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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역방향 기게스의 반지
사 36:1-22(1-10, 2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의 역방향 기게스의 반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기게스는 리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였습니다. 어느 날 뇌우와 지진이 일어나면서 땅이 갈라졌고, 기게스는 그 틈으로 내려가 송장을 발견했습니다. 송장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지만, 손에는 금반지를 끼고 있었고. 기게스는 금반지를 챙겨서 지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기게스는 왕에게 양들에 관한 일을 보고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우연히 반지의 보석받이를 돌려봤는데, 그 순간 기게스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반지가 가진 이러한 힘을 알아 챈 기게스는 그 힘을 이용해,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죽이고, 왕국을 장악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 2권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하는 것으로 ‘기게스의 반지’라 불리는 일화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제기하는 바는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도덕이란 결국 무력한 사람들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착하고 평범하고 착실했던 기게스가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힘을 얻자마자 사악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처럼 힘이 주어지면 인간은 누구나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덕이라는 것은 힘이 없는 자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문제 제기를 하는 가운데 나오는 일화입니다.
하버트 조지 웰스의 투명인간이라는 소설도 있듯이 인류 역사상 투명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인간의 어떤 욕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으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으니까요.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투명인간이라는 말에 전혀 다른 반대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 기게스가 투명인간이 될 때는 왕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할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그런 투명인간인데, 우리가 사용하는 투명인간이라는 단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 전혀 다른 뜻이 됩니다.
아주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제가 가요의 가사 일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가수 손담비가 부른 노래 가사입니다.
‘어디를 보니 니 앞에 난 투명인간이니 소리쳐야 내가 보이겠니’
네 앞에 내가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마치 나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나에 대해서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이질 않고 있느냐. 소리를 쳐야 네가 내가 있는 걸 알겠느냐.
이게 투명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손담비의 노래 투명인간이라는 제목 자체가 밀양아리랑의 현대판 번역본 같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동지 섣달에 꽃이 핍니까? 그런데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선이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날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투명인간이란 전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관심이 가질 않는 겁니다. 안 보이는 겁니다.
존재감이 제로다 라는 의미에서의 투명인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 나오는 투명인간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투명인간을 말한다면, 손담비의 가요에 나오는 투명인간은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관심을 가질래야 가져지지가 않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역방향의 기게스의 반지라는 오늘 제목의 의미는 뭘까요?
십자가는 이상하게 기게스의 반지와는 반대로 타인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전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두 번째 의미의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가족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아니면 내가 만나고 있는 상황 그게 어떤 상황이든지 지금 닥치고 있는 문제가 어떤 문제이든지 십자가에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 고백하면 이상하게 그 모든 사람과 상황이 투명인간으로 투명상황으로 되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의 신비입니다.
나 자신이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타인이나 내가 만나는 상황이 투명인간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은 여러 번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랍사게 장군을 시켜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상태에서 히스기야 왕이 사신 세 명을 보냅니다. 그때 사신들 앞에서 랍사게가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고 히스기야를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합니다. 바로 그 내용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나오는 내용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내용을 다시 얘기하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이 세상에서의 구원의 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이 실제화되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삶의 현장에서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의 역사 구원의 하나님의 활동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고 있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포인트는 21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대답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백성들이 랍사게가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서 침묵했다고 했습니다. 잠잠하여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여기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지금 대꾸하지 않고 잠잠하며 침묵하는 것이 보통 힘든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존심으로 말하면 싸우다 죽지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가 있어 라고 느낄만큼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선민들의 자존심을 그렇게 강하게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반대편으로 작용하는 그런 마음의 동요가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앗수르는 엄청나게 강하고 엄청나게 잔인합니다. 모든 노약자를 사정없이 진멸한 자들이 바로 앗수르였음을 예루살렘 선민들이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공포가 생깁니다.
