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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법화경의 인불사상
성인 중의 성인
인류 역사에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훌륭한 지혜를 갖춘 참다운 성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세상의 온갖 유형무형인 존재의 실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훌륭한 지혜를 갖춘 참다운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세존을 성인 중의 성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수행을 결심하신 것도 인간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였다. 6년의 수행 끝에 정각(正覺)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사실도 실은 인간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참다운 가치를 알았을 뿐이지 새로운 것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49년간, 당신이 깨달으신 인간 존재의 실상을 수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 전법의 세월을 보냈다. 그 전법의 세월을 보내면서 가르치신 내용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유형무형의 온갖 존재들에 대한 실상을 설하여 그 존재의 실상에 맞춰서 사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많고 많은 가르침으로써 진리를 설명하고 사람들은 그 진리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을 한껏 누리며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수 있다고 하는 내용이다. 무수한 가르침들 중에서 그 근본 취지만을 가려서 살펴본다면 부처님의 몇 가지 경전과 후대에 깨달음을 이루신 몇 분의 조사님들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먼저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가슴에 묻어두었던 최후의 말씀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리라. 특히 <법화경>은 <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취지를 스스로 밝힌 내용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깨달음의 지혜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큰 사연[一大事因緣]이 있어서 세상에 출현하느니라. 사리불이여, 무엇을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큰 사연이 있어서 이 세상에 출현한다.’ 하는가?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서[開]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기[示]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悟]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의 길에 들어가게[入]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느니라. 사리불이여,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하나의 큰일 인연을 위하여서 세상에 출현한 것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경전에서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사람들에게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 주고, 들어가게 해 주기 위해서 세상에 출현하였다는 그 부처님의 지견이란 정견(正見)이며 깨달음의 지혜다. 그 지견으로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고 사람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지혜에 의하여 사람의 실상을 바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만을 말하자면 ‘사람이 부처님’이요, ‘당신이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혹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잘못 알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업이 많고 번뇌 망상이 가득한 못난 중생이라거나, 또는 하나님의 종이라거나, 탐욕과 진에와 어리석음과 같은 몹쓸 것만 지니고 다니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삿된 견해며, 전도된 견해며, 캄캄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마치 맹인이 태양이 밝게 비추는데도 자신의 눈이 어두운 것은 탓하지 않고 태양이 없다고만 말하는 경우와 꼭 같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 하나님으로 보아서 부처님으로 또는 하나님으로 받들어 섬기며 존중하고 찬탄할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지혜를 갖춘 참다운 성인이다.
<법화경>은 28품으로 나눠져서 한 품 한 품이 모두 특색을 가지고 있다. <방편품>은 <법화경> 전체의 안목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법화경> <방편품>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무 꼬챙이나 붓이나 또는 손가락이나 손톱 따위로 불상을 그린다면 이와 같은 이들도 점점 공덕을 쌓으며 큰 자비심을 갖추어서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皆已成佛道]. 다만 보살이 되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였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탑에나 불상에나 탱화에 꽃과 향과 깃발과 일산으로써 공경 공양하였거나, 또는 남을 시켜 풍악을 울리고 북 치고 소라 불고 퉁소와 저와 거문고와 공후와 비파와 징과 요령 등 이러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불상에 공양하였거나, 또는 환희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거나, 내지 아주 작은 음성으로 공양하더라도 이러한 이들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皆已成佛道]. 만약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꽃 한 송이를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무수한 부처님을 친견하느니라. 혹 어떤 사람이 절을 한 번 하거나, 합장만 한 번 하거나, 손만 한 번 들거나, 머리만 조금 숙이어도, 이러한 일로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스스로 최상의 도를 이루고는 무수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게 하기를 마치 나무가 다 타고 불이 꺼지듯 하느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 하고 염불을 한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들이 혹 생존해 계실 때나 열반에 드신 뒤에 이러한 법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皆已成佛道].” 위에서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본다면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다.”는 것이 주제다. 경전의 내용대로라면 성불하기가 너무도 쉽다. 아니다. 성불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간단한 말이나 행위를 하는 그 사실과 그 능력을 부처의 능력이며 부처의 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무 꼬챙이나 붓이나 또는 손가락이나 손톱 따위로 불상을 그린다면 그것으로 다 이미 성불하였다.”고 하였다. 또 탑이나 불상 앞에서 노래만 한곡 불러도 다 이미 성불하였다. 또 산란한 마음, 즉 번뇌와 망상이 있는 그대로 불상 앞에 꽃 한 송이만 공양하더라도 그들도 다 이미 성불하였다. 또 탑 앞에서 “나무불”이라는 한마디 말로 다 이미 성불하였다. 성불의 조건이 이와 같이 쉬운데 그대들은 아직도 그와 같은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직도 부처님이 되지 못했다면 그처럼 쉬운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리라. 경전의 속뜻은 이렇다. 실은 부처님께 공경 공양하고 찬탄 예배하든지, 아니면 부처님을 비방하고 불상을 훼손하든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아무런 관계없이 그가 사람이면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탐·진·치 삼독과 8만 4천 번뇌 망상이 뒤범벅이 되어 취생몽사하는 사람이라도 그냥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사랑할 줄 알고 시기하고 질투할 줄 아는 그 사실이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실로 그 능력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 또 어디 있는가? 이는 곧 사람은 본래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달리 다듬거나 가꾸거나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은 멀쩡한 살을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기에 <법화경>의 위와 같은 말씀이 빛을 발하며, 경전 중에 최고의 경전이며, 경전 중의 왕으로 숭상 받고 있다.
