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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3: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0.10.25, 박홍섭 목사
히브리서는 고난과 박해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붙들어주기 위해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구원을 설명합니다. 저자는 편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권면과 그분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동시에 이어갑니다.
그 권면과 경고가 전개되는 구성은 이렇습니다. 우선 서론에 해당되는 1:1-3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최종계시자로 선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광의 광채, 본체의 형상인 분, 만물과의 관계에서는 만물의 창조자시며 소유자며 보존자로, 우리와의 관계에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선지자요 자신의 피로 죄를 정결케 해주시는 대제사장이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우주와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1:4-10:18까지가 본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논증하는 내용입니다. 1:4-2:18까지는 천사보다 우월한 분으로, 3:1-4:13까지는 모세보다 뛰어나고, 4:14-7:28까지는 아론보다 위대한 분으로 말하고, 8:1-10:18까지는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십자가의 죽음으로 제사를 드린 옛 언약의 제사장보다 더 나은 제사장이며 옛 언약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결론에 해당하는 10:19부터 13장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믿음과 인내로 이런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권면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3:1은 이런 구성으로 전개되는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핵심 구절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1장과 2장에서 말했던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에 대한 결론 역할을 하고 앞으로 이어갈 모세와 아론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의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첫 시간에 이 편지의 독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편지 내내 구약의 제사 제도와 천사와 모세와 아론을 대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히브리인들이 독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에게 오랫동안 섬겨왔던 눈에 보이는 성전의 의식 대신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말씀 하나로 믿고 섬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흐르고 고난이 찾아오면서 옛날에 몸담았던 유대교와 유대교의 의식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과 달리 유대교를 관용하고 우대했기 때문에 유대교의 그늘 아래 다시 들어가면 고난 대신 편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도전이었죠.
이런 독자들을 향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두 가지 직분, 하나는 우리의 사도, 하나는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분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1절을 다시 보실까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먼저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우리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도입니까? 믿는 도리의 사도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이 되고 대상이 되는 사도, 그런 뜻입니다. 1:1-2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죠. 선지자들과 아들은 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들만 아니라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 사도입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달하셨습니다. 영어 성경 NASB을 보면 “in the prophetes”라고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통해’에서는 관사가 없습니다. 부정관사도 없고 정관사도 없습니다. 그냥 “in His son”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선지자들은 보냄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전달 수단으로 보냄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심부름꾼이죠. 그러나 아들은 전달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뜻 자체이고 내용 자체입니다. 아들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내용 자체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지만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는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을 전달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최종계시자이자 계시 그 자체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광의 광채이시며 본체의 형상입니다. 아들은 곧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를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믿는 도리의 내용이며 목적이며 완성이신 완전한 하나님으로 보냄을 받은 그런 사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사 우리와 같은 시험을 당하셨기에 시험당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능히 도울 수 있는 대제사장이죠. 사도가 하늘의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삼위 하나님의 대표 성격을 띠고 있다면 대제사장은 땅의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중보하고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는 직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삼위 하나님의 대표로 보냄을 받은 사도이며 동시에 땅에 있는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인도하는 대제사장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고 하나님과 죄인을 이어주는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입니다. 창28:10-15을 보면 야곱이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갈 때 날이 어두워 벧엘에서 유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돌을 베게 삼아 잠을 자는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꿉니다. 하나님은 그 꿈을 통해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지켜주고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모든 것을 잃고 도망가는 땅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야곱을 하나님은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닥다리를 통해 위로하셨고 그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왜 예수님을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위로로 제시합니까? 요한복음 1:51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야곱이 꿈에서 본 것은 사닥다리 위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자신 위에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라 하십니다. 무슨 말씀이죠?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을 대표하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우리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인도하는 대제사장으로 하나님과 인생을 이어주는 사다리이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입니다.
