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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초등학교 총동문회
 
 
 
카페 게시글
58조국준이야기 진도읍성에 있던 1개의 연못과 9개의 우물터
58조국준 추천 0 조회 71 24.03.07 13:47 댓글 1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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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3.07 15:49

    첫댓글 우와~~~~~다 잊혔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감사합니다....

  • 24.03.07 15:57

    무정 恩泉은 없나요? ㅎㅎㅎ 아래 그림 생각나십니까? 자세히 보면 생각날겁니다.

  • 24.03.07 21:12

    무정은천은 성 배깥에여람짜.
    서문 배깥에라 섬바껜데 고짝 거가 생교가 있잉께 교동리(校洞里)고
    내나 고을 원님이 모실돌로 감시로 서문이로 나가가꼬
    섬바께로 사장나무거래로 글로 놀로 댕긴 데라고 해가꼬
    골모실 나가시든 질 거가 이름이 골모실!

  • 24.03.08 08:28

  • 24.03.07 16:05

    윗 그림은 남->북, 이 사진은 북->남 으로 이 팽나무 아래 무정 은천이라고 정만조선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 작성자 24.03.07 20:14

    원장님 반가워요 그리고 늘 수고 많으십니다
    기억나죠. 정만조 선생이 바우냇골 바위에서 솟는 샘에 새겨둔 글씨이죠?
    꼭 설악산 오색약수터와 흡사한 샘이었던 기억입니다.

    그림은 누구 작품인지요? 바우냇골 남쪽에서 북쪽 향교를 바라보는 그림인데, 왼편으로 소전 손재형의 모친이자 원장님의 진외증조모님이 계시던 집(지금은 삼성사 절)이고, 오른편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한 밭이죠. 어쩌면 그 밭이 '위리안치'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저는 추정하고 있어요. 사정리 실고 뒤편 탱자나무 밭과 욕실천 건너가는 탱자나무 밭..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밭이 읍내에 3군데 있었어요. 탱자나무는 진도에서 흔한 나무가 아니고, 동일한 크기로 빙둘러 심은 인위적인 식수형태라는 점에서 그럴 개연성이 높아요..

  • 24.03.08 08:24

    예 할아버지....좋은 글 감사합니다
    1944년 세한도를 찾아오고.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해. 12월 15일 진도 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 후 십 여년간 어찌 어찌 상황은 잘 모르고. 오지호 화백과 소전선생님과 2살 차이로 서로 지인 관계로 있었는데.
    오화백 아들 오승우 화백이 1957년 조선대 미대 졸업하자. 진도 중학교 미술 교사로 발령냈습니다.
    2년 근무하면서 오승우 화백은 국전 특선 등 등으로 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 오승우선생님이 1957~1958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우연히 옥션 경매에 올라왔는데. 어떤 분이 낙찰 받아 갔는데.
    제가 2년 간 사정 사정하여 구입하여 현재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속 빨래하는 앞쪽 여인이. 제 어머니 모습이 보여서 그대가 큰 형(고김정수) 낳고 기저귀 빨고 있는 모습 같습니다..

  • 24.03.07 20:51

    압따 찰로 선배님 방갑구만이라.
    챙개보기 쉽쟎안 존 내용 찰로 고맙십니다.

    요것이 내나 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7권 원문인데람짜.
    해당 거그 샘 9개 연못 1개 지가 표시했어람짜.

    그라고
    지가 쩝때 야기한 책 멫 권 챙개놨넌데 정현이보고 은제 전해 달라 한 것이... 안직...

  • 24.03.08 06:58

    그란데 한 가지 통정리 아그덜하고 지가 멫 년 전에
    통샘? 큰샘? 야기 해봤었넌데람짜.

    말씀하신 통샘이 내나 큰샘이고라.
    통샘은 성 배깥에 통정리에 짚운샘이 통샘이로
    통새자리다가 샘얼 파가꼬 이름이 통샘이란 말도 있어람짜.
    또 그도랑 성밖에 한나에 샘이 지끔 메꽈지고 없는 샘도 있답디다만...

    선배님 말씸하신 고대로 큰샘 물은 암만 가물어도 안 떼리넌 샘이고
    바닥이 야찹고 바구독인데도 수량도 풍부하고 맛도 존데람짜.

    짚운샘(통샘)은 훨썩 더 짚어도 수량은 큰샘만 못 했다고덜 그랍디다. 덜
    저는 그 동리럴 자주 안 댕깅께 거그 통정리 아그덜 야기하고
    내나 그 샘 뽀짝 붙은 집인 우리 59회 김경춘이 야기도 그랑께람짜.

  • 작성자 24.03.08 13:49

    반가워요 병현 작가님
    좋은 지적이예요.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더듬어 댓글을 달아주면 더 좋을 듯해요
    고마워요!!

  • 24.03.08 17:50

    또 큰 의문 한나는 9개 샘에 1개 연못이다가
    100년 이상 뒤 기록인 진도인 김몽규의 옥주지 기록엔 샘 2개 연못 2개여가꼬
    있던 샘을 메웠을 리가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본래 1481년(성종 12)에 왕명으로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중수(重修)한 것이로

    1530년(중종 25)에 왕명이로 편찬한 관찬(官撰) 지리지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인데 이는 또 1611년(광해군 3)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고 현재 전하는 판본 가운데 일부는 이러한 편차(編次)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어떻든 이후 1761년(영조 37년)에 진도 향동 사람인 김몽규가 직접 적어 필사본으로 편찬한 전라도 진도군의 읍지인 옥주지(沃州誌)에는 진도 읍성 안에 연못 2개하고 우물 2개가 있는 것이로 적어졌습니다.

    암만 그란다 해도 230년에서 150년전(1611년 이후라 했잉께 그 뒤라도 100년전이나) 어쨌든 옥주지 보다 그 앞 시기에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인데 진도에 사람이 직접 쓴 글하고 어뜬 놈이 신빙성이 있을란지넌... ???

    야튼 간에 기록물에 중요성을 새삼 느낍니다.

  • 작성자 24.03.09 12:53

    진도읍성 안에서도, 내아 및 아사(동헌)에는 2개의 우물(구 진도중학교와 구 진도군청)이 있었으니, 그것을 기록하였다고 해석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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