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12-36, 불량한 엘리의 두 아들, 23.12.27, 박홍섭 목사
사무엘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사사 시대의 말기를 고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종의 대조 기법으로 풀어나갑니다. 1장에서 브닌나와 한나의 대조 속에서 사무엘이 태어났다면 2장으로 오면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기 전에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벌이는 나쁜 행실을 먼저 언급합니다. 특히 이들의 나쁜 행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밝혀서 11절에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는 기록, 21절에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자라간다는 언급, 26절에 사무엘이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는 평가와 극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무엘과 대조되는 이 두 사람이 누구입니까?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해 일삼았던 악행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백성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 드린 제물을 자기 마음대로 탈취하여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것입니다(13-17), 다른 하나는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한 일입니다(22).
이들의 악행을 하나님은 한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2:27-30을 보십시오. 29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찌게하느냐”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제물과 예물을 탈취한 악행을 단순히 도둑질로 평가하지 않고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았다. 그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를 살찌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전 개역 한글 번역은 “너희들을 살찌게 하느냐”를 “스스로 살찌게 하냐”로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이 조금 더 선명합니다. 홉니와 비스하스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과 예물을 도둑질한 것은 하나님의 제물과 예물을 짓밟은 것이고 다른 말로는 스스로 살찌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동이 왜 하나님 앞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가 되는가 하면 예물을 훔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신을 스스로 살찌게 한 악행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살찌운다’ 이것이 홉니와 비스하스의 악행의 핵심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업이 없습니다. 땅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으로만 살아갑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보여야 했고, 백성들은 이들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 핵심이 스스로 살찌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찌게 하는 삶입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지만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완전히 맡겨 자기 야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들을 늘 가난하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십일조를 비롯한 많은 제도적인 장치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책임지셨습니다. 결코, 찌들어지게 가난하게 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통해 충분히 만족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의 온 백성들이 이 세상에 속한 기업이 없고 땅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세상의 기업과 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보다 비참하지 않고 오히려 더 충만한 기쁨과 평강과 놀라운 하나님의 복 가운데 산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들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살찌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철저하게 믿음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삶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을 차버리고 스스로 살찌게 했습니다. 스스로 살찌는 삶은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의 삶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심지어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삶,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는 불신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제사장이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했고 제사를 주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물과 예물을 짓밟았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 그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전능자와 초월자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삶은 전혀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세상의 헛된 영광을 좇는 자기 욕심과 야망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0 후반절을 보십시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은 이들이 나를 멸시하고 경멸했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구든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 대신 자기의 힘과 꾀로 사는 스스로 살찌게 하는 인생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인 엘리의 아들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스스로 살찌게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삶이 그와 같았다는 뜻입니다.
이때가 언제라고요? 사사 말기입니다. 사사 시대의 특징이 무엇이라고요?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이런 것 상관없습니다. 그냥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과 자기 능력이 최고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삶, 스스로 살찌게 하는 삶,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의 제사와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인의 예배에 불과하며 이런 예배는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이 멸시와 경멸을 당한다고 하십니다.
22절을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습니다. 백성들이 드렸던 예물과 제물을 탈취한 것이 물질로 스스로 살찌운 악행이었다면 이것은 육체의 정욕을 스스로 채워서 살찌게 하는 악행입니다. 엘리는 이들의 악행이 모든 백성으로 범죄 하게 하는 악행이라고 했습니다(23-25절). 제사장이 저렇게 사니까 우리도 저렇게 살아도 되겠네 하는 의미입니다. 사사기 후반부에 레위 인이 첩을 두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정해주신 경계를 자기 마음대로 넘어서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면서 스스로 자신을 살찌우던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살찌우게 하시기 전에 자기의 머리와 수단과 방법으로 스스로 살찌우는 모습 말입니다. 물질을 사용하고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을 사용하고 대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까지 취해서 더 많아지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고 더 쾌락을 누리려고 하는 것, 모두 스스로 살찌우는 악행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조금 뒤로 가서 삼상 4:1-4을 보십시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아벡이란 곳에서 싸우게 되는데 이스라엘이 4천 명이나 죽고 패배합니다. 그러자 장로들이 모여서 패인을 분석하고 다음 전투에서 승리할 방법을 모색하다가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법궤입니다. 아벡에서 패한 이유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실로에서 법궤를 가져와 그 법궤를 앞세우고 다시 싸우러 가서 원수를 갚자고 합니다.
그때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 법궤를 담당합니다. 마침내 실로에 있던 법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오고 이것을 본 이스라엘은 사기충천합니다. 법궤가 왔으니 이제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블레셋 진영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제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를 돌았을 때 그 견고한 성 여리고가 무너졌고 요단강이 갈라졌던 것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던 법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도착했으니 이제 자신들도 끝장났다고 생각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5-10절입니다. 오히려 더 크고 처참한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법궤를 빼앗기고 무려 삼만 명이나 죽습니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합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미 이들은 여호와를 멸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살찌우게 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고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법궤를 앞세운다는 것은 “내 모든 삶에 하나님이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고 도우시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제사장부터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전부 자기 욕심으로 달려가면서 스스로 살찌우게 하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정작 하나님의 능력과 복이 필요한 때에만 법궤를 앞세우는 방식의 종교적인 삶을 되풀이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경멸과 멸시를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에게는 나도 존중히 여기겠지만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는 나도 경멸하겠다고 하시면서 홉니와 비스하스를 죽이십니다. 법궤를 빼앗기에 하시고 삼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는 비참한 패배를 통해 스스로 살찌우는 삶의 말로가 이렇다고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그럼, 이들이 살길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살찌지 않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삶을 한나와 사무엘, 그리고 다윗을 등장시킴으로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고, 그 주변에 똑같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이 사무엘서입니다. 그 길을 잘 배워서 잘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