이분을 떠나서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으며 하나님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우리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죄를 사함받는 다른 방도가 없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늘을 알 수 있는 다른 원리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살기 위해 도망가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야곱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사닥다리를 보여주면서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약속의 성취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권면은 히브리서 독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저와 여러분에게도 적용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생각 자체를 깊이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든지 아니면 헛된 생각에 몰두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도 하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만 생각합니다. 하늘에 속한 진리와 생명에 대한 생각보다는 땅에 속한 돈과 이익과 쾌락과 편안함과 헛된 욕심을 생각합니다. 이런 풍조의 영향으로 기독교인들도 자신이 믿는 믿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도 땅의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만연된 피상적인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예수 믿으면 잘 되겠지,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교회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힘들고 피곤한 내 삶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겠지 정도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생각을 안 합니다. 왜 예수님이 고난받는 자의 참된 위로가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피상적인 믿음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없기에 믿음의 깊이도 없습니다. 깊이가 없기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믿음이 무너집니다. 생각이 필요합니다. 묵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왜 성부가 성자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어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는지? 왜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지? 왜 성도의 삶에 고난이 허락되는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어 이끌어가시는 자리가 어디이며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야곱을 택해 이스라엘로 바꾸고 만들어가신 하나님의 열심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사도와 선지자와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교’입니다. 우리가 속한 장로교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말합니다. ‘예수교’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교’ 혹은 ‘성령교’라 부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께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예수님을 통해서만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오늘 교회 강단의 메시지에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얼마나 언급됩니까? 교인들의 대화에 예수님은 얼마나 많이 등장합니까?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기독교에 예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설교에 예수님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하고 알려야 할 핵심인 예수님에 관한 주제와 내용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수보다 다른 것이 더 많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단의 가장 큰 교회 중에 하나가 연예인을 홍보 장로로 세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홍보 장로라는 직분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여러분도 다 아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평소에 자신을 스스로 광대라고 칭하며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위해 강단에서 유행가도 부르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터치하고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장로교회의 헌법과 정치원리에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장로직의 의미를 다 무시하고 연예인을 홍보 장로로 세웠다고 합니다.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인 교회가 어쩌다가 연예인을 홍보의 수단으로 삼고, 그것도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반영하는 장로 직분을 이용해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왜 이런 일이 부끄러운지 알지 못할까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몸 된 교회와 직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히브리서 저자가 배교의 위험 앞에 있는 독자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보십시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맏아들인 예수님과 형제로, 예수를 믿는 지체들끼리 서로 형제로 묶여 거룩함을 이루어 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거룩함을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누구를 통해 이런 부름을 받았습니까?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이분을 깊이 생각하는 믿음의 자리로 가야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밤낮으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지요? 있다면 어느 정도로 있습니까? 왜 성도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까요? 왜 교회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성장만 생각할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모든 사랑은 생각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생각도 더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그 사람이 생각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사랑하되 깊이 사랑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사랑해야 고난 중에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를 깊이 생각할 때 땅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모든 일을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삶에 대한 깊이도 생깁니다. 그 깊이가 마련될 때 우리 안의 많은 욕심과 죄의 본성을 거스르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가슴이 덜컹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내 인생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하늘과 땅이 연결되고 하나님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되면서 이길 수 있는 믿음과 힘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분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말은 면밀히 살피고 심사숙고한다는 ‘카타노에오’라는 단어인데 NIV영어 성경은 “너의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예수님께 몰두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예수님게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내 생각의 교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외에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그 무엇을 내려놓고 고치고 교정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셔놓고 예수님께 고정시켜 몰두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그분께 몰두해야 합니까? 그분이 우리의 최상의 가치이며 최고의 복이며 모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가치, 최고의 복에 마음을 두고 생각을 고정시켜 몰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루에 생각하는 것이 육만 가지라고 합니다. 그중에 예수님을 얼마나 생각합니까? 주일 한두 시간 예배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내 생각을 고정시키고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도 생각의 중요성을 압니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주간, 아무도 없는 통나무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주간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워렌 버핏도 매일 아침 출근해서 가장 먼저 생각하는 시간부터 갖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일 년에 50주는 생각하는 데 쓰고 남은 2주만 일한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의 중요성을 알고 많이 생각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하되 인도의 구루들이 명상하듯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의 스님들이 면백 수행하면서 자기를 비우듯이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으로 예수님을 생각합니까? 상상입니까? 내 안에 종교적인 에스타시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분이 하신 일과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마음에 간직하여 묵상하지 않고 생각하는 예수님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한때 세계적으로 모델이 되는 교회로 소문났던 윌로우 클릭 교회가 전교인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예상외였습니다. 너무 많은 교인들이 활발한 교회생활과 달리 영적 성장에 정체를 겪으면서 교회를 떠나고 싶다는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교회는 시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교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다음과 같은 4단계의 목표를 가진 프로그램으로 바꾸었습니다.
1단계/기독교를 알아감
2단계/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함
3단계/그리스도를 닮아감
4단계/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심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대형교회의 외적인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과 운동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들의 프로그램 속에 한 가지 동의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각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옮아갈 때마다 모든 과정에서 말씀 묵상이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말씀 묵상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도를 높이는 영적 성장의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 묵상은 생명의 당연한 결과이며 현상입니다. 꾸준히 말씀을 묵상하면 저절로 기독교를 알아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말씀 묵상이 중요합니다. 말씀 묵상을 꾸준히 하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매일 성경을 통한 말씀 묵상과 맥체인 성경읽기로 성경을 읽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일 공 예배에 선포되는 설교를 잘 듣고 새기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목사의 사적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을 삶에서 살아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하여 내 삶을 이끌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화초와 잡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잡초는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자랍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에도 잡초와 같은 죄와 욕심과 거짓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따로 가꾸지 않고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자라고 드러납니다. 반면에 화초는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잡초를 뽑고 부지런히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생각해서 죄의 잡초들을 뽑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귀한 화초를 내 생각과 인격과 성품 속에 꽃으로 피고 열매로 자라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