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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엔 가족을 격려하고 축복하라(2122.2022.1.30)
요5:1-9
할렐루야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고,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은혜로 삽니다’란 ‘없는 것에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비록 가진게 없을지라도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나고 싶은 가족이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고향을 찾은 자녀들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설 명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은혜는 입는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은혜를 사모하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리 큰 문제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고 이길 수가 있고 해결 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주에 설명절을 맞이하는데 명절이 되면 가족간에 격려하고 축복해 주면 참 좋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 설 명절에 가족을 만나면 ‘네 탓’이라며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줘선 안 됩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기 싫어합니다. 고향에 찾아오거들랑 ‘얼마나 힘드니’라며 가족을 따뜻이 격려하고 축복하고 감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옵니다. 이번 설 명절에 가족간에 서로서로 용서하고 말씀대로 격려하고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며 명절을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는 갚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변해야 합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한 언론에 나란히 소개된 배은망덕한 자녀와 보은한 부엉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아이가 없던 한 부부가 1967년 어느 날 집 앞의 강보에 싸인 채 버려진 아이를 주워 30년 동안 가슴으로 키웠습니다. 아이는 2007년 5월 아버지가 숨지자 어머니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고, 소송을 걸어 25억 원을 받아 도망가버렸습니다. 3년 만에 거지가 된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 거짓 용서를 구한 뒤 어머니의 집과 재산을 자신의 이름을 변경해 가로챈 뒤 탕진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고소했습니다. 재판장은 ‘배은망덕한 놈아, 네가 자식이냐. 동물도 그러지는 안 는다’며 아들을 법정구속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분은 이런분이 하나도 없는줄로 믿습니다.
보은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한 가정의 마당에 어느 날 다리를 다친 부엉이가 떨어졌습니다. 집 주인은 정성을 다해 부엉이를 돌봤습니다. 고양이는 부엉이와 친구가 되어 자신의 음식을 부엉이에게 주곤 했습니다. 두 달 뒤 부엉이는 회복되어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부엉이는 매일 뱀과 쥐를 잡아 고양이 앞에 던져 주었습니다.
여러분‘배은망덕’과 ‘보은’은 이런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고 천국가게 된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모은 물질은 천국 갈 때 가져가지 못합니다. 이 땅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가족이 내 대신 죽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주일 이후에는 2월1일은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명절에는 무엇보다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서 그동안 헤어져서 살던 부모님들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고향을 찾아가면 가족들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오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마음에 들지요. 금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모두가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고향도 제대로 갈수가 없습니다. 정부 방역 당국에서는 가급적 이동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코로나가 있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해서 전국에서 고향을 찾고 또 부모님을 찾아 이동을 하는 인구가 3천만 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라 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농촌에 살고 있는 늙은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오면 줄려고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것들을 꾸러미 꾸러미 싸서 아들 딸들이 타고 온 자동차에 실어 주느라고 또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주어도 더 주고 싶은 마음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설날 명절을 지내면서 신앙도 제쳐놓고 예수도 제쳐놓고 정신없이 명절에만 정신이 팔려있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자신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명절에 사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유월절 명절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들은 이번 설날 명절을 지내면서 혹시라도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깨어 경성하여 이번 설날 명절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는 해에 처음 부모님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갔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절기를 다 마치고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룻길을 와서 예수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오든 길을 다시 되돌아가면서 예수를 찾았으나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길을 찾아 헤매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율법사와 토론을 하는 예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잃어버린 예수, 잃어버린 신앙, 잃어버린 은혜,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고 고향에 가면 코로나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가족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명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도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명절은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것이 단순히 유대인들이 지키는 명절 해방을 기념키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만 그저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절의 의미는 영적 의미로써 명절을 지키는 뜻이 더 중요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해방의 감격을 기념하기도 하지만 이것보다 영원한 출애굽인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생각하면서 명절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죄인들이 그 죄에서 해방, 사망과 어둠의 권세에서 마귀의 사슬에서의 해방, 영원한 저주, 심판 멸망에서의 해방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바라보시고 명절의 의미를 두고 그 명절 지키려고 상경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의 명절에 무관심 소홀히 하기보다 명절을 지키되 영적 의미를 가지고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명절인 줄 믿습니다. 