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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전과 만복사저포기를 읽고
형도원
최척전에는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웠던 <박씨부인전>, <우투리전>등과는 달리 남들보다 출중하기는 하나 신기한 도술을 부린다든가, 전쟁을 이끌어나간다든가 하는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특히 옥영과 혼인을 앞두고 징병이 되어 결국 병역 도중에 나와 백년가약을 맺는 모습이나, 왜구의 침입으로 잃었던 첫째아들 몽석과 우연스럽게 재회하자 탈영을 하는 모습과 같이 공사의 갈등을 겪는 최척의 모습은 다른 전쟁소설보다 더 현실적이고 주인공의 심정에 이입도이 잘 되었다. 최척전은 전쟁 소설이기는 하지만 전쟁에 대한 가치개입이 드러나기보다는 전쟁 즉, 시대적 배경이 개인 혹은 가정사에 미치는 비극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인하여 부인과 자식이 사망하거나 그들과 헤어지는 난리통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한 가정의 해체 과정을 통하여 전쟁의 비참성을 드러내고 있다. 첫 아들 몽석을 잃고 서로 떨어지게 된 최척과 옥영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주요한 내용이라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자식을 잃고 어렵사리 손자 몽석을 찾아 키워야 했던 옥영의 어머니와 최척의 아버지의 마음도 심히 헤아려볼 만하다. 이처럼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패는 잘 드러나 있지 않은데, 이 역시 정치적 혹은 대외적 관계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헤어짐에 아파하고 고통 받는 민중의 마음이 잘 반영된 부분인 것 같다.
최척전이 다른 고전소설과 달라 신선함을 주는 또 다른 이유로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안남(베트남)에 이르는 여러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 개인의 짧은 일대기 속에서도 다양한 무대의 이동이 일어나 사건의 전개가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국내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과 명의 지원병파견, 왜와의 지지부진한 협상, 정유재란 그리고 후금의 명 침략과 이에 대한 광해군과 강홍립의 실리외교 등 국가들 관의 관계에 의한 역사적 사실이나 실제의 인물을 등장시켜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살상한 사람의 수를 세기 위하여 코를 베어가고, 기술자를 유출시켰으며 책과 보물, 가축의 약탈을 자행하는 왜의 모습을 담아 그 당시의 참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전쟁의 비극적인 요소만 담고 있지는 않다. 중국에서 최척을 잘 보살펴준 주우나 일본에서 옥영을 데리고 있다가 최척과 재회했을 때 선뜻 돈을 내어준 돈우, 그리고 그들을 축복해준 여러 나라의 사람들, 그리고 최척과 몽석이 재회했을 때 둘의 이야기를 듣고 군대에서 놓아주는 후금 장군 등 국가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혹은 주인공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이와 같이 개인과 사회의 모습이 불일치하는 장면은 전쟁의 잔인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정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어 따뜻한 감동을 전한다. 또, 옥영이 힘에 겨워 목숨을 끊으려 할 때 마다 옥영의 꿈속에 부처가 나타나고, 스님이 난리 중에 몽석을 거두어갔다가 조부모가 몽석을 발견하는 장면을 통해 선조들의 삶에 있어서 불교가 지니는 희망과 믿음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불교는 하나의 종교이기 이전에 그들의 삶 자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교적 요소의 개입은 사건의 전개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비논리적인 요소를 통해 주인공은 희망과 용기를 얻고 시련을 딛고 일어나는 자세를 보인다. 여기에는 불교의 힘을 바탕으로 현실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굳게 버티어 살아나가고자 하는 삶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메시지를 바탕으로 이 작품에서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결단력 있는 여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남장을 하고 일본 상인의 밑에 들어가 배를 타는 옥영의 모습, 그리고 중국에서 둘째아들인 몽선과 며느리 홍도를 데리고 나룻배에 의지해 고향에 가고자하는 옥영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여성은 혜안을 겸비한 존재로 등장한다. 옥영이 재산보다 사람의 됨됨이를 중시하여 신중히 배우자를 선택하는 모습, 그리고 고향에 가고자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아들인 몽선보다 잘 헤아려주는 홍도의 모습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희망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삶에 대한 대응은 결국 우연적 만남을 통하여 결실을 맺게 된다. 옥영과 최척이 각각 일본과 중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안남으로 떠나왔을 때의 운명적인 재회, 첫째아들 몽석과 최척의 만남, 최척과 사돈 진위경(홍도의 아버지)의 만남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온 가족의 결합 등 여러 우연적 재회를 통해 극적인 요소를 더해주고 있다.
