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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익세보>>(益世报)(上海版)
민국 4년(1915년) 10월에 천진에서 창간되었으며, 창간인은 벨기에 국적 전교사 뱅상 드 레브(雷鸣远)(후에 중국 국적을 취함)이었다. 민국 26년(1937년) 7월에 정간되었다. 그 해 겨울 남경 주교 于斌에 의해 崑明에서 복간되었다. 민국 29년(1940년) 3월에 重庆으로 이주하였다. 항일 전쟁이후, 西安판, 北平版(북경판)이 나왔으며, 天津판이 회복되었다. 민국 35년(1946년) 6월 15일에 상해판이 발행하였다. 각지의 <<익세보>>에는 모두 자기 지역의 사장이 있었으며, 상해판의 사장은 판져뽀(范争波)(국민 정부 감찰원 위원, 国大 대표)이었고, 발행인은 리우항쳔(刘航琛)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천주교인이었고, <<익세보>> 이사회의 이사장은 于斌이었다. 신문사는 山东路 290호에 위치하였고 편집부는 四川中路 215호 4楼에 세워졌다. 편집장 陈德征은 천주교인이 아니었다. 상해 주교인 惠济良은 일찍이 교구 신부인 张维屏(磐石 소학교 교장)을 파견하였고 예수회 소속 중국 신부인 徐宗泽, 王方이 이 신문사의 “지도신부”를 맡았다. <<익세보>>(상해판)의 판매 부수는 5만부였으며 천주교인이 구독 신청한 것은 2,000부에 못 미친다. 상해 해방 전에 정간되었다.
제 2 절 교회 병원(教会医院)
아편 전쟁이후, 천주교회는 상해에서 병원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조계 당국이 출현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관리를 위탁하였고 목적은 단지 상해를 여행하는 외국인을 위해 의료 서비스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 후 점점 사회에 개방되어 의료 행위를 이용하여 전교를 하였다. 어떤 교회 병원은 특등 병실, 1등 병실, 2등 병실이 있어 비용이 높았으며 영리 성격을 띠었다. 동시에 또한 빈민을 위한 병실이 설립되어 있어 자선 성격도 띠었다. 어떤 교회 병원은 전적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환자에게 치료 받는 것을 무료로 해주었으나 이런 병원의 의료 수준은 높지 않았고 어떤 곳은 심지어 중국 환자가 실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천주교회에는 아직도 여전히 도시와 시골에 문을 연 진료소(施诊所)가 있어 의료 행위를 통해 환자에서 교우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旧中国에는 교회 병원이 서방의 선진 의료 기술과 의료 설비 등을 받아들이고 병원 종사원을 배양하는 점에서 적극적인 작용을 하기도 하였으며 사회적으로 부족한 의약품을 해결하였다. 항일 전쟁 초기에 몇 몇 천주교회 병원은 임시로 부상병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부상당한 사람을 구하는 사업에 참가하여 의사와 간호사를 각 난민 시술소에 보내어 약을 주거나 임시 병원이나 의약국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49년 통계에 따르면, 전 시에는 크고 작은 천주교회의 병원이 11개 있었으며 접수하여 치료하는 환자 수가 26,442명이 되었고, 진료소는 60여 곳으로 환자가 943,665명이나 되었다.
1. 공제의원(公济医院) - 上海市 第一 人民医院
이 병원의 창립연도는 청조 同治 4년(1864년)이며, 장소는 外滩 高尔朋路(현재 汉口路)의 큰 건물 안이다. 이 병원의 전신은 프랑스군인 병원이고 청조 咸豊 6년(1856년)에 창설되었으며, 유럽인들을 위해 일을 했으며 洋泾浜 증망회 수녀원 안에 있었다. 이 병원은 주주들이 자금을 모아서 세웠으며, 光绪 원년(1875년)에 상해 영국 조계 工部局이 공제 병원으로 개조되었으며, 병원 일을 결정하는 주요 권한은 여전히 주주회에 속하여 결정되었고, 행정은 영국 조계 공부국 이사회에서 관리를 맡았다. 광서 3년(1878년)에 이 병원은 소주河 북쪽 연안의 새롭게 건설된 병원 건물로 이전되었다. 광서 10년(1885년)에 격리 병실을 개설하고, 광서 16년(1891년)에 새로운 병동을 확장, 건설되었다. 같은 해 遣使会(仁爱会 수녀가 견사회의 영도 하에 들어감)가 회의 병원을 세웠다. 공제 의원은 단지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만을 접수하여 치료하였으며, 후에 仁爱会 수녀가 병원 바로 옆에 하나의 중국인들만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무료 병원을 설립하였으니, 병상이 100개나 되었다. 宣统 원년(1913년)에 仁愛會 병원은 呂班路(현재 重庆南路)로 이주하였다. 민국 2년(1913년)에 공제 의원은 프란치스꼬회 수녀회의 관리로 바뀌었다. 민국 9년(1920년)에 이 병원은 또 하나의 새로운 건물을 지었으니, 인애회와 프란치스꼬회의 수녀가 병원의 간호 업무를 책임졌으며, 동시에 환자들을 향해 전교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민국 9년(1927년)을 전후로 하여 매년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의 수가 약 3,000명으로서 그 중에서 입교자수는 30명 내외 정도였다. 민국 16년(1927년) 이후, 공제 의원에는 병상이 500여개가 있었으며, 중국 환자를 받아들여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반발한 후, 병원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어 사용되었다. 항전 승리이후, 상해 시정부 위생국이 인수, 관리하였다. 1949년 6월에 상해시 군사 管制 위원회가 공제 의원을 인수, 관리하여 현재는 상해시 제1 인민 병원이 되었다.
2. 광자의원(广慈医院) - 성마리아 병원 (상해 제2 의과대학 부속 瑞金医院)
프랑스 말로 “성 마리아 병원(I'Hospital Sainte Marie)”이라고 부른다. 光绪 33년(1908년)에 상해 프랑스 조계 당국과 천주교 강남 교황청 직속 대목구가 합작을 하여 열었으며 인애회 프랑스 수녀들에게 병원 관리를 위탁하였다. 이 병원은 조계 시대에 교회 병원과 조계 병원이라는 이중성격을 띄었다. 민국 21년(1932년)에 이 병원이 창립 25주년 기념행사시 상해 주재 프랑스 총영사가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광자의원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프랑스 조계 병원이며 프랑스를 위해서 일했다.” 이 병원의 주요한 건물의 대부분은 프랑스 조계 공익 자선기금에서 지불하였다. 민국 18년(1929년)과 민국 22년(1933년)에 세워진 격리 병동과 2개의 5층 평민 병동은 주변을 이탈해 달아난 개에게 세금을 부과해 거두어들인 경비로 세웠다. 병원 등급은 분명했으니, 선교사 전용 특등 병실, 프랑스 해군 전용 병실, 安南 경찰 전용 병실, 프랑스 조계 공동국 직원 전용 병실 그리고 프랑스 조계 경찰서 범죄자 병실 등이다. 병원이 사용한 160亩의 토지는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상해 주재 재무담당 “김 신부”(Robert, 중국 이름 金河伯, 프랑스 조계 공동국 이사)는 불평등 조약을 빌미로 낮은 가격에 민간인에게 사들인 것이었다. 초기에 이 병원이 문을 열었을 때 겨우 內.外 2개 科가 있었으며 병상은 50개였다. 조계의 부단한 확장에 따라, 민국 24년(1935년)에 병상이 650개나 되었다. 상해가 점령당했던 시기에 모든 것이 평상시와 같았다. 민국 31년(1942년)에는 병상이 800개가 되었다. 30년대 초에 이 병원의 의료 수준은 일반적이었다. 각 科 주임의 대다수는 프랑스 군의관과 식민지 전문 군의관이었기에 의료 기술 수준이 높지 않았다. 병동 간호원의 부족에 심하여 수녀가 간호사 업무를 맡았기에 민국 21년(1933년) 통계에 따르면, 24개 仁爱会 수녀 중에서 단지 21명만이 간호사 자격증이 있었다. 그리고 수녀들은 병원 안에서 전교를 제일 중요한 일로 여겼기에 그들은 간호사 일을 이용해 전교를 하였으며, 더욱이 누워있는 위급한 환자에게 힘을 다해 입교를 권하고 종종 먼저 환자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의사를 불러 생명을 구하기도 하였다. “임종 세례”를 접수한 사람의 수는 많아서 민국 24년에는 409명이나 되었다. 민국 24년(1935년) 이후, 중국 유학생이 대륙으로 다시 돌아와 이 병원에 와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즉 내과 교수 광(鄺)安坤 의사, 외과 교수 徐玉彛(이) 의사였으며, 민국 35년(1946년)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傅培彬, 구강과 의사 沈国祚등이었다. 그들은 임상 의료 중 內外科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를 배양되었다. 동시에 한 세대의 우수한 간호사도 배양하여, 이 병원의 의료와 간호 수준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이로부터 광자의원은 천주교 병원으로서 전국에서 명문이 되었다. 민국 37년(1948년)도 통계에 따르면, 병원 전체 치료 접수 환자가 10,662명이었고 수술이 5,467명, 조산 1,042건(분만 성공 1,028건), 门诊 137,339명이었다. 의원 행정상 이사회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모두가 프랑스 사람 이사로 임명되었다. 원장은 일반적으로 교구 신부가 겸하였으니 항일 전쟁 직후 프랑스 신부 완알디엔(万尔典)(1932 ~ 1947년)과 차이알멍(才尔孟)(1947년 이후)가 원장직을 맡았다. 항전 승리이후, 국민 정부는 교회 병원이 필히 중국인이 원장을 하도록 입안을 규정하였다. 이를 위해 교구는 중국인 赵棣华, 陸子冬, 汪代玺, 兰绪章 등을 채용하여 명목상으로 원장으로 임명했으나, 실제적인 대권은 여전히 프랑스인이 잡고 조종하였다. 원내 각 부문의 일상적인 사무는 모두 천주교 수녀가 맡아서 관리하였다. 1951년 10월에 광자의원은 시정부 위생국에 의해 인수 관리하게 되었다. 1952년에 상해 제2의학원 부속의원으로 명칭을 고쳤다. 1972년에 다시 상해 제2의학원(90년대에 상해 제2의과대학으로 명칭을 고침)부속 瑞金医院으로 명칭을 바꿨다.
3. 안당의원(安当医院) - (안드레아 병원) 현재 卢湾区 中心医院
프랑스 인애회 수녀회에 의해 宣统 2년(1910년) 전후에 창립되었으며, 위치는 呂班路(현재 重庆南路) 149호이다. 이 병원은 자선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빈곤한 비기독교도인”만을 받아들였고 병상이 100개였으며, 진단 의학원 3학년 학생이 이곳에서 진단 및 작은 수술 등의 실습을 하였고 간호 업무는 수녀가 담당하였다. 설비가 간단하여 의료 수준이 낮았으며, 환자 사망률을 높았다. 수녀들은 환자가 위급할 때마다 목숨을 먼저 구하기보다는 그에게 입교를 권하였다. 민국 25년(1936년)의 통계에 따르면, 그해 접수받은 환자 수가 모두 974명이었으며, 그중에 243명이 임종 전에 세례를 받았다. 건국 초기에 병상이 감소하여 50개가 되었으며, 안당 빈민의원으로 불렸다. 50년대에 위생 부문 접수 관리로 인해 상해시 폐결핵 방지 분원이 되었으며, 80년대 초에 卢湾区 中心医院으로 병합되었다.