지금 공포 앞에 서 있고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한없이 한없이 망가진 채 대변과 소변까지 먹게 된다는 말이 12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모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랍사게를 향하여 대놓고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자기들끼리라도 얘기할 법도 한데 한 마디도 대꾸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엄청난 포인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내려오셔서 구원의 활동을 하실 때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바로 이 침묵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냥 침묵하는 것은 무서워서 겁에 질려서 생각아 나지 않는 것이고, 여기서 침묵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이 랍사게의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갑니다. 성전으로 간다는 것 바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왕이 백성들에게 자존심 상하고 굴욕적인 그리고 공퐁에 떨 수 밖에 없는 랍사게의 책동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명령하는 것 이 침묵의 단계가 있어야 하나님이 활동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침묵한다는 이 침묵의 의미?
지금 랍사게가 책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마디도 대꾸 안 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랍사게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침묵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전혀 랍사게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앗수르는 천하를 호령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선봉장이 랍사게입니다. 그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고 지금 책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진멸하기 위해 쳐들어가기 직전에 이 예루살렘을 항복하도록 권유하며 책동을 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항에서 그 랍사게의 말에 대해서 왕 이하 모든 백성들이 단 한 마디의 말도 안 합니다. 뭔가 웅성웅성 동요가 일어나야 되는데 잠잠하고 한 마디도 안 하고 침묵합니다. 그리고 왕은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랍사게의 입장에서는 아주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투명인간 취급을 해버린 것입니다.
랍사게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처럼 ‘내 말 좀 들어보소 내 말 좀 들어보소’ 이러고 있는데 그런데 한 마디 대꾸가 없습니다.
시편 46편 10절 제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랍사게의 책동 앞에서 지금 가만히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한다는 것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그 뒷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보이지 않고 계시던 하나님의 존재감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투명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동안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는 사람의 존재감에 흠뻑 취해 있었기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마음에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하는 일과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내가 생각을 멈춰버립니다. 침묵이라는 것은 입만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것은 생각이 죽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버립니다.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눈 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세상의 대상들이 투명인간이 되어 버리면서 동시에 그 동안 투명한 하나님이셨던 분이 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나와 함께 하고 내가 존재감을 느끼고 있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국 위에 높이실 때 나는 당연히 따라 올라가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따라 올라가는 게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내려 오셔서 실제로 나를 끌어 당기셔서 구원의 상태로 높이시는 것은 반드시 침묵을 통한 투명인간화의 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에 대한 투명 상황에 대한 역사 내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투명인간화 되게 되는 역사 이게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침묵의 결정체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내 생각의 침묵, 내 말의 침묵, 내 판단의 침묵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지금 눈에 보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내 생각이 죽어버립니다. 이럴 때에 그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재감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존재감이 사라지고 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으로 돌아가면 그 다음 날 새벽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멸절되고 이 얘기를 듣고 산헤립 왕은 줄행랑 쳐서 본국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말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래서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에 대한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고 투명인간 투명사건이 될 때 그때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내가 하나님을 존재감으로 느껴지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가 만나는 인간관계 속에서 활동해나가실 것입니다.
마귀의 임무와 사명은 무엇입니까?
마귀가 원하는 미션. 성취하려는 미션은 책동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책동의 시작은 바로 태초부터 시작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라’
내가 말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책동한 것입니다.
그렇게 책동에 넘어가서 스스로 생각하고 침묵을 깨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난 일이 하나님을 피해 동산 수풀 뒤에 숨어버립니다. 하나님이 투명한 하나님이 되어 버립니다.
