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6년 조선 성종 때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7권 전라도 진도군지“는 ”진도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4백자 높이가 11자이다. 안에 샘이 아홉, 못이 하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918년 편찬된 ‘중증 진도읍지’에서도 마찬가지로 9개 우물과 1개 연못이 있다고 전한다.
우물은 근대 상수도 시설이 만들어 지기 전까지 매우 중요한 생활 시설이었다. 마실 물이 있어야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고, 성안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야 적이 쳐들어와도 버틸 수 있었다. 목조 건물이던 시절이라 화재의 위험에 대비하여 연못을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중앙 정부에서 각 지역의 지리지를 편찬할 때에는 우물과 연못의 숫자를 표기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진도 읍성 안의 9개의 우물터도 하나 둘 사라졌다. 이제는 우물이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옛 진도읍성 안에 있던 1개 연못과 9개의 우물터는 어디일까?
우선 읍성 안에 1개 연못은 진도초등학교에 있던 연못이다. 지금은 메워져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1960년대에는 연못이 남아 있었다. 가로 20여미터, 세로 10여미터 쯤이었을 것이라 기억된다. 연못 안에는 수초가 자랐고 붕어와 미꾸라지 그리고 잉어가 살았다. 연못 서쪽으로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연못 동쪽으로는 학교 우물이 있었다. 연못 남쪽으로는 일제 때 건립한 단층 목조 교사가, 연못 북쪽으로는 60년대에 새로 지은 단층 시멘트 교사가 있었다.
이제 읍성 안에 9개 우물을 찾아본다. 진도군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6개의 우물이 있었고, 서쪽으로 3개의 우물이 있었다. 대체로 동편으로 위치한 6개 우물이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도 좋았다. 서쪽으로 흐르는 ‘순천내꼬랑‘에서 ’바우냇골‘을 거쳐 ’조금난리‘로 내려가는 개천 변에 있는 우물들은 수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가뭄이 들면 쉽게 바닥을 드러냈다. 철마산을 따라 내려오는 주된 수맥이 진도 군청의 동쪽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인가 보다.
먼저 동쪽으로 위치한 6개의 우물을 찾아 본다.
첫째 우물, 지금은 진도 군청으로 변해있는, 옛날 진도중학교 자리에 있는 우물이다. 현재 철마도서관의 바로 앞으로 기억된다. 1960년대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 우물물은 정말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그 당시 우물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고, 진도중학교 교무실이 있었다. 그 교무실은 한옥 건물이었는데, ‘교동리 봉악동에 있던 서예가 손재형 집의 사랑채’ 건물을 이전한 것이었다.
둘째 우물, 구 진도군청에 있던 우물이다. 지금은 소전 미술관으로 바뀐 자리이며, 첫번째 우물과 수맥을 같이 하는 우물터이다. 역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았다.
셋째 우물, 진도군청에서 옥주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동쪽으로 농협은행이 있다. 그 자리에도 우물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일제 강점기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었고, 그 옆으로 60년대 새로 지은 시멘트 건물이 있었다. 뒤쪽으로는 농협 창고가 있었다. 그 세 개의 건물 사이로 우물이 있었다. 60년대에도 여전히 샘물이 솟아올랐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물터이다.
넷째 우물, 농협에서 옥주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위치한 옛 진도교육청 자리에 있었다. 그곳 우물도 수량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곳은 67년 즈음에는 가발공장으로, 90년대에는 ‘조영남 외과’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커피집이 들어서있는 자리이다.
다섯 번째 우물, ‘통샘’이다. 진도읍에서 가장 크고 수량이 풍부한 우물로 ‘큰샘’이라고도 불렸다. 성내리와 쌍정리의 경계선에 있었으며, 풍성한 샘물은 성내리와 쌍정리와 동외리 사람들은 물론 진도 모든 사람의 식수가 되어 주었다. 이름 뜻 그대로 ‘통샘’이다. 1967년에 전라도 지방에 몹시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통샘은 마르지 않았다. 당시 진도에서 최고의 우물로 고군면 향동 우물과 지산면 외삼당 우물, 그리고 읍내 통샘이 꼽혔다. 통샘이 있던 자리도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카카오 지도에서 찾아보니 ‘진도읍 성동길3’ 청호회관 뒤편으로 생각된다.