4. 성심의원(圣心医院) - 杨浦区 中心医院
민국 5년(1916년)에 상해 공교 진행회 회장 육백홍이 杨树浦 工厂区에 진료소를 건립하여 프란치스꼬회 수녀가 진료를 베풀고 약을 주었다. 민국 12년(1923년)에 육백홍이 또 27만元의 자금을 모아 부근에 60亩의 토지를 사서 다음 해에 의원 병동 6동을 지었으니 남, 여와 소아과를 분리하고 매 동의 수용 환자가 120명이었으며, 프란치스꼬회 수녀에 의해 관리되었다. 병원 내에는 수녀가 거주하는 곳과 성당이 하나 있었다. 병실은 접수비에 따라 표준방이 특등실, 1등실, 2등실, 3등실로 나누어졌다. 민국 20년(1931년)에 중비경자배곡위원회(中比庚子赔縠委员会)(the Boxer Imdemnity Fund, 또는 中比庚縠委员会라고 칭함)의 변제한 돈으로 인해 프랑스로부터 최신의 라듐(뇌정의료의(镭锭医疗仪))를 사들이고 라듐과(镭锭科)를 세우고 후에 중비라듐(뇌정)의원을 위해 당시에 병원 내에는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의 국가 의사가 있었으며, 각 과가 갖추어져 있었다. 8.13 사변이 시작되어 이 병원은 일찍이 杨树浦의 한 무리의 부상당한 사람들을 구하고 심지어 상해가 함락되어 비로소 철수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며, 이 의원은 일본 군대에 의해 침략. 점령당하여 부상병 의원으로 고쳤다. 민국 29년(1940년)에 이 병원과 성심 간호사 학교(护校)는 함께 기(祁)齐路(현재 岳阳路 197호로 옮겼으며, 장소가 외지고 환자가 많지 않아 단지 50개의 병상만이 있었다. 항일 전쟁 승리 후, 의원은 원래의 지역인 寧国路 41호로 되돌아갔다. 성심 의원의 설립 취지는 전교였다. 민국 25년(1936년)의 통계에 따르면, 그 해에 접수 치료중인 환자 수는 5,000명이었고 입교자는 600명이 넘었다. 부설 진료소는 날마다 진단하고 치료를 받는 환자 수가 300여명이 넘었으며, 입교하는 수가 또한 적지 않았다. 성심 의원의 영도권이 프란치스꼬회 외국인 원장 수녀(속칭 大姆姆)에게 돌아왔다. 1951년 시정부 위생 부문이 이 병원을 인수 관리하게 되자 상해시 제2劳工医院이라 명칭을 바꾸고 1958년에 다시 양포구 중심의원으로 명칭을 고쳤다.
5. 중비라듐의원(중비라듐의원) - 상해시 肿瘤(肿疡)医院
이 의원은 일명 중비 라듐 치료 병원이라 부르기도 하며, 중국 제일의 肿瘤(종양) 전문 의원이고 전신은 성심의원 라듐과이다. 민국 20년(1931년)에 中比庚縠委员会 산하에 속한 중비 慈善会(the Sino-Belgian Philantropical institution)가 자금적으로 도움을 주어 건립하였으며, 일찍이 프랑스가 20만元이 넘는 가격의 최신 라듐 의료장비를 구해주었다. 이 과의 주임 의사는 葛成之, X선과 주임으로 张友梅를 임명하였다. 의원은 자선 성격을 띄고 있어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해주었다. 통계에 따르면, 민국 26년(1937년)에 이르러 혜택을 받은 환자 수는 1만명이 넘었다. 8.13 사변 후 이 병원은 일찍이 성심의원을 따라 조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항전 승리 후, 이 병원은 독립적인 성격의 하나의 시립 병원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林森中路(현재 淮海中路) 1773호에 설립되었다.(후에 1729호로 고쳤다.) 초대 원장은 교우인 汤于翰이었으며, 일상적인 업무는 여전히 프란치스꼬회 수녀들이 장악하여 관리하였다. 병실의 접수비는 아주 높아, 원래의 자선 병원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951년 중비라듐의원은 시정부 위생부가 접수. 관리하게 되어 병원 안에 57개의 병상이 있었으며, 상해시 肿瘤(종양) 병원이라고 고쳐 불렀다.
6. 보자 요양원(普慈療养院) - 상해시 北桥 精神病医院
민국 24년(1935년)에 陸伯鴻에 의해 상해 공교 진행회 명의로써 사회를 향해 자금을 모아 창립하였다. 위치는 상해시 南郊의 北桥(현재 沪闵 公路上)였으며, 상해시 정부와 영국 조계 당국의 자금 협조를 얻었다 이 병원에서는 정신병 환자를 남.여 둘로 나누어 주로 취급하였다. 남자들은 주로 루린빠오(卢林堡) 仁爱会의 독일 국적 수사가 책임을 맡았고, 여자들은 주로 메리놀(玛利诺)회 수녀들(민국 27년(1938년)말에 루산빠오(卢森堡) 프란치스꼬회 수녀로 고침)이 책임을 졌다. 원장은 루빠이홍의 장남인 陸隐耕이었다. 병원은 면적이 100亩가 넘는 땅에 20여동을 지었으며 수용 환자 수는 600명가량 되었다. 병원 내부에는 하나의 성당이 세워졌으며, 수용 인원은 1,500명이었다. 이곳에는 독일 신부가 상주하였다. 민국 26년(1937년) 항전 초기에 병원 내에 일찍이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병원과 난민소가 세워졌다. 일본군이 北桥를 침략한 후 독일 수사와 대처 하고 있어, 병원은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항전 승리후 병원은 일찍이 연합국의 구제 총서(总署)와 중국 천주교 복리회의 자금 협조와 보조금(수당)을 얻었다. 해방 전야에 국민당 군대가 상해에서 철수할 때, 일찍이 이 병원을 파괴하여 손실이 대략 30만 달러에 이르렀다. 성당의 종루와 급수탑이 폭격으로 훼손되었다. 병원의 원장은 张维明이었고, 이사장은 교우 顾守熙였으며, 병상이 280개, 병원 직원이 200명이 넘었다. 1951년 시정부가 이 병원을 인수 관리한 이후, 상해시 북교 정신 병원으로 고쳤다.
7. 기타 의원(其他医院)
(1) 육가취 인애의원(陸家嘴仁爱医院)
光绪 14년(1888년)에 仁愛會 프랑스 수녀회가 푸동 陸家嘴에 진료소를 새우고 전교를 진향하였다. 민국 26년(1937년)에 인애 의원으로 개량하여, 烟厂路 124호에 위치하였다. 건설된지 오래되지 않아, 즉 8.13 사변을 만나 심하게 파괴당하였으며, 민국 27년(1938년)에 수리 복원되었으니 병상이 75개나 되었다. 1951년에 시정부가 인애 의원을 접수, 관리하였다. 당시에 프랑스 국적 수녀가 1명, 방인 국적의 수녀가 4명이었고, 교우 직원은 28명이었다.
(2) 송강 요셉 의원(松江若瑟医院)
민국 15년(1926년)에 상해 공교 진행회의 회장인 陸伯鴻으로 인하여 창설되었으며 장소는 송강 城西 马路桥 이남에 위치하였다. 前身은 여전히 민국 6년(1917년)에 공교 진행회를 위하여 진료소를 세웠으며, 원장은 陸隐耕이었고 인애회 수녀들에게 위탁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병원 면적은 4亩였고 楼房이 1동, 병실이 13개로써 男女를 구분하였다. 병실은 头, 1, 2, 3등실로 구분하였다. 민국 26년(1937년) 8.13사변 때, 일찍이 부상당한 병사들의 의원이 되었으며, 일본 비행기가 송강 택시 정류장을 폭격했을 때, 그 여파가 병원에도 미쳤으며, 후에 한번 邱家湾 천주당으로 옮겼었다. 민국 35년(1946년) 10월에 주임 의사인 吴云瑞가 책임을 지고 수리. 복원을 담당하여 병상이 50개나 되었다. 1949년 시정부가 접수, 관리하게 되어 松江县 血吸虫病 防治站으로 바꾸었다.
(3) 갑북 모심 의원(闸北母心医院)
민국 19년(1930년)에 창설되었다. 원래는 갑북 진료소였으나 후에 상해 공교 진행회의 협조를 얻어 의원으로 개조하여 길이가 60m가 넘는 2층 아파트 2동이 되었다. 한 분의 이태리 국적 신부가 이곳에서 종교적인 분야의 책임을 맡았으며, 7명의 수녀가 병원 관리와 간호사일(护理)을 담당하였다. 민국 26년(1937년)에 의원은 일본군 비행기에 의해 폭격을 당했다.
8. 진료소(诊所)
천주교회는 상해에 의원을 연 것 이외에도 여전히 적지 않은 진료소를 열었으며, 전국의 市城郊에 노동하는 인민이 거주하는 곳이 퍼져있었으니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진단을 하고 약을 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교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진료소의 대부분이 의사가 없이 앉아서 진단을 하였으며, 수녀로 인해 병의 진단에서부터 침을 나주는 일 그리고 약을 주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진료소는 세 종류로 나눈다. 즉 (1) 교회 병원 안에 설치되어 일반적으로 조건이 좋은 곳으로서 예를 들어 广慈医院과 圣心医院의 진료소는 어떤 때는 실습 의사가 있어 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2) 수녀원 또는 교회 자선 기구 내에 설립되어 徐家汇, 洋泾浜과 虹口 圣母院의 진료소, 南市 新普育堂의 진료소, 조건은 중급 정도에 속한다. (3) 독채 한 칸이 전교 목적의 진료소였으며, 조건이 가장 못했고 江湾과 漕河泾의 진료소가 바로 그 예였으며 한 주에 단지 몇 분만 진단을 받았다. 옛날에 빈곤한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 병원에 가서 치료를 요청하면 진료소에서 치료를 한 후에 왕왕 입교를 위한 세례를 받았다.