영적 의미없이 그냥 단순한 명절로만 명절을 지킨다면 세속적인 명절로 끝날 것입니다. 금년 이 명절을 맞으면서 영적 의미를 찾았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고유 전통과 풍속 가운데 오래도록 지켜오고 있는 민속 명절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으뜸되는 고유명절은 설, 한식, 단오, 추석이 있습니다. 설은 새해를 맞는 큰 명절입니다. 웃어른들을 찾아가 세배를 드리고 그 분들의 덕담을 듣습니다. 서로 헤어져서 살던 형제들이 고향으로 모이는 귀성행렬의 차량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고향에 도착해서 귀한 명절을 지내기 위해 여러 가지 맛난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 분주함이 우리를 기다리게 합니다. 이렇게 모두가 기뻐하는 명절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았는지 한번 주위를 돌아보시는 여유를 가져보는 명절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안의 며느리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여유도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명절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는 설 명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연못으로 내려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일까요? 고향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이 계시고 그리고 가족과 친척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향은 자랄 때에 뛰어 놀든 정든 산천이 있고 자신의 탯줄을 묻은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향에서는 모든 여건과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히 고향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향을 찾아가보라는 것입니다. 고향이 있다는 그 기쁨이 명절을 통해서 찾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명절은 고향을 찾아갑니다. 금년에도 코로나19 때문에 확진자가 많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대이동을 하면서 귀성길에 오를 것입니다. 명절의 기쁨은 고향을 찾아가는 즐거움, 내 아버지집을 찾아가는 그 기쁨이 우선적입니다. 요즈음에는 명절에도 이단자들이 생겨서 고향을 안가고 외국이나 딴 곳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명절도 많이 타락했습니다만 원래는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반대로 명절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은 명절이면 더 쓸쓸하고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망향의 설움 때문입니다. 고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고향을 바라보고 찾아가는 것이 명절의 기쁨입니다. 명절은 고향이 생각이 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아가지는 않아도 고향이 그리운 날이 이 명절입니다. 이처럼 고향을 생각하고 찾기도 하는 것은 고향이라는 곳이 단순히 지명이 아닙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광주라고 하는 지명이 아닙니다. 고향이라는 곳은 역사고 숨결이 있습니다. 꿈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찾아가는 고향입니다. 오늘 같이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찾아 가는 ‘귀성전쟁’ ‘민족대이동’이 있는데... 올해도 수만명이 고향을 찾아 가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사모하는 고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고향으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고향입니다. 세 번째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인데요, 만들어 가는 고향입니다. 김상진의 노래가운데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을 주고 고향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참 강합니다. 노래도 고향을 소재로 한 것이 많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내 고향 남쪽나라,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고향의 봄, 타향살이’등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진정한 고향, 영원한 고향이 있으니 정말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고향은 있지만 영혼의 고향, 영원한 고향, 진정한 고향이 없어 방황하고, 망향의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영원한 고향 하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것이 얼마나 감격인지 모릅니다. 명절날 고향 찾는 기쁨을 보면서 영적으로 고향 하늘나라 천국이 있고 그 고향 생각하면서 기뻐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고향, 하늘나라 때문에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시작은 유대인의 명절이 시작되는 것을 알려주면서 시작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모든 일을 뒤로한채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찾아가신 곳은 명절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기쁨의 자리가 아닌 신음의 자리였습니다. 즐거워 마시면서 떠드는 흥겨운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의 날에 참여하지 못한채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그 시대의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은 베데스다라고 하는 아주 신비한 전설을 담고있는 작은 연못이었습니다. 연못주위에는 쉬기에는 좋은 행각이 다섯채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곳은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곳은 사람들이 쉬는 공간이 아니라 고통으로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간에도 슬픔에 차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음을 나눔으로 기쁨이 두배가 되는 기적을 우리가 실천해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많은 소경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지체장애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중풍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느사이 이곳은 병든 자들이 누워있는 침실이 되었습니다. 