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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으로부터 직, 간접 발출한 진리 3
- 천계를 대신하는 주님의 신성한 인간과 그 자연적 평면
스베덴보리(Swedenborg) 저
천계비의에서
1990
창 17:1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
2) 모든 천계들 위에 있고
사람에 관해서는 가장 내적인 것들 너머에 있는
무한존재 자체는(The Infinite Itself)
주님의 유일한 형상인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을
통하지 않고는 나타나실 수 없다.
그 외 다른 어떤 근원으로는
유한존재와 무한존재의 교류가 불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태고 교회의 사람들에게,
그 뒤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의 사람에게,
또 그 뒤 다시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요한복음서에서 공공연히 가르치시고 있다.(John 8:56,58).
예언서에서 특히 다니엘서에서
그분은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로 나타내 보이셨다.(다니엘 7:13)
3) 이들 인용말씀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이신 무한존재께서는
인간본질(the Human Essence)을 통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주님을 통하시지 않고서는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신성한 존재)은
주님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신성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옮겨 놓고
스스로 구역질나는 정욕에 몰두하고
그것에 의하여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빠져든 뒤,
주께서는
이들과 함께 하며 이들에게 결합하기 위해
출생에 의해 실제적으로 인간본질을 입으셨고
그것으로 그때 무한신성으로부터 아주 멀리 옮기워진 사람들에게
신성을 가까이 하게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지옥에 속한 죽음과 더불어
영원히 멸망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온전히 인간본질을 신적본질에 결합하시기 전,
그리고 그것을 영화하시기 전
겸비(humiliation, 굴욕)의 상태에 계실 때
주님의 '인성 안에 계신 신성'의 나타남에 관한 또 다른 비의는
주님의 자비로 뒤에 이어지는 것에서 드러나게 되겠으며
그 내용들도 매우 잘 이해될 것이다.
2034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뒤에 오는 자손도 (대대로 지키라)”
..
5) 무한존재, 즉 지고하신(Supreme) 신성과
인류와의 결합이 성취된 것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이 되시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과
또 이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주님께서 세상에 강림하신 목적이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비의(arcanum)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또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믿지 않으려는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그 비의가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것이 사실 그러하다는 것은
저 세상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대부분, 즉 그들은 거의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부류의 사람들이었는데
주님께서 한 사람이었고,
외모에서도 다른 사람과 같은 모습이셨고,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단순히 생각만 해도
즉시 그들의 영기(sphere)는 비방거리(scandals)로 가득 찼다.
비록 이 세상의 삶 속에서는
그때 그들이 그것에 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외적인 존엄성을 가지고 주님을 공경한다고 했을지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평생 동안 하나의 치욕이고 걸림돌이 되었다.
왜냐하면 저 세상에서는 내면적인 것들이 모두 개방되고
또 그들에게서 발산되는 영기에 의해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가졌던 믿음이 어떤 것이었고
또 그들이 주님에 관해서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백하게 지각되었다.
6) 이 경우가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람 안에 내재한 천적인(celestial)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랑이 사라진 뒤
그래서 그곳에는
선에 속한 그 어떤 의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인류는 그때
신성(the Divine, 신성한 존재)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왜냐하면 사랑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결합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 소멸되었을 때 그곳에는 다만 분리만 있고
분리가 이루어졌을 때 그때 거기 파괴와 근절만이 뒤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그때
주님의 세상 강림에 관한 약속이 세워졌고
또 주님은 인성을 신성에(the Human to the Divine)
결합(unite)하셔야 했고
이 결합에 의하여 주님은
사랑과 인애에 속한 믿음을 방편으로
당신 자신 안에서 온 인류와의 결합을 성취하셔야 했다.
7) '사랑에 속한 믿음'은
오셔서 결합을 성취하실 주님 안에서
창세기 3:15에 주어진 첫 번째 약속의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사랑에 속한 믿음이
온 세상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을 때
주님은 이 세상에 강림하셨고
인간적 본질을 신적 본질에 결합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에 관해 주님 스스로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은
진리의 길을 가르치셨고
또 누구나 주님을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즉 누구나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소유라는 것과,
온 우주의 인류를 향한 사랑인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따라서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결합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8) 그때 주님 안에서 인성은 신성이 되어
그분은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 되셨고
그 결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사람과 같이 하는 무한존재
즉 지고하신 신성(Supreme Divine)에 속한 입류가 생겨났다.
