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찾기 :충주시 동량면 호반로 755-9 주차하고 동영상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1579년(선조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1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 종군하였다.
그는 본래 활쏘기를 좋아하고, 병법을 안다고 자처하였는데, 왜적과 싸울 때 임기(臨機)하여 작전을 세우는 것을 김명원이 보고 더욱 영특하게 여겼다.
그해 5월에 김명원의 군사가 임진강변에 주둔하여 왜적과 대치하고 있었었는데,
그달 중순 즈음 왜적이 복병(伏兵)을 숨기고 일부러 도망가는 척하니, 김명원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추격하려 하였다.
김명원은 홍봉상이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급히 추격하다가 매복한 왜적에게 급습을 당하였다.
당시는 선조의 어가(御駕)가 임진강을 막 건넜을 때이고 그 어가를 홍봉상의 형인 홍이상(洪履祥)이 호종(扈從)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국가의 존망(存亡)이 이번 싸움에서 결정된다.”고 말하고, 자신이 직접 달려가서 싸우려고 하였다.
이에 김명원이 그의 손을 잡고 만류하자 그는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어찌 사생(死生)을 따져서 왜적의 병화(兵禍)를 군부(君父)에게 미치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전선으로 나갔다.
그가 강변 남쪽 언덕에 이르니, 우리 군사들은 이미 전멸하였다.
그는 안색이 변치 않은 채 그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그는 스스로 강물로 뛰어들어 죽으니, 그때가 1592년 5월 18일이었고,
나이는 겨우 37세였다.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개천리(開天里) 언덕에 있는데, 홍봉상이 전투에서 전사하여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의관을 부인의 묘에 묻어서 허장(虛葬)을 지냈다.
외손자 이진(李縝)의 부탁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현종 때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정랑 권응시(權應時)의 딸로 딸만
셋을 낳았는데, 세 딸은 사용(司勇) 이홍헌(李弘憲), 판관(判官)정시혁(鄭時赫), 장령(掌令) 이유양(李有養)에게 출가하였다.
이진의 어머니인 셋째 딸은 성품이 지극하여 친정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먹였으며, 그녀의 6남 1녀 중에서 장남 이적(李績)과 5남 이서(李緖)도
어머니의 병에 그 어머니처럼 하였으므로, 한 집안에 세 사람의 정려(旌閭)가 나란히 세워졌다.
첫댓글 우리 풍홍을 빛내주신 역사의 한분.
자손(아드님)이 없어 찾아주는 풍산홍씨 없이 500 여년간 외롭게 모셔저 있는 조상님을 뵈었읍니다.
우리 문경공계(모당공) 에서 시제는 모시고 있읍니다만 묘소도 관심있게 모셔야(참배 등) 되지 않을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