제 3 절 사회 사업(社会事业)
1. 서가회 천문대(徐家汇天文臺) - 상해 기상국
청조 同治 12년(1873년)에 예수회에 의해 쉬지아후이 쟈오지아빵(肇嘉浜)(현재 서가회 제2中心 小学校에 위치)에 세워지기 시작하였으니, 주로 기상 관측과 기록을 하였으며, 프랑스어를 사용하여 <<天文月报>>를 출판하였다. 최초의 주관자는 프랑스 예수회 전교사 까오롱?(高龍?)이었다. 다음해 초, 상해 영자 신문이 매일 간행되어 격일로 기상 관측 보고를 냈다. 까오롱?(高龍?)은 후에 예수회 스웨덴 전교사인 넝은쓰(能恩斯)에게 磁力의 전문적인 관리를 넘겨주어, 프랑스 신부 리우더야오(劉德耀)로 하여금 기상관측의 책임을 맡게 하였다. 光绪 3년(1877년)에 넝은쓰 한 명이 책임을 맡는 것으로 바뀌어 이 사람이 총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넝은쓰는 병으로 인해 유럽으로 돌아갔으며, 프랑스 신부 차이씨앙즈(蔡尚质)가 이어서 총대장에 임명되었다. 제3대 총대장은 프랑스 신부인 라오즈쑨(劳织勳)이었으며 그는 바티칸 과학원의 院士였으며, 전문적으로 颱风을 예측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태풍신부”라고 불렀다. 광서 10년(1884년)부터 이 천문대는 와이탄(外灘)에 신호탑을 설치하고 매일 정시에 기상 신호표기를 달았으며, 황포강에서 선박이 정박하는 일을 맡았다. 광서 16년(1890년)에 태풍 경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총대장을 역임한 분은 프랑스 신부 티엔구오주(田国柱), 이태리 신부 롱씨앙치(龍相齐), 프랑스 신부 옌위에페이(雁月飞), 프랑스 신부 마오누오쉬(茅若虚)(일찍이 상해 진단 대학 원장을 역임했음)등이 있었다. 이 기상대에는 천문, 地磁, 기상, 지진의 4개 부문이 있었다. 광서 26년(1900년)에 천문 관측 기구가 사산으로 옮겨졌다. 광서 31년(1905년)에 地磁(지구자기) 관측 업무 기구가 서가회에서 전차가 통과한 후, 업무에 영향을 주어 쿤샨 ?지아빵(昆山?葭浜)으로 옮긴 후, 서가회 천문대는 이것으로부터 단지 기상, 授时(천문대에서 매일 정확한 시간대를 알리는 것), 지진과 중력 관측 업무 만을 담당하였다. 授时 업무는 일찍이 光绪 7년(1881년)에 시작하여 와이탄에 세워진 신호대가 정오에 보도하고, 宣统 원년(1909년)에 야간 21시에 섬광(闪光) 보고를 증가시켰으며, 민국 31년(1914년)에 무선 电呼号를 사용하여 매일 두 번 보고를 시작하였다. 중력 관측 방면에서는 서가회 천문대가 일찍이 30년대에 北平 연구원과 합작하여 东北, 华北, 华东과 华南 등 208개 重力点을 측정하였다. 항전 기간에 서가회 천문대는 일찍이 상해 주둔 일본군 해군 사령부를 향해 기상 정보를 제공하였다. 항전 승리후 상해 주둔 미국 태평양 해군 사령부와 합작하였다.
2. 셔샨 티엔원타이(佘山天文臺)
광서 26년(1897년)에 송강 사산 산 정상에 창건되었다. 천문대의 원형 정상은 직경이 10m이고 1899년에 프랑스에서 제조한 구경 40mm의 두 개의 통으로 된 굴절(双筒折射) 망원경이 내장되었다. 원형 정상 동편에는 자오의실(子午仪室)이 있으며, 구경이 6mm의 중성의(中星仪)가 내장되어, 시간 관측용으로 사용하였다. 이 기상대를 세운 사람은 프랑스 예수회 수사 차이샹즈(蔡尚质)이었으며, 그는 태양과 항성 사진 관측을 하는데 능숙하였고, 사산 천문대의 기상 대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지도 하에 일본 신부인 투치아오빠치엔타이(土桥八千太)가 제일 처음으로 사산에서 당시 극동 최대의 천문 망원경으로 천문 사진을 찍었다. 제2대 기상 대장은 프랑스 신부인 거싀(葛式)이었고, 그는 중국 고대 계산학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견우성과 직녀성 두 쌍둥이 별을 재차 측량하여 학계에서 영예를 누렸다. 제3대 기상 대장은 프랑스 신부인 웨이알간(卫尔甘)이었으니 그는 일찍이 국제 경도 연합 측량에 참가하여 소행성의 보편적 摄动(태양계의 천계가 다른 행성의 인력으로 타원 궤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 규칙을 상당히 깊이 연구하였고, 월암성(月埯星)을 예보하였다. 제4대 기상 대장으로는 프랑스 신부인 마오누오쉬(茅若虚)가 임명되었다. 민국 20년(1931년)에 원래 설치된 쿤샨(崑山)의 자기 측량대가 샤샨(佘山)의 허리로 옮겨갔으며, 이 측량대는 프랑스 신부인 마더?(馬德?)가 책임을 졌다. 광서 32년초에 이 기상대에서는 프랑스어로 <<佘山天文年刊>>을 출판하였으니, 편집 주간은 차이샹즈(蔡尙質)였고, 민국 31년(1942년)에 이르러 정지되었으나 전부 21권이 출간되었다. 예수회 전교사가 상해에서 천문대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그들 자신이 말한 “과학을 이용하여 전교를 진행하자”라는 구호 이외에, 주로 중국 기상과 지구 물리 등의 정보 자료를 수집하여 외국이 중국을 침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서가회 천문대는 일찍이 국외의 식민 기구에 상을 주었으며, 상해의 프랑스 조계 당국은 일찍이 전교사 라오즈슌(劳积勳), 차이샹즈(蔡尚质) 등이 이름을 이용하여 도로 명을 정하고 상장과 상금을 주었다. 건국 이후, 시정부가 서가회와 사산 천문대를 접수, 관리하였으니, 전자는 현재 상해 기상국이 되었으며, 후자는 현재 중국 과학원 상해 사산 천문대가 되었다.
3. 진단 박물관(震旦 博物院)(현재 중국 과학원 곤충연구소)
프랑스 말로 “한뽀루박물원(韩伯禄博物院<La Musee Heude>)"이라고 하며, 예수회가 쉬지아후이 자연 박물관 창설자를 기념하기 위해서, 프랑스 예수회 전교사 한뽀루의 이름을 따라 명명하였다. 한뽀루는 여행가이자 사냥꾼이었다, 동치(同治) 7년에 상해에 박물관을 짓기 시작하여 그해 12년에 완공하였다. 이후 그의 20여년의 발자취가 중국과 이시아의 적지 않은 곳에 보급되었으며 동식물 표본도 대량 수집하였다. 그는 광서(光绪) 28년에 죽었으며 이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빠이용니엔(柏永年)이 연임되어, 그가 재직 25년에 江甦省과 安徽省 2개성을 출입하면서 대량의 식물과 조류 표본을 수집하여 안휘성과 상해 그리고 남경 식물지(志)에 수록. 편집해 놓았다. 민국(民国) 17년에 빠이용니엔이 죽은 후 프랑스 예수회 수사 쏭량차이(松梁才)가 그의 뒤를 이었다. 민국 20년 박물관을 진단 대학 옆에 새롭게 세워진 철근 콘크리트(钢骨水泥) 3층 건물로 옮겨, 이때부터 진단 박물원으로 칭했다. 원장은 쏭량차이로 기어다니는 동물과 어류 및 조류 표본을 책임졌다. 프랑스 신부 바이위헝(白于珩)은 식물학과 광물학 표본을 책임졌다. 프랑스 신부 졍삐알(郑璧爾)가 곤충류 표본을 책임졌다. 민국 23년 졍삐알은 원장직을 이어받았으며 민국 34년에 죽었다. 진단 박물원에는 중국과 아시아의 동식물 표본이 주로 전시되었고 그밖에도 중국의 문물과 옛날 화폐도 있었다. 민국 22년 초부터 대외로 개방되었다. 1951년, 진단 박물원은 시정부과 접수 관리하여 중국 과학원 상해 곤충연구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4. 쉬지아후이 장슈로우(徐家汇藏书楼)(현재 상해 도서관 장서루)
광서(光绪) 23년에 서가회 예수회 지부 건물 동쪽에 건립되어 2개 층을 서양식 서고로 만들었다. 청조 도광(道光) 27년(1847년)에 예수회 초대 총장인 난꺼루(南格禄)가 이미 장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 후에 이태리 예수회 챠오더리(晁德蒞)와 그의 조수 프랑스 신부 씨아밍레이(夏鸣雷)와 학생 마씨앙뽀(马相伯), 리원위(李问渔)등 모두가 장서 사업에 몰두하였다. 이후 중국 신부 마오번추안(茅本荃), 쉬윈씨(徐允希), 쟝위샨(张渔珊), 양웨이싀(杨维时)등이 장서 사업을 계속하였다. 1920년대 말, 쉬광치(徐光启)의 후예인 예수회 신부 셔종저(徐宗泽)이 장서루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장서루 사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장서루는 국어와 외국어 두 부문으로 나누어진다. 외국어 서적은 희랍어, 라틴어 등의 고서가 많았으며, 대략 총 8만권에 이른다; 중문서적은 사고전서의 분류에 따라 경(经), 사(史), 자(子), 집(集), 총(丛)서의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전체가 약 12만권이 되었다. 이밖에도 각 성(省), 부(府), 청(厅), 주(州), 현(县)志에 2,100여종을 수장하였으며, 심지어 항전시기에 도 고가의 지불을 마다하지 않고 도처에서 수집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후에 이르러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중단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지금까지 출판된 주요 잡지를 소장하였다. 꺼공젼(戈公振)의 <<즁구어 빠오쉬웨싀中国报学史)>>는 장서루에 소장된 잡지에 의거해 편집되었다. 1955년 후, 상해시 문화국이 관리함에 따라 상해 도서관 쉬지아후이 장슈로우로 명칭이 바뀌어진다. 1994년 3월 18일 , 쉬지아후이 장슈로우(현재는 상해 도서관 장서루임) 부분 건물이 시정부에의해 시정부건축보호 단위로 공표되었다.
5. 토산만회화관, 공장(土山湾绘畫馆, 工场)
1. 토산만 회화관
토산만은 쉬지아후이 씨난쟈오지아빵(西南肇家滨)연안에 위치한다. “고가빈을 깊게 팔 때 (빼았을 때), 진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고, 만에 쌓였다(浚肇家滨时, 堆泥成阜, 积在湾处)”에 유래해 명칭이 지어졌다. 청조 동치(同治)시기에 토산(土山)을 깎아 평평하게 했으나, 이곳에 토산만 이라는 지명을 사용 하지는 않았다. 청조 함풍(咸豊) 원년(1851년)에, 회화와 조각에 능숙했던 스페인 예수회 중국 보조수사(辅理修士) 판팅주오(范廷佐)가 쉬지아후이 로당(老堂) 서쪽의 공예미술학교를 경영했다. 範이 죽은 후, 그의 두 제자인 예수회 중국보조수사 陆省三(伯都, 베드로)와 刘德斋(必振,필립)가 계속해서 이 학교 경영을 맡았다. 동치 9년, 이 학교는 토산만 고아원내로 옮겨 토산만 회화관(속칭 도화간(图畵间)이라고 말함)을 설립한다. 이것이 상해 제일 처음 서양 화실이 된다. 중국 근대의 저명한 미술가 任伯年, 徐泳青, 周湘, 丁涑, 杭稚英, 张充仁, 徐宝庆 등이 이 학교 출신으로, 저명한 화가 徐悲鸿이 이 학교를 “중국 서양화의 요람”이라고 칭했다. 이 회화관은 유럽에서 서양 회화로 들여왔으며, 연필화, 수채화, 수탄화(水炭畵), 유화 등을 포함하여; 서양회화예술과 서양 조각예술에는 인상소조(人像塑造), 황양목조(黄杨木雕), 목각(木刻) 등을 포함하였다. 이외에도, 이곳은 석고 모형제작과 석고상 공예 기술을 들여와 유리에 꽃을 새기는(玻璃刻花) 공예에도 영향을 미쳤다.