그리고 부차적인 결과로는
이 세상에서 온 영들로 계속 채워진 '영들의 세계'에
철철 넘치던 거짓에 속한 지독한 종지(persuasions, 신념, 신조)와
악에 속한 무서운 정욕의 소멸이 일어났다.
이 같은 종지와 정욕 안에 있는 영들은 지옥으로 쫓겨났고
그것으로 그들은 분리되었다.
만약에 이 같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인류는 멸망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들을 방편으로 해서 인류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그 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그 영들을 흩어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신성이 도저히 사람의 합리적인 것들을 통해
내적 감각에 속한 것들 안으로 작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결합이 없었을 때
그들은 지고하신 신성으로부터 훨씬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깨달음에 설명할 수 없는 매우 심오한 비의는
언급할 수 없겠다.(1676.1990항 참조) ..
2661
..
2) 주님은
천적인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사람(아담)이라고 불리운 태고교회는 천적이었는데
만약 이 교회가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남았다면
주님께서 한 사람으로 태어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가 쇠퇴(decline)하자마자
주님은 천적 교회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될 것을 예견하셨고
이것 때문에 그때 주님의 이 세상 강림에 관한 예언이
만들어졌다.(창 3:15)
그 교회의 시대가 지나간 뒤
더 이상 천적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영적 교회가 존재하였다.
왜냐하면 앞서 수차례에 걸쳐 언급하였듯이
홍수 뒤에 존재했던 교회는 영적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 교회, 즉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지 않았다면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주님의 강림 이전에는
그분의 강림 뒤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그런 영적 왕국은
존재하지도 않았다.(6372항 참조)
창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입법자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다시 말해 실로가 오셔야 비로소
홀이 유다를 떠나게 되고
입법자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즉 실로가 오시면
천적 왕국에서 영적 왕국으로 흘러든던,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지상으로 흘러들던 방식의
신성한 진리의 입류가 그치고
이제는 천계를 통하는 대신
영화된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통해
신성한 진리의 입류가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의 심성에까지 있게 될 것이다.)
6371
“(왕의)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통치권이(the power and control of truth from good,
‘선에서 비롯된 진리’에 속한 힘과 통제력)
천적인 왕국에서 옮겨지지 않을 것을 뜻한다.
이는 '떠나는 것'을 가리키는 '옮긴다'는 말의 뜻에서,
그리고 '통치권'을 가리키는 '홀(지휘봉)'의 뜻에서,
그리고 그 통치권은
선에서 비롯된(온) 진리에 속한 것이라는 뜻에서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홀(지휘봉)은 왕권의 표지이고
왕위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천적인 왕국을 가리키는 유다의 표징에서 잘 알 수 있다. ..
2) 문자적인 뜻에서 볼 때 본 구절은
주님이 오시기까지 그 왕국은
유대백성에게서 옮겨지지 않을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역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모든 것에서와 똑 같이
이와 같은 역사적인 진리에는 속뜻이 있다.
즉 그 왕국이 유대백성에게서 옮겨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일인 반면
내적 의미에 속한 영적 진리의 의미는
홀(지휘봉)에 의해서 통치권이 이해되고,
유다에 의해서 천적 왕국이 이해될 때 분명해진다.
그러나 주께서 강림하실 때
통치권이 천적인 왕국에서 옮겨질 것이라는 것은
계시에 의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나의 비밀이다.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왕의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왕의 홀이 유다를 떠난다.
즉 천적 왕국의 통치권이
그곳의 천사들로부터 주님의 신성한 인성에게로 옮겨진다.)
그 경우는 이렇다.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사람들이나 영들에게는
여호와 즉 주님으로부터 천적 왕국을 경유하여 온 입류,
다시 말해 그 천적 왕국에 있는 천사들을 통한
생명의 입류가 있었다.
따라서 그때 천적 천사들은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셨을 때,
그리고 그것에 의해 그분 안에 있는 인성이 신성으로 되셨을 때
그분은 천적 왕국의 천사들에게 있었던 바로 그 통치권을
그분 자신이 취하셨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천계를 통하여 입류한 것은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었고
또한 여호와께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할 때 드러내신 것은
신성한 인물(the Divine Person)이셨으나
이 신성한 인간은
주님 자신이 그분 안에 있는 인성을 신성으로 완성하셨을 때
끝나게(came to an end, ceased) 되었기 때문이다.