여섯 번째 우물은 앞서 언급한 진도초등학교에 있던 우물이다. 우물 주변은 연못이 있던 늪지대이었다. 진도군청의 수맥과는 다른 물줄기로 물은 미적지근 하였고 물맛은 떨어졌다. 그냥 늪 지대에 만든 우물이었다. 그래도 일천 이백 명이 넘는 진도초등학교 학생들의 식수로 사용될 만큼 수량은 적지 않았다.
이렇게 진도 북쪽 철마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진도군청을 통과하여 흐르거나 혹은 진도초등학교 동편을 따라 흐르다가 통샘 자리에서 마주쳤다. 그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사람들은 6개의 우물을 만든 것이다. 구 진도중학교, 구 진도군청, 농협은행, 구 진도교육청, 진도초등학교 그리고 통샘인 것이다. 6개의 우물 가운데, 지금 60대라면 농협은행 우물과 구 진도교육청 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억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나머지 3개의 우물은 어디에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3개의 우물은 진도군청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쪽에 위치하였다. 동쪽에 위치한 6개의 우물에 비하여 대체로 수량이 적었고 물맛도 떨어졌다.
먼저(7번째 우물), 진도 군청 아래쪽에 구 진도중학교 관사가 있었는데, 그 관사 안에 우물이 있었다. 수량은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근처 사람들이 쓰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철마길 13-15’ 위치일 듯하다.
다음으로(8번째 우물) 옛날 진도면사무소 안에 있던 우물이다. 7번째 우물과 직선으로 남쪽이니 같은 지하 수맥이었을 듯하다. 이 우물은 수량이 작았고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말랐다. 그래선지 70년대쯤 폐쇄되었다.
마지막(9번째 우물)은 진도중앙교회 안에 있던 우물이다. 군청을 중심으로 서쪽 방향에 있던 3개의 우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은 우물로 기억된다. 내가 어릴 적에 시원한 우물물을 마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우물터도 메워져 사라졌을 듯하다.
진도읍성 안에 있던 9개의 우물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진도군청에서 시작하여 동편으로 6개의 우물이, 서편으로 3개의 우물이다.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또한 조선시대 관청도 있었던 자리이다. 1980년대 상수도가 공급되면서 이런 우물들은 점차 기능을 잃어갔다. 아홉 개의 우물 가운데 최고의 수량과 맛을 자랑하던 ‘통샘’도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우리의 추억이 사라져가듯 진도의 옛 모습도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에 적어본다. (태허당)
첫댓글 우와~~~~~다 잊혔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감사합니다....
무정 恩泉은 없나요? ㅎㅎㅎ 아래 그림 생각나십니까? 자세히 보면 생각날겁니다.
무정은천은 성 배깥에여람짜.
서문 배깥에라 섬바껜데 고짝 거가 생교가 있잉께 교동리(校洞里)고
내나 고을 원님이 모실돌로 감시로 서문이로 나가가꼬
섬바께로 사장나무거래로 글로 놀로 댕긴 데라고 해가꼬
골모실 나가시든 질 거가 이름이 골모실!
윗 그림은 남->북, 이 사진은 북->남 으로 이 팽나무 아래 무정 은천이라고 정만조선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원장님 반가워요 그리고 늘 수고 많으십니다
기억나죠. 정만조 선생이 바우냇골 바위에서 솟는 샘에 새겨둔 글씨이죠?
꼭 설악산 오색약수터와 흡사한 샘이었던 기억입니다.
그림은 누구 작품인지요? 바우냇골 남쪽에서 북쪽 향교를 바라보는 그림인데, 왼편으로 소전 손재형의 모친이자 원장님의 진외증조모님이 계시던 집(지금은 삼성사 절)이고, 오른편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한 밭이죠. 어쩌면 그 밭이 '위리안치'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저는 추정하고 있어요. 사정리 실고 뒤편 탱자나무 밭과 욕실천 건너가는 탱자나무 밭..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밭이 읍내에 3군데 있었어요. 탱자나무는 진도에서 흔한 나무가 아니고, 동일한 크기로 빙둘러 심은 인위적인 식수형태라는 점에서 그럴 개연성이 높아요..
