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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절임과 천국심지>의 줄거리: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니라! 이 구절을 산상수훈의 제목이라해도 큰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앞에 나온 8복은 소금 되고 빛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라면 그 뒤로 세상에서 소금 됨과 빛됨의 구체적인 내용을 7장까지 펼쳐보여 주신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천국절임과 천국심지
(마5:1~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천국절임, 천국심지’ 라는 제목의 하나님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절임과 천국심지’
여러분, 절임이라고 하는 말은 다 아실 거예요, 소금에 절인 것을 절임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오이지 그리고 무절임 또 깻잎절임 뭐 고추절임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된장에 절이고 간장에 절여도 그 절임의 주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소금기를 담기 위한 것이지요.
절임이라고 하는 반찬은 아시는 대로 많이 먹을 수도 없습니다.
절임을 하는 그 재료가 있지만 그 재료는 주로 짠 맛을 운반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지요.
물론 무절임과 고추절임이 맛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재료보다는 오이지 같은걸 연상해 보시면 사실 오이지가 뭐 별다른 맛이 있습니까?
짠 맛인데 오이의 향이 약간 들어간 것이지요.
어렸을 때 경상북도에서 교장선생님으로 교편생활 하시던 외삼촌이 외할머니를 모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외갓집에 자주가게 되는데 어머니가 늘 도시락을 싸주십니다.
근데 기차 안에서 먹어야 되니까 김치같이 냄새가 강한 것은 못 싸시고 소고기 동그랑땡을 큼직큼직하게 먹음직하게 싸시고 그리고 꼭 오이지를 싸셨어요.
그때 생각이 납니다.
물론 식었지마는 그 흰 쌀밥을 먹으면서 소고기 단자 먹고 그리고 오이지를 조금씩 떼어 먹으면 그렇게 그게 기차 안에서 먹는 게 맛있었어요.
절임, 소금기를 옮겨갔고 다니는 음식이 바로 절임입니다.
소금기에 주목적이 있다는 것이에요.
믿음으로 산다는 게 뭡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거치고 살아간다는 거, 이게 바로 천국절임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에요, 천국절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본문이지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되라’ 이렇게 얘기도 안하시고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것은, 7장까지 계속되어지고 있는 주옥과 같이 주신 이 산상수훈말씀의 제목과도 같습니다.
앞으로 펼쳐지는 모든 마태복음 7장까지의 산상수훈의 내용은 세상에서의 소금과 세상에서의 빛 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펼쳐놓아 보여주시는 것이고, 이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는 앞에 나오는 산상수훈이 5장부터 시작하는데 그 앞에 나오는 8복에 관한 내용은 어떻게 하면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가를 설명해 주시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이라고 하는 것,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는 이 짧은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할 때에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뭘 오해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하는 그 말씀을 좀 더 주목해서 이해를 했어야 됩니다.
소금은 맛을 잃을 수가 없어요.
NaCl의 화합물입니다, 나트륨과 염소의 화합물.
그래서 짠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맛을 잃은 소금에 대해서 말씀 하시는 것은, 그 당시 유대적 배경으로 돌아가면 어떤 내용이 그 안에 스며들어 있습니까?
돌소금을 말하는 거예요, 돌소금.
바다에서 만든 바다 염전에서 만들어내는 소금이 아니라 광산에서 캐내는 돌소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제기술이 온전하지 못했을 때, 돌소금 지금도 뭐 루이지애나라든지 미국의 텍사스 같은 데는 소금광산이 있고, 어쨌든 이렇게 광산에서 캐내는 소금이 정제기술이 부족할 때에 돌이 묻어있는 채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양들도 소금을 먹어야 되서 양들 앞에 돌소금을 뿌려주면 그걸 다 핥아 먹습니다, 소금기를.
소금기를 다 핥아먹고 나면 돌만 남지 않습니까? 돌덩어리 자갈덩어리 같은 거 남지 않아요?
그걸 바로 맛을 잃은 소금이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소금이라고 말할 때는 염전에서 만들어진 NaCl의 화합물 그거 자체만 순수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 묻어있는 돌을 말하는 겁니다.
소금이 묻어있는 돌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 비유말씀, 이 산상수훈의 제목과도 같은 말씀에 해석의 키가 있는 것이에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할 때 그 다음에 빛이라고 하는 말씀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소금이 붙어있는 돌을, 소금기가 붙어있는 돌을 소금이라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금은 맛을 잃을 수도 있는 소금이고 그것은 돌덩어리 플러스 소금기를 합쳐서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이 ‘소금이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앞에 8복을 얘기해 주시는데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8복과 소금이라고 하는 이 말씀과.