(천적 왕국을 통하는 식의 입류 대신
주님 자신 안에서 영화되신 인성을 통해
입류가 이루어지다.)
이러한 사실은
이것이 그 비밀의 경우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왕국의 천사들은
실제로 지금도 매우 큰 통치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통해 주님 안에
있는 것에 비례할 뿐이다.
이런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미 설명한 것에서 잘 읽을 수 있다.
(1990, 2803, 3061, 4180, 4687, 5110, 6280)
참고 2803
.. 그러나 영원으로부터 탄생한 신성한 인간과
또 시간 안에 탄생하였고, 시간 속에 태어나 영화되신 존재는
역시 똑 같은 존재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에게 갈 것,
즉 주님은 아버지에게 돌아가실 것을 자주 말씀하셨다. ..
(3061, 4687, 5110, 6280 은 이전 글 ‘신성한 인간 2’ 참고)
참고 4180
창 31:42 “나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두려운 존재께서 저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다면 ..”
이 말씀은 신성(신성한 존재)이나 신성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을 뜻한다. ..
아버지는 신성한 선을, 아들은 신성한 진리를 가리키고
또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신성한 본질이라고 부르는 신성(신성한 존재)을,
그리고 '이삭의 두려운 존재'는 '신성한 인간'을 가리킨다.
두려운 존재가 언급된 것은
이것이 그분의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를 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공포, 두려움, 전율과 더불어 오지만
'신성한 선'은 그렇게 다가오지 않고
또 어느 누구에게도 겁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이삭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을,
그리고 신성한 합리적 존재 측면의 신성한 인간을 표징한다.
2)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성한 진리는
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공포로 다가오지만
신성한 선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면
그 경우는 이렇다.
주님에게서 비롯된 거룩한 것은
본질적으로 신성한 선과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주님에게서 부단히 나오고
천계들에 존재하는 빛은 그것들로부터 나오며
따라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빛은 그것들에서 오며
결과적으로 지혜와 총명도 그것들에서 온다.
이는 지혜와 총명이 그 빛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 또는 지혜와 총명은
모든 이들을 그들의 수용에 따라 감동시킨다.
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성한 선을 수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이나 인애 안에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선이 사랑과 인애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악한 사람에 의해 수용될 수 있는데
다만 이것은 그들의 속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겉사람에 의해 수용될 뿐이다.
3) .. 주님에게서 비롯되는 볕과 빛의 경우도 이와 같다.
만일 사람이 봄이나 여름과 같다면
그 사람은 사랑이나 인애에 속한 것을 받고 열매들을 맺는다.
그러나 만일 그가 가을이나 겨울과 같다면
그는 사랑이나 인애에 속한 선을 받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빛을 받을 수는 있다.
다시 말해 믿음에 속한 것들 즉 진리를 알 수는 있다.
동절기의 빛도 이와 유사한 결과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절기의 빛과 같이 빛깔들과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그것들로 하여금 매우 이채롭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차이가 있어서 그것은 내면적인 것에 침투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 안에는 볕이 없고
따라서 싱싱해짐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선이 수용되지 않고 다만 빛만 수용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대상물 안에서 볕은 받아들이지 않고
빛에서 비롯되는 모양이나 아름다움의 현상만을 받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차가움만 있을 뿐이다.
속에 한기만 있는 곳에는
모든 것들의 무기력이나 동면상태만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빛이 거기까지 들어갈 경우
그곳에는 움츠림과 오한만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것들 안에서
공포, 두려움, 전율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악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공포, 두려움, 전율의 경우가 어떠한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그런 것들은
신성한 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신성한 진리로부터 오는 것일 뿐이다.
이는 그들이 신성한 선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신성한 진리는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선이 결여된 신성한 진리는
내면적인 것에 침투할 수 없고
다만 가장 외적인 것에 단순히 밀착되어 있다.
다시 말해 겉사람에게 밀착되어 있는데
대부분 겉사람의 감각부위에 붙어있다.
이런 일로 인해 사람은 가끔
겉모양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사람 안을 보면 추하고 욕지기날 뿐이다. ..