<법화경>은 전편이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사람이 본래로 부처님, 즉 ‘당신은 지금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뜻을 밝히고 있는 가르침이다. 그것이 세존께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인류에게 던져주고 싶어 했던 금과옥조다. 팔만대장경의 핵심이다. 이 한마디 말만 자신의 인격이 되면 불교공부 끝이며 인생 공부 끝이다. <법화경 상불경보살품>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최초의 위음왕 여래께서 열반하신 뒤 정법(正法)이 없어지고, 상법(像法) 동안에 뛰어난 체하고 잘난체하는 비구들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한 보살비구가 있었으니 이름은 상불경(常不輕)이라 하였느니라. 득대세 보살이여, 무슨 인연으로 이름을 상불경이라 하였는가. 이 비구는 무릇 만나는 사람마다 비구거나 비구니거나 청신사거나 청신녀거나 간에 보는 대로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하고 감히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비구는 경전을 읽거나 외우지도 아니하고 다만 사람들을 향해서 예배만을 행하였느니라. 멀리서 사부대중을 보더라도 또한 일부러 따라가서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하고 감히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느니라. 사부대중 가운데 화를 내거나 마음이 부정(不淨)한 이가 있다가 나쁜 말로 욕설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 무지(無智)한 비구야, 어디서 왔기에 스스로 말하되, “나는 그대들을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않노라.”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수기(授記)를 주는가. 우리는 그런 허망한 수기를 받지 아니 하리라.’라고 하였느니라. 그는 이렇게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항상 욕설과 꾸짖음을 당하여도 화도 내지 아니 하고 항상 말하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이러한 말을 할 적에 여러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거나 돌을 던지면 멀리 피하여 달아나면서도 오히려 음성을 높여서 외치기를 ‘나는 그대들을 감히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못하노라. 그대들은 모두 다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하였느니라. 그가 항상 이렇게 말하므로 뛰어난 체하고 잘난체하는 비구와 비구니와 청신사와 청신녀들은 별명을 지어서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상불경(常不輕)이라 하였느니라.” 라고 하였다. 상불경 보살은 석가세존의 전신이다. 석가세존이 과거에 이와 같은 정신과 행동으로 비로소 성불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이 사실이 불교의 전체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있으며 이 말씀이 불교의 결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80생애를 마치면서 <법화경>에서 최후의 유언으로 전 인류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마지막 한마디 말씀이 ‘당신은 부처님’이다. 무엇이 그토록 가르쳐 주고 싶었던 부처라는 사실일까? 눈과 귀와 코와 혀 등을 통해서 마음껏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그 능력이다. 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면 공연히 고독하고 쓸쓸한 감정에 젖어들 줄 아는 그 미묘 불가사의한 그 물건, 그 작용이 곧 부처의 작용이다. 봄이 돌아와서 새싹이 돋고 날씨가 화창하면 공연히 기분이 상쾌하고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이것이 모두 진실한 부처의 미묘한 작용이다. 이 사실은 이 세상 그 어떤 물건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참으로 신기한 존재다. 이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다. 이것은 만유의 주인이다. 상불경 보살은 사람 사람에게서 바로 이것을 보았던 것이다. 석가세존의 비원(悲願) <법화경>은 <상불경보살품> 이외에도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수기(授記)의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세속의 부인이었던 야수다라 비구니와 젖을 먹여 키워준 마하파사파제 비구니와 5백 명의 제자들과 2천 명의 제자들, 심지어 석가세존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까지 했던 천하에 무도한 악인 제바달다까지도 부처님이라는 보증을 하여 수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용녀라는 축생까지도 수기를 주었다. 그 외에도 부처님으로 보증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래서 <법화경>을 다른 이름으로 <수기경(授記經)>이라고도 부른다. 왜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보증하는 수기의 이야기가 많은가? 석가세존께서 모든 인류에게 바라는 한 가지 비원(悲願)이 있다. 그것은 바른 견해[正見]다. 전 인류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 보거나, 죄업이 많은 중생으로 보거나, 번뇌와 망상과 삼독으로 가려진 미완성의 부처님으로 보거나 미래의 부처님으로 보는 것은 삿된 소견이며, 전도된 소견이며 하열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방편의 가르침이다. 지금 이 순간 부처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 가서 부처가 되리. 실로 이렇게 글을 쓰고 이렇게 글을 읽으며 글의 내용을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하는 그 능력 그 사실을 두고 달리 무엇을 일러 부처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부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본래로 살아 있는 부처님이며, 살아 있는 하나님이라는 올바른 견해, 즉 정견(正見)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 세존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인류에게 전하고 싶었던 단 한마디 말이 ‘당신은 부처님’이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루의 해가 대지를 비추다가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최후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장엄하게 비추는 것과 같이 평생의 수많은 설법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면서 지극히 고귀하고 높은 차원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가장 수준이 높은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가슴 깊이 간직해 두고 보호하고 아끼던[敎菩薩法 佛所護念] 경전이라고 하였다. |
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 無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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