예 할아버지....좋은 글 감사합니다
1944년 세한도를 찾아오고.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해. 12월 15일 진도 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 후 십 여년간 어찌 어찌 상황은 잘 모르고. 오지호 화백과 소전선생님과 2살 차이로 서로 지인 관계로 있었는데.
오화백 아들 오승우 화백이 1957년 조선대 미대 졸업하자. 진도 중학교 미술 교사로 발령냈습니다.
2년 근무하면서 오승우 화백은 국전 특선 등 등으로 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 오승우선생님이 1957~1958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우연히 옥션 경매에 올라왔는데. 어떤 분이 낙찰 받아 갔는데.
제가 2년 간 사정 사정하여 구입하여 현재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속 빨래하는 앞쪽 여인이. 제 어머니 모습이 보여서 그대가 큰 형(고김정수) 낳고 기저귀 빨고 있는 모습 같습니다..
압따 찰로 선배님 방갑구만이라.
챙개보기 쉽쟎안 존 내용 찰로 고맙십니다.
요것이 내나 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7권 원문인데람짜.
해당 거그 샘 9개 연못 1개 지가 표시했어람짜.
그라고
지가 쩝때 야기한 책 멫 권 챙개놨넌데 정현이보고 은제 전해 달라 한 것이... 안직...
그란데 한 가지 통정리 아그덜하고 지가 멫 년 전에
통샘? 큰샘? 야기 해봤었넌데람짜.
말씀하신 통샘이 내나 큰샘이고라.
통샘은 성 배깥에 통정리에 짚운샘이 통샘이로
통새자리다가 샘얼 파가꼬 이름이 통샘이란 말도 있어람짜.
또 그도랑 성밖에 한나에 샘이 지끔 메꽈지고 없는 샘도 있답디다만...
선배님 말씸하신 고대로 큰샘 물은 암만 가물어도 안 떼리넌 샘이고
바닥이 야찹고 바구독인데도 수량도 풍부하고 맛도 존데람짜.
짚운샘(통샘)은 훨썩 더 짚어도 수량은 큰샘만 못 했다고덜 그랍디다. 덜
저는 그 동리럴 자주 안 댕깅께 거그 통정리 아그덜 야기하고
내나 그 샘 뽀짝 붙은 집인 우리 59회 김경춘이 야기도 그랑께람짜.
반가워요 병현 작가님
좋은 지적이예요.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더듬어 댓글을 달아주면 더 좋을 듯해요
고마워요!!
또 큰 의문 한나는 9개 샘에 1개 연못이다가
100년 이상 뒤 기록인 진도인 김몽규의 옥주지 기록엔 샘 2개 연못 2개여가꼬
있던 샘을 메웠을 리가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본래 1481년(성종 12)에 왕명으로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중수(重修)한 것이로
1530년(중종 25)에 왕명이로 편찬한 관찬(官撰) 지리지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인데 이는 또 1611년(광해군 3)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고 현재 전하는 판본 가운데 일부는 이러한 편차(編次)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어떻든 이후 1761년(영조 37년)에 진도 향동 사람인 김몽규가 직접 적어 필사본으로 편찬한 전라도 진도군의 읍지인 옥주지(沃州誌)에는 진도 읍성 안에 연못 2개하고 우물 2개가 있는 것이로 적어졌습니다.
암만 그란다 해도 230년에서 150년전(1611년 이후라 했잉께 그 뒤라도 100년전이나) 어쨌든 옥주지 보다 그 앞 시기에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인데 진도에 사람이 직접 쓴 글하고 어뜬 놈이 신빙성이 있을란지넌... ???
야튼 간에 기록물에 중요성을 새삼 느낍니다.
진도읍성 안에서도, 내아 및 아사(동헌)에는 2개의 우물(구 진도중학교와 구 진도군청)이 있었으니, 그것을 기록하였다고 해석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