5) 신성한 진리가 나오는 것은
'신성(신성한 존재)'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신성한 인간'으로부터이기 때문에
여기 이삭의 두려운 존재가 뜻하는 것은 신성한 인간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신성한 선이 아니라 신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가
신성(신성한 존재)에게서 비롯되지 않고
신성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의(arcanum)다.
이 경우의 내용은 이렇다.
주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기 전
신성 그분은 온 천계에 두루 입류하셨다.
그때 천계는 대부분 천적인 것들,
다시 말해 사랑에 속한 선 안에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천계들 안에는 이 입류를 통한 신성한 전능에 의해
빛이 있게 되었고 이 빛에 의해 지혜와 총명 또한 생성되었다.
그러나 인류가 스스로
사랑이나 인애에 속한 선으로부터 물러난 뒤
그 빛은 더 이상 천계를 통해 지혜나 총명을 생성할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인류에 침투하는 지혜와 총명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구원 받는 사람의 필수요소인
이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인간 측면의 주님은
신성한 빛이 되기 위해,
따라서 전 천계와 온 세상에 이 빛을 비추기 위해
이 세상에 강림하셨고
그분 안에 존재하는 인성을 신성으로 완성하셨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빛 자체이셨는데
왜냐하면 자체이신 이 빛은
신성으로 말미암아 천계를 통하여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신성이신 그분은 사람의 몸을 취하였고
이것을 신성으로 완성하셨다.
그리고 이 인성이 신성이 되었을 때
그때 그분은 그것에 의해 천적 천계뿐 아니라
영적 천계에도 빛을 두루 비추셨고
마찬가지로 인류에게도 빛을 비추셨다.
그러므로 인류는 선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
다시 말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진리를 받았고 또 받고 있다.
6) .. 왜냐하면 신성한 선은
사람, 심지어 천사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고
오직 주님의 신성한 인간만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신성한 진리는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의 성품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그곳에 신성한 선이 거주할 수 있는데
그 차이는 그 수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
6372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로부터(중간/발의 안쪽 측면)
(And a lawgiver from between his feet /
낮은 차원의 선으로부터 온 진리)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이 말씀은 낮은(자연적인) 것들 안에 있는
선에서 비롯된 진리들을 뜻한다.
이는 아래에서 설명할 진리들을 가리키는 입법자의 뜻에서,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 따라서 낮은 것들을 가리키는
발의 뜻에서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것들은 아래에 있고
바로 지금 기술한 것과 같이 천적인 것들은 위에 있기 때문이다.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
즉 선에서 비롯된 진리가 표의되기 위하여
‘그의 발 사이로부터 입법자가’ 라고 언급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영적 왕국은,
주님이 강림한 뒤의 영적 왕국이
천적 왕국으로부터 분리되고 구분되는 것과 같은
그런 영적 왕국이 아니었고
그때의 영적 왕국은
다만 천적 왕국의 외곽부분을 형성함으로
천적왕국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의 영적 왕국은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영적왕국 역시 천적왕국과 하나로 있어
천적왕국을 통치하는 높은 진리,
즉 선에서 비롯된 진리가 그들을 다스렸기 때문에
보다 낮은 상태의 영적 왕국은 그 진리의 빛을 수용할 수 없었고
오직 천적 왕국에 속한 자들만 그 수용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지상의 인류 역시
그 빛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없었던 까닭에
주님이 직접 이 세상에 자연에 속한 인성을 입고 오셔서
그 인성을 신성이 되게 하심으로
이제 주님의 영화된 신성한 인성으로부터 발출된 신성한 진리가
질서의 가장 외곽이며 가장 낮은 자연적 측면에까지 내려와
흘러들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인간은 이제
'자연적 차원의 영적 진리'를 통하여
선을 수용함으로
구원에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발 사이(발의 안쪽 측면)로부터’라고 언급한 것은
선에서 나온 진리를 뜻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허리와의 교류에서 비롯된(혼인애로부터 생겨난)
발의 안쪽 측면이 그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진리에 관해 언급된 것은
‘실로가 올 때에 옮겨질 것이다’라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의 통치권은
마치 천적인 것에 속한 통치권이 옮겨지듯 제거될 것이라고
언급되었다.(6371항 참조)
왜냐하면 그 당시의 천적 왕국은
이 진리를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 진리를 가리켜 ‘입법자’라고 불렀다.