2. 토산만 공장
토산만 고아원에는 각종 공장이 운영되었다. 주요한 부분으로는 목공부(속칭 목장간(木匠间이라 함)), 철물부(五金部)(속칭 铜匠间이라 함)가 있었다. 목공부는 성당용 가구 이외에, 홍목(红木)가구를 포함하여, 각종 중서(中西) 가구를 제작했다. 일을 하고 신경을 씀으로써 명성이 널리 알려져 국내외 시장의 호응이 매우 좋았다. 생산품을 국내외 시장에 많이 팔았다. 五金部는 원래 아연도금을 위주로 하는 작업장으로 성당 건물과 배수관을 수리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광서(光绪) 34년에 시작하여 성당용품을 제조하여 제대, 성상, 신부가 미사 할 때 사용하는 “성작, 성반”등의 성당용품을 제조 하였다. 그런 물품의 도금, 은도금(镀银), 니켈도금(镀镍), 광택(연마)(抛光)등 기술적인 면에서 가히 일류라고 할 수 있었으며, 국외에서도 또한 이름을 밝히지 않는 분이 예약 주문을 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이곳에서 주조된 성당용 큰 종은 일찍이 일본, 인도 태평양 군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도 팔려나갔다.
6. 토산만 고아 공예원(土山湾 孤儿 工艺院)
도광(道光) 27년 강남 지역이 홍수로 인한 피해를 입자,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송강 횡당에 고아원을 창설하여 수재민을 수용했다. 다음해에 고아원은 청포 차이지아완(蔡家湾)으로 옮겨졌다. 함풍(咸豊) 원년에 프랑스 선교사 씨아쉬엔더(夏显德)가 책임을 지고, 당시의 남녀 고아가 66명 중 여자아이는 푸동 탕무치아오 위잉탕(育嬰堂)으로 보내졌으며, 차이지아완에서는 단지 남자 아이만을 수용하였다. 고아원은 재봉, 목공, 인쇄 등 공장을 운영하였고, 고아들에게는 생소한 수공예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함풍(咸豊) 10년, 태평양 연합군이 칭푸(青浦)를 침공하자 고아원은 상해 동지아두(董家渡)로 옮겨졌다. 동치(同治) 3년에 다시 서가회 토산만으로 옮겨졌으며, 이때부터 토산만 고아원이라 칭했다. 1940년대 초에 토산만 인쇄소(印书馆), 회화관, 공장간(工場間)과 고아원이 대외에 토산만 고아 공예원으로 통칭되었다. 토산만 고아(속칭 “당건(堂囝)”이라 함)중 적지 않은 수가 부모가 있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이곳에 위탁되어 양육되었다. 일반적으로 7(8)세에서 11(12)세에 고아원에 들어와 수공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6년이 되면 이곳에 남거나 타지로 나가 일했다. 공예를 배우는 아이들은 교리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초등교육을 이수하였다. 원내에는 자운소학(慈云小学)이 있었다. 이 고아원의 내규는 엄격해 이곳에 들어온 후, 가장은 그들을 보호할 권리가 없었다. <<이위안꾸이티아오(艺院规条)>> 규정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의 관리하에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만일 이를 위반하면, 규칙에 의해 엄격히 책임을 져야하며, 눈물을 흘려서는 안되며, 천주가 내린 명령을 듣고 복종하며, 집안에서 자그마한 일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 고아원에 들어올 때, 보증인으로 하여금 “아이들이 실습한 공예품을 보내” 갖고 있게 하여, 만약 아이들이 도주하면, 보증인(保送人) 또는 중간 보증인(中證人)이 돈으로 배상해야 한다.(광서 연간에 매월 돈을 1,500원으로 제한함) 수공예를 배운 사람은 공인이 되었으나, 아주 월급이 적었고, 교회에서는 자주 성모원 육영당의 “당건”을 배우자로 선정해 주어 결혼 후 쟈오지아빵(肇嘉滨)에 위치한 고아원에 머물 수 있게 하였다. 남자는 토산만 공장에서 일하였고, 여자는 성모원 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괴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많은 사람이 아이들 낳으면 성당의 고아원으로 보냈다. 해방 전, 이곳의 적지 않은 수의 극빈자들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가 고아원 출신이었다. 고아가 만약 요절을 하면, 고아원에서는 얇은 관을 하나 내주어, “소성지(小圣地)”라 칭하는 삼각형 모양의 가까운 묘지에 매장하였다. 이 작은 관은 고아들이 목장(木匠)을 배울 때 스스로 만든 것으로 폐품을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토산만 고아 공예원의 월급은 매우 낮아, 공장 직원들의 생계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여러 번 집단 파업을 통해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민국 30년 춘절(春节)이후, 고아원에서는 종업원을 대량으로 해고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종업원들은 파업으로 항의하였다. 고아원 원장 프랑스 신부 뤼따오우(呂道茂)는 양징빵(洋泾浜) 천주당 재무담당 신부 완알띠엔(万爾典)을 통해 일본 헌병대에 보고했다. 종업원 대표 싀지아핑(施家平)과 양씨아오마오(杨小毛)등을 잡아들임으로써 파업은 진압되었다. 해방후, 고아를 파견하여 출로를 만들고 공인을 타당하게 안배하여 토산만의 200여 고아와 공인들은 인민정부의 친절한 보살핌을 받았다. 1953년, 고아원은 상해시 민정국 관리 하에 교구 추천은 통해 董貴民을 원장으로 선임했다. 토산만 공장간 중 토산만 인쇄소(印书馆)와 발행소를 포함하여 일부분은 여전히 남아있다. 1956년 공사합병의 조류 속에 각 공장은 관련된 업무에 귀속된다. 1960년 전후로 하여 폐쇄가 선포되었다.
7. 广播电臺(방송사)
(1). (黄钟播音社)( 황종 라디오 방송사)
민국(民国) 30년 9월에 성립되었으며, 창립인사는 상해 주교인 후이지량(惠济良)으로 선교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초기 서가회 성심 신문사 건물에 위치하였다. 후에 震旦大學으로 이전했다. 초기 사장은 王仁生이었다.(진단 부속 교도주임) 황종 라디오 방송사는 상해 프랑스 방송국을 빌려(항전 승리후 명칭은 국태 방송국(国泰电臺)으로 바꿈) 명칭을 FFZ로 주파수는 1,400MHz로 하여 시간은 주말 저녁으로, 초기에는 2주에 한번 방송 했으나, 나중에는 매주 한 번 방송했다. 프로그램 역시 초기에는 45분으로 시작하여 후에 2시간 반으로 늘어났다. 프로그램은 종교지식강좌, 교리강좌, 천주교 신문, 음악 및 의학 위생 강좌 등으로 편성되었다. 주요 강사는 王仁生, 蔡石方, 吴应枫(이들은 모두 예수회소속 중국 신부였다.), 沈造新, 张维屏, 丁宗杰(이들은 모두 교구 신부였다.) 吴云瑞, 주위량(周渭良)(이들은 모두 진단대학교의 교수였다.)이다. 후에 청년강좌를 개설해 진단대학 학생들인 王振义, 顾梅生 등이 담당하였다. 민국 37년초에, 황종 라디오 방송사(또 상해 천주교 라디오 방송사, 혹은 상해 공교 방송 프로그램(公教广播节目이라고도 함)는 상해 방송국(电臺播送)으로 바뀌어 XORA, 주파수는 900MHz로 하여, 프로는 가정 완회(晚会)와 “매주 완회(星期晚会)”로 명칭을 바꾸어 내용은 옛것을 조명하였다. 상해 해방전야에 방송이 중단되었다.
2. 기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其他播音节目)
(1) 영어 방송 프로그램(英语广播节目)(The Catholic Hour) 민국(民国) 26년, 상해 주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예수회 수사가 주관했으며, 위치는 포마청(跑马厅)로(현재 우셩루(武胜路) 445호) 였다. 상해주재 미국 방송국(电臺)을 빌려 XMHA라고 칭하였고, 2주에 한번 19시 30분 ~ 20시, 매 2주마다 한번 방송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반발한 후 이 방송은 폐지되었고, 상해 주교 후이지량과의 교섭을 통해, 상해 프랑스 방송국 방송국으로 고쳐져, 매주 19시 ~ 19시 30분에 방송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방송국으로 회복되어 매주일 한번으로 방송되었다. 이외에도, 매일 저녁 시간에 상해 방송국(XORA) 프로가 방송됐다.
(2) 프랑스 방송 프로그램(广播节目)(Le Radio Catholique) 민국 32년 4월에 개국되어, 상해 주재 프랑스 방송국의 라디오 방송국을 빌려, 매주 21시 ~ 21시 30분에 주요 강의는 진단대학 프랑스 신부 치아오티엔아이(乔典爱), 푸쳥리에(傅承烈) 등이 맡았다.
(3) 쥔왕탕 주일 미사 중계 방송 프로그램(郡王堂 主日 唱经 弥撒 转播 节目) 민국 27년 12월 개국을 시작으로 매주 11시 푸싀루(蒲石路)(현재 창르어루(长樂路)) 쥔왕탕에서 거행된 상해 주재 외국 신자들의 미사를 중계 방송했다.