여러분, 8복을 이해할 때에 그냥 8복 자체로 이해해선 절대로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8복은 주님께서 공생애 첫머리에서 가르치시는 교훈인 만큼 공생애의 마지막인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고, 십자가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의 8가지 측면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도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배열해 나갈 때에, 주님이 말씀하신 material들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주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말씀을 기록한 이런 재료들을 갖고 자기의 마태복음을 써내려 갈 때에,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써내려 갈 것인데 이 마태의 의식 속에서 이 모든 예수님에 관한 자료들을 배합하고 정렬하게 되는 기준이 뭐냐?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거예요.
마태는 지금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이해하고,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배열해 나가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게 뭐라고요?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람과 일에 대해서도 지불할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가난한 겁니다, 지불할 돈이 없을 때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지불할, 써먹을 지식이 없을 때 지식에 빈곤하다고 얘기합니다.
자식에 대해서 마음 쓸 여분의 마음이 없습니다, 사업에 대해서 쓸 마음의 여분이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겁니다.
왜 그래요? 십자가에 달려 이 세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세상에 대해 쓸 수가 없어서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다 어디로 갑니까?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에 대해서는 지불할 마음이 없는 것이지, 마음이 없어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마음은 다 하나님께 지불 됩니다,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이때, 온전히 하늘을 향하는 마음에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무슨 뭐 평안함이나 이런 게 아니라 진짜 실재하는 하늘이 마음에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이렇게 보면서 마음이 실제로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실재하는 하늘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8복이 다 그런 거예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애통이 뭐라고요?
나인 성 과부가 외아들을 잃어버릴 때의 애통함을 말합니다, 그런 애통함을 말하는 거예요.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함,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욥이 하나님을 제외해 놓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이 관계의 끊어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관계가 집중되기 위해서 모든 관계가 끊어집니다, 이게 애통함이에요.
그런데 위로를 받는다는 게 뭡니까? 파라 칼레오, 옆으로 부르신다는 거예요.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랑을 드릴 준비가 된 자를 하나님은 당신 옆으로 부르셔서 옆에 있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여덟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에요.
그런데 첫 번째와 여덟 번째 복이 천국을 갖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마음이 가난해서 천국을 갖게 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되면서 천국을 갖게 되고 천국에서 상을 받게 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이 진짜 하늘나라로 보내져서 하나님 나라를 성령의 감각을 통하여 성령이 느끼게 해주시는 바람에 우리 마음이 하늘을 느끼게 되고 하늘의 평강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남아 있잖아요? 몸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이 몸이 이 세상에 남아서 산다는 것, 마음이 천국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몸을 때리고 창으로 찌르고 칼로 죽이고 하는 핍박이 없어도 핍박입니다, 이미.
마음이 천국을 느낀다고 그러면 빨리 이 몸도 죽어서 온전히 천국에 당도하고 싶은 것이 진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몸이 살아 있어서 마음과의 연관이 계속되어져 있다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지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마음이 천국으로 갈 때에, 모든 일에 대해 십자가를 붙잡으며 일관된 행동을 보인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핍박과 박해에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여기에 이어서 소금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마지막 여덟 번째의 천국은 첫 번째의 천국과 다르게 몸이 이 땅에 남아 있음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시는 천국입니다.
여러분 몸이 남아 있으면서 천국을 갖게 된다는 것,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소금이 뭐라고 그랬죠?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NaCl의 화합물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소금기가 붙어있는 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이라 하시는 말씀은, 앞에 천국의 말씀과 이어서 해주시면서 이제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
천국절임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절임이 뭐라 그랬죠? 오이지다, 그러면 오이 맛 자체는 사실 많이 망가져 버리고 맙니다.
오이 맛은 거의 없어져 버려요. 그런데 그 소금의 짠맛을 오이가 담고 다니는 것이에요.
절임의 목적이 거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돌에 붙어있는 소금을 말합니다.
소금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해 가지고 소금이 소금기로 인해서 박테리아를 죽이고 음식을 오래 저장할 수 있고 부패를 방지하고 이래서 내가 ‘도덕적으로 사는 것 윤리적으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소금의 역할이다’ 이렇게 자꾸 얘기를 합니다.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아주 크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나는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소금은, 돌과 소금기가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비유말씀 그대로 적용을 하자면, 이 몸이 천국기운을 붙여 갖고 다니는 것을 주님은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돌에 소금기가 붙어있듯이 이 몸이 남아 있으니까…
마음은 천국을 갖습니다, 마음은 천국을 사랑합니다, 마음은 천국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지불할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에는 지불 될 마음이 없어요.