또한 이 진리가 속뜻으로 이사야서에서 ‘입법자’의 의미이다.
(사 33:22) “주께서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며
주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세워주시는 분(입법자)이시며
주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시다.”
이 말씀에서 재판관은
그분께서 선으로 말미암아 활동하신다는 것을 뜻하고
법을 세워주시는 분은
그분께서 이 선에서 비롯된 진리로 말미암아
활동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참고 2802
.. 또한 가장 깊은 뜻 안에 있는 천적 천사들의 지각에
이와 같은 낱말이 임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것들로부터 가장 천계적인 개념을 형성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말씀 안에 내재해 있는 '애정'으로부터
매우 반짝 반짝 빛나는 개념을 형성하지만
반면 영적 천사들은
'낱말의 표의나 사물의 표의'로부터
그와 같은 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에 속한 네 개의 분명한 양상들과 애정들이
그 안에 담겨있는 이들 대화에서
천계적 천사들은
인간의 이해에는 결코 임할 수도 없고
또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그와 같은 개념을 얻는다.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본 구절에서와 같이
말씀이 글자로 매우 단순하게 나타나 있는 곳에서조차
그 진정한 내용은 그 말씀의 속뜻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373
“실로가 올 때까지(실로가 오시고야 비로소)”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그때의 평화의 평온상태를 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화평케 하시고
모든 것들을 평온케 만드셨다는 사실 때문에
‘실로’라고 불리웠는데
이 실로가 그분을 가리킨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여기 주께서 실로로 불리운 이유는
천적 나라와 그것의 통치권에 대해 언급된 내용에서
(6371-6372) 명백하다.
왜냐하면 신성이
천적 왕국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실 때
그때 그 천적 왕국에는 평온이 없었고
그로 인해 이 왕국을 통해 천계나 지옥에 있는 모든 것들도
질서 가운데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이 그 천적 왕국을 통과할 때
순수함 안에 남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처럼 천계가 (상대적으로) 순수하지 않았기에
천적 왕국의 힘은
모든 것들을 질서 안에 보존하는 수단으로 쓰일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지옥적인 영들이나 악마적인 영들은
그때 그들의 지옥에서 나와
이 세상에서 (영계에)당도한 영혼들을 지배하였으며
그 결과 천적인 존재를 제외하고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종국에 주께서 인성을 취해
자신 안에 있는 그 인성을 신성으로 완성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었다.
주님은 인성의 영화를 통해
모든 것들을 질서의 상태로 회복하셨는데
처음에는 천계에 있는 것들을,
다음에는 지옥에 있는 것들을 질서의 상태로 회복하셨다.
따라서 주께서 이런 평화에 속한 평온의 상태를 이루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었다.
영적인 존재, 다시 말해 영적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주님의 강림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것은
위의 설명에서 읽을 수 있다.(2661, 2716, 2833, 2834)
그리고 주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모든 것들을 질서 안에 두셨다는 것은
1820, 4286, 4287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신성한 진리가 여호와 즉 주님으로부터
천계를 통하여 인류에게 입류하였지만
그러나 이 일도
사람 자신이 선에서부터 멀어져 부적합하였기 때문에
신성한 진리를
주님의 인성 자체에서부터 발출하기 위해,
따라서 진리를 통하여 선을 수용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주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인성을 신성으로 완성하셨다는 것은
4180, 6280항에 있다.
순정기독교
109
주님이 오시기 전의 모든 교회들은
표징적인(representative) 교회들로서
신성한 진리들을 오직 그늘진 곳에서만 볼 수 있었으나
주께서 세상에 오신 후에는
신성한 진리들을 밝은 빛 아래서 보게 되었다.
즉 오히려 밝은 빛 가운데서 신성한 진리들을 볼 수 있는
한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이 두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저녁과 아침의 차이여서
성언에서는 주님 강림 이전을 저녁이라 일컫고
강림 이후를 아침이라 부른다.
강림 이전에 주님은
실로 교회원들과 함께 임재해(present) 계셨지만
당신의 대리자로서 천사들의 중개(mediation)를 통해 임재하셨다.
그러나 강림 이후 주님은
교회원들에게 어떤 중개자(intermediary)도 없이 임재하신다.