8. 쉬지아후이 셩무위안 위잉탕과 요우즤위안(徐家汇 圣母院 育嬰堂 与 幼稚园)
서가회 성모원 育嬰堂(보육원)은 동치(同治) 8년에 증망회(拯亡会) 수녀에 의해 쟈오지아빵(肇嘉滨) 동쪽 연안(현재 차오씨베이루(漕磎北路) 201호)에 세웠졌다. 일찍이 함풍(咸豊) 원년에 쉬지아후이 왕지아탕(王家堂) 성모원에서 이미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함풍 5년에 씨엔탕후이(献堂会)가 창설된 후, 중국 헌당회 수녀가 관리하였다. 동치(同治) 6년, 프랑스 증망회 수녀가 상해에 들어온 후, 성모원과 보육원의 운영권을 취득하여 헌당회는 여기에 종속되었다. 보육원의 남자 아이는 6 ~ 7세가 되면 토산만 고아원에 보내졌고, 여자 아이는 바로 유치원에 입학했다. 민국 2년에 출판된 <<상해 서가회 성모원 보육원 개황(概况>>에 따르면, “통계적으로 매년 4000명 좌우의 아이들 ...... 받아들인 아이가 비록 많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구호사업을 그치지 않았으며, 일찍이 강보에 싸여 들어와 2(3)세에 이른 유아도 120명에 이르고 있다..... . 4(5)세에서부터 15세 전후와 15세 이상의 아이는 80명으로 대략 55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다.” 민국 19년의 통계( <<徐汇记略>>에 따르면, 창립 초기에 모두 11,464명의 영아를 받았다. <<圣心报>>에 근거한 민국 33년 5월 통계에는 이미 “8만명 이하는 아니다.”라고 나온다. “12월 8일 송호(淞滬)전쟁(1932년 제1차 상해 사변) 후, 매일 보육원으로 들어오는 영아의 숫자가 적어도 10명이나 되며, 많게는 30여명이나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버려지는 아이가 많아짐에 따라 관리가 갈수록 허술해지고 환경의 열악함으로 인 해 영아 사망률은 90% 이상에 이른다. 수녀들은 영아를 거두어들인 후에, 즉시 세례를 주고 그들이 요절하기를 기다리며 즉시, “천국을 훔지는 것”처럼 보여졌다. 이 성당은 오히려 매년 영아에게 세례를 주는 수를 로마 “성영회(圣嬰会)”에 보고하고, 이것에 근거하여 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연합국 선후구제총서(善后救济总署)와 연합국 국제 아동 急救 工作業가 일찍이 보육원에 대량의 물자를 원조해주었으나, 이러한 구호물자는 단지 극소수의 영아나 고아 여자 아이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뿐이었다. 신(新)중국 성립이후, 상해시 민정국에서 보육원을 접수 관리하자, 보육조건을 개선했으며, 병이든 영아들을 구제했다. 또한 군중들의 갈망을 근거로 사망한 영아 묘지 “小圣地” 안에서 많은 수의 유해를 찾아내 “만영묘(万嬰墓)”를 세웠다.
9. 신보육당 (新普育堂)
청조 말기에, 상해의 옛 시가지 大南门 외곽의 보육당에서는 장애자와 가난하고 병든 남녀를 거두어 보호하였다. 이것을 속칭 “지이오화빙위안(叫化病院)”이라고 불렀다. 민국 원년에 시의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추천된 천주교인 루빠이홍(陸伯鸿)이 확장 건설에 참여하여, 陸家滨 부근 普安亭 옛날 벽지(辟地) 100여무(亩)에 보육원을 세웠다. 건축비용은 대부분 지방 관청에서 지급되었으며, 나머지는 사회 기금으로 충당하였다. 사용된 벽돌은 그해 상해 성벽 철거 시 나온 벽돌이었다, 민국 2년 봄에 2층 건물 5개동을 준공했다. 이후 루빠이홍은 지속적으로 확장 건설하여, 그 건물이 1949년에는 20여개 동의 아파트가 되었다. 보육원의 업무는 상해 공교 진행회로부터 위탁된 프랑스 仁愛會 수녀가 관리를 했다. 그 곳은 남녀 극빈자병원(贫病院), 남녀양로원(老人院), 남녀장애인병원(残疾院), 남녀아동수용소(贫儿院), 남녀정신병원(疯人院)과 여자 기숙 양성소(女寄养所), 유아원(育嬰院), 전염병원(传染病院), 진료소(施诊所), 또한 부설 소학교, 습예소(习艺所)등으로 나뉘어져있다. 규정된 수용인원은 1,500명 정도였다. 창립 첫해에는 6,021명을 수용하였으나 그중 1,258명이 사망하였다. 민국 8년 여름, 상해에 콜레라(霍乱)가 유행하자 그 곳에는 적십자회로부터 보내진 336명의 콜레라 환자를 접수하였으며, 116명이 사망했다. 교회 통계에 따르며, 처음 이 보육당을 열어 민국 26년에 이르기까지 수용인원은 노인, 어린아이, 가난한 사람, 환자 모두를 합쳐 102,000여명이나 되었고, 진료소는 219만 4천여 차례나 약을 공급하였다. 신 보육당의 경상 경비는 약 10만여원 정도를 필요로 했으며, 주로 각 지방 정부나 중국과해외의 각계의 원조에 의지하였다. 루빠이홍은 항상 스스로 임시로 자금을 치입하였다. 민국 26년 말, 루빠이홍이 암살당한 후 경비상황이 악화되자, 교우들로 하여금 모금을 하여 어렵게 유지해 나갔다. 민국 34년 항전 승리 후, 중국 천주교 복리회는 일찍이 연합국과 미국에 전달하던 구호물자를 신 보육당으로 바꿔 전달했다. 신 보육당은 경비 부족과 관리 부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수녀들의 “영혼을 구한다(救靈魂)”는 임무로 인해 영아 사망률은 90% 이상에 이르렀다. 해방 초에, 상해시 민정국이 신 보육당을 접수 관리하면서, 현재 상해시 아동 복지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普育西路 105호에 위치하고 있다.
10. 양로원(安老院)
광서(光绪) 32년 프랑스 안로회(安老会) 수녀가 창설하였으며, 난싀추 지창루지에(南市區 机厂路街) 39호에 위치한다. 초기에는 동지아두(董家渡) 천주당 옆에 세워졌으며 27명의 홀로된 할머니들을 수용하였다. 지창루에 양로원이 세워진 첫 해에는 250명의 남녀노인을 수용했으며 매년 300여명 정도가 머물렀다. 민국 18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3,128명이 수용되었으며, 사망자수는 2,240명이었고 그중에 영세입교자는 1,685명이었다. 이 양로원의 경제적인 재원은 주로 사회 각계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상해해방 전야에, 수용인원은 350 ~ 400명에 달했다. 양로원에는 28명의 수녀가 있었으며 대부분이 방인 수녀였고 소수의 외국국적의 수녀가 있었다. 원장 수녀는 프랑스인인 마이싸이알(麦赛尔) (Marie de St. Eugenie, 일명 구걸니(欧杰妮)라고도 번역됨) 수녀였다. 해방 후, 마이싸이알 등은 원내의 노인들의 민주적인 권리를 제한하여 그들에게 정치 학습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민대표선거를 위반하였으며, 1953년 12월 29일 상해시 구제 사업 지부가 양로원을 접수 관리하게 되자 마이싸이알 등은 법에 의해 추방을 당했다.
11. 제영 구제원(济靈救济院)
민국 25년 루빠이홍이 지아베이 빠즈치아오 무신이위안(闸北 八字桥 母心医院)안에 창설하여, 모우회(母佑会) 수녀에게 관리를 위탁하였으며, 가난으로 고통 받고 능력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을 전문적으로 수용하였다. 다음 해에 항일 전쟁이 일어나, 의원은 포화에 재난을 당하였다, 이탈리아 자유회(慈幼会)의 수사가 양슈푸루(杨树浦路) 2219호에 다시 만들어 계속해서 모우회 수녀의 주관으로 운영되었다. 항일 전쟁 승리 후, 원사를 확장하였다. 민국 35년에 학생이 180명이나 되었고, 내부에는 고아가 40명이 있었다. 원내에서는 먹을 것과 살 곳을 제공해 주었고 공업계 학교를 세워 직업교육을 하였다. 1950년 원장은 이탈리아 국적의 수녀 푸즤런(傅智仁)이었고, 그 밖에 외국 국적의 수녀가 8명이었으며, 중국 수녀가 8명, 학생이 219명이었다. 그중에 교우 학생은 42명이었다. 오래되지 않아 사업이 중단되었다.
12. 항전시기 교회가 운영한 난민 수용소와 상이군인 의원
(1). 난싀 난민취(南市 難民區) 8월 13일 사변 후, 프랑스 전교사 라오지아쥐(饶家驹)는 상해 국제 적십자회 난민 구제 위원회 주석의 신분으로 영. 불 등 상해 주재 외교 당국과 중.일 교전 국가 쌍방의 동의를 얻어 南市에 안전구역을 정해 난민 수용소를 열었다. 그곳은 “라오지아쥐취(饶家驹区)”(La Zone Jacquinot)로 불려졌다. 전 구역은 팡빵루(方浜路)를 경계로 동, 서, 북이 민구오루(民国路)(현재는 人民路임)에 이르렀으며 모양은 반달형을 이루었다. 구역 안에는 거주민과 난민을 합쳐 약 25만명이 살았으며, 그중 지아베이(闸北), 양슈푸(杨树浦), 홍코우(虹口)와 호서(滬西) 일대로부터 온 난민이 약 10만 명이었다. 중국 측은 이곳에 주둔군과 방위시설을 설치하지 않았고 일본 측도 이곳에는 폭격하지 않았다. 쌍방이 이곳에서 모두 어떠한 군사적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9일에 南市 난민지역이 성립되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적십자회 삼자 대표가 협의안대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중국 측 대표 상해시장 俞鸿鈞, 일본 측 대표 상해 주재 총영사와 적십자 대표 라오지이쥐(饶家驹). 이 일이 있기 전에, 상해 주재 일본 측 대표 총영사는 일찍이 일본 군대가 진샨웨이(金山卫)로 상륙한 다음날인 11월 5일에 饒를 만나 두 차례에 걸쳐 영문 서신을 교환하였다. 요는 그것을 “일단 중국군대가 南市에서 물러나고 일본군이 이 지구를 점령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접수를 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외에도 饒가 일본 측에 제의한 요구사항은, 그가 이끄는 영도하는 위원회가 와서 이 구역을 관리함으로써 “일본이 스스로 이미 협조가 소용없고 이 안전구에서 관리를 끝마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건의를 하였다. 이것에 대해 난민구역은 처음부터 즉시 일본 측의 “찬양(赞赏)”을 얻어냈다. 전 구역은 9개의 소구역으로 나뉘어져, 100개가 넘는 난민 수용소가 설립되었으며, 성황묘(城隍墓), 구무지(九亩地), 전보국(电报局), 구화회(救火会), 광복사(广福寺) 등에 주로 분포하였다. 약 2만 명의 난민이 수용되었고, 나머지는 대개 공공장소나, 민가 혹은 대로변에 분산되어 거주하였다. 구역 내의 치안과 위생 상황이 매우 열악하여 여름에는 콜레라, 천연두(天花), 디프테리아(白喉) 등의 전염병이 유행했으며, 겨울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기아와 한파에 죽어갔다. 교회에서는 수사와 수녀를 파견하여 饒를 도와 각종 사업관리에 종사하도록 했다. 일부 주민의 물과 전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소를 열어 진단하고 약을 처방해주었으며 산부인과를 설립하여 무료로 출산을 도왔다. 진단대학 교우 의사들과 간호사, 학교 학생들, 심지어 수녀들에 이르기까지 의료 업무에 책임을 맡았다. 이들은 전구역의 거주민과 난민에게 방역을 하고 우두 접종을 실시하였다; 그밖에 이들은 난민 아동 소학교를 세웠으나 후에 일본 측의 거부로 운영이 중단되었다; 장애 양로원을 설립하여 장애노인 130여명을 수용하였다. 동시에 각종 공장을 설립하여 생산을 통해 자생의 길을 마련하였으나, 후에 원료가 없어 많은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였다. 난민구역에서는 매일 난민에게 향해 죽 2끼(頓)를 제공했고, 거주민에 대해서는 賑恤米를 발급하였다(饒는 일본 측의 동의를 거처 안남(安南), 태국(暹罗)에서 진휼미를 운반해 들여왔다.) 이 사업은 민국28년 10월에 중단되었다. 난민구역의 주요 경비는 사회 각계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국민 정부는 일차적으로 15만원을 지급했으며, 상해 주재 일본 육, 해군 사령들이 각각 1만 엔을 원조했다. 민국 27년 5월에 饒家駒는 미국에 가서 약 70만 달러를 모금해 왔다. 민국 28년 2 ~ 10월까지 매월 미국산 밀(소맥) 600포가 운반되어왔다. 민국 29년 6월 중순 饒는 상해를 떠나 프랑스로 가서 전쟁 중 구제 사업을 한 후, 프랑스와 일본 쌍방이 먼저 결정한 규정에 의거하여, 南市 難民區에서의 활동을 6월 말에 종결하였다. 2년 반 동안 난민 구역에서 천주교회는 각종 기회를 이용하여 전교활동을 하였으며, 일찍이 성황묘에 위치한 한곳의 진료소(施诊所)에서 어떤 날은 하루 수십 명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다.
