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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20, 예수의 탄생, 24.2.11, 박홍섭 목사
누가복음 1장과 2장은 세례요한의 출생에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냉혹한 세계사의 흐름을 배경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1장이 유대 왕 헤롯의 때를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면 2장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내린 인구조사 칙령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인구조사는 출생지에서 받아야 하므로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120Km 떨어진 고향 유다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이미 성령으로 임신하여 해산할 날이 가까운 마리아와 그녀의 정혼자 요셉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여관에 빈 객실이 없어서 어느 한 가정집의 외양간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마리아가 아이를 낳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만 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그렇게 강보에 싸여 외양간의 구유에 뉘어집니다. 누가가 이렇게 상세하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술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혹자들의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누군가가 지어낸 신화적 사건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1-7).
여기서 누가가 그리스도의 탄생에 역사적 배경으로 소해가는 가이사 아구스도에 대해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초대황제로 본 이름은 카이우스 옥타비우스입니다. 그는 쥴리우스 시이저의 조카로 세계 최고의 통치자가 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고 짓밟고 일어선 무자비한 사람입니다. 그의 등극으로 로마 공화국이 끝나고 황제 치하의 로마제국이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백성들에게 황제 숭배를 추앙하도록 강요했던 잔인한 독재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힘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던 팍스 로마나의 때에 참 신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지중해 동쪽 끝 유다라는 작은 나라 베들레헴의 한 외양간 여물통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자가 이렇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650년 전 미가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것이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입니다.
미 5:2-4을 보십시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신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거기 붙여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을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어찌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때가 되자 하나님은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를 하게 만드시고 그 칙령을 이용하여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로마 공화국을 통일하고 제국을 이룬 힘과 능력을 지녔다고 스스로 신이라 높였지만,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작은 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가 시작한 팍스 로마나는 잠시 흥했다가(180년 정도) 사라지는 먼지와 같은 나라였지만, 베들레헴의 초라한 구유에 태어나서 강보에 싸여 뉘여진 이 아기가 십자가로 이루는 나라는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누가는 이 아이를 ‘맏아들’ 혹은 ‘첫아들’이라고 부릅니다. 5-6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물론 이 아이는 호적상 마리아에 첫아들, 요셉의 맏아들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예수를 첫아들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단지 그 이유만이 아닙니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씨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첫아들만 아니라 자신을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양자 삼아 그들의 주가 되시는 우리의 첫아들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사 사흘 만에 부활하여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만물의 으뜸이 되신 첫아들입니다. 누가는 이 첫아들의 탄생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신 복음의 시작이라고 소개합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주’로 불렀고 그의 탄생이나 등극, 그가 출정한 전쟁의 승리 소식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유다 베들레헴의 한 외양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신 예수를 주라 부르고 그가 우리 중에 이루신 구원의 소식을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로마는 황제가 태어나면 그 소식을 복음이라고 말하면서 제국의 모든 곳에 반포하여 축하를 강요했지만, 하나님은 이 복된 구원자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립니다. 이들은 법정의 증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주의 천사는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왕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 떼를 치고 있던 천한 목자들에게 나타나 주의 영광을 두루 비추며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한 구주가 나셨다고 알려줍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구주, 곧 그리스도 주라고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 곧 복음을 전합니다.
그날, 땅에서는 아무도 여기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변방 팔레스타인의 마구간 구유 위에 한 아기가 초라하게 태어났는데 누가 주목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에서는 이곳을 향하여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13-14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기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고 계신 것이 보이십니까? (고전 1:27)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영광을 받으셨고 땅에서는 당신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오심으로 이 땅에 팍스 로마나의 평화가 아닌 진정한 평화가 임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만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 모든 자의 구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는 끝없는 탐욕의 사람들의 구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청결한 마음으로 사는 자들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는 화평케 하는 자들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의 구주로 오셔서 그들에게 대속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생명과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참된 평화는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만 임합니다.
모든 자연인은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잉태되어 허물과 죄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와 부활로 베푸시는 대속의 은혜를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만들어 놓은 세상 풍조와 타락한 육체의 욕심과 부패한 마음의 원함을 따라 삽니다(엡 2:1-3).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여 힘써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게 만들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청결한 마음, 화평을 추구하는 마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는 마음으로 만들어 그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평강으로 누리게 하십니다. 누가 이 은혜를 입습니까? 아무나 이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오직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만 이 복된 은혜를 받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목자들을 통하여 증거합니다. 목자들이 마리아와 요셉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한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는데 이 단어가 누가복음에서 8번 등장합니다. 그 8번이 전부 낮은 자들과 연관해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의 목자들, 치유 받은 중풍 병자(5:25), 무리들(5:26), 나인성 과부(7:16),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17:15), 눈 뜬 맹인(18:43), 로마의 이방인(23:47)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신 구원을 자신의 구원으로 누리며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 낮고 초라하게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영접하는 자들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탄생하셨는지 가만히 보십시오. 지극히 자신을 낮추어 이 땅에 오시되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오셨습니다. 기적입니다. 초월입니다. 그러나 모든 다른 아이들처럼 여인의 몸에서 열 달이라는 기간에 걸쳐 몸으로 형성되고 자라서 탄생했습니다. 자연과 일상의 모습입니다. 초월자 하나님께서 일상의 시간과 공간 안에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을 제한시키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이 방을 구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습, 초라한 구유에 강보에 싸여 누이는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초월이 초월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영광이 영광의 모습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의 시간과 공간과 역사 가운데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우리에게도 그런 주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우리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 길을 가는 자들이 땅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니 그 영광과 명예와 특권을 외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탐하고 그 자리에서 팍스 로마나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승리만이 최선이라고 소리치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죽이고 짓밟는 비정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너희는 당신을 죽여 우리를 살리신 주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후 6:1-10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여기 팍스 로마나의 가이사 아구스도처럼 살지 않고 주님을 따라 주님과 같이 살아갔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삶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깨끗하고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았지만, 세상이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무명했고 죽은 자 같았고 징계를 받는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것도 없는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유명했고 살아있고 기쁨이 있으며,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참된 부요함의 사람,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어디든지 주를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요 평화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시면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길을 믿음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도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할 테니 기쁨으로 이 복된 생명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앞에 가이사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길, 두 길이 있습니다. 의인의 길, 악인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길을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