그 까닭은 이 세상에서는
주님께서 '신성한 자연적인 것'(the Divine Natural,
Divinity on the natural plane)을 입으시고
그 안에서 인류와 더불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광(glorification)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취하셨던
당신의 인성(His Human)의 영광이다.
주님의 영화된 인성이 '신성한 자연인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지고 계셨던
당신의 몸 전체를 가지고 무덤에서 일어나셨고
무덤에 아무 것도 남겨두시지 않은 사실로 명백하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자연적인 것(the Human Natural) 자체를 가지고 가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 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주님을 유령(a ghost)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7.39)
이것으로 주님의 자연적 몸은
영화에 의해 신성으로 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거한다고(골로새 2:9) 말하고
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참 하나님이시라고(요한 1서 5:20) 말한다.
이것에 의해서 천사들은
주님만이 홀로 온 영계에서 충실하게 사람이심을 안다.
이스라엘과 유대 족속에게 있던 모든 예배가
단지 외적인 예배였고
주님께서 계시하신 내적 예배의 그림자에 불과했음은
교회 안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 같이 주님의 오심 이전의 모든 예배는
상징들과 형상들 안에 존재했고
그 고유한 닮음새로 있는 참예배의 표징들로만 존재했다.
주님은 실로 고대인들에게는 보여주셨다.
그것은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아 알 수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그러나 그때에는 주님께서 오직 천사들에 의해 표징되셨기 때문에
유대교회에 속한 모든 것들도 표징적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에는 그 표징들이 사라졌다.
이것의 내적 이유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신성한 자연적인 것'을 입으셨고
그것에서 안쪽의 영적 사람뿐만 아니라
바깥쪽의 자연적 사람도 동시에 조요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 모두가 사람이
빛 가운데서 보듯 보게 하시기 위해서 조요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그늘진 곳에서 보는 것 같이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속사람만이 조요 되고 겉 사람은 그렇지 못하거나,
겉 사람만이 조요 되고 속사람은 그렇지 못하게 될 때
사람은 마치 잠자며 꿈꾸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깨어나서 그 꿈을 기억할 때
그것으로부터 다양한 결론을 이끌어내지만
모든 상상 속 결론을 끌어내는 것과 같고
또는 몽중행보 하는 사람이 자기가 보는 대상들을
한낮 밝은 빛 가운데 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과 후의 교회들의 상태 사이의 차이는
밤에 달빛과 별빛 아래서 문서를 읽는 것과
태양 빛에 의해서 낮에 읽는 것의 차이와 같다.
달의 어슴프레한 빛으로는 눈이 오류를 범할 수가 있으나
태양의 해맑은 빛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온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사무엘 하 23:3,4)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바위”는 주님이시다.
또 다른 곳에는ㅡ.“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이사야 30:26)
이것들은 주님께서 오신 후의 교회의 상태에 관한 서술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 강림 전의 교회의 상태는
마치 얼굴에 화장을 하고서
자기가 아름답다고 환상하는 늙은 여인과 같으나
주님 강림후의 교회의 상태는
아름다운 피부를 지닌 처녀에 비할 수 있겠다.
다시 주님 강림 이전의 교회의 상태는
오렌지․사과․배 또는 포도의 껍질에 비길 수 있겠으나
주님 강림후의 교회의 상태는
과육의 내적 부분과 그 맛에 비길 수 있겠다.
이 차이가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신성한 자연적인 것'을 입으시고
내적 영인과 외적 자연인을 동시에 조요하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속사람만이 겉 사람을 제외하고 조요 되든가
겉 사람만이 속사람을 떠나서 조요 될 때에는
밝은 빛은 없고 어스룩함 만이 있다.
묵시록 해설
1087
..