어느사이 이곳은 질병으로 신음하는 그야말로 고통의 절규가 끊이지 않는 절망과 한숨의 대표적인 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곳은 명절을 맞아 잔치를 즐기는 때임에도 그들은 여전히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명절을 맞이한 바로 그곳으로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내려가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그곳에 나와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한번 가본적도 없습니다. 그곳에 나의 병든 부모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가기를 싫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 가면 살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그곳에 가면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지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곳에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이 베데스다 연못의 명절로서 우리 주님이 필요한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 주님이 꼭 가셔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그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연못으로 내려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번 명절에 고향으로 내려가 만나야 할 사람들의 모습을 미리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나야할 그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번에 만나게 될 여러분의 친척들 가운데 육신의 질병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바로 그들의 곁으로 우리가 가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자리는 바로 그들의 곁입니다. 그들에게 더욱 더 사랑을 나누시는 명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찾아가는 고향의 이웃들 중에 육신의 장애로 여러분을 마중 나오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러분이 찾아가 위로해 주십시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담대함으로 증거 하십시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우리들의 질병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 그것이 살길이다. 바로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우리가 해 주어야 할 말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이 베데스다 연못으로 내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의 참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 작은 마음을 실천함으로 그들이 우리들의 구세주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명절이 될 수 있다면 참으로 이것이 기쁨중의 기쁨이 될것입니다. 우리들의 담대함으로 증거한 이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질병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이것이 참 명절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이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는 명절이 된다면 이것이 참 명절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2.연못에만 시선을 쏟는 사람이 되지말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명절입니다.
명절의 기쁨은 무엇보다 부모형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는 기쁨이 명절의 기쁨인줄 압니다. 고향이 있어도 만일 부모형제가 없고 사랑하는 가족이 없다면 사실 명절의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명절일수록 가족, 부모형제가 없는 사람들은 더 쓸쓸합니다.(고아원, 양로원, 베데스다 연못가) 그래서 명절에는 무엇보다 가족을 만나는 기쁨, 가족의 따뜻한 사람과 정을 생각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명절날에 더 기쁨이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부모형제를 만나고 함께 하는 기쁨도 있고, 또한 우리에게 믿음의 식구, 영원한 가족이 있음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기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 아버지 없는 영적 고아들이 많습니다. 영적 가족이 없어서 외로운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식구, 영원한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기쁨 중에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명절날 세상의 부모형제 만나고 함께 하는 기쁨과 함께 믿음의 식구 영원한 가족, 아버지, 형제 자매가 있고, 함께 한다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이 명절은 통해서 그리스도인들 영적 의미를 발견한다면 더 큰 기쁨의 명절이 될수 있는줄 믿습니다.
연못에만 시선을 쏟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끊임없는 대박의 환상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신앙을 가져도 말씀을 믿지 못하고 신비한 체험을 기다리고 믿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괴로움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번 명절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 중에도 분명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의 헛된 것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세상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물질에 시선을 고정한채 정신없이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옆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쳐다 볼 수 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온통 세상의 물질에 초점이 모아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연못가의 사람들 곁으로 예수님이 다가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연못에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종착역이 여기 베데스다 연못가인줄 압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우리의 종착지는 베데스다 연못가가 있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히11:16절‘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라는 말씀처럼 성도는 이 세상에 있는 고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나라, 본향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명절이 되면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듯,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 25:34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창세전에 예비 된 나라를 받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보이는 고향에 가지만 중심 신앙만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본향을 사모하며 달려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 사는 삶을‘타향살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인간들은 참 본향인 하늘나라를 떠나서 살고 있기에 이 세상의 삶은 타향살이와 같습니다. 똑같은 타향살이지만 그러나 세상의 나그네 길은 서러운 신세타령의 타향살이라면 하나님의 세계를 본향 삼아 달려가는 나그네 길은 전혀 다릅니다.
