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1:34-46, 가데스 회상-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19,7,24, 박홍섭 목사
모세는 출애굽 2세대에게 40년 전 가데스 바네아 반역사건을 회고하면서 가나안 입성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신1:19-46절이 그 내용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가데스에서 가나안을 정탐한 후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26절). 그들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못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 들어갔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이런 결정을 불신앙이라고 평가합니다. 32절이죠.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안음같이 이스라엘을 안고 홍해를 건너 여기까지 인도해오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은 거기에 덧붙여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를 불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네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여호수아가 순종해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나머지 백성들이 불순종해서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유언적 설교의 첫 주제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았던 가데스바네아 사건의 회고입니다. 여기서 쉽게 “40년 전 가데스에서 너희 조상들이 순종했더라면 가나안에 들어갔을 터인데 불순종해서 못 들어갔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은 순종해야 한다.” 이렇게 쉽게 정리하면 곤란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고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게만 정리하기에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과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선택의 문제 이전에 훨씬 근본적인 원인이 작용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도 그렇습니다. 가나안은 순종의 보상으로 들어가는 땅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입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복된 성취이지 순종의 대가가 아닙니다. 순종은 보상과 성취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할 차원에서 강조되고 다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시내산 밑에서 언약을 맺고 율법을 주셔서 가나안에 들여보내는 이유는 거기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백성의 복된 삶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 그 복된 약속을 그들의 현실로 주시려고 그 땅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은 지금 정탐꾼을 통해 듣고 보는 현실 같은 복과 그런 하나님의 통치는 싫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표면적인 불순종 이전에 아직 그 땅에서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누릴 준비가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에 넣으려면 헤엄을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데스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수영은커녕 개헤엄도 못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들여보낼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순종해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그들은 그 땅의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된 통치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죠. 가나안 입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의 대가로 결론지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물리적 환경적 파라다이스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정탐꾼들이 거대한 포도송이를 들고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구나 하고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 땅에 강한 원주민들이 있고 견고한 성읍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파라다이스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11:8-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들어가서 얻을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까? 자연조건의 부요함 때문이 아닙니다. 연 초부터 연말까지 하나님의 눈이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은 그곳이 어디이든 젖과 꿀이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출애굽 2세대에게 40년 전의 가데스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 문제를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환경, 어떤 소리,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와 통치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선택해서 복을 받을 것인가 심판을 초래할 것인가의 문제 이전에 그런 선택과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근본 바탕의 문제입니다. doing 이전에 being입니다.
신명기가 순종과 불순종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의 사건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해서 벌을 받으니 순종하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죠.
가데스의 반역 이후에 하나님이 올라가지 말라 했는데도 기를 쓰고 올라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십시오. 41-43절이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를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결과가 무엇입니까? 대패하고 통곡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가데스의 불순종 하나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아직 이들의 수준이 이렇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쪽으로만 나가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라고 하면 못 들어가겠다고 하고,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다시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면 가나안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뭐가 생각납니까? 청개구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싸움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통치를 기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결과입니다. 믿음이 순종으로 드러나고 불신앙은 불순종으로 드러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은 단순히 가데스에서 한번의 결정적인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사사건건 청개구리처럼 반응하는 불신앙과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서 순종하는 삶의 결과를 맺을 만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물지 못해서 40년의 광야 훈련이 더 필요하다 하십니다.
본문의 가데스 회고만 아니라 신명기 내내 모세는 출애굽 2세대에게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니 순종하라는 설교를 합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의 사건마다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너희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일생을 어떤 사건과 환경 앞에서도 순종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았으니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 훈련대로 매사에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한지요? 이런 방향으로 훈련되고 있습니까?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믿고 말씀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자라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순종하면 복, 불순종하면 심판이라는 조건과 보상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는 일은 없이 매사에 줄다리기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자라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