4) 주님은
처음(first) 것들로부터 궁극적인(ultimates) 것들을 통하여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고
또 궁극적인 것 안에서
그분의 능력과 충만함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따라서 주님은
자기 자신이 인성을 취하시는 것과
신성한 진리 즉 성언이 되시는 것을 기뻐하셨고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주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천계의 모든 것들이나 지옥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질서에로 가져오시는 (bring into order) 것을,
다시 말해 최후심판을 단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러한 모든 일은
주님께서 처음 것들 안에 있던 그분 자신 속의 신성으로부터
궁극적인 것들 안에 있던 그분의 인성을 통하여
성취하실 수 있으셨고
예전처럼 교회에 속한 사람들 안에
그분이 임재하거나 거주하심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에 사람과 더불어 사시는 주님의 거처였던
성경 말씀의 모든 선과 진리들로부터
완전히 이탈, 변절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신 주된 이유시고
또한 주님의 인성을 신성으로 완성하신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해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천계의 모든 것들이나 지옥의 모든 것들을
영원 전부터 질서 가운데 지키고
관장하는 능력 안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랑과 지혜
233
천국에서 들은 말이다.
여호와이신 영원부터 계신 주님이
인간의 성품(human nature)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두 가지(천적, 영적) 앞선 등차(degrees, level, 단계)는
실제로 있으셨으나
셋째 등차는 가능성으로만 있었다.
이것은 천사들에게 있어서도 잘 안다.
그러나 주님이 인성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후로는
이 두 등차 외에 자연적(the natural)이라 하는 셋째 등차를 입고
이 세상 사람처럼 사람이 되셨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
주 안에 있는 이 (자연적)등차는 앞선 (천적, 영적)등차처럼
무한하고 지음을 입지 아니하였으나
천사와 사람에게 있는 이것들은
다 유한하고 지음을 입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간을 떠나서 모든 공간에 충만하신 신성이
극외적인 자연에까지 관통하였기 때문이다.
즉, 인성을 입기 전의 자연적 등차로 들어가는 흐름은
천사의 천국을 거친 간접적인 것이었으나
인성을 입으신 뒤에는
당신 자신으로부터 나온 직접적인 것이었다.
왜 주님 강림 이전의 이 세상 모든 교회가
영적 및 천적 사물의 표징이었다가
그분의 강림 후에는
영적-자연적(spiritual-natural) 및
천적-자연적(celestial-natural)이 되고
표징적 예배는 폐지되었는가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신의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의 제일 발출물인
천사적 천국의 해가
왜 주님이 인성을 입기 전보다 입으신 후에
보다 큰 광채와 장엄한 빛으로 빛났는가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사야서의 아래의 말씀은 이것을 뜻한다.
(사30:26) “그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나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이것은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다음
천국과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또 계시록에도
(계1:16) “인자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빛난 것과 같더라”
주의 강림 전에 있었던 천사의 천국을 거친
인간의 간접적 깨달음은
해의 간접적 빛이 되는 달빛에 비교할 수 있다.
또 당신의 강림 후에는
이것이 직접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이사야서에 일렀으되 “달빛은 햇빛 같이 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주께 대하여 말한 것이다.
(예전에는 신성한 빛이
천적, 영적 천국의 천사들을 거쳐
자연적인 것에 이르는 간접 입류였고
이 세계와 저 세계 간의 연결은
서로 간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이
말씀의 상응과 표징을 통해 위에서 아래 수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방식 대신
영화되신 주님의 인성이 가교 역할을 하여
신성한 빛이 직접 자연적인 것에 드러나게 되었다.
즉 예전에는 위에서 아래 종으로 유입되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통해
각 천국에서 자연적 천국으로 횡적 유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비추이심인 것이다.)
234
왜 영원부터 주 곧 여호와께서
이 세상에서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이 셋째 등차를 입으셨나 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같은 자질에 의해서만
이 (자연적)등차 안에 들어오실 수 있었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당신의 신성으로부터 잉태되고
처녀에게서 나심으로써만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 방법 안에서
주님은 신성의 수용그릇에 지나지 않는,
그 자체에 있어서 죽은 자질을 벗고
그 대신 신성을 입으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겸허의 상태와 영광의 상태라 하는,
주님의 이 세상 안에서의 두 상태는 이것을 뜻한다.
이것은 ‘주께 대한 새 예루살렘 교리’ 안에 다룬 바 있다.
묵시록 계현
466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자연적인 것 안에서
(in His Divine natural, in His Divinity on the natural plane)
사람과 같이 현존하시고
신성한 영적인 것 안에서는
그분의 영적 왕국의 천사들과 같이 현존하시고
그분의 신성한 천적인 것 안에서는
그분의 천적 왕국의 천사들과 같이 현존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나뉘시지 않고
그들의 성품에 맞추어서 모두에게 주님으로 나타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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