교회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3) 강명석과 ‘그리스도의 교회’
강명석은 밴더빌트 대학에서 The office of the modern Minister라는 논문으로 1935년 신학사 학위를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귀국을 늦춰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교육기관인 프리드 하드만 대학에서 공부를 한 후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1934년 「긔독신보」에 재미(在美) 강명석이라고 기고한 ‘전도인의 생활과 그의 일’(1)이란 제목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교회의 정의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 위에 세운 멸망하지 않은 조직이고, 그리스도 자신이 세운 것이며, 그리스도의 정신의 표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근본적 조직이며, 그리스도의 몸이고, 복음을 전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교회는 뭇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하는 장소로 하나님께 찬미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유학전 한국에 있을 때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를 강조했던 일면이 변화됨을 느낄 수 있다.
강문석(강명석)은 한국에 들어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비의 지원으로 울산을 중심한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1937년 4월 14일자 「긔독신보」에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설교문을 기고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명칭이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질문하는데 대한 대답이다. “제가 미국에서 도라온 후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슨 교회며 어떠한 교회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여러 차례 있었읍니다. 그럴 때마다 저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귀하신 피로 갑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사람의 이름 보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사람의 공로 보담 그리스도의 공로를 높이고 사람이 지은 이름 보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높이기 위하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자기의 귀하신 피를 흘리섰음은 자기의 교회만 위하여 흘렸읍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야 또는 교회를 위하야 흘리신 그 피를 귀중히 여긴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어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다른 명칭을 그 명칭에 대신하거나 또는 다른 명칭에 그 명칭을 형용사격으로 첨부하는 일들은 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모이는 모임은 ‘그리스도의 교회’ 밖에는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는 줄 압니다.
강명석은 설교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서에서 말하는 참다운 교회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월간 청년에 ‘歷史上으로 본 基督敎會의 正體’에서 기독교를 성서적, 역사적으로 접근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정체는 사도 시대에서 볼 수 있는데 오순절에 베드로의 활동으로 예루살렘에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으로 유럽으로 전도되었는데 이러한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정체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교회가 있어 어느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정말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사도 시대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 몸은 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이지 여럿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참다운 교회는 신약교회인 초대교회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강명석은 귀국하여 유학을 가기 전 그가 많은 글을 기고했던 기독교 잡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과 정신, 사상을 알리는 글을 쓰고 있다. 성서 자체가 명시한 것처럼 성서는 분명히 인류에게 광명이 되고 유익이 되고, 인류를 완전케 하는 가장 좋은 메시지다’ 라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메시지는 성서로 돌아가 그 좋은 메시지를 우리는 필독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강조한다.
‘미국 목사들의 신앙관’에서는 미국의 종교 교육가인 조지 헐버트가 미국 전역에 있는 교단과 교파의 대표적인 목사들에게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문을 5백명 이상의 목사들에게 설문지를 보낸 것에 회신하여 받는 결과를 분석한 것이다. 당시의 통계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 예수님에 대한 신앙, 성령에 대한 신앙의 대답에서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강명석은 청년에 ‘假先知者’와 ‘國際宣敎大會를 앞두고’ 글이 실린 후 그의 글을 볼 수 없다.강명석 전도자는 젊은 나이에 타계했지만, 그의 사상과 신학 및 신앙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신앙과 삶을 함께 했던 그는 학식과 덕망은 물론이고 선교에도 열정을 쏟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장 큰 일을 했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한국 선교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동석기 전도자와 강명석 전도자는 이 땅에서 신약교회로의 환원운동에 불을 지피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리스도의 교회’ 거두인 역사적 인물들이다.
나가는 말
신약교회의 씨앗을 뿌렸던 동석기 강명석 전도자의 신앙의 발자취를 되새겨 보면서 우리들의 신약교회를 향한 환원운동의 현주소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족적(足跡)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으며, 성서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이정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는 20세기 후반부터 세계적 추세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역사학은 인문과학의 바탕을 이루는 것뿐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이고 둘째, 인류의 정치적 현실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미궁에서 빠져나가는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노력 때문이다.
역사의 바탕이 사실(facts)인데 사실을 추구하는 것은 과학이다. 역사는 과학의 도움을 받지만 철학은 역사의 도움 없이 제구실을 하기 어렵다. 땅속에 구슬 서 말이 뭍혀 있을 때 그 한개 한 개를 캐내어 물로 씻고, 헝겊으로 닦는 노력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서 말의 구슬을 다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이다. 즉 끈을 들고 이 구슬을 꿰어야하는 책임은 역사가에 있다. 서말의 구슬로 긴 목걸이를 만들수도 있고 손목용의 손목걸이를 여러개 만들 수도 있다. 이 목걸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 예술이 되고 이것의 의미나 가치를 따지면 철학의 영역으로 진압한다.
그리스도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총서 『환원신학과 구약성서』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구자 상’에서 동석기, 강명석, 이신, 이흥식 4인을 선정하여 기술하고 있다
역사적인 평가와 기준 없이 개인적인 관점에서 환원의 지도자가 선정된 것은 역사적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기준없는 개인의 발표는 연구소의 최소한의 기준과 문제점을 제기해야 된다.
-환원역사연구소 펴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