찬송가 246장에는‘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 버렸네 죄 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라는 가사와 같이 거룩한 믿음으로 소망 찬 발걸음을 옮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계 21장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본향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나오며, 강 좌우에는 열두 가지 실과가 맺히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는 곳입니다. 그곳에 거하는 자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은 떠날 수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곳입니다. 한번 가면 끝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나라요 더 나은 본향입니다. 고후 5:1 이하에 나와 있듯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본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요 14:2-3절‘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모하는 고향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드신 곳이며 영원한 곳이며 어둠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아픔도 질병도 괴로움도 없습니다. 그저 보기만 해도 만족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창조하신 영원하신 세계로서 의와 정의가 차고 넘치는 곳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통치하시되 은혜와 자비로써, 아가페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은 영광이 둘려 있는 화려한 성이며 아픔과 눈물이 없는 곳이라고 계 21:4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세상만 바라보고, 연못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내고향 아름다운 천국이 있는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도 눈을 돌려 지금까지 누구를 바라보고 왔는지를 생각 할 수 있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분주하게 살면서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왔는지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 이제부터는 예수를 바라보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히12:1-2절‘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행16:31절‘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예수를 바라보아 온 가족이 구원 받는 명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우리는 조상님이 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미신을 타파하는 명절입니다. 이 작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직도 허황된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연못의 물속에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곳에 병든 몸을 맨 처음에 담그는 사람은 깨끗이 낳음을 입는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전설 때문에, 그 허황된 잘못된 믿음 때문에 그들은 이곳에서 진을 치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못으로 시선을 고정한채 다른 것은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민속놀이, 민간의 풍습을 재고해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 민속놀이 대부분에 미신적 요소가 스며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북이나 장고, 단소나 꽹과리 등등 사용하는 악기가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에도 국악 찬양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농악을 잘 보십시오. 무엇을 하는 행사입니까 ? 가정에, 그 지역에 귀신 쫓는 행사인 것입니다. 병마, 악신을 쫓고 복을 구하는 행사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집을 짓는데 무엇을 하는지 집을 사고, 판다 하면 무엇을 보는지 보십시오. 묘를 쓸 때에 시간을 맞추어 기다립니다. 이사를 하는데 손이 있다 없다 따집니다. 이게 다 뭡니까 ? 이것이 다 귀신을 믿고 섬기는 행위요 우상숭배라는 말입니다. 잘못된 것은 과감히 개혁하고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새롭게 하는 것이요 진리 가운데로 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고 너 같은 놈 때문에 예수 안 믿겠다. 하면 되겠습니까? 이번 설날 고향 친지들에게 가서 외식과 가식에 빠지지 말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돌아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정에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귀신 섬기는 제사는 안 됩니다. 우상숭배는 저주 받을 일입니다. 미신적 행사, 악습은 버립시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버릴 것, 타파할 것은 단호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선교 한답시고 좋은 것이 좋지 하는 태도는 버리시기 바랍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했습니다.
명절의 또 하나의 기쁨은 안 믿는 사람들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감격이었지만 우리는 하나님 은혜 생각하면서 기뻐서 할 수 있는 명절이 되는 것입니다. 왜 조상에게 제사합니까? 또 이 제사를 지내는 것 절대적 의무로 생각합니다. 안 지내면 명절의 주제가 빠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사는 것, 한해동안 살아가는 것 다 조상의 은덕이요 조상의 돌보심인줄로 믿고 있기 때문이고 그러한 관습 때문입니다. 그 고마움을 기리고 만일 제사 안 지내면 조상이 노해서 모든 일이 안될까 두렴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상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 명절에는 더욱 더 하나님의 주신 은총을 기억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 하나님께 예배해야 함을 더 확신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고 믿게 된 것이 너무 기쁘고 감사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물론 우리는 조상을 잊어서는 안되고 조상의 묘를 관리하는 것 후손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그러가 결코 제사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고전 10:20) 이유는 조상님의 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하나님의 자리에다 조상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명절날 진정으로 은혜베푸신 분이 하나님을 더 확신하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3,4대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데스다의 명절은 이러한 우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주께서 찾아가신 명절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잘못된 사고, 환경을 개혁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를 살리는 일이요 민족을 복 받게 하는 일입니다. 주님 부탁하신대로 기독교가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명절을 맞이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들로서 보다 더 소외된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우상을 타파하고 주님만을 바라 볼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곳이 바로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4:2절‘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 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3:20절‘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갈곳은? 우리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본향 천국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세상이요,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입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우리의 본향, 영원한 고향은 오직 천국임을 믿으시고 2022년 설날을 맞으면서 더욱 믿음의 신앙이 말씀을 통하여 새로워져서 이번 명절에는 고행가시면 가족들에게 격려해주고 축복해주고 복음 전해주고 오는 명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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