(2). 진단 대학 난민소
8. 13 사변 후 오래지 않아, 프랑스 선교사 饶家驹는 중국과 외국 인사의 도움을 받아 진단대학 난민소를 창설하여 마쓰난루(马斯南路) 난민소라 칭했다. 수용난민은 3,000여명이나 되었다. 진단 부속 중학교 소년병(童子军)은 20여명이었고, 남녀 20여명이 질서를 유지하였다. 또한 각각 관리조직을 나누어 직원을 고용하였다(그중에는 중국공산당 지하당원도 있었다). 창립 초기에 일제히 콜레라, 이질 등의 역병과 어린아이에게는 홍역이 유행하였다; 후에 천주교회에서는 병원, 진료소(施诊所), 약방, 임산 병원, 산부인과를 각각 1개씩 설치하였으며, 진단 의학원 교수와 학생, 광자(广慈) 의원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仁爱会 수녀들이 의료 위생 사업에 책임을 맡았다. 교회는 난민을 수용하는 동시에 선교활동을 했다. 첫 해에 병세가 위급한 난민 23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난민소는 조계 당국의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으며, 상해 공교 진행회도 또한 교우들의 모금 운동을 진행했으며, 부녀 교우들은 난민을 위해 솜옷을 만들어 주었다. 민국 28년 2월, 난민을 분산하기 시작하여 7월 29일에 이 일을 마쳤다. 난민수용소는 5만여 명에 이르는 난민을 수용했다. 중국 공산당 지하당원은 난민에게 애국주의 교육을 시키고 항일 의식을 일으켜 적지 않은 난민을 신서군(新西军)에 참가해 항일 대열에 서게 하였다.
(3) 쉬지아후이 난민수오(徐家匯 難民所)
8. 13사변 후, 홍코우(虹口,) 지아베이(閘北), 양슈푸(楊樹浦), 우쏭(吴淞) 일대의 난민 2,000여명이 쉬지아후이 천주당 마당에 운집하였으며, 그 밖의 수천 명의 난민이 쉬지아후이젼 (鎭) 거리에 노숙했다. 같은 해 8월 15일에 교회는 쉬지아후이 난민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서회 중학 체육관, 빈 기숙사, 복도 등을 이용하여 난민 4,000여명, 서회 사범학교, 성모원, 요셉원, 토산만 고아원 등에 1,000여명을 수용하였으며, 그 후에 총 수용인원은 1만 명을 초과하였다. 난민에게 매일 두 끼의 식사가 지급됐다. 양식은 상해 난민 구제 위원회에서 공급했으며 매월 3만 원 이상의 구제비용이 들었으니 이에 드는 비용은 사회 원조를 통해 마련되었다. 난민소에는 유행성 급성 장염, 이질, 결막염, 피부병 등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유행성 질환을 위한 병원 내에 격리의원이 설치되었고 증망회 수녀가 책임을 맡았다; 그밖에 의원이 2곳, 중환자 병동 1개와 진료소 3곳에서 있었으며, 그곳에는 중의,서양의 의사와 간호사 10여명이 균등하게 담당 업무를 수행하였다. 매월 약값으로 3,000원이 지출되었다. 민국 29년 초 난민 400여명은 고르게 임종 전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교회는 또한 난민 아동 학교 네 곳을 열었다. 학생수가 2,000명을 넘어섰으며 성모회 회원과 진수생이 문화강좌와 교의(敎義)를 강의했으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난민소 내에는 베를 짜고, 양말을 짓고 자수를 생산하는 공장 등이 있었다. 서회 중학교 교장 쟝지아슈(张家树) 신부가 난민 수용소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4) 유태인 난민 수용소
민국 28년 초, 수천여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상해로 난을 피해 모여들었다. 상해 주교 惠濟良은 홍코우 천주당에 수용소를 설립하여 유태인 난민을 수용하였다. 이 성당은 원래 유대인 교인 300여명이 있어, 유대인 “당구(堂口)”가 성립되어, 주일에 독일 국적 예수회 수사 레이(雷) 신부가 독일어로 강론을 하였다. 난민소는 잠자리를(住宿) 제공하는 일 이외에 직업을 소개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또한 영어 보충 학습반도 열었으며, 상해에서 구직을 위한 편리를 봐주었다. 민국 29년 여름에 난민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5. 진단 대학 부상병 의원
민국 21년 1.28 사변 후, 진단 대학 의학원 宋国宾, 许日东, 沈永康 등의 선생들이 이 학교의 대(大예)배당과 서(西)기숙사에서 제28 부상병 의원을 창설하여, 중국 부상병 300여명을 수용하여 치료하였다. 이밖에 안당(安当) 의원 내에 제18 부상병 의원을 설립하여, 진단 대학교수들의 책임 하에 부상병 100여명을 수용. 치료하였으며, 민국 26년 8. 13 사변 때, 대세계(大世界) 놀이동산 앞에서 폭탄이 폭발하는 참극이 발생하여, 광자의원에서 부상자 450명을 수용. 치료 하였다. 동시에 진단대학 예배당, 새로운 교사, 광자의원(중상을 당한 사람을 전문적으로 수용함)과 안당 의원 등이 부상자 전문의원을 설치했다. 침상은 모두 500개정도 되었다. 이 병원은 중국 적십자회에 속해 제3구호 의원으로 불리웠다. 원장은 진단대학의 교우 孙逵方과 吴云瑞 의사가 맡았다. 8개월간 수용되어 치료를 받은 부상자 수는 1,424명이나 되었다. 병원 전체로 의사가 30명으로 의무 복무비나 월급을 받지 않았다. 경비는 중국 적십자회가 매월 1,000원을 지급했으며 후에 경비가 부족하여 사회에 모금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교회에서 수녀가 30명 파견돼 일하면서 동시에 선교활동을 했다. 세례를 권고 받아 입교한 군인(官兵)은 68명이었다.
부상병 의원과 난민 수용소 수용 인원 통계 (1932년 1월 1937년 8월 수용 부상병 인원 통계표)
(1937년 8월 ~ 1940년 6월 수용 난민 인원 통계표)
13. 기타 공익사업
1. 선목원(善牧院)
민국 22년 프랑스 국적 善牧會 수녀가 쉬지아후이(현재 국제 평화 부여 유아 보건원 소재지임)에서 창설했다. 창녀와 기생 등 윤락업에 종사하는 부녀자를 전문적으로 모아 의식주를 제공했으며 경비는 국내외 인사의 모금에 의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국 선후 구제 총서는 일찍이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민국 36년 규모가 확장되어 원내 전체 수용 인원이 112명에 달했다. 그중에 60명은 그 해에 수용된 인원이었다. 이 선목원은 12세 이하의 여자 아이는 수용하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해부터 소수의 윤락가 7 ~ 8세 난민 아동을 수용하였다. 내부에 있는 소성당과 수녀원에는 외국인 수녀가 15명이나 되었고 평상시에 부녀와 아동들에게 종교와 글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동시에 봉제, 자수, 음악, 미술 등 공예기술을 전수하였다. 해방 후 시정부가 인수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2. 일심교양원(一心教养院)
민국 14년 상해 공교 진행회 회장 陸伯鴻이 말미암아 난싀(南市) 신푸위탕루(新普育堂路)에 건축비 30여만 원을 들여 창설했다. 빈곤한 아이들 1,000여명을 수용하여 이태리 자유회(慈幼会) 선교사에게 관리를 위탁하였다. 북벌전쟁 기간동안 교사(校舍)는 일찍이 군대가 점령하여 사용했다. 항전 전에 복교되어 일심 소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후에 초중부를 증설하였다. 주소는 국화로(国货路) 239호이다. 1951년 상해시 인민 구제 분회(分會)가 접수 관리하였고, 1953년에 학교는 여러 개의 학교가 합병하여 명칭을 국화로 소학으로 바꾸었다.
3. 공동묘지 식언 공묘(息焉公墓) 민국 20년에 馬相伯, 朱孔嘉 등이 발기하여 상해시 루오비에건루(羅别根路)(현재 하미루(哈密路)임)에 창설됐으며, 교회는 교우 何理中에게 관리를 위탁했다. 후에 그 제자인 何锐中이 그 일을 이어받았다. 묘원 내에는 배점정(拜占庭)식의 교당이 한 개 있었는데 명칭은 성모 승천당이었다. 1962년 시정부 민정부가 접수 관리하였다. 시정부는 30무(亩)의 땅을 교회에 주어 차오빠오루(漕宝路) 5號橋에 공동묘지를 세웠다. “문화 대혁명”중 묘지가 훼손되었으나 성당 건축물은 아직은 파괴되지 않았다.
식안 공묘(息安 公墓) 다른 말로 5號橋 공묘라고도 한다. 1962년 7월 상해 교구가 차오빠오루(漕宝路) 5호교에 공묘를 설치해, 陸伯鴻은 남문밖 셩무탕(圣墓堂) 예수회 묘지, 총칭난로(重庆南路) 견사회(遣使会, 빈첸시오회)와 런아이후이(仁爱会) 묘지, 쉬지아후이 성모원, 셩이위안(圣衣院) 묘지, 일리휘씨앙(日辉港) 묘지, 칭푸 쥬씨앙후이(诸巷会) 등의 묘지를 이곳으로 이동시켰다. 묘지 내 돌 십자가는 쉬광치 묘지에서 가져왔다. 상해 교구 쟝싀량(张士琅) 대리 주교가 돌아가신 후 이곳에 매장됐다. 교구는 일찍이 공묘 관리조를 두어, 리쓰더(李思德) 신부로 하여금 책임을 지게 하였고, 교우 리원더(李文德)으로 하여금 관리 위탁했다. “문화 대혁명”기간 중, 묘지가 파괴되었다.