시각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모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 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시각의 기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시각에 안 보이지만 마음에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이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투명인간처럼 그분의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느냐면 내가 스스로 생각하게 되면서 수풀 뒤 하나님이 안 보이는 장소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투명인간 취급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감으로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주어지고 있는 상황, 만나고 있는 사람 그것이 가족이건 친구건 동료건 길거리에서 만난 아저시건 가게 아줌마건 누구든지 간에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저 사람이 어떻다 판단이 시작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침묵이 깨어지고 내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서서 내가 판단하자 마자 하나님은 투명한 하나님이 되어버리시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예를 들어 지금 눈 앞에 닥친 가정의 문제 자식의 무제를 놓고 이 문제는 이렇게 잘못됐어. 그러므로 이렇게 개선되고 해결이 되어야 해. 라는 판단을 하고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때 그 하나님은 여러분이 빚어내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이 좋다 나쁘다를 내 스스로 판단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침묵을 깨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하면 진짜 존재감을 느끼는 실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급해서 만들어내고 여러분이 창조하고 여러분이 빚어내는 한나님이고 여러분의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창조주가 됩니다.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그 생각과 판단을 받아들이는 자요 그 생각과 팓단대로 하나님이 내 안에서 움직이실 때 내가 장갑처럼 움직이는 그런 존재입니다.
침묵은 생각의 죽음까지 가야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은 오늘 본문에서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선택받은 백성을 책동하듯이 그러한 책동 앞에 부딪치게 됩니다.
남편을 봐도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게 됩니다. 아내를 봐도 그렇고 자식을 봐도 그렇고 또 지금 주어져 있는 삶의 환경을 봐도 그렇고 끊임없이 우리는 책동에 시달립니다.
네가 생각해라, 네가 판단해라. 지금 상황은 안 좋은거야, 지금 상황은 뭔가 잘 되어 가고 있는거야....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침묵을 깨고 나오게 합니다.
너희는 잠잠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라는 시편 46편 말씀대로 흘러가지 못한 채로 내가 계속 잠잠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말하게 됩니다.
침묵은 생각과 판단과 말이 한꺼번에 죽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으면서 입만 닫고 있으면 침묵이 아닙니다.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이미 내 속에서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선악과를 기점으로 내 스스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은 투명한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계속해서 세상에서 나를 책동하는 사건과 사람들이 내 앞에 보입니다. 네가 생각하라고 합니다. 네가 비판하라고 합니다. 네가 판단해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랍사게 앞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을 향하여 침묵합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침묵합니다.
이때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느껴질 것입니다. 진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의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 있는 게 마음에 느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활동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내 삶의 현장으로 들어와 활동하신다 라는 말을 많이 듣는 것 같아도 선택받은 백성들이 침묵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조차도 몇 번 없습니다.
전부 반응합니다. 무서워 큰일났네, 나는 망했네 이대로 가다가는 큰 일 나겠다, 일이 잘 되어 가네 내가 능력이 있는 사람 같아 이대로 가면 참 좋겠다.....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짜 활동하시는 역사는 성경에서 조차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 어떻습니까? 시시각각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나를 못 믿겠거든 내 안에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하시는 그 일을 보고 믿어라.
주님은 완전한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혹 주님은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말하겠지만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가 가르쳐주시는 말씀이 아니면 나는 안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침묵 속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존재감으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이제 그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그 입이 내 마음에 느껴집니다. 그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기게스의 반지. 역방향의 기게스의 반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고 고백하면 이상하게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내 마음이 존재감을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침묵하게 되어 버립니다. 관심이 끊어져 버립니다.
다 투명인간이 되게 하고 투명 사건이 되어버리게 만듭니다.
이게 복음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이 맛을 모르면 아직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가 현장에서 어떻게 일어납니까?
투명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는 사건과 상황들이 다 투명인간 투명상황 투명문제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침묵을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투명인간 투명상황이 되게 하는 기게스의 반지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침묵이 이루어져서 나를 만나는 모든 것이 다 투명한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높이시고 나도 덩달아 올라가며 구원의 역사가 이 현실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느낄 수 있는 축복이 반복되어 경험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역방향 기게스의 반지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투명인간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이 다 투명한 존재들이 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내가 한 마디도 할 필요가 없게 해주세요. 침묵이 회복되게 해주세요.
그러기 위해 역방향 기게스의 반지이신 십자가 사건을 나의 죽음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소원합니다.내 사건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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