최척전을 읽으며 가끔씩 놀랐던 부분이 몇 있었는데 우선, 재산을 보고 배우자를 고르려고 하는 과거의 모습이 현재의 세태와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과거는 신분제 사회로 가문을 배우자를 선정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길 줄 알았는데, 가문뿐만 아니라 재산도 중시하는 모습을 엿보며 옛날에도 혼인은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절과 신의, 그리고 배우자에 대한 신중한 고려를 중시하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혼인에 있어 좀 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몽선과 홍도가 중국에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옥영에게 한국어와 일어를 배우는 모습도 신기했다. 타국 사람들과의 마찰을 피해 안전하게 조선에 오기 위한 수단이기는 했지만, 외국어 학습이 현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옛 시절에도 상황에 따라-특히 신분과도 상관없이-필요한 때가 있었구나하고 생각하니 자못 낯설기도 하였다. 배를 타며 마주하게 되는 타국의 뱃사람을 관찰하여 그 사람들과 같은 나라의 옷을 입고 그 나라 말을 구사하면서 항해를 해나가는 장면이 아슬아슬하기도 하면서 극적으로 느껴져 재미있었다. 또, 사돈과 조부모까지 어우르는 끈끈한 가족애 또한 눈여겨볼 만한 요소였다. 소규모의 가족도 유대를 유지하기가 힘든 현재의 상황과 비교해보았을 때, 서로를 평생 그리워하며 다시 만나기를 소망하고, 결국 재회하는 모습을 통해 과거의 가족 간의 유대가 얼마나 끈끈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최척전을 읽으며 처음부터 계속 드는 생각은 우리의 문학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아름다운 묘사가 담겨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특히 퉁소를 연주하며 옥영과 최척이 시를 주고받는 장면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기운이 잘 느껴질 뿐만 아니라, 선조의 정취 또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어서 인상 깊었다. 물론 지금의 문학에서도 주인공에 대한 정보 제공 혹은 주인공의 심리 표현 등을 위해 묘사가 빈번하게이루어지지만, 옛 문학에는 그런 효과와 더불어 현대의 작품에서 좀처럼 느끼기 힘든 우리의 정갈한 정취가 들어있는 듯하다. 언어의 사용에서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대에서는 논리적인 말의 전달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옛 문학작품을 읽으니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효율성의 이면에 가려진 우리말과 표현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기도 했다. 또한, ‘시루가 깨져 떡이 쏟아진 뒤에 울어봐야 소용없다.’와 같이 우리 고유의 소재가 들어간 속담이나, 현재는 사라졌거나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접하니 낯설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조상의 삶에 대항 풍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만복사저포기 또한 ‘마치 옥으로 만든 나무에 은 조각이 쌓여있는 것 같았다.’와 같이 한국적인 소재를 통한 묘사를 보여주어 우리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이 작품에는 최척전 보다 시 작품이 더 많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양생과 여인뿐만 아니라 정씨, 오씨, 김씨, 류씨 등 다양한 인물의 마음을 담겨있다. 수려한 문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장면은 마치 눈앞에 그림이 펼쳐지는 듯 하였는데, 직접적으로 전할 때보다 외로움의 정서가 더 짙게 나타난 것 같아 진한 감동을 주었다. 양생이 여인을 만나기 이전에 느꼈던 외로움과 여인을 만나고 난 후의 기쁨과 사랑을 함께 담은 <만강홍>과 자신의 상황과 정서에 맞게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화답하며 장난하는 양생과 여인의 모습을 통해 옛 사람들의 삶 속에 문학이 얼마나 잘 스며들어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부처에게 내기를 걸고 저포놀이를 하여 자신의 사랑을 만나는 양생의 모습, 자신의 혼을 다하고 다시 사내아이로 태어나는 여인의 이야기 등에서 최척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우리 조상의 삶이 얼마나 밀접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윤회사상은 옛 사람들이 생사와 관련하여 어떠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도 일부 이어지기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의 다양한 사고방식들과의 차이를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만복사가 남원의 만복사라는 실제 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작가는 그 절을 모티브로 하여 이 소설을 탄생시킨 것일까? 절을 배경으로 이러한 사랑 이야기를 상상해낸 작가의 생각을 더듬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