그런 상태에서 이 몸이 남아있으면서 살아갈 때 이 몸은 어떤 몸이어야 되느냐?
천국기운에 절여진 몸이 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천국을 실어 나르는 몸인 것이지, 소금기를 실어 나르는 오이처럼, 소금기를 실어 나르는 무처럼, 소금기를 실어 나르는 고추처럼, 소금기를 실어 나르는 천국기운을 실어 나르는 몸이지, 이 몸을 가지고 내가 윤리적으로 행한다는 이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행하려고 해도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마음은 천국에 가 있습니다.
천국에 가 있는 자들이 그 마음과 마음의 인격과 이 몸이 관계가 끊어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지상에서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렇지요 관계가 끊어진 건 아니에요.
관계라는 건 마치 파이프와 같은 것이에요.
그 ‘나’라는 인격과 이 몸이 관계는 되어있지만, 그 인격으로부터 마음을 통해서 이 몸이 접하는 세상의 마음을 보내지 않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다 가있고 지금이라도 죽어서 천국 가고 싶은 게 십자가를 통해서 천국을 경험한 자들의 고백입니다.
이럴 때에 천국의 기운이 내 마음의 기운 대신에 이 몸으로 내려와서 몸을 절여버립니다, 천국절임이 된다 이겁니다, 천국절임.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소금기가 떨어진 소금, 짠맛을 잃은 소금, 이게 돌입니다, 돌만 남은 상태에요, 이건 ‘버려진다’라고…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천국절임으로 살아가다가, 천국기운을 다 거둬들이고 이제 끝나야 될 때가 되어서 몸만 남게 되면 그 몸은 버리시는 거예요, 이 몸은 버리시는 겁니다.
몸은 돌과 같은 거예요, 소금기를 묻히고 있는 돌과 같은 것이지요,
근데 이 몸이 가는 곳마다 천국을 실어 나른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산상수훈의 앞으로의 이야기는 내가 행한다는 관점에서 보지 말라는 거예요.
물론 말씀은 행해라, 행해라, 행해라, 행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근본정신 그 근본의도가 어디 있느냐?
천국이 나타나는 거라는 겁니다, 천국이 나타나는 거.
그래서 빛이라는 말씀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정확하게 이해 한다는 것이에요.
마음이 하늘에 갔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곳에 마음이 첨벙 담겨집니다.
마음이 담겨지면서 그 마음의 인격과 이 몸과 연관성의 파이프, 관계의 파이프를 통해서 천국기운이 내려오면서 이 몸이 심지가 됩니다. 기름에 흠뻑 젖은 심지가 되는 것처럼 이 몸이 천국에 젖은, 천국에 밴 심지가 됩니다.
그래서 그 천국의 기운이 이 몸의 심지를 통해서 활활 타오르게 되는 것이에요, 천국 기름이.
내가 내 에너지를 사용하고 내 뜻과 내 힘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해서 천국기운이 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에너지가 흘러 들어와서 천국의 기름이 흘러 들어와서 내 몸을 천국의 심지 삼아 가지고, 천국기운의 심지 삼아서 천국 스스로가 활활 드러나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모세의 떨기나무 불꽃 우리가 자주 얘기하잖아요? 그 특징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나무들은 불이 붙으면 다 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모세의 떨기나무는 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도 재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다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우리 뜻도 힘도 다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이 세상은 몸만 남아 있을 뿐이지 사실 살아갈 힘도 뜻도 마음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마음도 뜻도 힘도 다 하나님께로 올라가고 천국으로 올라간 상태에서, 하늘의 에너지가 내려오면서 내 몸을 성전 삼아 움직여 가는 것이에요.
산상수훈은 그러므로 우리보고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를 갖고 천국으로 마음이 간 자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국으로 마음이가서 천국을 소유하게 되면, 그 마음이 빈자리로 이 몸이 있는 곳에 천국의 기운이 내려와서 천국기운이 표현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것이고 그 구체적이 내용들이 바로 산상수훈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제시하시고 율법을 행하라는 것처럼 행하는, 그러한 과제로서 산상수훈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자, 여러분 천국절임, 천국심지, 이 몸이 그렇다는 거예요, 몸이.