4. 헝탕 시안 구후이탕(横塘 息安 骨灰堂<납골당>)
이 납골당은 상해 교구가 교우 사망자를 위해 마련한 납골함을 모셔두는 장소이다. 1986년 5월 건설되어 개방되었으며 횡당 천주당 안에 위치한다. 횡당 천주당은 동치(同治) 12년에 세워졌으며, 위치는 후쏭공루(滬松公路) 챠따이징(查袋泾) 정류장 옆이다. 1953년d[ 종교 활동이 중단되자 이 곳에서 운영하던 유아원을 후에 송강현 위생 방역소에서 흡혈충병 치료 의원과 바꾸어 사용했다. 1985년 교회가 이 곳을 회수하였다. 후에 또한 당시의 2층짜리 아파트 2동을 수용해 息安 납골당으로 개조했다. “시안탕(息安堂)” 옆에는 성당이 있어 거기에서 망자를 위해 직접 기도할 수 있다. 1986년 5월 29일 개방 의식을 거행했다. 처음으로 이미 고인이 된 상해 교구의 사제들과 수녀들의 납골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성당이 개방된 후 모든 분들이 균등하게 안치되었고 예약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1994년 그 자리에 5층으로 증축하여, 28,000개에 이르는 납골함이 안치되었다. 이 성당은 징안취(靜安區) 천주교 애국회에 관리가 위탁되었다. 개방 이래 전국 20여개 성과 시 및 홍콩, 마카오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참관했으며 또한 미국, 프랑스, 독일 등 17개 국가에서 온 방문자를 모두 합쳐 17만 명에 이른다. 그 중에는 성직자들, 교우들 그리고 사회 각계 인사도 포함된다.
5. 난쟝 안라오위안(南张 安老院<양로원>)
이 양로원은 상해 교구에서 운영하며, 남장 천주당은 민항취(闵行区) 신주앙(莘庄) 밍씽춘(明星村)에 위치하며 광서(光绪) 2년에 세워졌다. 다른 명칭은 남전 천주당이라고도 한다. 1988년에 상해 교구의 진루씨엔 주교의 제의 하에 양로원을 열기로 결정했다. 일찍이 각 교구 성당에서 복무했던 나이가 많고 체력이 약하며 생활면에서나 곤란한 노인 동정녀를 모셨다. 1989년 10월에 준공했다. 그동안 지출된 액수는 인민폐로 20여만 원에 이른다. 이 양로원에는 40개의 침상이 있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진루씨엔 주교 주례로 개막 전례가 개최되었다. 남장 천주당도 11일에 복원되었다. 이 성당은 “대 성요셉(大圣若瑟<약슬>)”을 주보로 받들어 양로원안의 노인들로 하여금 대 성요셉을 받들어 모시면서 만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했다. 편안한 죽음을 구하였기에 이런 까닭으로 일명 샨종탕(善终堂)이라고도 불렀다. 상해 교구 수녀원 총원장 션지아빠오(沈嘉宝)가 이 양로원의 원장을 겸했다. 양로원 내에는 노인들의 평균 연령은 80세 이상이었다. 그들은 서로 화목하고 서로 도왔다. 이 양로원 직원의 근무 태도는 밖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적지 않은 국내외 천주교 인사가 양로원에 물건이나 돈을 기부했다. 1992년 양로원은 다시 한 층에 10개 방을 갖춰 확장 건설하였다.
제 5 장 회의 및 교안(会议 和 教案)
제 1 절 회의
1. 지아띵 후이이(嘉定 会议)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된 초기에 외국 선교사들은 교리 중 라틴어로 된 고유명사의 번역에 어려움을 느껴 의견이 통일되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Deus”의 번역은 요컨대 “天”이나 “上帝”로 하였다. 혹은 음역하여 “도우스(陡斯)”로 번역하기도 했다. 사람마다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라 의견이 분분했다. 명조 천계(天启) 7년 12월(1628년 1월)에 선교사가 지아띵(嘉定)에서 집회를 소집하여, 상술한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지아띵(嘉定)지역의 천주교는 비교적 일찍 들어와 당시에 11명의 선교사 양마누오(阳玛諾), 까오이즤(高一志), 롱화민(龍华民), 진니거(金尼阁), 삐팡지(毕方济), 구오쥐징(郭居精), 이마누오(李玛諾), 정더쟈오(曾德昭), 페이지관(费奇观), 아이루누오(艺儒略)(이상은 모두 내지에 있었던 예수회 수사들이다.)가 회의에 참석하였다. 내륙 예수회 마카오 지도자 파이매루(巴尔迈祿)(Andre Palmeiro)이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견해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한 달의 토론을 거쳤으나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참가자가 서로 존중 하긴 했으나, 또한 각자의 주장 또한 굽히지 않아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냈다. 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중국 천주교 “삼대 기둥(三大柱石)”이라고 칭해졌던 쉬광치, 양팅쥔(杨廷筠), 리즤자오(李之澡)와 지아띵(嘉定) 첫 번째 천주교인인 쑨위안화(孙元化)가 회의에 참석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2. 중국 동부 지구 주교회의(동지아두(董家渡) 주교회의)
청조 도광(道光) 28년 4월(1848년 5월), 로마 전신부(传信部)는 중국 교회과 관련해 특별 회의 중에 있었다. 이에 전신부는 중국의 종교 대목(代牧)(즉 주교) 전체 회의의 소집 계획을 통과시켰다. 장소는 마카오였으나 교통이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취소되었다. 후에 남경교구 서리(暑理) 주교 쟈오팡지(赵方济)가 제의하여 상해에서 제1차 중국 동부지구 주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함풍(咸豊) 원년 9월 15일에서 1월 11일(1851년 11월 7일 ~ 12월 3일)에 상해 동지아두 주교 공서(公暑)에서 거행되었다. 그런 이유로 명칭을 동지아두 주교회의라고 불렀다. 몽고 교황청 주교 겸 북경 서리 주교 멍젼셩(孟振生)(프랑스 국적의 빈첸시오회(遣使会) 선교사)등 6명의 외국인 주교가 회의에 출석하였다. 회의는 중국에서 성립된 성통제(圣统制) 문제와 대(總)주교 선거, 중국인 성직자 배양, 교구내의 교회 재산 배분 문제 등과 관련하여 토론이 이루어졌다. 종교 전례와 관련된 방면의 중대한 문제도 토론되었다. 대주교 선거권에 대해서는 외국인 사제만이 피선거권이 있다고 결정됐다. 주교 선거에 관련해서는 중국. 외국 사제에게 고르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었으나 차별이 있었다. 외국 국적 사제는 2/3의 득표로도 당선이 되었고, 중국 사제의 경우에는 2/3 득표수 안에 반드시 전체 외국인 사제의 표가 들어있어야 비로소 당선이 되었다. 동지아두 주교회의는 대주교 선거에 중. 외 사제를 배려했으나 실제로 주교의 지위는 평등하지 못했다. 중국 교회의 주권이 외국인에 의해 좌지우지됐으며 중국 천주교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3. 중화(中华) 전국 주교 공회의(公會议)
일명 상해 공회의(公会议)라고 불린다. 민국 13년(1924년) 5월 15일 ~ 6월 12일에 상해에서 거행되었다. 로마 교황청 초대 주중 대표 대주교 깡헝이(刚恒毅)가 교황 비오 11세와 이번 회의의 의장의 명의로 회의를 소집했다. 그것은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주교 회의였다. 중국에 천주교가 전파된 수백 년의 경험과 교훈을 바탕으로, 중국 선교에 있어서 적절한 방법과 지름길을 찾고 이에 맞는 법칙과 조례를 제정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선교사가 적절하게 선교활동을 하여 중국지역에서 천주교를 더욱 공고히 하며 발전시키고자 했다. 회의는 양징빵(洋泾浜) 천주당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주교, 감목(监牧) 48명이 출석하였다. 그 중 중국인은 겨우 2명이었다. 각 수도회의 성의 회장(省会长)과 회장 30여명으로 대다수가 외국인이었다. 천주교의 교회법(敎律) 규정에 따르면, 전체 주교와 감목은 표결권이 있었다. 나머지 회의 참가자들은 표결권이 없었다. 회의에서는 <<중국 천주교 현행 법칙>>등의 문건을 제정하였다. 회의 의안은 로마 교황의 비준을 거쳐 다시 대표자들로 하여금 전체 주교에게 통지되었으며, 민국 18년 6월 12일에 효력이 발생하였다.
4. 중화 공교 진행회 전국 대표 회의(中華 公敎 進行會議 代表 會議)
민국 24년 9월 8일 ~ 15일에 상해에서 거행되었다. 공교 진행회는 천주교계의 교우 조직이었다. 그 취지는 각 교구 주교와 사제를 도와 선교활동을 하는데 있었다. 전국 대표 회의는 각 교구 공교 진행회의 일에 대한 경험을 교류하고, 그것을 토대로 조직을 확대,강화하여 효율성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었다. 대회에서 제2대 교황청 주중 대표 대주교 차이닝(蔡宁)이 비준되자 각 교구 주교 사제가 이 일을 중요시 하였다. 회의에는 대주교와 주교 23명, 사제 65명, 각 교구 공교 진행회 대표 123명이 참석하였다. 회의 장소는 구오화루(国货路) 졍씨우(正修) 중학 대강당(大礼堂)이었다. 상해 공교 진행회에서는 숙식비와 차량을 제공하였다. 회의에서는 대표 회의와 주교단 그리고 지도단 주석 차이닝과 대표회의에 출석한 전체 주교가 성원이 되었다; 주교단 명예 주교는 馬相伯, 陸伯鴻이었다. 상해시 시장 우티에청(吴铁城)과 국민 정부 행정원 부원장 공공씨앙씨(孔祥熙)는 대회의 개막식과 폐막식에 나누어서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공교 진행회의 사업 요강이 제출되었다. 첫 번째는 현대 사회의 수요와 현대인의 심리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신문 방송과 영화매체 등을 통한 선교방법을 채택하여 방법상의 혁신을 가져왔다. 두 번째는 교육사업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공교 진행회는 정부의 협조아래 아동, 청년, 부녀자, 민중을 교육하며 특히 문맹을 퇴치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세 번째는 천주교 출판 사업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자선 사업을 활발히 진행한다는 것이다.
5. 전국 공교 출판 회의(全國公敎出版會議)
민국 36년 5월 16 ~ 17일에 상해 위에양루(岳阳路) 197호에서 천주교 교무 협진회(协进会) 사무실에서 거행되었다. 중국 천주교 교무 협진회가 소집됨에 따라 로마 교황청은 주둔 중인 국민 정부 공사 리뻬이리(黎培理)를 주최자로 하여 위삔(于斌) 등 中. 外 주교 신부 25명과 중국 교우 3명을 참가시켰다. 모두 영어로 발언을 하였다. 회의 주요 의안은 8개 항목으로 나누어졌다. (1) 통일된 출판기관 조직 (2) 전국 발행만 조직 (3) 교회의 각 출판계 연계 합작 (4) 원고료 준비 문제 (5) 각 부문 전문 위원회를 조직, 교과서와 역사적 자료 및 교양서적의 번역. 편집 (6) 교내 인사를 대상으로 새로 출판된 서적 및 잡지에 대한 선전 방안 (7) 부문별로 정기 간행물의 발행 (8) 명칭 번역을 통일하는 문제 회의에서는 천주교 출판 사업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천주교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교회 안의 우수한 작가를 선발하여 창작에 종사시키고 문학 고문 기구 설립 등의 안이 제시되었다. 독자 지도와 서적 유통을 강화시키며, 정당한 사회 문제를 담은 소책자를 발행하고 공교회(公教会)의 고유명사와 원고료와 판권 문제를 통일시키고자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6. 전국 공교 교육회의(全國公敎敎育會議)
민국 37년 2월 15일 ~ 22일 상해에서 거행되었으며 로마 교황청과 주중 공사 리뻬이리의 제의에 의해 전국 천주교 교무 협진회 조직이 소집되었다. 천주교 학교와 신학교의 교육을 장려하여 종교 교육을 확대 추진을 기본취지로 삼았다. 또한 “학생들에게 종교 지식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시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회의는 상해 진단 여자 문리학원을 빌려 개최되었으며, 모두 100여명이 참가했으며 그중 대주교와 주교 20명이 포함되었다. 리뻬이리, 티엔껑씬(田耕莘), 위삔(于斌)이 회의를 진행했다. 주교회의, 국민 정부 교육부 사회 교육사 사장 잉치엔리(英千里)(천주교인), 상해시 시장 대표, 상해시 교육국 국장 등이 회의에 참석해 발표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국 천주교 교육의 현황과 교육사업을 추진 및 종교 교육 강화 등의 문제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주중 미국 대사관 비서 마이알삐(麦尔毕)의 발표 도중 中. 美 양국에 “현재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것인가? 그리고 정치상, 군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방면에서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회의는 교육의 질과 교사의 자질을 높이고 학생 품행 등의 방면에서 구체적인 조치로써 배양시키며 교육기금을 늘리고 학생들에게 학자금을 보조하며 교육 설비를 보충하는 등의 의견이 제출되었다.
제 2 절 교 안(敎案)(* 청조 말기에 외국 교회와 중국인 사이에 일어난 소송사건 또는 외교 사건)
1. 치우지아완 지아오안(邱家湾 教案)
치우지아완 외교사건은 치우지아완 천주당에서 발생하였다. 치우지아완 성당은 청조 순치(顺治) 15년(1658년)에 세워졌다. 교안은 광서(光绪) 13년 2월 2일(1886년 3월 7일)에 발생했다. 난후이(南汇)로 시험을 보러가던 몇 명의 학생이 치우지아완 천주당에 참관을 와 미사 에 참가했다. 교회는 그들의 의관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바로 문밖으로 몰아냈다. 2월 5일에 시험을 보러온 학생들이 다시 와서 성당을 참관했다. 성당에서는 이전의 한 학생이 제대의 종이꽃을 제멋대로 가져가 성스러움을 모독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2명의 학생이 절도를 하였다고 모함하여 구류시켰다. 외부에 있던 학생들과 그곳의 민중들이 성당에 침입해 성당안의 기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성당 옆 학교에도 불을 지르고 수녀들이 사는 곳도 공격했다. 송강 지부(知府)가 이 소식을 듣고 200명의 병사를 파견해 진압하고 “주동자(肇事者)를 체포했다. 다음날, 수백 명의 수험생과 민중들이 송강 지부 관공서(衙门)에 쳐들어가 지부가 서양 사람들을 도와 양민을 학대하였다고 고소하였다. 강남 제독 리wi오삔(李朝斌)이 병사를 파견해 진압하려고 하자 이에 충돌은 더욱 격해졌다. 용병 20여명과 더 많은 수의 학생과 민중이 부상당했다. 리쟈오삔도 머리에 돌을 맞아 부상당했다. 결국 화염 중에 수명이 체포됐다. 3월 4일(4월 7일) 상해도(道) 샤오요우리엔(邵友濂)이 대표로 파견되어 강남 주교 아이후이룬(倪怀纶)에게 사과를 표시하고 신속하고도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할 것을 보증하였다. 3월 7일(4월 10일) 샤오요우리엔은 은 3만 냥을 도(道), 부(府), 현(县)이 각각 나누어서 배상하라고 명령하였다. 교회의 요구에 따라, 이 일에 가담한 난후이縣 사람 5명, 칭푸縣 사람 3명을 체포하고, 교안에 참가한 학생의 수험 자격을 취소시켰다. 또한 강남 주교 아이후이룬의 요구에 따라, 난후이縣에 택지를 선정하여 성당을 세우도록 요구했다. 광서 13년 초, 치우지아완 성당 등은 수리 복원되었다.
2. 난띠엔 지아오안(南殿 教案)
난띠엔(현재는 난쟝(南张)) 천주당. 위치는 민항취(闵行区) 신주왕씨앙(莘庄乡)이었으며, 쟝쟈이지아탕(张宅家堂)이라고 하였다. 광서 24년 강남의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였다. 6월 14일(8월 1일) 늦은 시각에, 두 무리의 기아민들이 남전 천주당에 와서 음식을 구걸하였으나, 당(宅)에는 저장해둔 쌀이 없자 이를 거절하였다. 다음 날 기아민들이 쟝취씨앙(张渠乡)등의 교우 집에 쳐들어와 쌀을 훔쳐가고 張씨의 방(성당용으로 사용) 몇 칸을 훼손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후, 성당을 관리하고 있던 신부가 나서서 현(縣) 당국과 교섭하여 곡식으로 배상할 것을 촉구하였다. 縣의 관리는 즉시 다음과 같이 고지하였다. “10명이상이 모여 양식을 도둑질할 경우 주동자를 처벌하고 만약 무기를 가지고 위협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일률적으로 처벌할 것이다.” 당시의 <<申报>>에는 “기아민이 쌀을 도둑질할 때부터 지방관은 성당에서 무섭게 돌아다녔으며, 위로는 군부의 근심거리이기에 정신을 차려 진압하라”고 기재되었다. 사건 후, 현 당국은 외국인의 압력에 굴복하여, 쉬지아후이 천주당과 교회 측의 결정에 따라 난띠엔 천주당에 은 1.8만 냥을 정해진 날에 지불하기로 했다. 상해관리는 몇 개의 현 백성에게 균등하게 할당되도록 명령해, 레이씨엔(类县)과 화팅(华亭), 상하이(上海) 3개현이 함께 돌을 모아 성당을 재건토록 했다. 광서 28년에 새로운 성당이 준공됐다. 원래의 성당 규모의 약 10배로 확장되었고, 현재에는 南張 천주당으로 남아있다.
제 6 장 반제 애국 운동과 독립 자주 자반 교회 제 1절 반제 애국 운동 1. 해방 초기의 상해 천주교
아편 전쟁 후, 제국주의는 천주교를 중국 침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으니 상해 천주교회는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상해 천주교회의 지도권은 시종 외국 선교기구의 수중에 있었고, 일반 중국 성직자와 교우들은 권리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東西方 냉전시기에, 바티칸은 서방을 지지하면서 반공의식을 견지하고 중국인민 혁명의 입장을 반대했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외국 선교 기구와 중국 천주교회 안의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그 지령을 관철시켰다. 민국 38년(1949년)초 중국 인민 해방군이 長江에 다다를 즈음, 국민당은 대륙에서의 반동 통치를 머지않아 종결해야했다. 중국 천주교회가 신생 인민 정권하에서의 생존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바티칸은 여기에 대응하도록 조치를 하달했다. 중국 내의 선교기구와 선교사들은 “중국을 사수하고 절대 후퇴하지 않고 철수하지 않으며, 공산주의에 항거한다.”는 것이 총지침 이었다. 예수회 총장이 성직자와 교우들에게 하달한 3가지 행동 원칙은 (1) 용감하게 대항한다. (2) 아주 낙관적일 필요가 없다. (3) 실망할 필요가 없다. 는 것이었다. 상해 천주교회는 민국 38년 초부터 반공 선전을 강화시키고, 교회의 조직 체계를 통해 교우들을 향해 소위 “有神과 無神은 세력이 양립하지 못하며, 공산당이 종교를 멸망시킨다”. 는 등의 논조를 퍼뜨렸다. 민국 38년 2월자 상해 천주교 대변자인 <<성심보>>에 교황의 말을 인용하여 <<현대 무신주의 논박>>이라는 제목의 글을 개재했다. “공산주의의 정당성을 위해 천주교를 모욕한다.”며 논박했다. 또한 천주인 하느님이 “공산”이라는 재해를 벗어나고 세속을 구해주기를 간청했다. 교회 안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로 인해, 상해 인민이 거리에서 해방군을 기뻐하고 희망에 차 맞이할 때, 상해 천주교 내의 대부분의 교우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상해 해방군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여 1950년 로마 교황청은 중국 공산당이 인민 혁명을 이끄는 것에 반대하고 또한 외국 선교 기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공핀매이(龚品梅)를 상해 교구 주교 및 蘇州 교구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외국 선교사를 뒤로 물러나있게 하였다. 상해 교구의 프랑스 예수회 중국회 수사 중에서 정치적으로는 바티칸의 명령을 수행하며 학식을 갖춘 젊은 신부 몇 명을 선택하여 프랑스 말로 “아이지뽀(爱纪伯)”(Equipe)라는 비밀 핵심 조직을 구성했다. 그들로 하여금 인민 정권의 고문단(지랑단(智囊团))에 대항하도록 했다. 또한 그들을 상해 천주교의 각 중요 사업에 중임을 위탁하여 파견했다. 쉬지아후이 총수도원, 교우가 집중된 쉬지아후이 천주당, 상류계층 교우가 운집한 루완취(盧灣區) 베드로(伯多禄) 성당의 원장 및 진단 대학교우 학생의 “총 성직 교사”등이었다. 거쇼우핑(格寿平), 차이알멍(才尔孟) 등으로 형성된 제국주의자들은 막후에서 공핀매이와 “아아지뽀(爱纪伯)” 구성원으로 하여금 한편으로 공개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인민정부에 대항하도록 지휘하였다. 1949년 7월과 1950년 7월 로마 교황청은 잇달아 “공산주의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상해 교구는 이중에서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는 삼부주의(三不主义)를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교우의 실천을 요구하는 동시에, 사회의 정치 학습과 각종 애국 활동에 대처하도록 했다. 교회 내부에서는, 공산당이 말했던 “마귀”나 새로운 사회가 말한 바 있는 “암흑세계”를 강론에 이용하였다. 그들은 또한 “교리반(教理 小组)”을 통해 교우를 속이고 선동했으며, 특히 공산당과 인민 정부에 반대하는 청년교우들을 내세워 인민 정부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매번 중대한 정치 운동이 전개될 때마다 공핀매와 거쇼우핑 등은 교의나 규칙을 구실삼아 어떻게 그들의 정치활동을 저지할 것인가를 협의하였다. 그들은 부당한 전쟁에 대한 미국의 원조에 대해 대항하는 것을 모독하고 청년 교우들의 참전과 비행기나 대포 등 전쟁 무기 마련을 위해 모금하거나 봉헌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조선을 침략한 미군이 실시한 세균전에 대한 항의 활동도 허락하지 않았다. 토지 개혁시, 농민 교우들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분배해서 자기 몫을 나누어 갖는 것도 승인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으며, 인민 정부가 붕괴된다고 여기게 한 다음 토지를 지주에게 돌려주었다; 농민 교우가 분배된 토지를 매매할 때는 반드시 지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지었다; 지주와의 투쟁에 참가할 수 없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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