내가 소금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이 몸을 가지고 내 마음이 힘을 쓰면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몸은 단지 돌덩어리와 같은 거예요.
왜 돌덩어리가 되었습니까? 왜 무생물체와 같이 되었습니까?
마음이 다 천국으로 가서…
왜 천국으로 갑니까?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에서 주님과 꽁꽁 묶여버리니까 주님이 부활하셔서 천국 갈 때 마음도 따라 올라가는 거지요.
이 남은 몸이 돌이 되어서 천국기운을 소금기를 묻히고 다니던 돌처럼 천국기운을 묻히고 다니는 것이고 천국절임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지성미를 맛보거나, 아름다울 미(美)자가 아니라 맛 미(味)자입니다.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지성미, 아니면 뭐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무슨 육체미,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또 뭐가 있을까요, 숙련미?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부티? 내가 부자라서 부자의 티를 내며 삽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천국미(味)를 나타내야 되고 천국티를 나타내야 된다는 겁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가난하다는 이 상황에 내 마음이 절어서, 빈티를 줄줄 내고 다녀야 되는 겁니까?
부자라 그러면 부자라는 상황에 내 마음이 장아찌처럼 절어서 부자 됨을 드러내며 살아야 되는 겁니까? 이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내 상황이 부자건 가난하건 우리는 천국 맛을 내고 다니는 사람들이고 천국티를 내는 사람들이라는 얘깁니다.
천국을 담고 있는 천국절임으로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빛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나를 만나는 사람은 천국을 밝히는 불을 보는 거예요, 천국을 밝히는 불.
‘저 사람은 이상하다’ 이 암흑처럼 깜깜한 이 세상에 검은색 얼음으로 덮여서 공중권세 잡은 자가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요, 얼음이 얼어 버렸습니다.
그 얼음에 구멍을 뚫고 나를 보는 사람마다 뭔가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빛을 보는 것이에요, 빛을.
여러분, 천국절임 이거 분명히 이해합시다.
내가 소금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소금기를 달고 다니는 자입니다.
소금기를 달고 다니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마음은 천국에 가있는 자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고 지불할 마음이 없고 온통 마음은 다 하늘에 가있는 자들입니다, 몸만 남았습니다.
이제 이 몸을 하나님이 장악하시고 지배하시고 천국기운이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이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데로 움직여 갑니다.
바로 하늘의 기운이 묻어나는 돌소금을 말하는 거예요, 돌소금을.
등불도 이 몸이 바로 천국기운이라는 기름이 배어나오는 심지가 되어서, 하늘의 기운 천국기운으로 불이 붙어서 천국을 밝혀주는 심지로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자,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서 여러분,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하지 않으시고 ‘빛이다’ ‘소금이다’ 말씀 하셨어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 이 죽음이 뭐에요? 사랑의 관계를 말해요.
더 이상 세상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할 때에, 나는 자식 앞에서 천국 맛을 내는 천국절임이 되고,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천국의 내부를 밝혀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드러내주는 천국의 심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로 가느라고 내가 십자가 붙잡고 잘라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아들 앞에서 아버지 티를 내는 게 아니라 천국티를 내면서 다가갈 수 있게 된다는 거지요.
직장으로 어디로든지 천국티를 내면서 다가갈 수 있다는 거지요.
직장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해서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는 직장으로 천국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직장을 사랑하는 자는, 직장에 대한 이 세상의 경험에 지식에 바탕을 둔 나의 아이디어를 그 알량한 그 아이디어를 갖고 가지만, 직장을 버리고 천국절임이 된 자들은 천국 맛을 가지고 직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산상수훈의 제목처럼 제시하신 말씀이지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다른 말로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는 천국기운을 묻히고 다니는 천국절임이요, 천국기운에 밴 천국불이 붙어야 되는 천국의 심지이다, 몸이 남아있는 동안 너희 몸이 바로 그렇게 천국의 절임이고 천국의 심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면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지불할 수 있는 여분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온전히 하늘에 드려진 마음에 하늘이 소유되어지고,
몸이 이 세상에 남았을 때 몸이 천국을 소유하는 방법은 소금이 되고 그리고 등불의 심지가 되는 길임을 배웠사오니 오늘 하루 살아갈 때에 십자가 붙잡음을 통하여 이 몸이 천국을 묻힌 천국절임이 되게 하시고 천국의 에너지가 배어서 불꽃이 되는 천국의 심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